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독사(讀史)
얼마전 하르빈은 2021년도 전체시의 상주인구총수가 988.5만명이라고 발표했다.
1년전 제7차인구센서스때의 수치 1000.1만명과 비교하면 1년만에 하르빈은 12만명의 인구가 감소했다.
2020년때 중국의 천만인구도시는 모두 18개였다. 하르빈도 그 중의 하나였다.
2021년에 이르러 하르빈의 인구는 1000만이 무너져 1000만도시클럽에서 탈락하게 된다.
이제 동북(만주지방)에는 더 이상 천만의 대도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국무원이 비준하여 확정한 동북지구의 중요중심도시 하르빈은 동북에서 유라시아로 향하는 문호였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최근 나오는 ‘동북쇠락’의 목소리를 인증하는 것처럼 하르빈을 떠나는 것이 직면해야하는 어쩔 수 없는 객관적 현실이다.
1. 계속 떠나는 하르빈인구
중국의 최고수준의 공과대학인 하르빈공업대학은 하르빈대학들 중에서 최고일 뿐아니라, 헤이룽장성에서도 랭킹이 가장 높은 대학이다.
2001년 하르빈공업대학 졸업생의 통계수치중에서 본과졸업생의 제1, 제2선택은 모두 헤이룽장이 아니었다.
광둥으로 취업간 졸업생이 가장 많아서 19.5%에 달했고,
베이징으로 취업한 졸업생이 그 다음으로 17.1%였으며,
헤이룽장성에 남은 졸업생은 세번째로 11.9%였다.
최고대학마저 현지에 졸업생이 남지 않으니 다른 대학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르빈의 대학생들에게 현지에는 좋은 기업이 없다. 현지에 남으면 역시 정부부서나 공기관에서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만일 더 나은 취업자리를 찾으려면 남쪽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다.
보통사람들이 제대로 된 직업을 찾지 못하면, 영업을 하거나 배달을 할 수밖에 없다. 통계원이라도 되면 급여에 5험1금을 합쳐서 3000여위안이 된다. 이것도 박터지게 싸워서 겨우 얻을 수 있다.
한 네티즌은 이렇게 말한다: “남방에는 수공업이 발달하고, 공장도 많고, 학교도 많다. 같은 조건이면 남방에 기회가 더욱 많다. 고생을 하고 열심히 할 생각만 있다면 돈을 벌 수 있는 것이다.”
한 도시의 발전은 토지, 인구와 자본의 3대요소를 벗어날 수 없다. 토지는 하늘이 준 것이고 움직일 수 없다. 이는 자연적인 속성이다. 자본은 움직인다. 조건이 변화하면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관건은 인구이다.
하르빈공업대학의 졸업생이 외지로 흘러나간다는 것은 하르빈이라는 도시의 현재 실력을 말해준다. 만일 도시가 발전하려면 젊은이에 의존해야한다고 말한다면, 도시의 미래는 어린이이다. 이 도시에서 공부하는 소학생, 중학생(중국의 중학은 한국의 중,고등학교임)이다.
하르빈의 미래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같다. 하르빈의 2021년 통계수치를 보면 2010년에서 2021년까지 11년간 다음과 같이 변화했다:
소학생의 재학생수량은 46.07만명에서 39.41만명으로 줄어서 6.66만명이 줄었다.
중학생의 재학생수량은 29.96만명에서 25.4만명으로 줄어서 4.56만명이 줄었다.
두 통계수치를 합치면 초중학생이 11년간 11.22만명 감소했다는 것이다.
성년인만 밖으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미성년자도 감소하고 있다. 일찍이 ‘동방의 파리’라고 불리던 하르빈이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2. 하르빈은 철도로 성장한 도시이다.
하르빈의 출현은 ‘틈관동(闖關東)’과 관련이 있다.
19세기 황하중하류에 여러 해동안 재해가 빈발하여 생계가 힘들어지자, 산해관이내에 있는 백성들이 동북으로 살길을 찾아 떠난다.
