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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송휘종)

송휘종(宋徽宗)의 비극

by 중은우시 2025. 3. 11.

글: 상서교(尙書喬)

송휘종의 북송을 멸망시킨 망국지군으로 역사의 치욕주(恥辱柱)에 못박혔다. 누가 알겠는가. 그도 즉위초기에는 일찌기 상당한 업적이 있던 황제이고, 원래 북송을 중흥시킬 능력있는 군주였다는 것을. 그런데, 그는 왜 신속히 망국지군으로 전락했을까? 그 배후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 도대체 무엇이 그를 능력있는 군주에서 타락한 망국지군으로 만들었을까?

송휘종 조길(趙佶)은 1082년 십월 십일 태어났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의 부친 송신종(宋神宗)이 마침 비서성(秘書省)에서 남당후주(南唐後主) 이욱(李煜)의 화상을 보고 있을 때, 후궁에서 아들을 낳았다고 보고했다고 한다. 그 아이가 바로 조길이다. 확실히 이는 후인들이 송휘종과 이욱 두 망국지군을 견강부회한 이야기일 것이다. 두 사람은 모두 천고에 보기 드문 걸출한 재자(才子)이며, 또한 최후가 처참했던 망국지군이다.

조길이 1살때, 그의 부친 송신종에 의해 진녕군절도사(鎭寧軍節度使), 영국공(寧國公)에 봉해진다. 그의 형인 송철종(宋哲宗)이 즉위하자, 조길은 수녕군왕(遂寧郡王)에 봉해진다. 1096년에는 단왕(端王)으로 고쳐 봉해진다. 2년후에는 사공(司空)에 봉해지고, 소덕창신군절도사(昭德彰信軍節度使)가 된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부귀를 타고난 말그대로 천황귀주(天湟貴胄)이다. 번왕에 봉해진 때로부터 그는 성색견마(聲色犬馬)의 형제들과는 크게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조길은 도서, 단청(그림), 사어(射御, 활쏘기와 말타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경성에서 명성이 높았다. 조길의 형인 송철종의 첫황후 맹황후(孟皇后)는 딸만 낳고 아들이 없었다. 그리고 송철종과의 불화로 몇년후에 폐위된다; 두번째 황후인 유황후(劉皇后)는 후궁중 미모가 가장 뛰어나고 다재다능하여 송철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1남2녀를 낳는다. 그러나 아들이 석달만에 요절하였고, 그 후에는 다시 아들을 낳지 못한다.

송철종은 당시 이렇게 생각했다. 자신은 아직 젊기 때문에 아들이 생기지 않을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1100년 정월 십이일, 25살의 송철종 조후(趙煦)는 돌연 붕어한다. 그럼 누가 황위를 승계할 것인가? 송철종은 아들이 없으므로, 후계자는 그의 형제들 중에서 고를 수밖에 없었다. 송신종에게는 모두 14명의 아들이 있었고, 송철종이 붕어한 후 남은 송신종의 아들은 5명이었다: 제9황자, 제11황자, 제12황자, 제13황자, 제14황자.

이 다섯 명은 모두 황제의 자리에 욕심이 있었다. 누구든지 황제에 오르면 인간부귀의 극치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활발한 사람이 바로 송신종의 제11자 조길이었다. 조길의 생모인 진황후(陳皇后)는 송철종의 생모인 주황후(朱皇后)와 모두 개봉사람이나는 연유로 송철종의 여러 형제들 중에서 조길과 사이가 가장 가까웠다.

조길이 단왕으로 있을 때인 어느 날, 부중으로 돌연 2마리의 학이 날아들었다. 이는 상서(祥瑞)로 여겨졌다. 조정대신들은 그 소식을 듣고 속속 그에게 축하인사를 했고, 조길도 매우 기뻐했다. 다만 그의 관가(管家) 양진(楊震)은 이들을 쫓아내며, 여러분들이 잘못 보았다. 그 새는 그저 관조(鸛鳥, 황새)일 뿐이다. 얼마 후 단왕부의 침각(寢閣)에 돌연 영지(靈芝)가 자랐다. 대신들이 다시 속속 축하하러 왔지만, 양진은 사람을 시켜 영지를 뽑아내고, 그건 영지가 아니라 그냥 버섯일 뿐이라고 말한다.

