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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송휘종)

송휘종(宋徽宗): 풍류오국(風流誤國)

by 중은우시 2014. 10. 2.

글: 복녕객(福寧客)

 

1126년, 북송과 금이 연합하여 요나라를 멸망시키자마자, 금나라는 맹약을 깨고, 침략자의 사나운 얼굴을 드러낸다. 곧바로 송나라의 동경 변량으로 쳐들어간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수십년동안 풍화설월(風花雪月), 온유부귀한 생활을 즐겼던 송휘종은 놀라서 늙은 얼굴이 창백해지고 즉시 모든 짐을 벗어던지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황위를 태자 조환(趙桓)에게 물려준다. 태상황이 된 송휘종은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아예 남방으로 휴가를 떠난다. 타조정책을 쓴 것이다. 나중에 형세가 호전되어 다시 경성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후에 다시 전황이 급전직하하여 금나라병사들이 일거에 변경을 점령해버린다. 도망칠래야 도망칠 수 없게 된 송휘종과 그의 자손들, 그의 삼궁육원, 그의 황친국척, 그의 문무백관은 모조리 빙천설지(氷天雪地), 천한지동(天寒地凍)의 오국성(五國城)으로 끌려간다. 거기서 망국노의 갖은 굴욕을 맛보며, 송휘종은 결국 이국타향에서 죽는다.

 

송휘종은 나라를 다스리는데는 무능했지만, 예술적인 재능은 아주 뛰어났다. 서법은 "수금체(瘦金體)"로 불리며 후세에 전해지는 그림은 <부용금계(芙蓉錦鷄)>, <지당만추(池塘晩秋)>등이 있고, 시사에도 능했다.

 

운명은 예술적 재주가 뛰어났던 소년시대에 이미 암시되어 있었다.

 

송휘종 조길(趙佶)은 1082년에 태어난다. 즉 북송 원풍5년 음력십월십일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가 태어나기 전에, 그의 부친 송신종(宋神宗)은 일찌기 비서성에 가서 그곳에 수장된 남당후주 이욱(李煜)의 화상을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망국지군의 유아(儒雅)한 풍도에 극히 감명받았다고 한다. 그후 조길이 탄생한다. 그리고, 사서에서는 아주 진지하게 적고 있다. 그가 출생할 때, 그의 부친 송신종은 꿈에 이욱이 와서 그를 알현하는 것을 보얐다고. 이런 이욱탁생(李煜托生)의 전설은 믿을만하지는 않지만, 조길의 몸에는 확실히 이욱의 그림자가 있다. 조길은 어려서부터 필묵,단청을 좋아하고, 기화이석(奇花異石), 비금주수(飛禽走獸)에 깊은 흥미를 나타낸다. 특히 서예와 회화에서는 더욱 비범한 천부적 재능을 드러냈다.

 

그는 확실히 중국역대제왕중에서, 예술적인 자질이 가장 뛰어난 황제이다. 만일 황제의 보좌에 앉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도 중국역사상 상당히 위대한 예술가가 되었을 것이다. 최소한 중국서예사와 미술사에서 그는 모두 다툼의 여지가 없는 숭고한 지위를 차지했을 것이다. 또 한 명의 위대한 문장가, 예술가가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송휘종이 황제가 되기 전에, 확실히 다재다능하며 계속 발전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좋은 황자(皇子)였다. 궁정의 내외, 조정의 상하에서 모두 좋은 평판을 들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행동거지가 비범했다고 한다. 당시의 황가귀족자제는 대부분 성색견마(聲色犬馬)를 쫓는데, 오로지 송휘종만은 매일 필연(筆硏), 단청, 도사(圖史), 사어(射御)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이는 확실히 정파의 건강한 기호이다. 그러므로 16,7세가 되었을 때 그는 이미 "사람들 사이에 명성을 크게 떨쳤다"

 

문인은 확실히 풍류적인 기질이 있다. 하물며 황제임에야. 조길은 일생동안 풍류적이었다. 황제가 된 후에 후궁비빈이 구름처럼 많았고 그 수량은 놀랄 정도였다. 부인, 구빈, 이십칠세부, 팔십일어처를 제외하고, "삼천분대(三千粉黛), 팔백연교(八百煙嬌)"가 있었다.

