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역사기실정유취(歷史其實挺有趣)
원나라말기, 개략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의 재위시기에 범맹(范孟)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범맹은 하급관리였고, 원나라조정의 하남행성(河南行省)에 근무하고 있었다.
하남행성이라는 말을 들으면, 지방의 높은 등급의 관청에 근무하니 아주 체면이 서고, 잘나간다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물론 그렇지만, 실제로는 크게 달랐다.
왜냐하면 우리가 통상 관리(官吏)라고 하지만, 그 의미는 관(官)과 리(吏)이다. 둘은 구분된다. 관원(官員)은 조정에서 임명된 관료이다. 관계(官階), 품급이 있다. 그러나 소리(小吏)는 품급도 없고, 관계(官階)도 없다. 심지어 어떤 지방의 소리는 편제도 없어서, 임시직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소리에도 두 종류가 있다. 잘 나가는 소리는 간리(奸吏), 악리(惡吏)로 기꺼이 상관의 응견(鷹犬)이 되어, 부정부패하면서 백성들을 괴롭히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며, 자신이 가진 소소한 권력을 가지고 사적인 이익을 꾀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잘 살 수 있다. 그러나, 범맹은 달랐다. 그는 그렇게 머리를 쓰지도 않았고, 수완을 발후ㅏ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인간관계같은 것도 그다지 연구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평상시에 그다지 잘 살지 못했다.
생각해보라. 원나라말기는 정치도 부패하고, 갈등이 첨예했다. 관료사회는 더더욱 온갖 폐단이 횡행했다. 왕왕 몽골귀족이 대권을 장악하고, 한족관료는 보편적으로 배척당했다. 범맹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넌 하남에서 여러 해동안 근무했지만 승진을 전혀 하지 못했다. 시종 별 볼 일없는 자잘한 역할을 했다. 기실 그는 일을 아주 열심히 했고, 일처리도 잘 했다. 단지 그는 관청내에 인맥이 없어서, 상사들이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고, 동료들도 그를 무시했다. 어떤 동료들은 심지어 그의 면전에서 그가 능력이 없다고 조롱하기도 했다.
범맹은 매우 화가 났다. 그는 성실한 사람이고, 그런 조소는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만들었다. 그는 분노를 배설할 수 없었고, 그리하여 그는 아예 자신이 출근하는 관청의 뒷쪽 벽에 시를 한 수 써놓는다. 이를 통해 자신의 불만을 배설한 것이다:
인개위아불판사(人皆謂我不辦事) 사람들마다 내가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여금판사유기인(如今辦事有幾人) 지금 일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는가
수리도룡참교수(袖罹屠龍斬蛟手) 소매 속에 교룡까지 베어버릴 수 있는 손이 있지만,
매몰청봉이십춘(埋沒靑鋒二十春) 그 날카로움은 이십년이나 매몰되어 있구나.
사실상, 이 시는 호기가 넘쳤다. 그러나 봉건황제시대에 위험한 말이라 할 수 있다. 너 범맹이 '도룡참교'할 수 있다니 무슨 의도인가. 용은 천자, 제왕의 상징인데, 네가 용을 죽인다는 것은 바로 반란을 하겠다는 말이 아닌가.
하물며, 이걸 그저 집에서 쓰기만 한 것이 아니라, 관청에서 쓰다기. 그것도 관청안에서 종이에 쓴 것이 아니라, 관청의 벽에다 써놓다니.
그의 행동은 그저 두 글자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광망(狂妄)!
이는 바로 <수호전>의 송강(宋江)이 객잔의 벽에 "감소황천부장부(敢笑黃巢不丈夫)"(감히 황소는 대장부가 아니라고 웃는다)라는 시를 쓴 것과 마찬가지로, 아주 반동적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당시는 어쨌든 원나라말기이고, 원순제의 재위기간동안 황하가 범람하고, 천하는 큰 가뭄이 들어, 유민(流民)이 사방을 떠돌아다니고 있었으며, 반란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범맹과 유사한 평범한 소리, 이름없는 무리들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나, 범맹이 불만을 쏟아낸 후에 정말 운이 그에게 따라준다. 금방 상사에게 발탁되어 정식 하급관원으로 변신한 것이다.
