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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남송(南宋)의 마지막 10년: 구연잔천(苟延殘喘)

by 중은우시 2024. 12. 4.

글: 비정상역사연구실(非正常歷史硏究室)

경정5년(1264년), 십월 이십육일, 재위한지 40여년이 된 송리종(宋理宗)이 붕어하고, 유조로 태자 조기(趙禥)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송도종(宋度宗)이다.

송도종은 송리종의 친아들이 아니고, 조카이다. 송리종의 몇몇 아들이 모두 요절했기 때문에 그를 양자로 들여 황위를 물려주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신하들이 조기를 황태자로 삼는데 반대했다. 원인을 따지자면 조기는 선천적으로 지능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조기의 모친은 원래 복왕(福王) 조여예(趙與芮)의 소첩이었다. 조여예의 적차는 그녀가 임신한 것을 질투하여, 그녀에게 낙태약을 강제로 먹게 했다.

약때문인지는 몰라도, 조기의 모친은 낙태약을 먹은 후에 오히려 앞당겨 출산하게 된다. 그리하여 조기는 발육이 느린 문제가 있었다.

대신들 사이에서 의론이 분분했지만, 어쨌든 자신의 친조카이니 송리종은 반대의견을 물리치고 그를 황태자로 삼는다.

이렇게 지능에 문제있는 제왕이 정말 이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있을까?

아마도 조기가 황태자로 세워졌다는 소식을 듣고, 대신들의 머리 속에는 즉시 사마충(司馬衷)이 떠올랐을지도 모르겠다.

만일 대통일시대라면, 대신들이 적절히 보좌해서 조정을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어떤 때인가? 북방의 몽골족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때가 아닌가?

그리고 송도종이 즉위한 바로 그 해에, 쿠빌라이는 아릭부케를 물리치고 새로운 몽골의 칸이 된다.

이때, 전체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대륙에서 남송을 제외한 나머지 나라들은 모조리 몽골에 정복당했다. 바꾸어 말하면, 쿠빌라이의 다음 움직임은 바로 남송을 정벌하는 것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기실 송리종시기에, 몽케칸이 삼로로 대군을 나누어 남송을 정벌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그러나 조어성(釣魚城)에서 기이한 죽음을 맞이하면서, 몽골내부의 칸쟁탈전이 벌어졌고, 남송으로서는 숨쉴 시간을 벌게 되었다.

그러나 쿠빌라이가 아릭부케가 칸의 자리를 놓고 쟁탈하던 시기는 남송이 북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도 있었다.

당시 몽골의 한족 세후(世侯) 이단(李璮)이 쿠빌라이가 다루가치를 두어 감독하고 한인세후를 견제하고, 게다가 몽골은 다시 한인세후의 관할지를 몽골여러 왕공귀족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한인세후의 관할지가 잠식되는데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고, 사적으로 남송과 연합한다.

당시 송리종과 가사도(賈似道)는 이 기회를 잡아, 병력을 보내 북벌에 나섰으나 아쉽게도 성공하지 못한다. 이것이 남송에게는 아마도 마지막 대규모 북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북방이 혼란할 때 북벌이 실패하면서, 남송이 적극적으로 공격하여 평화를 이끌어낼 가능성은 없어졌다.

더구나 지금은 칸의 자리가 정해졌으니, 남송에게 더 이상 그런 좋은 운이 따라주지도 않을 것이다.

몽골이라는 외부의 큰 적이외에 남송내부에도 문제가 적지 않았다. 어쨌든 북송부터 계산하면 남송은 이미 건국한지 300여년이 되었고, 말기정권이 통상 가지고 있는 문제를 남송도 모조리 가지고 있었다.

토지겸병, 국고공허, 관리부패는 일찌감치 남송의 골수를 빨아먹고 있었다.

그중 이들 문제의 핵심은 기실 인구은닉이다. 그리고 그 숫자는 방대했다. 또한 그것은 남송초기부터 존재했다.

