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만군(程萬軍)
중국에 이런 말이 있다: 삼세간소(三歲看小), 칠세간로(七歲看老). 세살을 보면 소년시절을 알 수있고, 일곱 살을 보면 노년시절을 알 수 있다. 그 말은 한 사람의 동년에서 그가 어른이 된 후에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세계심리학의 각도에서 보자면, 17세가 비로소 한 사람의 인격형성기이다.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의 삼관(三觀)이 대체적으로 청소년기에 형성된다고 본다.
어느 말이 맞을까? 필자의 생각에는 둘 다 이치에 맞는 점이 있다고 본다. 단지 그들이 가리키는 것이 인격형성의 서로 다른 단계일 뿐이다. 하나는 추형(雛形)이라면, 하나는 정형(定型)이다. 그래서 한 사람이 괜찮을지 아닐지를 보려면 어린 시절을 봐야 한다. 더더욱 곧 어리지 않게 될 시절을 봐야 한다. 삼관이 형성되는 것은 반드시 그의 17세의 상태를 봐야 한다. 청소년기의 그가누구와 다니고, 무슨 책을 보고, 무슨 일을 하는지...
그래서 이 사람은 어떤 본질을 지니고 있는지, 싹이 있는지 없는지, 방관자는 비교적 정확하게 예측해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을 파악하게 되면, 설사 국가최고지도자를 선정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위인의 잠재적 자질을 가진 인물을 뽑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고대중국인은 인격의 판단에서, 그들이 인강성을 파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왕왕 큰 하자가 나타나고 실수를 연발했고, 심지어 오히려 잘못되고 거꾸로 가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상류의 황실에서는 안력이 극히 문제있었다. 그리고 여러번 사람을 잘못 뽑아서, 벼룩을 용이라고 여기는 바람에 심각한 대가를 치르곤 했다.
화하문화의 최고봉을 창조한 북송에는 바로 이런 각골명심할 교훈이 있었다.
1100년, 140년간 계속되어온 북송은 다시 최고지도자교체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해에 황제인 송철종(宋哲宗) 조후(趙煦)가 병사하니, 향년 24세였다. 젊어서 죽은 그는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 적장자계승원칙은 적용될 수가 없었다. 관례에 따라, 예비방안을 집행해야 했다. "형종제급(兄終弟及)". 즉 다음번 황제후계자는 송철종 조후의 동생들 중에서 뽑아야 했다.
조후의 동생은 적지 않았다. 그중 3명은 요절한다. 5명은 아직 살아있었다. 순서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셋째동생 신왕(申王) 조필(趙佖), 다섯째동생 단왕(端王) 조길, 여섯째동생 연왕(燕王) 조오(趙俣), 일곱째동생 간왕(簡王) 조사(趙似), 여덟째동생 목왕(睦王) 조시(趙偲).
송나라황궁의 후화원에는 송철종의 적모인 향태후(向太后)와 승상 장돈(章惇)을 우두머리로 하는 팀이 조직되어 국가지도자를 선정하게 된다.
순서에 따라 당연이 처음 떠오른 인물은 셋째동생 조필이다.
그러나, 이 동생은 자신이 황제가 될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안질(眼疾)"이 심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거의 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맹인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중국은 자고 이래로 비록 정신지체자가 황제에 오른 선례는 있지만, 맹인이 황제에 오른 선례는 없다. 그래서 이 첫번째 순위의 인물은 포기된다.
다음번 후보자는 다섯째동생 조길이다.
조길은 1082년에 태어났다. 즉 북송 원풍5년 하력 십월십일에 태어난다. 북송의 제6대황제인 송신종(宋神宗)의 11번째 아들이다. 제7대황제 송철종에게는 다섯째동생이 된다.
향태후는 극력 주장한다: 내가 보기에 이 아이가 괜찮다. 이유는 잘 생겼고, 복상(福相) 즉 복있는 관상이다. 그리고 인의(仁義)가 있고, 효순(孝順)한다.
승상 장돈은 즉시 반대의견을 제기한다: 이 아이는 안됩니다. 행위가 경박하고, 온건하고 묵직하지 못합니다. 성숙한 정치인이 되는 것이 가능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길에 대한 판단에서 서로 맞부딛친다.
