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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교육

"해귀폐물(海歸廢物)"의 이야기

by 중은우시 2023. 3. 16.

글: 극주공작실(極晝工作室)

 

구정이 지난 후, 한 유학컨설팅회사가 <국제교육발전과소비지도보고서(2023)>을 발표했다. 거기에는 해귀(海歸, 해외유학후 귀국한 사람, 같은 발음으로 海龜로도 부름, 국내에서 공부하고 유학하지 않은 사람은 이에 대응하여 土鼈이라고 부름) 구직자들중 북상광심(北上廣深,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선전을 가리킴)의 수퍼1선도시를 선택한 경우는 16%에 불과하고, 더 많은 사람들은 1선도시나 2선도시로 몰려갔다고 한다.

 

최근 3년간 또우반(豆瓣)의 "해귀폐물회수호조협회(海歸廢物回收互助協會)"에는 4만명이 넘는 해귀들이 서로 자신의 '실패사례'를 공유하고 있다. 그들 중에서 많은 사람은 유학으로 백만위안이 넘는 돈을 썼는데, 어떤 사람은 졸업후, 귀국하고서도 아직 실업자이거나, 자신이 기대하던 것과는 너무나 차이가 큰 급여를 받고 있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상하이봉쇄후 회사에서 잘렸다고 한다.

 

그중 북상광심에서 생활하는 세 사람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올렸다. 그들의 출국유학은 대부분 가장들에 의해 '피동적으로 투자된' 것이었다. 학술목적이 아니었고, 강력한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업계가 변동하고, 학력의 가치가 떨어지고, 팬데믹영향까지 겹치면서, 결국 그런 투자예상은 어긋나게 되었다. 우리는 '해폐'라는 현상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 사람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의 신분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아래에서는 그들의 이야기를 적어보기로 한다.

 

진림(陳霖), 30세, 미국유학8년, 건축업종: "내가 이 정도 가치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작년 7월, 나는 SNS에 글을 올렸다. 아이비리그대학을 졸업한 후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30살이 되도록 이룬 것이 하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글이 그렇게 많은 관심을 받을 줄은 몰랐다.

 

나는 건축사이다. 그 글을 썼을 때, 재직하고 있던 부동산회사는 경영상황이 좋지 못했다. 2년전까지는 4,5개의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나중에 업계가 불황에 빠지면서 여러 회사들이 도산했다. 어느 주말 고향집을 찾아갔는데, 밤에 잠이 오지 않아서, 그런 초조한 마음을 글로 썼던 것이다. 

 

실제로 작년초 우리 회사는 더 이상 새로운 프로젝트가 없었다. 그렇게 반년을 지내다가 나는 이직했다. 그 기간에 남편도 이직해서, 집안의 경제는 나에게 의존했다. 나는 회사에 급여인상을 요구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11월까지 기다려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회사상황을 보고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여겼다. 프로젝트가 없다는 것은 급여가 낮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세전12K(12,000위안을 의미함)는 내가 막 귀국했을 때와 같은 금액이다.

 

2018년 6월 나는 석사학위를 따고, 7월말에 즉시 귀국했다. 그해에 나는 25살이었다. 베이징에서 처음 받은 offer는 급여12,000위안이었다. 당시에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내업계나 시장을 더 이상 조사해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중에 더 오를 수 있는 여지가 많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일한지 1년여후, 나는 임신을 했다. 집에서 1년간 휴식을 취한다. 다시 일자리를 찾으려 할 때 마침 신종코로나가 터졌다. 내가 당시에 받을 수 있는 가장 나은 대우가 여전히 급여 12,000위안이었다. 그때는 신종코로나때문이라고 여겨서 급여가 낮은 것은 일시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2년이 지났지만 급여는 오르지 않았다.

 

남편은 나와 같은 업종이다. 막 졸업했을 때, 우리 둘을 합치면 연수입이 45만위안이었다. 지금은 근 4년이나 일했는데, 오히려 이전보다 많이 줄었다. 어느 날 퇴근할 때 그가 나를 데리러왔다. 집으로 가고 싶지 않아서, 차를 세우고, 둘이 차안에서 한참을 얘기했다. 그는 유학을 간 적이 없고, 비교적 낙관적인 사람이다. 나는 비교적 조급한 사람이다. 내가 미국에서 8년이나 공부했는데, 자세히 계산해보면 비용만 개략 268만위안이 들었다. 들인 것과 얻어낸 것간에 전혀 비율이 맞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께 미안하다는 생각을 한다.