송고종이 남하한 후, 통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지방호족들에 대하여 관용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들이 임의로 민호를 점거하고, 심지어 점차 사군(私軍)을 가진 지방강대세력을 형성하는 것까지 용인했다.

남송시기, 이들 지방호족은 조정의 체면을 봐서, 상징적으로 호구를 정리해 보내주어서 조정이 세금을 거두기 편리하게 해주었다.

다만 송효종이후, 그리고 송금전쟁, 송몽전쟁을 거치면서 적지 않은 하층백성들은 세금부담을 견디지 못해, 속속 지방호족에 의탁하여 생존을 도모한다.

조정은 지방호족의 지지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인구를 은닉하는 것을 방치한다. 결국 이들 호족의 지위와 권세는 갈수록 높아지고, 직접적으로 세금을 내지 않겠다고 말하기에 이른다.

당연히 호족만이 아니다. 대외전투를 수행하는 장수들도 기회를 틈타 토지를 겸병한다. 원래 남송의 토지는 적은데, 호족과 장수들이 연이어 겸병하고 은닉하는 바람에, 상세(商稅)를 적지 않게 거두고 있기는 했지만, 빈번한 전쟁에는 부족했고, 국고도 텅비어 갔다.

그렇다면, 당시 지방호족들은 얼마나 인구를 많이 은닉했을까? 수치를 보면 알 수 있다.

송도종이 등극한 해애, 조정통계상 남정민호는 겨우 1,300만이었다. 그러나 원나라가 남송을 멸망시킨 후의 강남민호는 5,000만이다. 겨우 20년만에, 차이가 이렇게 크다. 이를 보면 호족들이 얼마나 많은 인구를 은닉했는지 알 수 있다.

국고에 돈은 없는데, 호족들은 국가에 돈을 내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할까? 그저 대량으로 지폐를 찍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남발하다보니 결국 남송의 지폐는 휴지와 별 차이가 없어진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남송이 백성들에게 양식을 팔도록 강제했고, 대가는 바로 이런 지폐로 지급했다.

지주, 호족에 대해서는 조정이 감히 어떻게 하지 못한다. 이렇게 되다보니, 모든 부담은 하층백성들에게 돌아간다.

그래서, 이렇게 계속되다가는 몽골인이 침입하지 않더라도, 남송은 내부에서 붕괴할 터였다.

그리하여, 남송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가사도는 개혁을 통해 남송의 목숨을 연장하고자 한다.

다행히 이때 쿠빌라이는 아릭부케와의 칸쟁탈전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의 원망과 불만을 사고, 심지어 다른 칸국과 싸우기까지 하게 되면서, 쿠빌라이도 부득이 먼저 내부부터 안정시켜야 했다. 그리하여 가사도가 개혁을 실행할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전에 가사도는 "공전법(公田法)"을 추진한 바 있다. 먼저, 호족들이 토지를 장악하게 하고, 그후 그들로 하여금 규정을 넘는 토지의 1/3을 내놓게 하여, 이를 조정이 구매하여, '공전'으로 부르고, 땅이 없는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어 경작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조정은 공전에서 세금을 거둘 수 있고, 국고를 채울 수 있다. 호족들에게서 돈을 뜯어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쨌든 조정이 지급하는 돈은 남발한 지폐이고, 착취대상만 일반백성에서 지방호족으로 바꾼 것뿐이다.

이런 강매를 통해, 조정은 전후로 근 400만무의 토지를 획득한다. 다만 지방호족들은 이에 불만을 품고 계속하여 가사도가 화국앙민(禍國殃民)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돈과 양식은 만들었지만, 내부사람들의 부정부패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특히 남송말기, 무장들은 전투는 잘 못하지만, 군량을 빼돌리는 것은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그리하여 가사도는 "타산법(打算法)"을 내놓는다. 이들 무장의 비용지출을 감독하는 것이다.

