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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도시

남경(南京)은 안휘성(安徽省)의 성회(省會)도시?

by 중은우시 2025. 3. 19.

글: 유월(劉越)

요즘, 강소(江蘇, 장쑤)와 안휘(安徽, 안후이)는 나란히 위치한 남방의 두 개 성인데, 네티즌들은 강소와 안휘에 대해 얘기하는 건 영원한 이슈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강소성의 성회도시인 남경이 안휘와 가까이 있어, 남경과 가까운 곳에 사는 안휘성의 주민들은 강소성의 성회도시 남경으로 가는 것이 안휘성의 성회도시 합비로 가는 것보다 훨씬 편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터넷에서는 이런 재미로 하는 말이 있다: "남경은 안휘의 성회도시이다." 자세히 검토해보면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남경이 강소보다 안휘의 성도같다는 것이고, 둘은 남경은 강소의 성회인데, 강소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 것같다는 것이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된 것에는 역사적인 원인이 있다. 강소와 안휘는 청나라이전에 원래 하나의 성이었다. 강희연간에 이르러 지금의 두 개 성으로 나뉜 것이다.

  1. 고유한 강남성(江南省)

안휘, 강소가 아직 분가하기 전에는 "강남성"으로 불렸다. 청나라 순치연간, 강남성의 판도가 너무 방대하여, 조정은 강남성내에 "강남, 강서" 두 총독을 두었고, 치소를 강녕(江寧, 지금의 남경)에 두고, 동시에 강녕순무(소주에 주재함), 안휘순무(안경에 주재함)와 봉양순무(태주에 주재함)의 세명의 순무가 각각 나누어 관리했다. 1개의 성에 총독 1명, 순무 3명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화려한진용은 청나라내에서 유일무이한 경우였다. 전체 성을 통할하는 총독과 각지를 관할하는 순무외에 강남성에는 강남성포정사사(布政使司)와 안찰사사(按察使司)가 있었는데, 모두 강녕에 주재했고, 각각 전체 성의 민정(民政)과 사법(司法)사무를 관장했다.

 

이런 '호화로운 진용'과 '부유한 토지'를 가진 강남성은 한때 청나라조정의 우려를 자아낸다. 만일 강남을 야심있는 사람이나 적이 장악하게 되면 조정에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순치제때부터, 조정은 강남성에 대한 개혁을 진행하게 된다.

먼저 손을 댄 것은 포정사사의 직무였다. 그때의 강남성은 이미 3명의 순무가 각각 지역을 나누어 관할하고 있었다. 다만 포정사사는 오직 1개였다. 당시의 교통통신여건하에서, 이렇게 해서는 효과적으로 전체 성을 다스릴 수 없었다. 그리고 하나의 아문이 전체 성의 목숨줄인 "양식과 민정"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곤란했다. 순치18년, 즉 1661년, 조정은 강남포정사사를 강남좌,우포정사사로 나누어 두 곳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다. 그리고 이전에 별다른 실권이 없던 우포정사사를 가장 부유한 강녕순무의 주재지인 소주(蘇州)에 둔다. 좌,우포정사사는 서로 다른 지역을 관장했기 때문에, 세금도 각각 별도로 조정에 납부했다. 그리하여 호부도 부득이 인원을 둘로 나누어서, 강남성의 두 포정사사의 세금을 관리해야 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이 바로 강남성 분가의 도화선이라는 것이다.

강녕포정사사

2. 강남성이 둘로 분할되다

포정사사가 둘로 나뉘어 다스리게 되면서, 강남성의 또 다른 중요 아문인 안찰사사도 강희3년(1664년) 강북, 강남안찰사사의 두 부분으로 나뉘게 된다. 이제 강남성에는 이미 3명의 순무, 2명의 포정사사, 2명의 안찰사가가 생기게 된 것이다. 강남성분가의 조건은 이미 갖추어졌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때의 강남성은 여전히 하나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포정사사, 안찰사사, 순무가 관할하는 지역이 완전히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청나라정부는 추가로 개혁조치를 진행해야만 했다.