조길은 양진이 그렇게 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야 깨닫는다. 이건 양진이 충성심으로 주군을 보호한 것이라고, 이로 인하여 송철종의 그에 대한 의심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양진의 고심을 알고 난 후, 그는 양진을 더욱 신임하고 중시했다. 이 두 차례의 상서는 더더욱 조길의 황제위에 대한 욕심을 불러 일으킨다. 다만 화를 부를까 겁이 나서 하루종일 좌불안석이고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다.

이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는 중에 조길은 사람을 시켜 길흉화복을 점쳐보게 한다. 점을 치는 자들은 모두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는데, 나중에 진언(陳彦)이라는 사람이 눈치를 채고, 단왕은 천자가 될 운명이니, 스스로를 아끼라고 말한다. 1년후 조길이 과연 원하는 대로 황제에 오른다. 진언은 그후 관운이 형통하여, 점치는 사람에서 관직이 절도사에 이른다. 잘나가는 권력귀족이 된 것이다.

다만, 조길이 황제위에 오른 것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반드시 조정의 권세있는 사람들의 환심을 사야 한다는 것을. 그는 바로 송신종의 정궁 향황후(向皇后)였다. 송신종은 향황후와 사이가 아주 좋았다. 1085년 삼월, 송신종이 붕어하고, 향황후와 송신종의 생모인 고태후(高太后)는 조후를 황제로 세우기로 결정한다. 그가 바로 송철종이었다.

조정의 문무대신들이 보기에 향태후는 공평정직하며 사적인 감정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는 현숙한 황후였다. 송철종의 병이 위중할 때, 군국대권은 모두 향태후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다. 그녀의 말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었다. 조길도 알고 있었다. 황제위에 오르르면, 반드시 향태후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될 것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그는 모든 방법을 강구하여 향태후에게 잘 보이고, 그녀의 환심을 산다.

조길은 먼저 향태후의 곁에 있는 사람들부터 손을 쓰기 시작한다. 온갖 방법을 써서 그들을 회유했고, 그들로 하여금 향태후에게 자신에 대해 좋은 말을 하도록 했다. 이 방법은 효과가 있었다. 향태후는 조길에 대한 좋은 말을 여러번 듣다보니 점점 조길이야말로 인의효제(仁義孝悌), 풍류온자(風流蘊藉)한 사람이며, 다른 번왕들보다 재능이 있고 비범하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하여 조길에 대해 갈수록 호감을 가지고 갈수록 좋아하게 된다.

1100년 정월 십일일 밤, 향태후는 송철종의 생모 주태비(朱太妃)와 병이 위중한 송신종을 보러 간다. 주태비는 곡을 하며 상심해했고, 아들로부터 단 한마디 말도 들을 수 없었다. 향태후는 그녀에게 말한다. 황제가 그녀로 하여금 단왕에게 황위를 물려주라고 했다고. 주태비는 한번도 아들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었지만, 향태후는 위고권중(位高權重)한 인물이니 그녀와 다툴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송철종이 목숨을 거두자, 향태후는 대신을 소집하여 누가 황제위를 계승할 것인지를 논의한다. 재상 장돈(章惇)은 먼저 송신종의 제13황자 간왕(簡王)을 추천하나, 향태후가 거부한다; 장돈은 다시 제9자 신왕(申王)을 추천했지만, 향태후는 이렇게 말한다. 당당한 천자가 어찌 눈 하나만 가질 수 있겠는가? 원래 신왕은 어려서 병을 알아 눈 하나가 멀었다. 최종적으로 향태후가 결정을 내린다. 단왕 조길이 대통을 계승한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장돈은 마음이 조급해져서 큰 소리로 반박한다. 단왕은 경박하여 군림천하할 수 없습니다. 이때 평소에 장돈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증포(曾布)가 큰 소리로 장돈을 질책한다. 그는 향태후의 결정이 극히 타당하고, 아무런 부당한 점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모든 것은 태후의 결정에 따르고, 장돈의 헛소리는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증포의 말이 떨어지자, 대신 채변(蔡卞), 허장(許將)도 증포의 의견에 동조한다. 장돈은 혼자 힘으로 국면을 뒤집을 수 없자 장탄식을 하고 한켠으로 물러났다. 대사는 이렇게 결정된다. 단왕 조길이 대통을 계승하게 된 것이다. 조길은 단왕부에서 가슴을 졸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단왕을 부르는 소리를 듣자, 그는 알았다. 대사가 성공한 것이다. 그는 활짝 웃는 얼굴로 여러 사람들이 뒤따르는 와중에 궁으로 들어가 즉위한다. 그가 바로 송휘종이고 19세였다.

