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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거란(契丹): 어떻게 일개 부락에서 제국으로 발전했는가?

by 중은우시 2024. 11. 19.

글: 서북낭(西北狼)

거란은 중국역사상 최초로 "농경 + 유목"의 2원제국가를 건립한 민족이다. 2원제국가의 출현은 한민족이 제도적으로 유목민족에 대하여 가졌던 압도적우세가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발명이다.

  1. 대하씨시대(大賀氏時代)

거란이 가장 먼저 한문 기록에 등장한 것은 6세기의 북위(北魏)시기이다. 당시의 거란은 단지 8개 부족으로 구성된 느슨한 부락연맹이었다. 8부족은 공동으로 규정했다. 대하씨(大賀氏)가족이 대대로 부락연맹의 군사지도자가 된다.

다만 구체적으로 대하씨가족내에서 누가 지도자에 오를 것이냐에 대하여는 부사자계(父死子繼) 혹은 형종제급(兄終弟及)의 승계원칙을 따르지 않고, 8부의 대인들이 후보자중에서 민주적 선거를 통해 결정한다. 이처럼 세습과 민주를 결합한 제도는 바로 "세선제(世選制)"였다.

정관(貞觀)연간, 거란의 수령 대하굴가(大賀屈哥)는 당태종 이세민을 따라 고구려정벌에 참전하여 공을 세운다. 그리하여 그는 태종으로부터 국성(國姓) 즉 이씨(李氏)의 성을 부여받고, 수령권위를 상징하는 기고(旗鼓)를 받는다. 그리고 송막도독부(松漠都督府) 대도독(大都督)에 임명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대하씨의 세습제는 대당왕조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굴가(李屈哥)가 죽은 후, 그의 손자 아복고조(阿卜固造)는 당고종연간에 돌궐(突厥)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결국 명장 설인귀(薛仁貴)에게 생포당한다.

그후에도 당왕조는 여전히 대하. 이씨가족의 통치지위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 가문의 송막도독 지위는 회수한다. 이때부터 한인 관료가 거란사무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무측천시기에, 현지사무를 관장하는 한인관료가 횡포를 부리면서 과다하게 세금을 거두자 동북 소수민족의 폭란이 발생한다. 앞장서서 반기를 든 사람은 바로 이굴가의 손자인 이진충(李盡忠)과 그의 처남 손만영(孫萬榮)이었다.

원래는 단지 보통의 소수민족무장항거였을 뿐인데, 이진충은 고수의 가르침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왜 우리 여릉왕(廬陵王, 즉 李顯)에게 정권을 돌려주지 않는가?"라는 구호를 내세운다. 교묘하게 민족문제와 무측천의 내정문제를 연결시켜버린 것이다.

이런 정치구호는 무측천의 레드라인을 넘었고, 그녀는 폭발하게 된다. 그녀는 대노하여 그의 이름을 이진멸(李盡滅)로 바꾸고, 그를 붙잡아 뼛가루로 만들어 뿌리지 않으면 마음 속의 화를 삭일 수 없겠다는 자태를 보인다.

그러나, 이진충의 반군은 기세가 대단했고, 한때 하북의 요지를 석권한다. 그리고 무씨가족이 반란을 평정하라고 보낸 무삼사(武三思)와 무의종(武懿宗)을 격패시킨다. 이런 치욕은 당나라가 건립된 이래 유래가 없었다. 이는 무측천의 집권합법성을 엄중하게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번 전쟁의 패배는 무측천으로 하여금 혹리(酷吏) 정치를 중단하게 만들었고, 당황실의 노신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다시 적인걸(狄仁傑)등 대신을 기용하게 만든다. 이를 통해 그들과 정치적 협력을 도모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정말 이진멸이 요구한 것처럼 여릉왕 이현을 다시 맞이해 오게 된다.

비록 이진멸의 반란활동은 결국 당나라와 돌궐이 연합하여 소탕하면서 실패로 끝나지만, 당황실이 복벽된 후, 대하이씨가족에게 크게 보답을 하게 된다. 새로 송막도독의 직위를 그들에게 넘겨주었을 뿐아니라, 처음으로 공주를 대하이씨가족에게 보내어 화친까지 한다.

2. 양족공치(兩族共治), 군국병행(郡國幷行)

720년, 거란8부중 요련씨(遙輦氏)가족이 점차 세력이 커지게 된다. 요련씨의 수령인 "가돌우(可突于)"는 대하이씨가족의 거란에서의 지도자지위를 빼앗고자 한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당태종이후, 대하이씨가족의 지도자로서의 권력은 거란내부에서 공동으로 선출되었을 뿐아니라, 당나라조정으로부터도 공식으로 인정받았었다.

그래서 투서기기(投鼠忌器)의 가돌우는 대하이씨가족의 칸(可汗)의 명호는 그대로 유지시킨다.

그러나 다시 십년이 지난 후, 가돌우는 당나라조정을 방문하였는데, 당나라의 재상으로부터 무시를 받는다. 그는 돌아온 후 대노하여 대하이씨가족의 칸의 지위를 박탈하고, 본가의 요련굴렬(遙輦屈列)을 칸으로 세운다.