 

2009년에 나는 16살이었고, 부모는 나를 미국의 고등학교로 보낸다. 그때 집을 떠났다. 고등학교 3년간 나는 기본적으로 오락생활을 즐긴 적이 없다. 양점일선(兩點一線, 집과 학교만 오감)이었다.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았으므로, 수업을 마친 후에는 녹음한 것을 들으면서 수업내용을 외웠다. 스스로 시간을 낭비하면 안된다는 생각이었다. 그후 미국에서 랭킹30위내에 드는 대학에 입학했고, 장학금도 괜찮게 받았다. 여름학기마다 수업을 들어가면서 3년만에 본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아이비리그대학의 건축학과의 대학원에 입학한다.

 

부모님과 얘기를 나눠보니 그들이 나를 기를 때 그렇게 많이 생각한 것같지는 않았다. 나는 당시 그들의 결정을 이렇게 이해한다: 국내의 어려운 대학입시를 피하게 해주어서, 나를 좀더 편안하게 해주려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내가 출국할 때 유학생은 아직 그다지 많지 않았고, 가장들간에도 서로 자식자랑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본과에서 공부한 것은 도시계획전공이었다. 나중에 건축전공으로 바꾼다. 그것도 가족들의 의견을 들은 것이다. 부친은 부동산에 종사하고 있다. 당시 그가 보기에, 건축사는 여러 방면으로 괜찮은 직업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지금 되돌아보면, 건축업계는 당시에 이미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우리가 당시에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돌아와서 몇년간 일을 하면서 주변사람들과 얘기해보니, 차이가 아주 크다는 것을 발견했다. 어떤 친구들은 유학을 간 적이 없지만, 인터넷회사, 은행과 금융업에서 일하는데, 나와 비교하면 급여가 1.5배나 많았다. 내가 나중에 생각해보니, 나 자신의 초조함의 원인은 업계떄문이었다. 같이 유학했던 친구들은 모두 이 업종은 가성비가 좋지 않다고 말했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유학생은 길거리에 넘쳐나고 있다고.

 

모두 우울해져서, 일을 하지 않으려 하거나, 업종을 바꾸려고 한다. 나의 한 이전 동료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금년에도 프로젝트가 없어서, 직원을 1/3을 잘랐다고. 또 다른 이전의 동료도 역시 외국에서 대학원까지 다녔는데, 얼마전에 이직을 했다. 그는 너무 피곤하다고 여겼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터넷회사로 가서 UI(User Interface)설계를 하고 싶었는데, 면접을 본 두 회사 모두 offer를 주지 않았다고 한다. 더욱 비참한 사람은 상하이에서 봉쇄시에 감원되고, 오랫동안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나는 친구들과 그런 화제로 이야기하는 것은 고의로 피했다. 부정적인 정서로 감염될 수 있으니까. 나는 이직을 하거나 부업을 찾아야한다. 그렇게 하여 자신의 생활을 다시 다잡아야 겠다. 나는 빈번하게 이력서를 보내고 면접을 보고 있다. 심지어 길거리에서 차를 세우고 며칠동안 코코넛푸딩을 팔기도 있다. 

 

그렇다고 나는 아직 내가 "폐물"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급여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 스스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정도 가치밖에 되지 않는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래서 곤혹스러운 느낌이다.

 

그 동안 집안의 분위기는 썩 좋지 못했다. 자주 싸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구체적인 원인이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저 비정상적인 감정을 푼 것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나는 자주 울었고, 목소리도 크게 냈다. 남편과 아이 앞에서 싸우지는 않았고, 항상 건물아래를 내려가서 마당에서 싸웠다. 

 

나의 상태를 보고 나의 부친은 아주 후회하고 있다. 그도 업종의 영향을 받아 미리 퇴직했고, 마음도 울적하다. 나까지 이 업종으로 끌고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그도 불만을 얘기한다. 누구집 자식은 인터넷업종에 있다든지. 그런데 나는 지금 어떻다든지. 나는 알고 있다. 그가 고의로 나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그저 자신을 원망하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면 그저 침묵할 뿐이다. 그리고 스스로 풀 수밖에 없다.