그들중 누가 정확하게 보았을까? 그럼 우선 사실을 살펴보기로 하자. 조길의 인격형성완료기인 17세때의 비내리는 때를 살펴보자.
어떤 사람은 말한다. 스승은 학생의 인격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17세의 조길은 누구에게 배우고 있었는가?
사료를 보면, 조길의 인생 스승은 북송의 저명한 서화가인 왕선(王詵)이다.
왕선은 북송의 제5대황제 송영종(宋英宗)의 부마이다. 왕선의 부인은 촉국공주이고, 송영종의 둘째딸이다. 나중에 촉국공주의 오빠인 조욱(趙頊, 즉 송신종)이 즉위하니, 왕선은 다시 황제의 매형이 된다. 신분은 혁혁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황실에서 인정을 받은 이유는 그도 사족(士族)이라는 것, 즉 그의 선조가 북송의 개국공신인 왕전침(王全郴)이라는 것 이외에 그 자신의 뛰어난 예술적 재능때문이다. 사료의 기록을 보면, 왕선은 글읽기를 좋아하고, 한번 보면 다 외웠다. 금기서화에 모두 능했다. 소년 왕선은 일찌기 자신의 글을 당시의 장원 정해(鄭獬)에게 보여준 적이 있다. 정해는 그의 글을 본 후, 손을 비비며 말한다: "네가 쓴 글은 문장이 멋지니, 나중에 반드시 크게 성공하겠구나". 북송의 문학가인 황정견(黃庭堅)은 소동파와 나란히 이름이 불릴 정도로 안목이 높은데, 왕선의 시서화에 대하여는 탄복해 마지 않았다. 후생가외라고 하면서.
재자(才子)이며 그림을 잘 그린다. 이것은 왕선에게 있는 특색중 하나일 뿐이다. 왕선에게는 3가지 두드러진 특색이 있는데, 나머지 2개의 특징은 좀 별로이다. 그 두 가지 특색은 무엇인까? 바로 사치를 좋아하고(豪侈), 여색을 밝힌다(好色)는 것이다.
왕선의 사치심과 방랑불기(放浪不羈)는 상당히 유명했다. 사서에는 그에 대하여 "불긍세행(不矜細行)"이라고 적었다. 집안에 처첩이 많았다. 첩이 8명이며, 집안에 둔 무녀(舞女)는 또한 부지기수였다. 이것만으로도 그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수시로 처첩을 놔두고 연화류항(煙花柳巷)을 드나들면서, 기녀들을 탐했다(尋花問柳). 듣기 좋은 말로 하자면, 왕선은 풍류 넘치는 예술가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예술적 재능을 지닌 문화건달이다.
호색하는 품성은 예술가에게는 아마도 치명적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정치가라면, 그것은 분명 나쁜 일이다. 스승 왕선은 제자 조길에게 이 이치를 보여준다.
왕선은 청소년기의 조길에게 영향이 아주 컸다. 조길은 왕선을 자신의 인생스승으로 삼는다. 그를 배우고, 그를 따라한다. 자주 그에게 가르침을 구했다. 왕선의 영향아래 성장한 조길은 말 그대로 왕선의 복사판이 된다.
이런 말이 있다. 유유상종이라고. 물이류취(物以類聚), 인이군분(人以群分). 사료를 보면, 왕서은 이 외조카를 아주 좋아했다. 그가 물어보면 반드시 답을 해주었고, 가르침을 구하면 반드시 알려주었다. 금기서화를 가르치는 외에 '성색견마(聲色犬馬)'의 기능도 가르쳐서, 조길이 '전면적으로 발전'하고, '사회학과'의 각 부분을 같이 배우도록 했다.