돈벌 방법을 차단한다는 것은 부모를 죽이는 것과 같다. 가사도의 이번 개혁은 직접적으로 무장들의 대동맥을 건드린 셈이 된다. 가사도에 불만을 가진 일부 무장들은 직접 쿠빌라이에 투항하는 것을 선택한다. 예를 들면, 유정(劉整)이다. 그는 쿠빌라이에게 양양(襄陽)을 공격하도록 건의한 사람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가사도가 타산법을 시행하지 않았더라면, 남송은 정말 군비를 지급하지 못했을 것이고, 타산법을 시행하면, 최소한 몇년은 더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반드시 일부 부정부패한 무장들이 반기를 들 것이고,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개혁하든 안하든 결말은 같다. 죽음이다.

이때의 쿠빌라이는 이미 내부적으로 통합을 마친다. 유정이 투항해와서 남송의 양양방어선의 약점을 까발리자, 쿠빌라이는 즉시 명령을 내린다. 수군을 건립하여 남하하여 남송을 멸망시킬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알아야 할 점은 남송이 버틸 수 있었던 관건은 바로 장강방어선과 수군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우세가 점점 약화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함순3년(1267년), 쿠빌라이가 대군을 보내 양양으로 진격한다. 이때 양양을 수비하던 명장 여문환(呂文煥)은 여러차례 물리치지만 고립무원의 상태여서 금방 포위당하고 만다.

양양이 포위되자, 가사도는 마음이 조급해진다. 전후로 14번이나 대규모 지원을 보내지만, 이정지(李庭芝)를 제외하고는 그다시 쓸만한 장수가 없었으며, 시종 성공하지 못한다.

그리고 양양을 공격하면서, 쿠빌라이는 또 다른 대군을 보내어 서쪽에서 사천의 송나라군대를 소탕하고자 한다.

함순9년(1273년),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던 여문환이 투항하고, 양양성이 함락된다. 남송의 북방방어선은 큰 구멍이 생긴 것이다. 서쪽전선에서는 중경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쿠빌라이군대의 손에 넘어간다. 남송은 아무런 방어선도 남지 않고, 철저히 쿠빌라이에 포위당하게 된다. 남송의 멸망은 이제 초읽기에 들어갔다.

양양을 함락시킨 후, 쿠빌라이는 즉시 남송정벌에 착수한다. 이때 남송은 아직 강대한 수군이 남아 있었다. 쿠빌라이는 유정으로 하여금 계속 수군을 훈련시키게 하여, 전후로 3천여척의 전선을 건조한다. 그리고 수군 5만여명을 훈련시킨다. 그리하여 잠시 몽골의 수군부족문제를 보완할 수 있었다.

함순10년(1274년) 육월, 모든 준비를 마친 후, 쿠빌라이는 남송을 토벌하라는 명을 내린다.

바로 이때 송도종이 붕어한다.

쿠빌라이가 남송을 멸망시키는 전투를 일으킬 때,남송은 송도종을 안장하고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느라 바빴다. 그리하여 아무도 방어선을 배치하는데 신경쓰지 못했다.

그후 4살짜리 조현(趙㬎)이 등극한다. 그리고 사태후(謝太后)가 임조칭제하며, 다시 가사도를 기용한다.

주소국약(主少國弱), 임금은 나이가 어리고, 나라는 약하다. 그런데 밖에는 강적이 있다. 조금만 실수하면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이다.

더욱 치명적인 점은 남송의 양양수군이 이때 다시 쿠빌라이에 투항해버린 것이다. 이제 남송은 수군실력에서도 훨씬 못미치게 되어버렸다.

바로 이 시기에, 여문환이 나서서 장강일선의 수비장수들을 회유하고, 몽골인은 장강을 따라 내려온다.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장강중상류를 장악해버린 것이다.