다만 비록 승진하기는 했지만, 급여는 원래 그대로이고, 대우도 그대로였다. 이번 승진은 그저 정신적인 위로에 불과했다. 범맹이 보기에, 이건 그저 아이를 사탕으로 달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고, 자신의 치욕이라고 생각한다.
당시의 사료를 보면 범맹의 상태는 "빈무자(貧無資), 과교유(寡郊遊)"라고 되어 있다. 즉 그는 집안이 가난하고, 본인이 무슨 저축한 것도 없으며, 친구도 없고, 사교생활을 하거나 교외로 놀러나갈 돈도 없었다. 범맹은 하남행성에 근무하고 있었지만, 그의 생활은 거의 파탄지경이라고 할 수 있다.
사료에 따르면 범맹이 한 말을 한 마디 남기고 있다:
<경신외사(庚申外史)>: 나는 반드시 너희들을 죽여버릴 것이다(我必殺若輩)"
그렇다면 범맹은 어떻게 곽팔실(霍八失)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을까?
범맹은 더 이상 생활이라는 둔도(鈍刀)에 한칼 한칼 베어져서 죽임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뭔가를 하고 싶었다. 자신의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인생을 바꾸기 위해서.
곽팔실은 범맹의 좋은 친구이자, 동료라 할 수 있다. 다만 곽팔실은 관청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고, 민간에서 굴러다니는 건달, 무뢰한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인물과 함께 범진은 정말 경천동지할 일을 벌인다.
먼저, 그는 곽팔실로 하여금 납환(蠟丸)을 하나 만들고, 납환의 속에 백지를 넣어두게 했다. 안은 백지로 바깥은 납환으로 싸고 있으니, 아무도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범맹은 말한다. 너는 이 납환을 가지고, 저녁에 역참(驛站)으로 가라. 그리고 자신이 조정에서 성지(聖旨)를 대독하도록 보냈다고 말해라. 그렇게 되면 역참의 역승(驛丞), 역졸(驛卒)은 너를 상관으로 모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역참에서 무기와 말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아주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곽팔실등은 그가 시키는대로 했다. 과연 역참에서 순조롭게 역승, 역졸을 속이고 말과 무기를 얻는다. 그후 범맹은 다시 그들을 분장시키고, 말을 몰아 하남행성의 관아로 달려간다.
그날 저녁은 동지(冬至)였고, 마침 범맹이 야근당직을 서는 날이었다.
동지는 일년을 보내는 날로 희기양양(喜氣洋洋)했고, 대부분의 관원은 일찌감치 퇴근했고, 퇴근하지 않은 관원들은 관아내에서 술좌석을 베풀어 만두를 먹으면서 술을 마셨다.
이런 환경하에서 관원들은 대부분 그저 세월을 보낼 뿐 아무 쓸모가 없었다.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은 몇몇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술잔이 오가면서 하나하나 만취하게 된다.
오직 범맹만이 전혀 술을 마시지 않았고, 맑은 정신을 유지했다. 곽실리가 사람들을 이끌고 달려오자, 그는 즉시 크게 소리친다:
"흠차대인(欽差大人)이 오셨다!"
그 소리를 외치면서, 범맹과 곽팔실 두 사람은 연기를 시작한다. 범맹은 계속하여 이들을 위풍당당하고 위엄있는 진짜 흠차대신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곽팔실은 흠차대신의 느릿한 걸음과 당당한 태도를 유지한다. 그 모습은 진짜 흠차대신과 별 차이가 없었다.
만일 낮이었다면 시야도 비교적 좋아서, 사람들이 쉽게 속아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한밤중이고, 모호하며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시각적인 면에서 우선 지고 들어갔다.