 

중성공월(衆星拱月, 여러 별들이 달을 둘러싸고 받든다)같은 지위에 있던 그는 정무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계속 타락한 생활을 보낸다. 정궁황후인 왕황후는 용모가 평범하고 성격이 검약해서 송휘종에게 애교를 부리지도 않아 송휘종이 좋아하지 않았다. 이대, 송휘종의 총애를 받은 것은 정귀비, 왕귀비 두 귀비였다. 두 사람은 원래 태후궁의 압반(押班, 내시관명)이고, 미목이 청수하고, 말을 잘했다. 기록에 따르면, 정씨는 "궁에 들어온 후 책보기를 좋아하고, 문서를 스스로 작성할 수 있어서 황제가 그의 재주를 좋아했다"고 한다. 확실히, 정씨는 자색이 출중할 뿐아니라, 송휘종을 도와서 상소문을 처리할 수도 있었다. 조길은 여러번 정씨에게 정사염곡(情詞艶曲)을 써준다. 나중에는 궁궐밖에까지 흘러나가서 널리 전해지게 된다. 왕황후가 사망한 후, 송휘종은 정화원년(1111년) 정씨를 황후로 책봉한다.

 

정,왕 두 귀비를 제외하고, 총애를 받은 사람으로는 유귀비(劉貴妃)가 있다. 유귀비는 하천한 출신이지만 용모는 화용월태이다. 입궁하자마자 조길의 총애를 받는다. 재인에서 연속 7급을 올라 귀비가 된다.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유귀비는 얼마후에 사망한다. 송휘종은 비통해 마지 않았다. 특별히 4글자의 시호(諡號)를 내려 "명달의문(明達懿文)"이라 한다. 그리고 그녀의 평생의 사적을 시문으로 엮어서 악부로 하여금 곡을 붙여 연주하고 부르게 한다.

 

송휘종이 귀비의 죽음으로 상심에 빠져 있을 때, 내시 양전(楊戩)은 송휘종의 면전에서 또 다른 유씨가 경성경국의 미모를 지녔으며, 왕소군에 못지 않다고 말한다. 송휘종은 그녀를 궁중으로 부른다. 유씨는 원래 술집의 딸이고 출신이 비천했다. 다만 용모는 뛰어났다. 송휘종이 한번 보고는 정신이 달아날 정도였고, 순식간에 유귀비를 잃은 고통을 모조리 잊어버렸다. 송휘종은 유씨를 크게 총애하여 그녀와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녀와 떨어지면 음식은 맛이 없고, 밤에는 잠을 못잘 정도였다. 유씨는 천성이 총명하고, 송휘종의 뜻을 잘 맞추어 주었으며, 꾸미는데도 뛰어났다. 매번 옷을 만들만 모양이 새롭고, 입고 나면 완전히 선녀가 인간세상에 내려온 것같았다. 송휘종이 좋아했을 뿐아니라, 경성내외에서도 앞다투어 따라했다. 송휘종이 보기에, 유씨가 고개를 돌려 한번 웃으면 육궁의 분대는 모조리 그 색을 잃는 것같았다. 도사 임영소(林靈素)는 유씨가 이렇게 총애를 받는 것을 보자, 아부를 하기 위하여, 유씨를 "구화옥진안비(九華玉眞安妃)"라 부른다. 그리고 그녀의 화상을 신소제군(神霄帝君)의 왼쪽에 모신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유씨의 풍운(風韻)도 예전같지 않아진다.원래 사람됨이 가볍고 떠도는 송휘종은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아나선다. 비록 후궁분대3천이 있고, 미인이 구름처럼 많지만, 송휘종은 그녀들이 일부러 만드는 교태에는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바로 이 때, 명기(名妓) 이사사(李師師)가 나타난다. 이사사는 원래 변경성내에 염색집을 운영하는 왕인(王寅)의 딸이다. 모친이 일찍 죽어서, 부친이 죽을 끓여 젖대신 먹여서 키웠다.

 

이사사가 4살 되던 때, 부친이 죄를 지어 감옥에 갇히고 옥중에서 사망한다. 이때부터 이웃에서 그녀를 기른다. 점점 자라면서 미목여화(眉目如畵), 통체설염(通體雪艶)의 미인으로 자란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려서 기원을 운영하던 이온(李媼)이 그녀를 데려가 키운다. 스승을 모셔 글을 가르치고, 가무도 훈련시킨다. 13살이 되던해에 청관인(靑館人)의 자태로 패를 내걸고 손님을 받는다. 원래 가기(歌妓)인 그녀가 가장 잘하는 것은 소창(小唱)이다. 송휘종시기가 되자, 그녀의 소창은 동경 변량에서 이미 독보적으로 되고, 변경에 그녀는 유명해진다. 조정명관, 문인아사, 왕손공자들, 삼산오악의 무리들까지 모두 그녀의 집문을 드나드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점점 그녀의 명성은 동경의 길거리에서 퍼져나갔을 뿐아니라, 궁궐의 높은 담장을 넘어 송휘종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정강지난때, 송휘종,송흠종 두 황제는 전후로 포로가 된다. 송나라황실이 남으로 내려간 후, 이사사는 호광(湖廣)일대를 전전하며 스스로 살아가기 어렵게 되어 할 수 없이 다시 원래의 생업으로 돌아간다. 많은 고생을 겪은 이사사는 이미 용안도 초췌하고, 마음도 잡지 못하여 그저 노래로 연명했다. 남으로 내려온 사대부들은 그녀의 명성을 듣고 자주 그녀를 술자리에 초대했다. 그녀가 가장 많이 불렀던 노래는 다음과 같았다: 연곡번화사가상(輦轂繁華事可傷), 사사수로우호상(師師垂老遇湖湘), 누삼단판무안색(縷衫檀板無顔色), 일곡당년동제왕(一曲當年動帝王).