학생에게 자신의 진전을 잇게 하기 위하여, 이 스승 왕선은 스스로 행동으로 보여주면서, 적극적으로 두번째 과목을 가르친다: 조길을 데리고 경성에서 가장 유명한 기원인 힐방루(擷芳樓)로 간다. 자신의 침대위에서의 스킬을 모조리 전해준다. 왕선은 조길보다 40세가 많았다. 이렇게 솔직하게 가르쳐주니, 조길은 감동하여, 어떻게 보답해야할지를 모른다. 열의있는 대부의 가르침이 있다보니, 조길은 매우 빠르게 익하고, 자주 홍등가에 출몰한다. 일찌기 소년시대에 조길은 여자를 데리고 노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눈도 높았다. 그는 일찌기 좋아하는 기녀를 변장시켜 왕부로 데려와 장기간 머물게 하기도 했다.
온몸에 문화예술적인 기질이 충만했던 어린 청년을 만일 누군가가 제대로 가르치고, 제대로 감독하여 구속하면서 교육하고 가르쳤다면, 아마도 비범한 올바른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주 불행하게도, 조길의 곁에는 어려서부터 그를 관리감독할 사람은 없었다. 조길은 송신종의 비빈인 진미인(陳美人)의 소생이다. 부친은 아이를 많이 돌볼 수가 없었다. 모친은 병약해서 32살에 사망한다. 조길은 어려서 모친을 잃고, 생활이 여유있었던 그는 가르침을 제대로 받질 못한다. 그래서 천마행공(天馬行空)이 된다. 이렇게 하여 그는 풍류스승과 함께 곁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이 나이들고 어린 한 쌍의 풍류예술가는 규방에서 술에 취해서 사는데 뜻을 두었지, 천하를 다스리고 구하는데는 뜻을 두지 않았다.
스승이외에 그의 친구들을 보기로 하자.
조길이 알았던 친구들에 대하여 남송 왕명청의 <휘진록>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원우8년 즉 1093년, 한림시독학사 소식(蘇軾)이 중산부로 발령받아 나간다. 수행인원이 너무 많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그는 '가족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소식의 신변에는 서동(書童)이 하나 있었다. 그도 '정리명단'에 들어 있었다. 처음에 소식은 이 서동을 동료이자 동지추밀원사인 증포(曾布)에게 보내려 한다. 그러나 증포에게는 이미 서동이 있었고, 그의 집안에서도 사람이 너무 많아서 고민하고 있어 그 서동의 자리를 마련하기 힘들어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래서 소식은 할 수 없이 서동을 부마인 왕선에게 보낸다.
이 왕선은 조길의 스승이고 이때 조길의 나이는 겨우 12살이었다.
이어서 이 서동은 성공의 가도를 내달린다. 한번은 부마 왕선이 이 서동을 아직은 단왕으로 있던 조길에게 보내서 서신을 전달하게 한다. 그 결과 조길이 집안에서 어린 친구들과 신나게 축국(고대축구)을 즐기고 있었다. 모두 알고 있듯이 조길은 축국광이다. 이 놀이를 너무좋아했다. 한번 차기 시작하면 모든 것을 잊고 집중한다. 그래서 이 서동은 방해하지 않고, 곁에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돌연 공이 바깥으로 흘러나와 그의 앞으로 온다.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멋진 원앙각의 솜씨를 보이며 단왕에게 차서 보낸다. 단왕 조길은 이를 보고 아주 기뻐한다. 즉시 스승 왕선에게 연락한다: "이 서동을 나에게 주세요."
여기까지 들었으면, <수호전>을 본 사람이라면 모두 이 서동이 누구인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고구(高俅)이다. 이 이야기는 사실이다. 최소한 앞부분은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휘진록>의 작자인 왕명청의 외조부는 증우(曾紆)인데, 증우의 부친이 바로 이야기에 나오는 증포이다.
그러나, 정사에서 고구에 관한 기록은 아주 적다. <송사>에는 그의 전(傳)을 아예 두지 않았다. 그의 역사평가도 애매하다. <휘진록>에는 그저 이렇게 쓰고 있다. "달이 지나 단왕이 황위에 오른다. 황상은 그를 더욱 총애하고 그를 잘 대해준다." "여러 해동안 관직을 올려주어 재상에 이른다. 세 아문을 모두 돌아가며 이십년간 맡으면서 고위관직에 머무르는 것은 고구때부터 시작한다."