다음으로, 기본적으로 그 자리에 있던 관원은 범맹을 제외하고, 모두 술에 취해 있었다. 그리고 마신 양도 적지 않았다. 술을 많이 아시면, 주의력, 관찰력, 판단력이 모두 흐려지기 마련이다. 곽팔실은 역참에서 얻어낸 장비를 갖추고 있어서, 사람들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범맹이 소리치자, 관아의 관원들은 거의 조건반사처럼 믿어 의심치 않고, 하나하나 무릎을 꿇었다. 곽팔실을 진짜 흠차대신으로 믿은 것이다.
그리고 곽팔실은 범맹의 말을 이어받아, 본 흠차가 여기에 왔으니,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떠나지 말고 남아 있어라 한명 한명 물어볼 말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 없는 사람은 집에서 자고 있지 못하게 하고, 모조리 불러와라. 그들에게도 하나하나 물어봐야겠다.
관청내의 몇몇 하급소리들은 흠차대신이 명령하니 속속 말을 타고 길거리로 나가서, 하남행성의 모든 고위관원들을 불러모은다.
그렇다면, 곽팔실은 이들과 회의를 개최할 생각인가?
당연히 아니다. 그는 건달, 무뢰한이고 글자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그런데 무슨 회의를 열겠는가. 그가 모든 관리를 집합시킨 이유는 오직 한 가지이다. 그것은 바로 범맹과 곽팔리가 사전에 합의한 것으로 사람이 모두 모이기만 하면, 즉시 칼을 들어 모조리 죽여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살이 개시된다.
아무런 사정도 모르고 있던 관원들은 이제 금방 잠에서 깨어 어떤 사람은 멍한 상태였고, 어떤 사람은 눈을 맞고 취한 눈으로 현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곽팔실등이 무기를 휘둘러 모조리 죽여버린 것이다.
참혹한 비명 속에 범맹과 곽팔실의 목적은 마침내 달성된다.
다음 날 아침, 범맹은 스스로 하남도원수(河南都元帥)를 칭한다. 그후 곽팔실등에게도 관직과 상을 내려, 자신의 심복으로 삼는다. 범맹은 다시 곽팔실을 보내어 하남의 지방 크고 작은 관아에 있는 인신(印信)을 거둔다. 이렇게 하여 권력찬탈에 성공한 것이다. 일거에 하남행성의 최고지도자가 되고, 군정민의 대권을 모두 장악하게 된다.
범맹의 탈권과정은 이전의 하급군관의 무장폭동 혹은 일부 지구의 농민반란과 달랐다. 그는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우리가 지금의 시각에서 보자면, 이것이 범맹의 반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전체 하남행성은 범맹의 이번 반란에 대하여 거의 느끼지 못했다. 범맹은 최소한의 범위내에서, 최소한의 폭력을 써서 비밀스럽고 자연스럽게 권력교체를 완성한 것이다.
이는 실제로 수천년동안 유례가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보통의 반란은 인원을 끌어모으고, 성을 점령하고, 하층에서 한단계 한단계 위로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범맹은 신속하게 직접 최고권력을 차지해버린 것이다.
이는 마치 한 사람이 한 회사의 빌딩을 폭파시면 모든 사람이 알게 되지만, 만일 그가 몰래 CEO의 사무실로 잡입해 들어가서, 소리소문없이 CEO를 죽여버리고, 계속하여 CEO의 명의로 지시를 내리고, 직원들은 그 명령을 받아 일한다면 절대로 사장이 바뀌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하남도원수가 된 후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아무도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반대로 사람들은 오히려 자연스럽게 범맹의 명령을 듣게 된다.
그리고, 이 범맹은 사후처리를 잘 했다. 권력을 탈취한 후 두 말하지 않고 즉시 하남행성의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황하의 나룻터를 막아버린다. 그렇게 하여 남북교통이 단절된다. 그는 다시 병력을 보내 하남행성의 각 도로의 관문을 지키게 했다. 그렇게 되니 모든 소식이 철저히 막혀버린다.