이러한 동아시아지도자의 권위에 대한 공공연한 도발은 금방 당나라조정으로부터 엄중한 제재를 받게 된다.

732년, 당현종은 병력을 파견하여 가돌우를 토벌한다. 그러나 당군은 기습을 당해 6천명의 병사를 잃는다.

2년후, 유주자사(幽州刺史) 장수규(張守圭)는 대하이씨가족의 이가절(李可折)을 매수하고, 안팎에서 협공하여 가돌우와 굴렬칸을 제거한다.

그러나, 얼마 후, 요련부 출신의 야율니례(耶律泥禮)이 이가절을 죽여버리고, 후돌궐칸국(後突厥汗國)에 의탁하여 당나라와 맞서싸운다.

그후, 쌍방은 10년간 지속적으로 전투를 벌인다. 745년 돌궐이 멸망한 후, 야율니례는 다시 사람을 장안으로 보내 용서를 구한다.

이때의 당현종은 이미 더 이상 체면을 위하여 거란인과 끝도없는 소모전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쌍방은 화해를 달성한다. 당왕조는 야율니례가 세운 요련씨칸(遙輦氏可汗)을 인정한다.

여기까지 본 사람들은 아마도 의혹을 가졌을 것이다. 야율니례는 분명 야율씨인데, 왜 요련씨를 칸으로 세운 것일까? 자신이 직접 칸에 오르는 것이 더 좋지 않은가?

이건 초원의 부락은 왕왕 여러 씨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들 씨족의 유래는 아주 복잡하다. 어떤 경우는 먼 친척일 수도 있고, 어떤 경우는 인척관계일 수도 있으며, 비호를 청해온 외래씨족일 수도 있다. 그리고 전쟁때 병합된 소규모 씨족일 수도 있다. 그리고 부락의 명칭은 왕왕 가장 강대한 씨족의 명칭에 따라 명명된다. 그래서 요련씨라고 하여 요련부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다만 요련부에서 가장 강대한 씨족이고, 같은 요련부에 속하는 야율씨는 실력이 그들보다 아래였던 것이다.

야율니례가 일을 성사시킬 수 있었던 것은 부락내에서 요련씨를 포함한 다른 씨족의 역량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야율씨 일족이 큰 능력을 가져서가 아니라. 이때의 야율씨는 단지 한 명의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였을 뿐이고, 아직은 요련씨를 대체할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던 것이다.

당나라와 화해한 후, 야율니례는 거란의 각부에 대한 대개혁을 진행한다. 이를 통해 야율씨의 역량을 공고히 하게 된다.

그는 각부락에서 관할하는 씨족을 다시 조합하여, 새로운 거란8부를 형성한다.

이번 개혁에서 야율가족이 요련부에서 갈라져 나와 독립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부락을 만든다: 질렬부(迭烈部).

당시 거란의 기본행정단위는 "석렬(石烈)"이다. 8부는 모두 22석렬이었는데, 질렬부는 혼자서 8개를 차지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질렬부는 칸의 관할을 받지 않는 것이다. 칸은 단지 다른 7개 부락만을 관할한다.

이런 안배는 한나라초기의 군국병행제(郡國幷行制)와 유사하다. 만일 칸의 조정에서 어느 부락이에 가돌우같은 인물이 나타나면, 조정에서 독립되어 있는 질렬부는 병력을 이끌고 칸을 보호하여, 요련씨의 강산이 천추만대 이어질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만일 질렬부가 범상작란을 벌이게 되면, 칸은 다른 7부와 연합하여 그들을 억누를 수 있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야율씨와 요련씨는 모두 같이 요련부에서 나왔으니, 그들은 일가가 아니게 되지 않았는가? 왜 그들이 요련씨의 강산을 지켜주어야 한단 말인가?

이 점을 피하기 위하여, 조정에는 이리근(夷離堇)이라는 직위를 질렬부에 주어 세습하게 했다.

이 이리근은 거란의 군사분야 1인자이다. 중원의 태위(太尉)에 상당하는 직위이다. 어떤 때는 야율가에게 주는 직위가 "우월(于越)"(태위 + 승상)일 때도 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 요련씨가 조정의 명목상 지도자이지만, 너희 야율씨가 정권을 장악해라. 이는 백년이 지나도록 변치 않는다.

이런 독특한 설계하에 두 집안은 이후 1세기반동안 평안하게 지낸다. "야율과 요련이 함께 천하를 통치한다"는 국면을 유지한 것이다.

이런 이두체제(二頭體制)는 쌍방의 세력이 비슷하다는 기초 위에서 건립된다. 일단 어느 한쪽의 실력이 단기간내에 급증하게 되면 공동통치는 끝날 가능성이 커진다.

가장 먼저 국면을 깨버린 사람은 요련씨의 마지막 칸인 흔덕근칸(痕德堇可汗)이다.