 

어떤 때는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과거에 받았던 교육이 정확한 것일까? 열심히 공부하고, 해외로 나가 좋은 대학에서 공부하면, 마음먹은대로 잘 지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나에게는 여성친구가 있는데, 외국을 나간 적이 없다. 공부도 그저 전문학교를 마쳤다. 내가 보기에 그녀가 나보다 훨씬 잘 지낸다. 생활수준도 나보다 훨씬 높다. 그녀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인생은 무슨 진정으로 정확한 길이라는 것이 없다. 그리고 과거에 부모들이 좋게 보지 않았던 아이가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남자친구를 만나서, 좋은 생활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디에서 문제가 생겼는지 모르겠다. 나는 정해진 인생의 극본대로 한걸음 한걸음 아주 노력했고,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귀국해보니 업계는 엉망이 되어 있다. 그제서야 나 자신이 이렇게 미미한 존재였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양파(梁擺), 26살, 영국석사1년, 법무업무: 부실학력, 부실업무, 부실호구

 

나는 폐물이다. 이건 객관적 사실이다.

 

이런 느낌은 2018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때 나는 베이징의 한 평범한 211대학을 졸업했고, 법학과였다. 한편으로 사법시험을 준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대학원시험도 준비했다. 그 결과 사법시험은 낙방했고, 대학원시험도 그후 준비하지 않게 되었다. 또 다른 선택지가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본과졸업후 바로 직장에서 일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영국의 학교에 입학신청을 했다. 그때 스스로가 폐물이라고 느껴졌었다.

 

그 학교는 QS랭킹이 50여위정도 되었고, 준비할 자료도 많지 않았다. 대학의 학점성적만 가지면 되고, IELTS성적도 필요없었다. 1년간 공부하고나니 바로 깨달았다: 이건 그저 학력을 위한 것이다.

 

그  한해는 즐거웠다. 여기저기 놀러다녔다. 공부압박도 거의 없었다. 돈은 개략 30-50만위안이 들었다. 부모님이 도와주었고, 집안에서 그다지 크게 부담되지도 않았다. 나의 고향은 후난(湖南)인데, 초등학교때 베이징으로 왔다. 어머니는 공무원이고, 아버지는 사업을 했다. 대학에 들어간 후에 그들은 다시 후난으로 돌아간다. 만일 내가 고향으로 돌아갔다면 친구가 그다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베이징에 남아서 살고 싶었기 때문에 호구(戶口)를 취득해야 했다.

 

호구정책에 관해서 유학생은 해외에서 365일을 채우면 되었다. 나는 당시 날짜를 계산해 보았고, 졸업하고 바로 귀국하면 만1년에 조금 모자랐다. 그래서 며칠을 더 채우면 되는 것이었다.

 

그때는 2019년 가을이었다. 그후 몇달간, 여러 입사시험을 치렀다. 나는 한 사업단위의 법무팀에 들어갔고, 5년짜리 고용계약을 체결했다. 호구지표가 있어서 위약금이 30만위안이다(직장마다 베이징호구 T/O가 있어서, 신입직원에게 그 베이징호구를 주는데, 5년기간을 채우지 않고 다른 회사로 가면 위약금을 내도록 약정함). 일자리를 찾을 때 나는 그저 호구에 관해서만 생각했다. 무슨 일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호구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일을 시작하고 반년에서 1년이 되었을 때부터 나는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나는 돌연 느꼈다. 자신의 정신이 업무로 부식되어버렸다는 것을. 일하는 내용의 대부분은 생산계약이고, 매일 아침 8시에 직장에 도착해서 아침식사를 하고, 11시반에 휴식을 취하고, 1시반부터 다시 4시반까지 일한 후에 퇴근한다. 

 

생각해보라. 가성비는 아주 높다. 하루에 그다지 많은 일을 할 필요도 없고, 그래도 1만여위안을 받는다. 퇴근후에 회사식당에서 저녁도 먹을 수 있다. 그래도 나는 일찍 귀가했다. 일반적으로 정시에 퇴근했고, 상사들보다 먼저 퇴근했다. 기실 귀가한 후에 무엇을 해야할지는 몰랐다. 그저 시간만 보냈다. 처음에는 게임을 했다. 뒤에는 게임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낚시도 생각해 보았고, 인터넷에서 누군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말발굽을 갈아주는 것도 보았다. 모두 별다른 의미가 없는 일들이다.

