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감시서원(砍柴書院)
중국에 이런 도시가 있다.
이름도 아주 기괴하다. 그저 숫자로만 이루어져 있다. "404"
"404"는 중국의 서북, 궁벽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가장 가까운 도시와의 거리도 백킬로미터가 넘는다.
이곳은 황량하고 가난하다. 그러나 그 지위는 아주 높다.
일기예보때, 방송국에서 가장 먼저 알려주는 도시는 성회(省會, 성정부 소재지)도시이고, 그 다음이 바로 그곳이다.
이곳의 사람들은 아주 대단하다. 길거리에서 아무렇게나 햇볕을 쬐고 있는 노인들도 북경대학 아니면 청화대학 졸업생이다.
이곳에는 일찌기 중국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 가장 뛰어난 엔지니어, 가장 뛰어난 주방장이 모여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같이 신비롭게 감숙의 가장 서쪽에 들어섰다.
왜 이렇게 황막한 곳에 이런 도시를 만들게 되었을까? 여기에 왜 그렇게 많은 인재들이 몰려들었을까?
이곳은 왜 그렇게 높은 지위를 가졌을까? 그 배후에는 어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역사가 숨어 있는 것일까?
1
404는 탄생부터 신비로운 색채를 띄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몰랐다. 서신을 보내는 주소에는 구체적인 집주소를 적을 수 없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성과 이름을 감추고, 그저 일을 열심히 했다. 오직 하나의 목표를 위하여 - 중국자신의 핵무기를 제조한다.
왜 핵무기를 만들어야 하는가. 그것은 중국이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목격했기 때문이고, 그것의 위협을 깊이 느꼈기 때문이다.
핵무기가 처음 나타난 것은 2차대전기간이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은 확정적이지만, 여전히 완고하게 항거하고 있었다.
이때 미군은 이미 뎌러 나라들과 동맹조약을 체결했고, 동맹국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리고 이전에 미국의 진주만이 기습받은 복수를 하기 위하여, 미국은 그들이 연구개발헤서 제작한 신식무기인 원자탄의 위력을 시험해보기로 결정한다.
여러 조사를 거쳐, 미군은 시험지로 히로시마와 나카사키를 정한다.
왜 이 두 곳일까? 왜냐하년 이곳의 군사적인 지위가 일본에서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두 곳을 타격하면, 첫째, 철저히 일본의 군사역량을 파괴시키고, 그외에 현실적인 요소 하나는 당시 일본의 수인 도쿄에는 비록 중요인물이 운집되어 있지만, 미군 공군의 연이은 공중폭격으로 이미 파괴되어, 원자탄의 위력이 어떤지를 보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6일, 원자탄을 실은 미군전투기가 일본영공으로 향하고, 8시 16분, 원자탄을 투하한다. 히로시마의 시간은 이때로 고정된다.
훼멸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지면에서 300미터지점에서 원자탄이 폭발하고, 강렬한 빛은 '태양처럼 사람들에게 쪼였다" 그리고 지옥이 재현된다.
폭발중심에 있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분해되고, 조금 멀리 있던 사람은 찰나간에 유해로 변한다; 더욱 멀리 있던 사람은 두 눈이 불에타 구멍이 난다. 지면의 모든 부착건축물은 머누지고, 14만명의 민간인이 순식간에 사망한다.
이것은 원자탄이 처음으로 전쟁터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전에 세계는 그 힘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번 타격은 일본으로 하여금 신속히 무조건항복을 하도록 만들었고, 미국의 패권지위를 공고히 하게 된다. 이는 원자탄이 없으면 모두 미국을 겁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국제형세는 급격히 변화한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비록 미군은 장비가 뛰어났지만, 결국 중국지원군이 혈육으로 막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전쟁터에서 연이어 패퇴하게 된다. 전쟁의 중요한 순간에 지휘관 맥아더는 여러번 상급에 원자탄으로 중국을 봉쇄하자고 건의한다.