강희4년(1665년), 조정은 영을 내려 봉양등 관할구역이 비교적 적은 순무의 직위를 취소한다. 전국에 최대한 1개성에 1명의 순무를 두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리고 지역이 비교적 넓은 성 예를 들어, 강남성, 호남성의 경우에도 최대 1개성에 2명의 순무를 두는 것으로 편제한다. 강남성에서, 원래 봉양순무가 관리하던 지역은 안휘순무와 강녕순무가 나누어 가진다. 이는 향후 안휘와 강소 두 지역의 기반이 된다.

1666년, 조정은 안휘와 강녕순무의 관할하는 지역을 기본으로 하여, 강남성의 두 포정사사와 두 안찰사사가 관리하는 지역을 조정한다. 그렇게 하여, 강녕순무는 강남우포정사사, 강소안찰사사와 관할구역을 일치시키고, 안휘순무는 강남좌포정사사, 안휘안찰사와 관할구역을 일치시킨다. 이렇게 하여 관할구역이 기본적으로 나뉘어진다. 이렇게 여러 해동안의 개혁조정을 거쳐 강남성이 분가할 여건은 모두 갖추어졌다. 이제는 조정에서 명을 내리면 강남성은 둘로 나뉘어질 것이었다.

3. 새로운 성의 탄생

강희6년(1667년) 여러 해동안의 준비를 거쳐, 조정은 마침내 대규모 행정구역조정계획을 진행한다. 조정은 단도직입적으로 강남성을 직접 나누지는 않았고, 그저 1개의 성에는 1명의 포정사를 둔다고 규정한다. 강남성과 같이 좌, 우 두 명의 포정사가 있는 곳은 그 주재지에 따라 포정사사의 명칭을 다시 명명했다. 즉, 조정은 1개성에는 1명의 포정사사가 있다는 전제하에, 강남성좌,우포정사사의 명칭을 고치고, 독립적으로 설치했다. 기실 이는 방대한 강남성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2개의 성으로 해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강소성과 안휘성이다. 이제 순치18년부터 강희6년까지 근 7년의 시간을 들여 청나라정부는 강남성의 분할을 완성한 것이다.

 

다시 인터넷에서의 이야기로 되돌아가보자. 즉 안휘성의 성회가 남경이라는 말은 역사상 정말 근거가 있다. 강소, 안휘 두 개의 성으로 나눌 때, 안휘의 포정사는 오랫동안 남경에 주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안휘의 당시 성회인 안경(安慶)은 안휘성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안휘성의 대부분 지역은 자신의 성회도시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북쪽의 봉양등지에서는 강녕으로 가는 것이 훨씬 편리했다. 그리고 안경은 아문도 협소하였다. 나중에 안휘의 포정사사를 안경으로 이전하지만, 불만이 많았고, 자주 조정에 아문을 새로 만들자고 요구했다.

강소성의 경우에는 강소포정사, 강서순무가 모두 소주에 주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강소성의 성회는 기실 장기간 소주였다. 강녕(즉, 남경)은 강소안찰사(옹정기간에 소주로 옮겨간다) 및 강남총독(나중의 양강총독)의 주재지였다. 다만 남경은 총독주재지이고, 남방의 중지이므로, 많은 사람들은 남경을 강소성의 성회로 생각했다. 그러나 황제가 보기에, 강녕은 여전히 '강남성'의 성회이고, 소주는 나뉘어진 '강소성'의 성회였다. 둘은 모두 성회였다. 이는 바로 오늘날에도 강소성내에서 소주, 남경 두 도시중에서 누가 성회가 되어야 하는지를 다투는 근원이 된다.

결론

오늘날 강소성의 '내부싸움'이나 안휘, 강소 양성의 '성회'가 어디인지 하는 이야기는 오락거리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일어나게 된 역사적인 근원을 추적해보는 사람은 드물다. 만일 역사를 이해한다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안휘, 강소 두 곳은 하나의 성이었고, 강소성내에 소주와 남경은 모두 성회급의 도시였다. 이런 것을 이해하면 비로소 오늘날의 많은 문제의 원인은 기실 역사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