덕우원년(1275년) 정월, 유정이 사망한다. 가사도는 결사의 항전을 생각한다. 남송의 남은 정예수군을 이끌고 몽골과 전투를 벌여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태후는 가사도가 군대를 이끄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그에게 임안(臨安)에 남아서 지휘하도록 한다. 아마도 가사도까지 몽골에 투항하는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가사도가 간신인지 충신인지는 별론으로 하고, 이때 가사도의 행동은 본받을 점이 있다.

그는 즉시 자신의 자손을 모두 임안에 인질로 남겨놓고서야 군대를 지휘할 수 있었다.

단지 지금 남송의 방어력은 부족하고, 군심은 흩어졌으며, 수군실력도 몽골군에 못미치는 상황이다. 패배는 불보듯이 뻔한 상황이었다.

이월 이십구일, 정가주(丁家洲)전투로 남송수군은 전멸한다. 남송은 더 이상 남은 군대가 없었다. 임안도 철저히 몽골인의 앞에 노출된다.

망국의 위기에 직면하여, 남송내부에서는 어떻게 저항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내분이 일어난다. 창끝은 자연히 가사로를 겨누었다.

삼월, 한 무리의 대신들이 가사도를 탄핵한다. 몽골에 정벌당하는 것은 모두 가사도때문이고, 가사도를 파면해야만 몽골군이 병력을 퇴각할 것이라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들은 정말 가사도를 탄핵하면 몽골인이 퇴각할 것이라고 믿었을까? 그저 그들은 가사도를 쫓아내고 자신들이 그 자리에 앉고 싶었을 뿐이다. 그 다음에 쿠빌라이에게 항복하여 높은 자리를 얻으면 된다.

예를 들어, 진의중(陳宜中)이 그러했다. 사태후가 가사도를 파면한 후, 큰소리치던 진의중을 승상에 임명한다.

그러나 진의중은 무슨 일을 하였는가? 당시 진의중이 조정에서 했던 각종 호언장담은 볼 것도 없다. 그는 겁쟁이였고, 몽골인들과 결전을 벌일 용기는 전혀 없었다. 더더구나 그럴 능력도 없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화의를 구하면서 문천상(文天祥)이 제안한 천도건의도 거부하며, 시간을 낭비한다.

몽골인들이 계속하여 다가오자, 진의중은 직접 투항을 선택한다. 마지막에는 섬라(暹羅)로 도망친다.

방법이 없었던 사태후는 문천상을 우승상 겸 추밀사로 임명하고, 몽골군영으로 가서 담판하게 한다. 실제로 이때 사태후등은 모두 알고 있었다. 남송은 이미 끝났다는 것을 어떻게 하더라도 멸망할 것이다.

서하와 금나라의 멸망시의 비극을 참고하여, 차라리 적극적으로 화의에 나서는 것이 하반생의 평안이라도 구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사태후는 문천상이 주전파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는 조정이 화의하는데 반대하고, 우승상을 맡는 것도 거절하며,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의 신분으로 담판에 나선다.

문천상 마음 속으로 남송은 아직 남방에 적지 않은 영토가 있고, 몽골인과 계속 싸워볼 수 있다고 여겼다.

고정(皋亭)에서 문천상은 바얀(伯顔)과 협상을 벌인다. 문천상은 양회(兩淮), 양절(兩浙), 민월(閩粤)을 여전히 대송이 장악하고 있으므로, 만일 끝까지 쌍누다면, 승부는 아직 알 수 없다고 말한다. 화가난 바얀은 그를 구금한다.

문천상이 구금되었다는 말을 듣고, 사태후는 어쩔 수 없이 가여경(賈餘慶)을 사신으로 보낸다. 그러나, 이제 몽골은 남송을 멸망시키기로 마음을 굳혔다. 무슨 협상조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덕우2년(1276년) 정월 십팔일, 남송은 국인(國印)을 헌상한다. 몽골에 투항한 것이다. 그리고 이월 초닷새, 조현은 백관을 대리고 상희전(祥曦殿)에서 항표(降表)를 올린다.