중국군대는 전쟁에서 지지 않았지만, '원자탄'의 위협은 머리위의 다모클래스의 검과 같이 언제든지 떨어질 수 있었다.
만일 중국이 원자탄을 가지지 못하면, 중국은 계속 그 공포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중국 자신의 원자탄을 만들어내는 것은 이미 절박한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원자탄은 고정밀무기이다. 연구개발, 경비가 거대하다. 이때의 신중국은 전쟁으로 경제가 거의 무너졌다. 무엇으로 원자탄을 만들 것인가.
다만 중국인은 고생을 겁낸 적이 없고, 힘든 것을 겁낸 적이 없다. 중국인이 허리뼈만 펼 수 있다면.
1955년, 물리학자 첸산창(錢三强)과 지질학자 류제(劉傑)의 보고서를 받고, 모주석은 즉석에서 결정한다: 국가의 모든 힘을 모아서, 원자탄을 제조하자!
중국이 원자탄을 만들겠다는 말을 하자 서방각국은 비웃었다: "너희는 20년이 지나도 원자탄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서방국가의 조소를 받으면서 중국의 과학연구자들은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우리가 반드시 원자탄을 만들어 내겠다."
주은래 총리가 앞장서서 제2기계부를 성립하고, 전문적으로 원자탄설계를 기획한다.
비록 결심은 섰지만, 진정 착수하는데는 곤란이 적지 않았다.
가장 먼저 설비문제이다.
당시 전체 연구소에 그저 1대의 낡은 컴퓨터만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순서를 정해서 차례로 사용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이론자료문제이다.
원자탄의 핵심배합은 무엇인지, 과학연구자들은 가장 기본적인 이론자료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할지도 몰랐던 것이다.
조건이 없으면 조건을 만든다.
중국인들이 가장 잘하는 것은 역량을 집중해서 큰 일을 해낸다는 것이다.
과학연구자들은 컴퓨터가 없으면 연필과 주산으로 하나하나 계산했다. 자료가 없으면 그냥 계속 외국자료를 공부하고, 계속하여 추연(推演)했다.
원자탄의 연구제조는 시스템적인 정밀공정이다. 과학연구, 설계뿐아니라, 시험, 생산, 제조가 필요하다.
당중앙은 결정한다. 황막한 곳에 핵공업생산기지를 건설한다. 그리하여 404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404는 감숙성 서북부, 사막지애에 있다.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이며, 미국의 정찰기의 눈도 피할 수 있다.
1958년 가을, 감숙서부의 황량한 고비사막에 돌연 수만명이 나타난다. 전국각지에서 온 기술엘리트, 명문대학의 대학졸업생, 심지어 해외에서 귀국한 전문가들이 모두 이곳에 모인 것이다.
원자탄은 계산이 복잡할 뿐아니라, 핵심부품의 가공정밀도도 아주 까다로웠다. 조그만치의 차이가 나더라도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된다.
다만 당시 중국은 아직 정밀한 CNC머신도 없었다. 원자탄의 '심장'인 농축우라늄구를 제작하려면 인공으로 손에 도구와 자를 들고 한칼 한칼 새길 수밖에 없었다.
관련부서는 전국범위에서 가장 좋은 기술자를 불러서 그 작업을 하도록 조치한다.
2
1959년 봄, 제2기계공업부는 상하이자동차 섀시공장의 핵심기술자들을 선발하여 서북으로 데려간다. 원공포(原公浦)는 자원하여 신청한다.