송휘종은 극히 총명했다. 그는 자신에게 치국경험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리고 서자(庶子)로 즉위한 것이니 불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재삼 향태후에게 수렴청정을 간청한다. 55세의 향태후는 송휘종의 계속되는 간청에 버티지 못하고 응락한다. 다만 반년후, 그녀는 권력을 다시 송휘종에게 넘겨준다. 다음해 정월, 향태후는 사망한다.

향태후가 죽자, 송휘종은 더 이상 의지할 사람이 없어지고, 반드시 스스로 중임을 떠안아야 했다. 이때의 송휘종은 웅심만장(雄心萬丈)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여정도치(勵精圖治)하여, 이미 기울어지는 제국에 태평성세를 가져오게 하고 싶었다. 송휘종이 북송왕조를 넘겨받았을 때는 이미 만신창이여서, 조금만 실수하면 멸정지재(滅頂之灾)를 불러올 수 있었다.

송휘종은 즉위후 대거 개혁하고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그가 한 첫번째 일은 과감하게 대명부지부 한충언(韓忠彦)을 이부상서로 삼고, 진정부지부 이청신(李淸臣)을 예부상서로 삼고, 우정언(右正言) 황리(黃履)를 자정전대학사(資政殿大學士)겸 시독(侍讀)으로 임명한다. 이 세 사람은 공정하고 직언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이 발탁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조야에서는 일치하여 그의 성덕을 칭송한다.

그러나, 급사중(給事中) 유증(劉拯)이 상소를 올려 반대한다. 그는 한충언은 부마도위 한가언(韓嘉彦)의 형으로, 한충언을 발탁한 것은 외척을 우대하는 혐의가 있다는 것이다. 송휘종은 그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고,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충언의 부친인 한기(韓琦)는 송인종, 송영종, 송신종 3조에 걸쳐 공헌이 탁월했고, 한충언도 덕행이 순후하니 승진시키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어찌 부마 한가언때문에 현명하고 능력있는 사람의 승진길을 막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한충은은 부임한 후 역시 기대에 부응했다. 그는 '광인은(廣仁恩), 개언로(開言路), 거의사(去疑似), 계용병(戒用兵)"의 4가지 주장을 펼쳤고, 송휘종은 모두 채택한다. 3개월후, 한충언은 송휘종에 의해 상서우복야(재상) 겸 중서시랑에 임명된다. 이와 동시에 송휘종은 많은 정직하고 직언하는 인사들을 임명하는데, 그중 적지 않은 대간(臺諫)의 직위도 포함된다.

중서사인(中書舍人) 증조(曾肇)는 이런 건의를 내놓는다. 송휘종이 간관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펼치도록 하용하고, 그중 좋은 것을 선택하여 따르고, 상을 내리라는 것이다. 설사 간관의 말이 취할 만하지 못하고, 광망하고 황당하더라도 죄를 묻지는 말고 그저 무시하면 된다는 것이다. 송휘종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조서를 내려 그의 건의를 문하성, 중서성, 상서성에서 연구하도록 시킨다. 며칠 후, 송휘종은 조서를 내려 사서신료(士庶臣僚)들에게 시정의 폐해를 직언하고 질책하며, 조정을 비판하도록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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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서가 하달되자 한충언, 증조등은 즉시 상소를 올렸고, 송휘종은 하나하나 채택한다. 조야간에 송휘종이 이러한 흉금을 보이자, 속속 상소를 올려 의견을 개진한다. 먼저 사천 균주추관은 상소를 올려 재상 장돈과 어사중승 안돈(安惇)은 간사한 신하라고 직접 이름을 거명하여 질책한다. 이런 간사한 신하들을 처벌하지 않으면 백성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 없다고 말한다.

당초, 송휘종이 번왕으로 있을 때, 장돈이 간사한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하마터면 장돈의 반대로 그가 대통을 잇지 못할 수도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천추관의 상소문 하나로 장돈을 처리하기는 힘들었다. 마침 즉시 누군가 장돈이 송철종의 재천지령에 불경했다고 고발한다. 그러자 송휘종은 즉시 장돈을 조정에서 쫓아내고, 계속 좌천시켜 결국 장돈은 목주(睦州, 지금의 절강성 건덕)에서 사망한다.