<휘진록>의 기재에 따르면, 서동 고구의 운은 확실히 좋았다. 그는 조길의 놀이친구가 되어 놀기 시작한지 몇 달이 되지 않다. 조길은 황제에 오른다. 그래서 고구는 황제의 중용을 받는다. 서동이자 구동(球童)에서 일약 권신, 총신이 된다. <휘진록>에서은 이어서 이렇게 묘사한다. 당시 조길의 곁에는 많은 놀이친구가 있었는데, 그들은 고구가 너무 총애받는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때 조길의 첫 대답은 이러했다: "그는 축국을 잘찬다. 너희는 질투하지 말라. 그와 마찬가지로 먼저 가서 차는 것이나 연습 더 해라."
이 말을 정말 대단하다. 만일 단왕으로서 조길이 이런 말을 했다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단왕은 치국안방에 중요한 인물이 아니고 국가를 위하여 인재를 구할 의무도 없다. 그러나 만일 군주라면, 놀이친구를 국가의 동량으로 삼다니, 정말 치료할 약이 없다.
당연히, 고구도 축국기술 하나만 가지고 조구의 총애를 받은 건 아니다. 고구가 나타나기 전에, 조길의 축국친구들은 수가 많아서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나중에 나타난 고구가 혼자서 두드러진다. 이를 보면 고구는 절대로 축국기술이 뛰어난 것만은 아니다. 축국기술 외에 그에게는 두 가지 장점이 있었다.
하나는 사람됨이 기민했다. 둘째는 화려하게 꾸밀 줄 알았다.
주인인 조길의 앞에서 그는 어떻게 기민했는가. 야사의 기록에 따르면, 조길과 고구라는 주종관계는 아주 좋았다. 생활에서도 서로간에 거리가 없었다. 고구는 일처리가 기민하여 주인의 속마음을 잘 헤아렸다. 그래서 조길은 그를 믿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하지 않는 사적인 이야기도 그에게 하고, 남부끄러운 일도 그에게 얘기를 하고, 그와 같이 한다. 나중에 황제가 된 후의 조길은 경성의 명기 이사사(李師師)에게 침을 흘리는데, 그 일을 고구에게 맡긴다. 고구는 용감하게 그 임무를 맡아서, 자신의 옻명함과 기민함을 충분히 발휘한다. 그는 기생질은 군주가 남부끄러워하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를 모시고 '지하전'을 벌인다. 지하도를 파서, 직접 기원으로 가며, 그 자신이 안내자가 된다. 이렇게 하여 기녀와 황제의 사랑을 이루어준다.
이것은 그의 기민함을 보여주는 일면인데, 그에게는 화려하게 일을 만드는 재주도 있었다. 조길에게 이런 재주를 아낌없이 쓴다. 우리는 알고 있다. 나중에 고구는 태위(太尉)라는 관직에 올라. 금군을 책임진다. 원래의 축국스타는 아마도 선수권전의 창시자라 할 수 있을 것같다. 고구는 국가의 군대를 관리하는 기간동안, 송나라군대의 훈련에는 각양각색의 재미있는 모습이나타난다. 그중 가장 사람의 눈길을 끄는 것은 '쟁표새(爭標賽)'인데, 그 광경이 요란하고, 화려했다.
송나라때의 필기 <동경몽화록>은 고구가 군대내에서 '선수권전'을 행한 것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참전한 군인들의 대오는 몇 개의 열로 나누었다. '쟁표'에 앞서서 먼저 피리를 불고 북을 치면서 분위기를 돋우었다. 쟁표가 시작되기를 기다려, 오색으로 장식한 배가 횡열로 서서 위에는 군인들이 여러가지를 하고 있는데 대기, 사표, 도도, 만패, 신귀, 잡극같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 두 배가 있는데 모두 음악을 연주했다. 마지막에 쟁표경기를 벌여서 등수를 결정한다. 거기에는 '선라', '해안', '교두'등 각양각색이 있어서 아주 요란했다.
일 벌이기를 좋아하는 군주는 큰 행사를 좋아한다. 조길은 '화려한 행사'를 잘 꾸미는 고구를 아주 좋아했다. 고구는 조길의 인재풀에 들어갔을 뿐아니라, 인재풀 내에서 아주 뛰어난 봉모인각의 고급인재였다.