이때의 원공포는 상하이자동차 섀시공장의 기술핵심이었다. 그는 신혼으로 원래 상하이에서 평생을 살 터였는데, 조국이 부른다는 말을 듣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404에 도착한 후, 원공포는 비로소 이곳의 여건이 너무 열악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고비의 기후는 아침과 저녁의 온도차가 컸다. 낮에는 태양이 내리쬐고, 저녁에는 겨울외투를 걸쳐야 했다. 바람이 불면, 모래가 얼굴을 때려 아플 정도였다. 길을 걸을 때도 안전모를 써야 했다. 모든 것은 이제 막 건설되고 있었고, 집도 없었다. 원공포는 그저 천막에서 잠을 자야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1958년부터 전국은 대규모 자연재해를 겪는다. 전국인민들이 먹을 것이 없었고, 404는 더욱 심했다.
생활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지도자들은 땅의 일부를 농장으로 삼아 각종 먹을 거리를 재배하도록 한다. 그래서 과학연구자들이 낮에는 실험실에서 일에 매진하고, 퇴근 후에는 땅에서 일하면서 스스로 먹을 것을 생산해야 했다.
그러나, 황량한 사막에서 야채를 심는 것은 쉽지 않았다. 지도자들은 방법을 강구해서 감자를 운송해와서 과학연구자들이 먹도록 했다. 그러나 감자도 무한정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계획을 세워서 아껴서 먹어야 했다.
먹을 것이 없을 뿐아니라, 마실 물도 문제였다.
사막에 물은 없다. 매일 도시에서 약간의 물을 운송해와야 했다. 매일 대야 반 정도의 물로, 먹고, 마시고, 씻고, 세수하는 것을 다 해야 했다. 마지막에 약간 남겨서 순환사용해야 했다.
생활을 개선하기 위하여, 과학연구자들은 새로운 방법을 고안했다. 저녁에 호미를 들고 쥐굴을 파서 '쥐에게서 먹을 것을 빼앗는 것'이다.
사막에는 고기를 먹을 수 없다. 그들은 버드나무잎 따서, 소금을 뿌린 후 끓여서 먹으면서 서로 '인공고기를 먹는다'고 말하곤 했다.
비록 생활을 고되지만, 기술적으로는 약간의 진전이 있었고, 거기에서 즐거움을 느꼈다.
원공포는 404에 도착한 후, 금방 기술자들과 폐쇄식훈련 '절구(切球)'을 시작한다.
비록 훈련이었지만, 그들도 정식으로 농축우라늄을 자르는 것처럼 완전무장을 하고, 두터운 방호복을 입고, 3겹의 장갑을 끼고, 손에 든 칼로 대용재료를 조금씩 갈아서 '구'의 형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조금씩 칼질을 해서 설계도상의 크기, 광결도(光潔度)를 맞추었다.
왜 진짜 농축우라늄으로 훈련하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당시에 이미 우라늄광산을 찾아내기는 했지만, 돌맹이에 분포된 우라늄의 순도가 미치지 못해, 우라늄은 다시 제순(提純), 분리, 농축과정을 거쳐야 사용될 수 있었다. 즉, 그때 쓸 수 있는 우라늄재료는 아직 생산해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매일 '구'를 잘랐지만, 원공포는 이게 어디에 쓰이는 것인지는 몰랐다.
기밀때문에 404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상당히 신비했다. 모두 하나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아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모르는 것은 묻지 않는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부부가 동시에 404에서 일했는데, 그들은 공장지구의 한 나무 아래서 만날 때까지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1964년 1월 14일, 우라늄이 여러 형태로 층층이 분리되어 마침내 99.99%의 농도를 가지게 만들었고, 감숙농축우라늄504공장에서 제1차 완제품이 나왔다. 그후 그것은 무경의 호송하에 전용열차에 실려 404로 온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원공포가 연습한 성과를 검증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1964년 4월 30일 밤, 중앙에서는 원자탄제조의 '심장' 제조를 승인한다. 원공포가 작업을 개시한다.
많은 과학연구자의 심혈이 농축되어 있는 우라늄을 가지고 원공포는 극도로 긴장했다. "성공해야만 하고, 실패할 수는 없다" 그는 사람들의 심혈을 자신이 망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작업할 때가 온 것이다!
