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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교육

65년전의 친소식민교육을 회고한다

by 중은우시 2025. 3. 10.

글: 계변수하(溪邊樹下)

1950년 중소는 생사결맹의 시기로 진입했다. 중국은 소련을 큰형님으로 받들고, 기꺼이 동생이 되었다. 중국은 소련의 전차에 묶여 올라탔다. 스탈린의 명을 받들어, 중국은 240만명을 한국전쟁에 파견했고, 14.8만명이 비장하게 희생되었다.

필자가 소재하던 칭다오(靑島)라는 도시는 친소 분야에서 특히 부지런하게 힘을 썼다. 비록 6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필자의 기억에 새롭다.

먼저, 칭다오의 대표적인 경관은 전해잔교(前海棧橋)를 중소우의각(中蘇友誼閣)으로 개명했다. 중소우호협회 회장인 곽말약(郭沫若)이 현판의 글을 써주어서 걸어놓았다. 다음 단계로, 중산로(中山路) 1호라는 임해제일루(臨海第一樓)인 고전양식의 독일건축에 중소우호협회라는 현판을 내걸었다. 그리하여 주소중국대사 판쯔리(潘自力)가 자주 이곳에서 소련귀빈을 접대하는 장소가 되었다.

우리 학교의 교실의 위에는 스탈린과 모택동의 위인 초상이 걸려 있었다. 어떤 유행을 따르는 가정에는 스탈린과 모택동의 초상을 높이 걸어놓았다.

전국에서 소련화포(蘇聯花布, 꽃무늬 옷감)가 유행했다. 칭다오시와 각구정부기관의 남녀간부는 소련화포로 만든 셔츠와 레닌복을 앞장서서 입었다. 소련전문가가 칭다오로 와서 공장건설을 지도했는데, 이들을 맞이하는 간부들은 마치 신을 모시는 것처럼 말하는대로 집행했다.

당시 <청도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칭다오 푸샨(浮山)에서 석재를 채굴하여 베이징의 인민영웅기념비에 사용하는 동시에 소련에서 스탈린광장을 건설하는데에도 상급 석재를 대량으로 보내주었다.

칭다오의 중학교는 모두 영어를 폐기하고 러시아어를 배웠다. 중학교 소학교의 시험에서 백점제를 폐기하고 소련의 오점제를 실행했다. 소련소학생의 홍령건(紅領巾, 빨간스카프)제도가 중국에 풍미한다. 1958년 15살의 필자는 1년간 러시아어를 배웠다.

각급간부는 회의를 개최하면 항상 말하곤 했다: 소련은 이미 공산주의사회로 진입했다. 소련의 오늘이 우리의 내일이다.

1951년 칭다오방직의 여성노동자 하오젠슈(郝建秀)는 전국노동모범으로 당선된다. 베이징에 가서 모택동에게 술을 따라주었을 뿐아니라, 1952년 소련 모스크바의 붉은광장으로 가서 행사에 참가하고 스탈린을 접견했다. 대중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스탈린은 하오젠슈를 보고 매우 기뻐했다. 그녀를 끌어안고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하오젠슈는 소련에서 돌아올 때 4개의 레닌공청단훈장을 받아왔다. 하오젠슈는 또한 자신이 쓴 76페이지짜리 <소련관례일기>라는 책을 써서, 공인출판사에서 1952년에 출판한다. 소학교학력만 가진 하오젠슈는 이제 겨우 글을 배워서 책을 쓸 수는 없었으므로, 다른 사람이 대필하여 쓴 것일 뿐이었다.

당시 사회에서 유행하던 노래는: 스탈린, 모택동은 태양처럼 하늘에서 비춘다였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죽었다. 스탈린의 유상은 천안문성루에 걸린다. 전체 사회가 흑사(黑沙)를 차고 애도했다. 학교의 선생들은 학생들을 이끌고 부친상을 당한 것처럼 곡을 했다. 소학교 2학년이던 나같은 학생들은 그저 멍하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불가닌이 스탈린을 이어 새로운 소련지도자에 오른다. 우리 칭다오의 가곡가는 즉시 새로운 친소가곡을 만들어 냈다. 나는 기억한다. 타이동 순흥로의 소학교 운동장에서 한 여선생이 수백명의 소학생들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쳤다. 잊기 힘든 가사는 이러했다:

내가 한 마리 작은 새라면(假如我是一只小鳥)

나는 높이 더 높이 날아서(我要飛的高又高)

베이징으로 가고(飛到北京去)

모스크바로 가고(飛到莫斯科)

모주석 안녕하세요 소리치고(問一聲毛主席您好)

불가닌주석 안녕하세요라고 소리치겠다(問一聲布爾加寧主席您好)

(우리 세대는 어렸을 때 무슨 교육을 받은 것인가?)

1960년 필자는 연안로에서 거행된 공개재판대회에 참가한 바 있다. 타이동법원의 송카이(宋凱)라는 법관은 법정에서 타이동의 자선가 왕XX에게 유기징역5년형을 선고했다. 그중 죄명은 이러했다: "악독하게 우리의 소련 큰형님을 공격했다." 그 목소리는 어떤 때는 내 귀에 울린다. 지나간 일은 정말 감히 되돌아볼 수가 없다.

나는 생각한다: 오늘날 중국에는 여전히 많은 아분(俄粉, 친러분자)이 푸틴을 위해 변명해준다.

지난 일을 잊지 말고, 후일의 거울로 삼아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전혀 기억력이 없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