다만, 나중의 사실이 증명한다. 고구의 이런 재주는 전형적인 '화권수퇴(花拳繡腿)'에 속한다. 보기는 좋으나 쓸모는 없다. 요나라군대나 금나라군대와 상대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본국이 농민반란군과 싸우는데도 쓸모가 없다. 정사에는 고구의 '금표군'이 승리한 전투에 대하여는 단 하나의 기록도 없다. <수호전>에는 생동감있게 '금표군'이 패전한 기록을 적고 있다. 산동에서 송강의 군대와 싸울 때 고구의 군대는 연전연패했다. 한번은 고구 본인이 포로로 잡히기도 한다. 하마터면 양산박의 수군에 의해 강물에 빠져 물고기밥이 될 뻔했다.
그러나, 그때 조길은 고구를 잘 보고 있었다. 조길이 보기에, 여러가지 재주가 있는 고구는 다시 얻기 힘든 국가의 동량이었다. 우리는 알고 있다. 정치가의 가장 중요한 소양은 사람을 잘 알아보고 쓰는 눈이 있는 것이다. 조길의 안력으로는 놀이친구를 찾을 수는 있는데, 이런 놀이친구들 가운데에서 나라를 위하여 일할 인재를 찾아내다기 정말 기괴한 일이다.
송사의 기록에 따르면, 황제가 된 후의 조길은 곁에 있는 심복들이 모두 이런 자들이었다. 놀이친구가 아니면 배우였다. 여기서 그의 곁에 있던 총신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고구에서 채경까지 그리고 다시 동관까지. 문화건달 아니면 시정잡배이다. 그것도 아니면 심신에 장애가 있는 쓰레기였다. 그들은 국가의 고굉대신이라기 보다는 황제의 심부름꾼이었다. 조길은 25년간 재임했는데, 12명의 재상을 임명한다. 증포부터 왕보(王黼)까지 한 명도 현상(賢相)이라고 할 사람은 없고 모조리 건달이었다.
재상 오민(吳敏). 이 자는 송휘종의 신임을 듬뿍 받았다. 그러나 그는 관료사회의 뺀질이었다. 송사에는 그를 "우국이 마음이 없다"고 적었다. 조정은 신경쓰지 않고, 금기(金器) 수백건을 만들고, 비첩 2,3명을 두고 오락을 즐겼다. 그리고 이런 말도 한다: '재상의 일이라는 것은 이런 것일 뿐이다.' 오민은 태평성대에 재상은 국가를 위하여 신경을 쓸 필요가 없고, 그저 노래하고 춤추고 태평성대를 즐기며 먹고 마시면 된다는 것이다.
재상 왕보. 송휘종이 총애하던 대신중 하나이다. 그의 장점은 약간 욕설이 섞인 '혼화(混話)'을 잘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황상을 즐겁게 해주었다. 요즘 말로 하면, 우스개소리를 잘 했다. 송휘종의 앞에서 자주 야한 농담을 잘해서 송휘종을 즐겁게 해주었다.
재상 채경(蔡京). 송휘종이 가장 신임한 노신이다. 그는 저명한 간상(奸相)이다. 그리고 비교적 뛰어난 서예가이다. 다만 이 나이 많은 노신은 재상이 된 후에 매일 제대로 된 일은 하지 않고, 황제와 술을 마시거나 황제에게 미인을 뽑아서 보내주었다. 주색으로 황제를 묶어놓았던 것이다.
재상 이방언(李邦彦). 송휘종이 좋아한 재자(才子). 실제로 그는 방탕한 부잣집도령이다. 그는 스스로 '이랑자(李浪子)'라고 불렀다. 재상이 된 후에는 자칭 "천하의 꽃은 모조리 감상하고, 천하의 공은 모조리 차고, 천하의 관직은 모조리 다 해보았다"고 하였다. 그의 뜻은 꽃을 감상하고 공을 차는 것이다. 천하의 미녀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다.