범맹이 전체 하남행성을 장악한 것은 원순제 지원5년 십일월이다. 이치대로라면 한개의 성이 함락되었다면 이는 경천동지할 큰 일이다. 그러나 범맹의 기밀유지작업이 너무 뛰어났던지, 조정이 정보에 느렸는지 몇 달이 지나도록 조정에서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중에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아주 간단하다. 많은 지방의 전량세부(錢糧稅賦)는 하남을 거쳐 황하로 운송되는데 원순제는 몇달동안 지방에서 양식과 세금을 받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의심을 품게 되고, 사람을 보내 알아본 다음 하남이 이미 반란자에게 점령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조정은 진노했다. 아마도 창피하다고 여기는 것이 더욱 컸을 것이다. 그들은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소소한 하급관리 하나가 몇몇의 건달을 데리고 하남행성을 차지할 수 있었다는 것을.
그러나, 조정이 더더욱 생각지 못한 점은 그들이 하남으로 병력을 보내기도 전에 범맹이 죽어버린 것이다.
범맹은 어떻게 죽었을까? 하남행성을 점령한 후, 범맹과 몇몇 관원들이 함께 술을 마셨는데, 이들은 모두 지방관원으로 그가 발탁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함께 술을 마신 것이다. 그런데 범맹이 특히 많이 마시고 술에 취해 실언을 한다. 그는 자신이 한 짓을 모조리 털어놓은 것이다.
당시 범맹과 함께 술을 마시던 사람중에 풍이사(馮二舍)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조정에 충성했고, 범맹이 하남도원수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반적이라는 것을 알고난 후, 며칠 후 범맹의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범맹을 죽여버린다.
범맹이 죽자, 범맹을 우두머리로 하는 권력집단은 금방 궤멸된다. 그의 심복들 곽팔실등은 금방 죽임을 당하고, 하남행성은 광복된다.
그러나, 광복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전체 하남행성은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고, 조정은 빠른 시일내에 회복시킬 수가 없었다.
1325년에 이미 하남에서는 상당한 규모의 농민반란이 일어난 적이 있다. 즉 조축시(趙丑廝)와 곽보살(郭菩薩)의 난이 있었고, 범맹의 거사 1년전에는 하남 진주의 호윤아(胡閏兒)의 난이 있었다. 그리고 범맹의 사태를 겪은 후, 하남행성이 크게 망가지면서 군정이 해이해져서 일시에 크고 작은 농민반란이 연이어 발생한다. 천하대란의 조짐은 이렇게 시작된다.
아무 것도 아닌 범맹은 이해하기 어려운 큰 사건을 저질렀을 뿐아니라, 심지어 무형중에 나중의 홍건군(紅巾軍), 원나라말기의 농민반란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해 주었다.
9년후에 방국진(方國珍)의 난이 일어난다.
다시 3년후, 한산동(韓山童), 유복통(劉福通)의 난, 서수휘(徐壽輝)의 난이 일어나고, 진우량(陳友諒)은 서수휘의 부하가 된다.
그리고, 장사성(張士誠), 명옥진(明玉珍), 등등등등. 많은 사람들의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여기에서 더 이상 언급하지는 않겠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반란이 북에서 남으로 모든 지역에서 일어나면서 원나라의 강산은 불에 타버리게 된다.
원나라 지정12년에 이르러 의삼이 남루한 떠돌이 승려가 홍건군의 군문을 두드린다.....
'중국과 역사사건 > 역사사건 (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나라때 이슬람과의 천문학 교류와 접촉 (1) | 2023.06.18 |
---|---|
마르코 폴로는 중국에 온 적이 없다. (0) | 2021.10.08 |
몽금십년전쟁(蒙金十年戰爭): 초원제국과 삼림제국의 결전 (0) | 2021.04.21 |
<마르코폴로여행기>의 이상한 점들.... (0) | 2020.01.08 |
원나라 멸망의 원인은....? (0) | 2019.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