 

나는심지어 이성을 만나는 것조차 귀찮았다. 과거에 누군가 나에게 여자를 소개시켜주었는데, 그 여자는 사람이 좋았다. 그런데 흥미가 일지 않았고, 그녀가 생각나지도 않았다. 부모는 작년에 나에게 혼처를 알아봐주었다. 그들은 내가 어느 정도 나이도 되고, 일자리도 잡았고, 호구도 있으니, 이제 일가를 이루어야할 때라고 여긴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뭐가뭔지 모르겠고, 이런 상태로 결혼하고 싶지는 않았다.

 

실제로, 그런 조건들이 모두 갖추어졌지만, 나는 스스로 이미 갇혀죽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마치 어느 일부분이 걸려있는 것같다. 내 생각에 많은 유학생들이 귀국한 후 빠르게 중산층의 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 급여가 기대보다 훨씬 적고, 직장에서의 승진도 아주 느리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일찌감치 생각지 않기로 했다. 체제내에서 젊은 사람도 모두 30세이상이다. 나는 아직 26살이다. 이제 일하기 시작한지 겨우 2년이 되었다. 그리고 직장내에서 가장 젊다. 분위기는 아주 화목하지만, 승진할 수 있을 것같지는 않다. 내가 40살이 되더라도 여전히 직위는 지금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생각하면 할수록 초조함만 더해간다.

 

다른 직장으로 옮기려고 해도, 적합한 자리가 없을 것같다. 나는 법률전공인데, 기본적으로 갈 수 있는 길은 공무원, 법관, 변호사이다. 그러나 나는 그 어느 길도 가고 싶지 않다. 대학입시때 나는 금융을 전공하고 싶었다. 그런데 결국 밀려났다. 나는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재수를 선택한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흐르는대로 몸을 맡기는 편이다. 어려서부터  '흘러가는대로 노를 젓는 사람'이었다. 

 

지금 일은 가성비로는 괜찮지만, 베이징에서는 친구나 다른 사람들과 얘기해볼 필요도 없이 급여가 얼마나 적은지를 알 수가 있다. 그 숫자는 나로 하여금 스스로가 폐물이라고 느끼게 만들만하다. 전해에는 집에 돈을 조금 부쳐주었다. 나는 주식투자를 시작했는데, 하루에 버는 돈이 1,2달 월급은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수십만을 손해보았다. 그러다보니 더더욱 출근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주요원인은 돈이 나에게 자극을 주는데, 이 직장은 의미가 없다고 느껴지고, 허무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가 친구를 만나는 횟수는 이전의 주당 몇번에서 한두번으로 줄어들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불러도 나는 핑계를 대며 나가지 않는다. 함께 귀국했던 친구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모두 상황이 비슷하다. 나보다 못한 사람보다는 낫고, 나보다 나은 사람보다는 못하다. 어떤 때는 그들이 나를 부러워하기도 한다. 안정적이며 호구도 취득했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아무런 느낌도 없다.

 

하루는 내가 마치 각성을 한 것같았다. 자신은 체제내에서 일하는 것이 맞지 않는다고. 작년 연말, 한 친구가 나에게 일자리를 하나 소개시켜주었다. 국유중앙기업이다. 급여도 현재보다 높았다. 반드시 강제로 해외근무를 3년이상 해야 했다. 비록 아프리카로 가는 것이긴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뛰었다. 또 어떤 사람은 나에게 증권회사를 소개시켜주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가지 않았다. 귀찮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댓가가 너무 크다. 나는 먼저 현재 직장이 위약금을 물어주어야 하고, 그후에 어떤 결과가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작년 10월초, 나는 채팅앱을 깔았고, 현실도피하고 싶었다. 사이버세계에서 스스로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싶었다. 그러나 한달후에 다시 발견했다. 거기도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앱을 지웠다. 나는 앞으로 뭘 해야할지 모르겠다. 새해에도 계속 이렇게 시간만 보내야할 것같다.

 

공건(龔健), 30세, 호주석사2년, 제조업체 재무담당: "너는 해외에 그렇게 오래 있었는데, 초과근무는 할 수 있는가?"