청나라 동치연간부터 산서, 하북, 하남, 산동, 강소등 여러 성에서 대거 사람들이 관동으로 간다. 하르빈지구도 사람이 점점 늘어났다.
하르빈이라는 명칭이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1862년 <흑룡강장군아문당안>이다: 타르혼추(他爾渾處)강의 북쪽에 원래 도선(渡船) 한 척이 있고….건너편 강의 남쪽 하르빈에도 역시 도선 1척이 있다.”
최초의 하르빈은 현재의 임수촌락에 상당한다. 백성들은 수로의 요충지인 부두에 있었다.
하르빈이 도시로 발전한 것은 하나의 교통용구때문이다. 철도
1898년, 제정러시아는 중국과 러시아 양국을 관통하는 철로인 ‘중국동방철도’를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서로는 치타(赤塔)에서 동으로 블라디보스톡까지 이 철로의 기점이 바로 하르빈이다.
이 철도를 통해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유태인등 유럽이민들이 하르빈으로 밀려들어왔다.
지난세기초 이곳의 외국인은 16만여명에 달한다. 하르빈은 당시 동북지구 최대의 수륙교통허브였다.
1905년 러일전쟁후, 하르빈은 통상개방도시가 된다. 20여개국이 이곳에 영사관을 설립한다. 외국자본도 속속 이 곳으로 밀려든다. HSBC, 원동은행등이 전후로 하르빈에 진출한다.
청정부는 직접적으로 이곳에 국제통신망을 개통한다. 북경, 상해, 광주등지에서 구미로 보내는 전보는 모두 하르빈을 거쳐서 발송되었다.
1926년에 설립된 하르빈라디오방송국은 중국최초의 라디오방송국이다.
당시의 하르빈은 극동정치금융중심일 뿐아니라, 군사정보수집중심이었다. 그리하여 “극동발칸”으로 불렸다.
하르빈은 철도로 성장한 도시이고, 대중형기업 근 200여곳, 소형공장 1,150곳을 보유하여 전란의 시대에 전국에서 가장 앞선 도시였다.
일찍이 황야의 시골마을이 졸지에 동방의 파리라는 명칭을 얻은 국제적인 대도시로 변신한 것이다.
신중국이 성립된 후, 하르빈은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맞는다.
“1차5개년계획”시기에 큰형님인 소련이 지원한 156개의 중점프로젝트중에서 13개가 하르빈에 건설된다. 국내에서 가장 프로젝트가 많은 도시였다.
발전기공장, 전기공장, 보일러공장, 베어링공장등이 전후로 이곳에 건립되며 기록을 하나하나 세워간다.
1953년, 하르빈전기공장은 중국최초의 대형 6천킬로와크수력발전기세트의 시제품을 완성한다.
1955년 1월, 하르빈전기공장은 하북 관청발전소에 1만킬로와트의 입축혼류식수력발전기세트를 완성하고, 2월에는 중국최대의 1.5만킬로와트 수력발전기세트를 제작성공한다.
1956년 12월 31일, 하르빈보일러공장은 중국최초의 시간당 증기증발령 35톤의 석탄보일러를 제작하는데 성공한다.
“1차5개년계획”은 하르빈의 공업혼을 만들어낸다.
현재의 항공공업의 하페이(哈飛)의 전신은 바로 “1차5개년계획”기간의 하르빈웨이젠기기공장이었다.
이러한 탄탄한 공업을 기반으로 하르빈은 국내 10대도시에 굳건히 자리를 잡았었다.
지금 널리 알려진 “공화국장자”라는 표현도 가장 먼저 모택동주석이 하르빈을 시찰하면서 꺼낸 말이다.
1990년대에 연해의 항구들이 앞다투어 개방된다.
국가의 중심이 동남으로 옮겨가면서 하르빈은 신단에서 내려오게 된다.
3. 일찍이 휘황했으나 지금은 몰락했다.
2019년의 1인당 GDP에서 하르빈의 1인당GDP는 5만위안이 되지 않는다. 전국의 성회도시중에서 뒤에서 1위이다.
같은 해 전국GDP50대도시중에서 42위를 차지했는데, 15개의 부성급도시중에서는 꼴찌였다.