얼마 후, 장돈과 결탁했던 안돈도 송휘종에 의해 쫓겨나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어서 채경의 동생 채변도 일찌기 장돈과 함께 어울려서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에 의해 탄핵받는다. 송휘종은 그를 계속 좌천시켜 결국 지주(池州, 지금의 안휘성 지주 귀지구)에 안치시킨다. 채경도 사람들이 상소를 올려 죄를 까발리자, 결국 송휘종은 그의 관직을 박탈하고 항주에 거주하게 한다.

일시에 대부분의 소인배 간신들은 조정에서 축출된다. 간신들이 조정에서 축출되자 현량지신들이 능력을 발휘할 무대가 완성된다. 송휘종은 전후로 조서를 내려 북송명신 범중엄(范仲淹)의 아들 범순인(范純仁)과 조야에 명성을 떨치고 있던 소식(蘇軾)을 잘 대해준다. 이전에 억울하게 누명을 쓴 대신들도 송휘종이 적절하게 조치한다. 송휘종은 여러 해동안 누적되어 있던 골치아픈 사건들을 가볍게 처리해버린다.

송휘종이 즉위한 이후의 조치들은 젊고 능력있는 황제의 능력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특히 성심성의껏 의견을 받아주는 측면은 심지어 이전의 당태종에 비하여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조야의 상하에서는 그에 대한 기대가 한껏 올라간다. 특히 송신종, 송철종을 오랫동안 괴롭혔던 변법, 폐법문제에서 송휘종은 극히 시원스럽게 "무편무당(無偏無黨), 정직시여(正直是與)"의 고명한 견해를 내놓았으니, 정말 귀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자신은 정책을 공명정대하게 하고, 붕당을 없애겠다는 결심을 표시하기 위해, 송휘종은 심지어 연호를 "원부(元符)"에서 "건중정국(建中靖國)"으로 바꾸기까지 한다. 이를 통해 그는 불편부당하게 안정적이고 조화로운 국가를 건립하겠다는 지향을 밝힌다. 아쉽게도, 송휘종의 그런 예의진취(銳意進取)하는 상태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의 날카로운 개혁의지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고, 그의 만장웅심도 내심의 사념을 넘어서지 못했다.

증포는 먼저 나쁜 짓을 하고, 반대파를 제거하고, 전횡발호하며, 조정을 독단했다. 친동생인 증조가 말려도 듣지 않았다. 나중에 증포는 외부로 좌천되어나갔던 채경을 조정으로 불러들여 인랑입실(引狼入室)한다. 얼마 후, 증포는 채경의 함정에 걸려들어 계속 좌천되다가 1107년 윤주(潤州)에서 사망한다. 채경은 증포보다 훨씬 음험하고 후안무치한 소인이다. 그러나 그는 송휘종으로부터 높이 평가받는 서예가였다.

당초 단왕으로 있던 조길은 2만의 돈을 들여 채경이 시를 쓴 손부채를 구매했었고, 채경에 대하여 크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채경이 조정으로 돌아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제1재상이 된다. 이제 젊은 송휘종은 점차 채경의 매혹지술에 넘어가, 조정은 거의 채경 한 사람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채경을 거스르면 망하고, 채경을 따르면 흥한다. 조정은 금방 채경에 의해 흑백이 전도되고, 오연장기(烏煙瘴氣)가 넘쳤다.

특히, 송휘종은 채경 일당의 조종을 받아, 원우당(元祐黨)의 인물들을 대거 박해한다. 전국에서 큰 파란을 불러일으켰고, 사람과 하늘이 공분하게 만든다. 이제 송휘종은 당초 분발하고 노력하던 소년천자의 이미지가 완전히 사라진다. 채경의 유도하에, 송휘종은 독서회화, 고기산선에 빠져지낸다. 그는 더 이상 스스로 자제하지 않고, 자신의 취미생활에 완전히 빠져버린다.

송휘종은 사악한 욕심이 살아나면서, 갈수록 사치하고 무절제하게 된다. 사람을 보내 아름다운 각종 기물을 만들고, 토목공사를 대거 벌인다. 궁전을 화려하게 짓고, 모든 부담을 백성들에게 떠넘긴다. 백성의 사활은 송휘종이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이제 송휘종의 사악한 욕망은 그를 노력하고 업적있는 군주에서 무도한 혼군으로 크게 바꾸어버린다. 이는 송휘종 개인의 비극이면서, 더더욱 북송왕조의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