원공포는 심호흡을 하고,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그와 조사원, 품질검사원이 우라늄의 앞에 서서, 작업을 준비한다.
칼 하나마다, 반드시 정확하게 머리카락의 5분의 1이 되어야 했다. 원공포는 정력을 집중하였고, 칼 하나하나가 모든 사람의 심장에 그어지는 것같았다.
이제 마지막 칼질 3번이 남았다.
이 세 번의 칼질은 특히 관건이다. 단 1밀리미터의 오차만 생기더라도 이전의 칼질이 모조리 허사가 되는 것이다. 원공포는 호흡을 멈추고, 측량하고, 조정하고 칼을 댄다.
"마쳤다!" 세번째 칼질이 이루어지고 품질검사원이 격동하여 소리친다. 원공포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나중에 인터뷰를 하면서, 원공포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내 생명을 다 바친 세 번의 칼질이었다!"
그 세번의 칼질 때문에 원공포는 "원삼도(原三刀)"라는 별명을 얻는다.
농축우라늄구를 제작완료한 후 다시 전용열차에 실어 원자탄의 최종실험지인 211로 갔다.
1964년 10월 16일 15시 30부, 사막가운데 강력한 빛이 번개처럼 하늘을 가른다. 머리 위로는 천둥소리가 치고, 멀리 지평선에서는 불구덩이가 떠올랐다.
"쾅!"
큰 소리가 천지를 울리면서, 버섯구름이 만들어졌다.
무수한 과학연구자들은 산위로 올라가서 주먹을 쥐고 흔들면서 환호작약했다. 밤잠을 못이뤘던 무수한 밤, 힘들었던 무수한 순간은 이때 기쁨의 눈물로 화했다: "우리는 성공했다!"
이날, 중국은 미국, 소련, 프랑스, 영국의 뒤를 이어 세계에서 다섯번째 원자탄보유국이 된 것이다.
이날은 역사서에 영원히 기록되어야 한다.
3
원자탄실험이 성공했지만, 이들 과학연구자들이 살 환경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404의 최초사명은 이미 완수했다. 과학연구자들의 가족들도 들어오기 시작한다. 404는 계획을 세워서, 진정한 도시의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다.
후손들에게 양호한 생활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하여,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사막의 지하에 음수시스템을 갖추고, 도시에 병원, 학교를 짓는다.
이들은 공원도 만들었고, 거기에는 가산(假山), 폭포도 만들고, 퇴역한 전투기도 가져다 놓고, 위락설비도 갖추었으며, 동물원도 만들었다.
그러나 동물원에는 동물이 5마리밖에 없었다. 다섯마리가 서로 다른 철창 안에 있었다: 곰, 새, 원숭이, 공작, 매화록(梅花鹿).
식초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식초를 만들기 시작했고,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들은 여름에 아이스크림과 아이스케키를 만들었다. 이곳의 아이들도 도시의 아이들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404의 생활은 간단하고 순수했다.
404는 아주 작았다. 아이들도 함께 자랐고,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동창들은 더 이상 서로를 잘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이들의 선생님도 아마 부모들의 선생님일 것이다.
이곳에는 자신의 입학시험사무실이 있었고, 매기 대학입시에서 70-80명을 담당했다. 만일 누군가 합격하지 못하면, 그 수험생이 정원을 채우지 못한 학교로 가도록 도와주었다.
아이들의 생활도 아주 간단했다. 고비사막에서 햇볕을 쬐면서 사막에서 개미를 가지고 하루종일 놀았다. 공휴일이 되면, 공원을 가는 것이 거의 모든 집에서의 여가활동이었다. 방공지하도를 탐험하는 것은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였다.
구정이 되면 아이들이 유일하게 도시를 나갈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구정이 되면, 404의 아이들은 멘빠오차를 빌려, 100킬로미터 떨어진 가욕관(嘉峪關)으로 가서 새 옷을 사고, 국수를 먹는다. 그게 명절행사이다.