2021년의 GDP랭킹에서 하르빈은 타이저우, 뤄양등 3선도시들에게 밀렸다.
이전의 휘황한 역사와 비교해보면 하르빈의 경제하락은 실로 너무나 급속하다. 인구도 대량으로 빠져나간다.
요 몇 년간 동북쇠락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계속하여 있어왔다. “이전에는 모두 틈관동했는데, 이제는 모두 관내로 달려간다” “투자는 산해관을 넘어오지 못한다”는 말이 인터넷에 널리 떠돌고 있다.
모두 동북이 몰락했다고 하는데, 하르빈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사정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러시아 때문에 흥하고 러시아 때문에 망했다.
제정러시아이건 소련이건 모두 당시 세계의 1,2위를 다투는 강국이었다. 이 시기에 하르빈과 동북은 잘나갔던 전성기였다. 이는 러시아에 이웃해서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다. 소련해체와 러시아경제의 몰락으로 자연히 의존할 곳이 사라지게 된다.
다음으로, 동북의 자원인 삼림, 석유, 금광, 석탄등이 고갈되고 있다. 자원개발에 의존한 재정은 지금 무척 부족해졌다. 그래서 도시공공서비스를 제대로 제공하기 어렵다.
게다가 산업이 주로 중공업과 농업이었고, 고부가가치의 3차산업은 없었다. 업무성장기회가 적고, 인구를 많이 잡아놓을 수 없엇다. 연해도시가 개혁개방한 것과 달리 동북이 다시 부활하기는 더욱 어렵게 된 것이다.
오늘날에 이르러 동북을 얘기하면, 그저 탄식을 내뱉는 외에는 조롱하는 말이다.
기실 그럴 필요는 정말 없다.
건국후에 공업에 의존하여 “공화국장자”로 대접받았을 때이나, 1960년대부터 시작된 국가3선건설에 동북은 15년간 계속하여 외지로 수혈해주며 중서부에 무수한 인재, 자원과 설비를 지원해주고, 전국으로 내보낸 프로젝트가 300여개가 넘는다. 그리하여 중국을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변신하는데 공헌했다.
동북은 실로 너무나 많이 공헌했다.
한 시대의 종결은 한 시대의 시작이다. 비록 현재 동북경제는 위축되고 발전은 완만하지만 여전히 중국의 양식창고이자 여러 중공업의 제조기지이다.
헤이룽장은 중국최대의 식량생산대성이다. 누적적으로 생산한 상품식량이 1조여근에 이른다. 연속 8년간 전국식량생산1위를 차지한다.
지린은 1.7%의 인구로 6%의 식량을 생산해낸다. 양식의 단위당생산량이 7,059.9킬로그램으로 전국1위를 안정적으로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랴오닝은, 국산항공모함 산동함을 이곳에서 제조해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동북은 나라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이전에 하르빈을 가본 적이 있다. 택시를 타서 기사와 얘기를 나누었는데, 하르빈의 1인당 GDP가 꼴찌라는 얘기도 나눴는데, 그래도 그의 손님대접의 열정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
내 생각에 이것이 바로 동북이다.
이곳은 역사외에 광활한 평원도 있고, 짙은 원시삼림도 있으며 인정미 넘치는 동북의 ‘노철’도 있다.
중앙대가의 오광십색은 여가여읍(如歌如泣)의 황혼을 장식한다.
하르빈은 일찍이 십리양장-상해와 비견되었던 동방의 파리라 불리웠다. 유태인후예, 러시아후예들이 뿌리를 찾아서 오고는 하는 곳이다.
하르빈은 다양한 문화, 언어가 융합된 무대이고, 휘황한 성취를 거두었던 도시이다. 가장 먼저 해방된 대도시이며, 최초의 교향악단, 최초의 맥주공장도 이곳에 세워졌다.
이것이 하르빈의 이야기이다. 또한 동북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건국초기의 헌신, 시대개혁의 곤경, 신시대의 침적, 우리는 하르빈이 다시 한번 날아오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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