조길의 이런 '친구'들은 한편으로 부용풍아(附庸風雅)하거나 다른 한편으로 비비무치(卑鄙無恥)하다. 신앙도 없고 도덕도 없는 그저 권력과 본능에 충실한 문화건달들이다. 그들은 수치심이라고는 없고, 어떤 때는 송휘종조차도 얼굴이 붉어질 정도였다. 조길은 주변의 총신들에 대하여 이렇게 조소한 적도 있다: "지금의 사대부들은 염치를 모른다."
다만, 조소는 조소이고, 본질적으로 그들은 한패이다. 심지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전인후과의 관계이다. 윗사람이 좋아하면 아랫사람은 따르게 된다. 조길과 같은 경박한 군주가 있으므로, 이렇게 아부하는 불량한 친구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17살의 조길은 무술을 익히거나 글을 읽지 않고 주로 3가지 일에 집중했다: 그림그리기, 공차기, 번식.
황위에 오르기 전에, 그는 벌써 자식을 많이 낳았다. 그리고 황제가 된 후에는 다시 많이 낳았다. 그리하여 중국황제중에서 자식을 많이 나은 신기록을 세운다. 사서 <종실전>의 기록에 따르면, "휘종은 31명의 아들이 있다."라고 되어 있고, <공주전>에는 "휘종은 34명의 딸을 두었다"고 한다. 합치면 65명의 자식이 있었다. 고대에는 과학적인 피임조치가 없었기 때문에, 황실의 자제는 조절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를 얼마나 낳은지를 보면, 기본적으로 그가 생활을 얼마나 "즐겼는지"를 알 수 있다. 65명의 자식을 낳은 송휘종은 생활을 무척이나 "즐겼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청소년을 오늘날의 기준으로 본다면 그냥 먹고마시고 노는데 열중하는 것이고 무슨 특별한 에너지나 꿈은 없다. 후세인들은 모두 다 알고 있다. 조길은 황제의 재목이 아니라고. 문제는 그의 백락(伯樂)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누가 이 화가를 정계로 데려 왔는가? 우리가 앞에서 말한 바 있는데, 조길의 이 귀인 백락은 바로 향태후이다. 그는 송신종의 정실이고, 송철종의 적모이다. 조길에게는 양모라 할 수 있다. 황제 후계자를 추천하는 권한이 있는 그녀는 조길을 좋은 말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조길에게 있어서 국가최고지도자가 된 것은 확실히 의외의 수확이다. 그는 황부의 열한째 아들이며, 황형의 다섯째 동생이다. 천자의 보좌는 아무리 봐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황위를 '주운' 것이다. 그는 '넝마주이황제'이다. 그가 황위를 주울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때문이다.
첫째는 운이고 둘째는 인연(人緣)이다.
황형이 요절하고, 다른 형들은 잘나지 못했다. 이것은 그의 운이다. 인연을 따지자면, 원래 대신들에게 그에 대한 평가는 별로였다. 다만 관건은 추천위원회의 핵심인물이 그를 잘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승율은 가장 높아진다.
이 핵심인물이 누구인가? 바로 향태후이다.
여기에서 봉건국가의 최고지도자의 후계자 선발통로를 언급해야할 것같다.
이 길은 베이징의 후통보다도 좁다. 봉건왕조의 관리선발은 과거이다. 향시에서 회시 그리고 다시 전시까지 공개된 시험의 선발방식이 있다. 그러나 황제후계자의 추천은 자고이래로 몇몇만이 말할 수 있다.
첫째는 전임황제이다. 둘째는 후궁의 최고어른이다. 주로 태후 태비 혹은 태감의 우두머리이다; 셋째는 조정의 권신이다. 이들 중에서 전임황제를 제외하고 나머지 두 부류는 모두 자신의 계산이 있다. 전임황제가 급사하여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한 경우에, 뒤의 두 부류의 사람들이 후계자를 뽑는다. 허수아비인 어린아이가 아니면, 자신과 일가친척의 관계가 있는 자를 뽑는다.
역대 황제 후계자를 선발하는 절차를 비교하면, '조의제도(朝議制度)'가 있던 북송은 비교적 민주적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본질적으로 독재정치의 본질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중의 민주적인 공간은 범위가 협소했고, 절차도 한계가 있었다. 향태후가 좌지우지하는 황제후계자선발위원회는 더더욱 민주적인 부분이 최소화 될 수밖에 없다. 송철종이 사망한 후, 후당(后黨)이 일수차천하는 상황하에서 이런 상대적으로 민주적인 조의는 변질될 수밖에 없었다.