그리고 오직 이때, 아이들은 발견하게 된다. 원래 이곳 바깥에 그들과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404에서 아이들이 자라고 나면, 당연히 이 도시에서 각종 직업에 종사한다. 이는 각종 기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잘 아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잘못을 저지러면 감옥에 들어간다. 이곳에도 자신의 중급인민법원이 있고, 자신의 감옥이 있었다.
1996년, 핵실험의 잠정중단이 선언되면서, 404라는 세상과 단절된 소도시의 시간은 멈추게 된다.
그후 404는 기나긴 개조를 거쳐, 군대에서 민간으로 신분이 바뀌고, 전문적으로 핵폐기물을 처리하는 공장이 된다.
2006년, 404내에서 대규모 붕괴가 발생하고, 상급에서는 긴급하게 가장 가까운 가욕관으로 철수하도록 조치한다.
10여만명이 이주를 했고, 군대가 출동하여 이사를 도왔다. 심지어 미국스파이까지 주목을 하게 된다. 중국경내에 이상 군사행동이 있다고 본 것이다.
지금의 404는 이미 10여만명의 소도시에서 천명이 지키는 공장으로 바뀌었다. 이전의 주민아파트는 대부분 버려졌다.
공장지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차를 타고 가욕관과 공장지구를 출퇴근하며 1시간40분을 달린다.
가욕관으로 옮기면서, 404의 사람들은 처음으로 '주민'신분으로 대중의 시야에 드러나게 된다. 이때는 이 도시가 처음 생긴 때로부터 이미 48년이 지난 후였다.
지금의 404에는 여전히 무경부대가 진주하고 있고, 모든 진출입차량과 행인은 반드시 검문을 거쳐야 한다.
당시의 번화함은 이미 사라졌지만, 도시중심의 그 모택동주석이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조각상은 여전히 남아서 세상사람들에게 당시 이름과 성을 숨기고 과학연구에 매달렸던 뜨거운 피의 청춘세월을 증언해주고 있다.
4
중국에서 고비, 초원, 사막, 산속의 도시는 아주 많았다. 그들의 이름은 지도에서 지워지고, 3개의 숫자로만 남았다.
221, 504, 272, 711, 202, 404
가난했던 중국의 무수한 과학연구자들이 성과 이름을 감추고, 가족들과 모든 관계를 끊고, 그저 조국의 부름에 응해 이곳으로 간 것이다.
황막한 고비사망ㄱ에서 그들은 청춘을 불살랐다. 올때는 청춘이었지만 떠날 때는 백발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모른다.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들 때문에, 중국은 더 이상 다른 나라에 고개를 숙이지 않고, 허리를 꼿꼿이 펼 수 있게 되었다.
그들 때문에 중국은 원자탄을 가지게 되고, 수소탄도 발사하며, 핵잠수함도 만들었고, 핵발전소도 건설했다. 이것때문에 중국인은 더 이상 다른 나라의 위협과 도전을 겁내지 않아도 되게 된 것이다.
404의 영광은 이미 역사가 되었다. 그러나 영원히 잊어서는 안된다.
그 도시, 그 사람들...
'중국과 사회 > 중국의 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춘(長春): 전국유일의 경제가 마이너스성장인 성회(省會) 도시 (0) | 2022.08.06 |
---|---|
장사(長沙): 천년고성(千年古城)인데 왜 문화재가 거의 남아있지 않을까? (0) | 2022.08.05 |
포핑현(佛坪縣): 상주인구 8천, 공직인원 2천의 미니현의 현황 (0) | 2022.08.02 |
하르빈의 몰락: 1000만클럽에서 탈락하다. (0) | 2022.06.06 |
형주(荊州): 초(楚)나라 4백년 도읍지 (0) | 2022.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