 

조길이 즉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채경(蔡京)등 "육적(六賊)"을 중용한다. 개략 그의 예술기질과 관련이 있는 것같다. 송휘종은 기석(奇石)을 아주 좋아하였는데, 이런 기괴한 취미는 재상 채경이 그의 뜻을 받들어 아부하면서 아주 기괴하게 바뀐다. 이것이 바로 중국역사상 그 유명한 북송제국이 패망하는데 큰 역할을 한 "화석강(花石綱)"이다.

 

숭년4년, 즉 기원1105년은 채경이 재상이 된 3년째 되는 해이다.  조정은 소주에 응봉국을 설치하고, 채경의 심복 주면(朱勔)이 주재하여 강소절강일대에서 황제를 위하여 진기한 물품과 기화이석을 수집한다.

 

금나라병사들이 변경을 공격해올 때, 북송의 휘종은 화가나면서도 마음이 조급해져서 몸이 하루하루 못해진다. 그래서 황위를 태자에게 넘겨준다. 황위를 이어받은 태자는 바로 송흠종이다. 송흠종은 송휘종과 마찬가지로, 역시 구차하더라도 편안하게 사는 것을 택하고 스스로 강해지고자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결국 대송강산은 끝장이 난다. 그 자신도 포로가 된다. 포로가 된 사람은 송휘종과 그의 형, 동생 및 그의 32명아들, 22명 딸이 있다. 외지에서 근왕하고 있던 아홉째 아들 조구(趙構)와 1살짜리 막내딸을 제외하고 모조리 포로로 잡힌다. 궁정후비, 종실친척, 대신등 약 3000명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 북방으로 끌려간다.

 

당시는 음력4월로, 북방은 아직도 추운 때였다. 송휘종, 송흠종 두 황제와 정씨, 주씨 두 황후는 의복이 모두 얇았다. 저녁에는 추워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저 장작불, 풀을 때어서 따스함을 느껴야 했다. 흠종의 주황후는 당시 26살이고, 용모가 뛰어났다. 그리하여 자주 금나라병사들에게 희롱을 당했다.

 

송휘종과 포로로 잡힌 인원이 금나라의 수도 회녕부에 도착했을 때, 금나라에서는 헌부의식(獻俘儀式)을 거행한다. 두 황제와 후비, 종실, 여러 왕, 부마, 공주에게 모두 금나라 백성들이 입는 복장으로 갈아입게 하고, 머리에 말두(帕頭)를 두르게 하며, 몸에는 양가죽을 입고, 상체를 들어내게 했다. 그리고는 금나라 아구타의 묘로 가서 '견양례(牽羊禮)"를 거행한다. 주황후는 이런 치욕을 참지 못하고, 그날 밤에 자진한다. 금나라사람들은 두 황제에게 모욕적인 봉호를 내리는데, 송휘종에게는 "혼덕공(昏德公)"을 송흠종에게는 "중혼후(重昏侯)"라 하였다.

 

두 황제가 북방에 포로로 잡혀간 후, 먼저 오국성에 갇힌다. 금나라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여 하루는 송휘종이 의복을 잘라서 밧줄을 만들어 대들보에 목을 매어 자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송흠봉이 발견하고 끌어안아 부자 둘은 서로 머리를 붙잡고 통곡했다. 나중에 금나라사람은 두 황제를 균주(均州)로 보낸다. 이때 송휘종은 이미 병이 깊었다. 얼마후에 토항(土炕) 위에서 죽는다. 송흠종이 발견했을 때는 시체가 이미 뻣뻣해 있었다. 송휘종의 시체는 석항(石炕)위에 옮겨져서 불에 태워진다. 반쯤 탔을 때, 물을 부어서 불을 끈다. 그리고 시신을 다시 갱(坑)에 던진다. 전해지는 바로는, 이렇게 하면 갱안에서 물은 등유(燈油)가 된다는 것이다. 송흠종은 슬픔이 극에 달해, 갱으로 뛰어들고자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붙잡았다. 산 사람이 갱으로 들어가면 갱안의 물을 등유로 쓸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송흠종이 갱으로 뛰어들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송휘종이 죽었을 때 나이가 54세이다. 송휘종이 죽은 후, 송흠종은 계속하여 괴롬힘을 당하다가 역시 북방에서 비참하게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