당사자인 증포가 <증공유록>에 조의 경과를 기록했다. 북송의 조당에 제대로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단왕 조길이 후계자로 되는 제안을 내자 재상 장돈(章惇)이 중대한 반대의견을 내놓는다. 이유는 "단왕은 경박하여, 군림천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장돈은 조길을 비교적 정확하게 보았다고 할 수 있고, 평가가 정확했다. 그러나 재상의 의견은 향태후로부터 엄중한 반박을 당한다.
향태후는 조길이 황제가 되어야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선제(송신종)가 일찌기 말한 바 있다. 단왕은 복수(福壽)가 있고, 인효(仁孝)하여 다른 왕들과 다르다."
태후가 내놓은 것은 지고무상인 노황제의 말씀이다. 조길은 복상이고 효덕이 있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이다.
향태후가 조길을 적극 밀었던 이유는 지금 들어보면 고개가 저절로 흔들어진다. 국가지도자를 선발하는데 용모를 봐야 하는가 덕을 봐야 하는가 재능을 봐야 하는가?
조길의 용모가 뛰어나다는 것은 확실히 사실이다. 송사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부친이 "엄아(儼雅)' 즉 의젓하다고 칭찬받는다. 그러나 정치인물에 있어서 정치적 포부나 능력은 없는데 그저 용모만 있다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후당의 황제 이욱과 비교하더라도 조길이 더 잘 생겼다. 그렇지만 죽는 것도 더욱 비참하지 않았는가? 자신의 처자식조차 보호하지 못하고...
덕을 얘기하자면, 가장 믿을 수 없는 내용이다. 경박한 사람이 어찌 고상한 품성을 지닐 수 있겠는가. 당연히 재상 장돈은 몰랐을 것이다. 경박한 조길이 다른 여자들에게는 경박했지만, 향태후에게는 아주 공경했다는 것을. 부친 송신종이 죽은 후, 조길은 매번 향태후의 거소로 가서 안부인사를 한다. 그래서 향태후는 조길을 자신의 친아들처럼 여긴다. 송철종이 급사한 후, 향태후가 첫번째로 떠올린 황제후보자는 바로 조길이었다.
조길과 황태후의 이 관계를 잘 아는 대신들은 그녀의 말에 호응했다.
마지막으로, '민주조의'는 한 사람의 목소리에 여러 사람들이 따라서, "태후의 처분을 기다리자"는 것으로 변질된다.
그래서 나이 18살의 단왕은 황제의 보좌에 오르고 북송의 최고권력을 장악한다.
나중에 발생한 일은 세상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일이다. 놀기좋아하는 군주가 정권을 잡고 나라를 망친다. 조길이 송휘종으로 된 후, 멀쩡하던 국가는 결국 일락서산하게 된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놀기 좋아하고 색을 탐하며 제대로 된 일은 하지 않는 국가지도자는 정치의 부패를 가속화시키고, 국가를 몰락으로 이끄는 것이다.
당연히 북송의 군주집권이 고도로 이루어져 있고, 그를 따른 천한 무리들이 있어서 황제 조길은 멍청하지만 황위를 잃을 걱정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황제의 자리에서 놀기만 하면서 25년을 보낸다. 송휘종의 좋은 나날은 아마도 아무런 방해을 받지 않았다면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 통치당하는 사람들은 가만히 있더라도 국외에서 통치받지 않는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무능한 군주가 많은 양같은 백성을 이끌게 되면, 바깥의 호랑이가 피냄새를 맡게 되는 것이다. 1127년(정강2년) 대단한 기세로 굴기하던 유목민족 금나라 여진족이 남하하여 북송을 공격한다. 조길은 아들과 함께 포로로 잡혀서 망국지군이 된다.
전쟁포로가 된 조길은 황제를 계속할 수 없을 뿐아니라, 존엄한 예술가로서의 생활을 하는 것도 사치스러운 생각이었다.