 

나는 2017년 호주에서 석사를 마치고 귀국했다. 그후 상하이의 제조업체에서 재무를 보고 있다. 작년 상해의 신종코로나사태이후, 나는 잘렸다. 3개월동안, 나는 구직앱에서 700여명의 인사담당자와 소통했고, 최종적으로 이력서를 보내어 추가로 소통한 경우는 100여명이다. 빅데이타는 해귀폐물소조를 나에게 들이밀었다.

 

여러 회사들과의 소통과정에서, 나는 발견했다. 나의 유학경력이 가진 장점은 겨우 절반 정도이다. 어떤 회사에서는 영어능력이 좋은 사람을 구했다. 외국과 소통할 수 있도록. 그런 경우는 장점이다. 어떤 회사는 직접 묻는다. 너는 외국에서 그렇게 오래 있었으니, 초과근무는 할 수 있는가. 국내환경에 적응은 할 수 있겠는가?

 

나의 업무에 대한 기대수준은 조금씩 내려갔다. 이전에는 상장회사라 하더라도 통근시간이 1시간반이면 갈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급여 20%삭감도 받아들일 수 있다. 어쨌든 살아야 하니까.

 

나는 처음에는 장시간 불면증에 시달렸다. 그 백수시기에는 여행을 가더라도 즐겁게 즐기지 못했다. 차라리 돌아와서 계속 일자리를 찾는 편이 나았다. 이전에는 얘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잠을 자지 못하게 되니 그것을 풀 방법을 찾아야 했고, 친구, 가족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푸젠(福建) 사람이다. 집안의 몇몇은 일찌감치 외국으로 나갔다. 나의 부모는 사업을 하는데, 나도 외국에서 살기를 바랐다. 대학4학년때, 나는 주변의 몇몇 친구들이 외국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나는 반은 떠밀려서 호주로 갔다.

 

호주에서 대학원을 다닌 2년동안 거의 100만위안을 썼다. 내 생각에 부모가 투자한 예상치에 도달하지 못한 것같다. 스스로도 아주 낮다고 인정한ㄴ다. 이런 느낌은 막 귀국했을 때 특히 강했다. 부모와 그 일을 얘기하자, 그들은 나를 위로해 주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에게 투자하는 것이고, 더 많은 경력과 체험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내가 공부한 대학은 호주에서 8대 대학에 들어갔고 QS로 50위내에 들었다. 비록 나는 외국인친구가 많았고, 수업때는 외국인들과 한팀이 되었으며, 학교내의 동아리활동도 했지만, 많은 경우 나는 스스로를 외인(外人)이라고 여겼다. 귀속감이 없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어떤 레테르가 붙어 있었다. 나는 그래서 생각했다. 귀국하는게 더 낫지 않겠냐고.

 

2017년, 내가 귀국하면서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금융업종이었다. 그러나 그해에 금융업종은 불황이었다. 증권회사, 투자은행등은 모두 들어가기 어려웠다. 그리고 귀국후 발견한 것은 자신의 수준이 유학생들 집단내에서 아주 평범하다는 것이었다. 나와 함께 면접을 보는 사람들중 많은 사람이 아이비리그, 캠브리지, 옥스포드같은 명문대학출신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경쟁이 이렇게 치열하다니, 마치 모든 사람이 여기로 모인 것같았다.

 

결국 나는 금융업종에서는 적합한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제조업체의 재무로 시작했고, 급여는 1만에서 2만 사이이다. 

 

이 급여는 분명 낙차가 있다. 외국과 비교하면 내가 1개월간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80시간 일하면 상하이에서 풀타임으로 근무한 급여보다 높았다. 국내의 상황과 비교하면, 나의 친구들 중에서 외국에 가지 않았지만 나보다 근무는 2년을 더한 친구들의 급여는 나보다 훨씬 많았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국외로 나가서 공부한게 그다지 역할을 못하는 것같다. 시장이 불황을 만나니 차라리 2년 일찍 일자리를 잡은 것보다 못하게 된 것이다.

 

지금 나는 새 일자리를 막 찾았다. 매일 상해를 끝에서 끝까지 왕복한다. 통근시간이 4시간이나 된다. 그래도 나와 처는 푸젠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거기에는 이미 나에게 적합한 일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프라이버시보호를 위해, 글에 쓰인 사람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