남송은 이때 명목상 멸망했다. 그후 문천상등은 계속 항거하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애산(崖山)전투가 마지막 항전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남송이 몽골인이 천하를 쟁패하던 시기에 십여년이나 버틴 것도 대단했다.

남송은 이미 말기에 접어들었고, 각종 말기왕조의 병폐이외에 또 하나의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북인에 대한 차별이었다.

이로 인하여 남송은 북방의 한인들과 단합할 수 없었다. 전체 북방한인들과 함께 몽골통치에 반대하는 전선을 형성하지 못했다.

송효종시기에 이르러 남송의 승상 사호(史浩)는 이런 말을 한다: "중원에는 절대로 호걸이 없다. 만일 있다면 왜 들고 일어나 금을 멸망시키지 않는가?"

그의 눈에, 북방은 함락된 땅으로 더 일찌감치 호걸은 없다는 것이다. 있는 것은 그저 금나라의 통치에 순응하는 노예들 뿐이다.

바로 이런 기초 위에서, 사호는 "귀정인(歸正人)"제도를 제정한다. '귀정인'은 바로 금나라에서 남방으로 도망온 한인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들에 대하여, 조정상하는 모두 불신한다. 그들을 남송의 변경에 거주하게 하고, 재능있는 사람이라도 기용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신기질(辛棄疾)이 바로 귀정인이다. 아쉽게도 신기실은 평생 모략이 있었지만, 귀정인이라는 신분때문에 시종 포부를 펼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남송의 적지 않은 뜻있는 인사들은 이 제도를 없애고자 했다. 예를 들어, 맹공(孟珙)같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결국 헛수고가 되고 만다.

또 예를 들어, 남송이 금을 멸망시킨 이후, 어쩔 수 없이 몽골에 투항한 관리 범용길(范用吉)은 남송으로 돌아오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남송을 도와 하남의 실지를 회복하는 것을 돕겠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호북을 지키고 있던 맹공과 연락한다. 심지어 그는 친아들을 남송에 인질로 보내기까지 했다.

맹공이 조정에 상소를 올리자, 이들은 어떻게 했는가? 그들은 "장각(張覺)의 일"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고 여긴다.

장각은 이전에 요나라의 절도사였고, 북송에 투항하면서 영원과 산해관 두 땅을 바쳤다. 그리하여 금나라의 불만을 샀고, 금나라는 이를 이유로 출병하여 북송을 멸망시켰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일이 없더라도, 금나라는 출병했을 것이다. 이 사건은 그들에게 핑계를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 때의 남송은 그저 착실하게 몽골인과 평화공존하기를 원했다. 그래야 몽골인들이 남송을 침략할 이유가 없어질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몽골인은 침략할려머 침략한다. 착실하게 평화공존한다는게 가능한 일인가?

남송이 북방한인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쿠빌라이는 그들을 받아들였다. 쿠빌라이는 권력을 장악한 이후, 한족장수를 대거 기용한다. 그리고 이들 장수들이야말로 남송을 치는데 적극적으로 힘을 다한다.

쿠빌라이는 특별히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고친다. 그후 연경(燕京)을 수도로 삼는다. 몽골인의 전통적인 쿠릴타이대회를 대체하여 어전회의를 개최한다. 이렇게 하여 원나라는 중원대일통왕조의 서열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북방한인은 더욱 강력한 동력과 자신감을 갖게 된다. 현재의 그들은 몽골인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정통왕조를 위해 일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양양전투이후, 대량의 남송장수들이 속속 쿠빌라이에 투항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건 적에게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왕조교체에 순응하는 것이고, 이번 전쟁은 왕조교체전쟁이 된 것이다. 침략이 아니라. 쿠빌라이에 투항하는데 아무런 부담이 없어진 것이다.

이렇게 되니, 남송이 망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다. 가사도가 정가주전투에서 적벽대전처럼 극적으로 대승을 거두었다면 오르지만. 아쉽게도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