사서 <선화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금나라병사들에게 동북으로 끌려간 조길의 처와 딸은 모두 금나라사람들이 차지한다. 그는 모욕을 참으려 구년을 더 구차하게 살았다. 마지막에는 울화병으로 한을 품고 죽는다. 송휘종이 죽은 후, 후장되지도 못하고, 금나라사람들은 시체를 부수어서 태워버린다. 그들은 황제를 예술가로 안장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폐물로 이용했다. 그의 시체를 태워서 기름을 얻어 불을 밝히는데 쓴다. 향년 54세의 조길은 이렇게 시신이 부숴지는 인생결말을 맞이한 것이다.
조길은 구오지존에서 전쟁포로로 전락했을 때가 한창 중년나이인 45세였다. 이때의 그는 회한이 교차했을 것이다. 그러나 '놀이친구'들의 자신을 망쳤다고 원망하는 외에 반성하는 모습은 전혀 없었다.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황제가 될 때, 조길은 아주 적극적이었다. "당시에 여러가지 징조가 있어서 그는 마음 속을 자신감을 가졌다." 그는 자신이 황제가 될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재주가 뛰어나니 천자의 재목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가 황제로 오르는데 반대한 재상 장돈은 그가 보기에 '간언(奸言)'이었다. 조길은 이 일을 평생 가슴 속에 원한으로 품는다. 조길이 송취종이 된 해에 장돈은 재상에서 파직된다. 그후에 계속 좌천되어 결국 유배지에서 죽는다. 그의 주요 죄상은 바로 "조길이 황제에 오르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바이고 천하가 이미 조길에게 마음이 귀속되었는데, 장돈은 다른 뜻을 품고 헛소리를 하며 황제를 폄하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결과는 어떠한가? 황제가 된 후의 조길은 장돈이 말한 그대로 되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조길은 장돈의 평가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품었는지 궁금하다. 일본의 도변화산(渡邊華山)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한 사람이 안전한지 여부는 그가 스스로를 잘 알고 있느냐와 관련이 있다. 이 말은 기실 본국 일본 사람들에게 한 말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웃 중국사람들에게 했다면 더욱 적절했을 것이다. 조길은 물론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조길은 스스로를 천리마라고 여겼다. 그러나 실제 달려보니 어디 하루에 팔백리를 가겠는가. 이런 황제는 태평성대라면 그냥 그럭저럭 지나갈 수 있지만, 적군이 밀려오게 되면 바로 본질이 드러난다. 말이 뒤집히며 낙마하는 것이다. 만일 조길에게 스스로를 파악하는 눈이 있었다면, 당초에 황위를 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사부 왕선처럼 화가가 되는데 집중했을 것이고, 덕과 재능을 갖춘 인물이 황제에 오르도록 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랬다면 예술인생을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살아도 죽은 것만 못한 처지에 놓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성해야 할 것은 향태후처런 눈이 삔 부류이다. 북송이 망국할 때, 향태후는 이미 죽었다. 그러나 이것만 거지고 비난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녀의 선택이 천고의 한을 남겼기 때문이다. 개인감정, 사적인 욕심으로 그리고 좁은 시야를 가지고 향태후는 국가의 위기가 도래한 시기에 잘못된 사람을 선택한 것이다. 그녀는 내가 죽은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무슨 상관이냐고 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어쨌든 역사의 죄인이다.
당연히 가장 반성해야할 것은 바로 그 선발제도이다. 17세에 이미 조길은 많은 사람들이 좋지 않게 보았다. 그러나, 그는 한 사람에게 잘 보여서 황제에 오른다. 이런 선발제도는 나라를 망치고, 민족을 망치고, 자신을 망쳤다.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 > 역사인물 (송휘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휘종(宋徽宗)은 금나라에 잡혀간 후 어디에서 살았을까? (0) | 2022.05.12 |
---|---|
송휘종이 송흠종에게 양위한 경위 (0) | 2019.01.04 |
송휘종(宋徽宗): 풍류오국(風流誤國) (0) | 2014.10.02 |
송휘종(宋徽宗)과 이사사(李師師) (0) | 2013.05.18 |
송휘종: 금나라에 포로로 잡힌 이후에도 6남 8녀를 낳다. (0) | 2012.08.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