그의 재위기간은 당나라말기의 난세였고, 이때 중원은 분란에 빠져 내부투쟁이 그치지 않았다. 요련씨가 만일 이 기회를 틈타 남하하여 몇번의 승전을 거둔다면, 아마도 전쟁을 통해 새롭게 권위를 수립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흔덕근칸의 군사능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고, 그가 남하하여 개시한 첫번째 전투에서 당말오대의 인간쓰레기이자 걸연(桀燕)정권을 건립한 유인공(劉仁恭)과 유수광(劉守光) 부자를 만난다.

이 부자는 당나라말기의 혼란와중에 사나운 인물이다. 그들이 지속적으로 타격하자, 흔덕근칸은 세력을 크게 잃고 죽을 때까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다. 역사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유인공이 병력을 이끌고 적성산(摘星山)을 넘어 토벌한다. 변방의 풀을 불태워 그들이 목축을 할 수 없게 만들었으며 말이 많이 죽었다. 거란이 화해를 구하면서 좋은 말을 바치고 목지를 넘겨달라고 요구한다. 유인공이 허락했다....거란인은 만기를 이끌고 들어왔다. 유수광은 거짓으로 화해하는 척 하면서 들판에서 술을 마실 준비를 하고, 복병을 일으켜, 그 대장을 생포한다....흠덕(欽德, 흔덕근칸)은 많은 재물을 주고 그를 구해냈고, 결맹을 맺는다. 그후 십년간 감히 변경에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했다."

3. 궁장(宮賬) + 외척(外戚) = 세습제?

흔덕근칸의 실패는 오히려 또 다른 군사지도자인 우월을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는 바로 질렬부의 새로운 지도자 야율아보기이다.

901년 야율아보기는 군사지휘권을 넘겨받은 후, 그후 10년동안 유씨부자와 매년 싸웠고, 매번 이겼다. 뛰어난 전적은 주온(朱溫)과 이극용(李克用)같은 중원의 거물들마저도 앞다투어 사람을 보내 그를 자기 편으로 끌어드리고자 했을 정도였다.

야율아보기의 굴기와 더불어, 쌍방이 150여년간 유지해온 공동통치국면이 결국 끝나게 된다.

906년, 흔덕근칸이 사망하고, 임종전에 야율아보기를 후계자로 지명한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조치의 배후에는 어느 정도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요련씨의 통치는 끝이 난다. 그후 칸의 후보자는 야율가족내에서 선출되게 된다. 그렇다. 야율가족의 내부에서 선출되는 것이지, 야율아보기의 아들이 승계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규정에 따르면 3년에 한번씩 선출하게 되고, 연임할 수 있다. 그렇다면 누가 결정할 것인가?

답은 거란8부의 대인들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야율가족의 모든 사람은 후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선거를 하게 되면, 야율아보기의 명망으로 보아 죽을 때까지 연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909년 새롭게 선거해야할 때가 되었을 때, 그는 대회를 미루며 소집하지 않는다. 911년까지 미루었다. 이런 태도는 그가 칸의 지위를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주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처럼 공공연히 부락민주전통에 도전하자 두 무리의 사람들로부터 불만이 터져나온다: 하나는 야율가족의 친형제들이다. 왜냐하면 야율아보기가 세습제를 하게 되면 그들은 후보자가 될 권리가 사라지게 된다. 다른 하나는 다른 7부의 귀족들이다. 야율아보기가 세습제를 하게 되면 그들의 가진 투표권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가장 먼저 들고 일어난 것은 야율아보기의 친형제였다. 912년부터 시작하여, 그들은 연속으로 3차례의 제제지란(諸弟之亂)을 일으켜, 야율아보기를 끌어내리고자 한다. 비록 야율아보기가 매번 대국을 고려하여 이들 형제를 통크게 용서해주었지만, 야율가족의 세력은 크게 약화된다.

915년에 이르러, 7부대인들이 들고 일어난다. 야율아보기는 어쩔 수 없이 잠시 하야한다.

그리고, 같은 해, 야율아보기는 부인인 독비태후(獨譬太后) 술률평(述律平)의 건의를 받아, 홍문연을 열고 7부대인을 일망타진한다.

다음 해에 야율아보기는 정식으로 황제를 칭한다. 이렇게 하여 세선제는 철저히 막을 내린다. 세선제가 끝나면 바로 세습제가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인가?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총부리에서 권력이 나온다. 권력을 지속할 수 있을지 여부는 군사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거란의 군사역량은 주로 초원부락에서 나온다. 이런 군사권력은 군사귀족의 수중에 분산되어 있다. 야율아보기가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력과 군사명망때문이다. 일단 그가 죽으면, 그의 아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은 그저 가족내의 역량뿐이다. 그러나 야율가족내이 형제들조차도 확실히 믿을 수는 없다. 그때가 되면 고아과부가 정말 모두를 억누를 수 있을까?

후세에 요나라의 군사역량은 주로 5개부분으로 구성된다:

부족군(部族軍). 주로 부락대인과 황실종친이 장악하고 있다. 이는 요나라군대의 주요전력이다. 또한 최대의 동원가능한 병력자원이다. 인원수는 개략 15만가량이다.

복종군(僕從軍). 다음으로 부속국의 복종군이다. 인원수는 정해져 있지 않다.

오경향병(五京鄕兵). 다음으로 도시의 민병이다. 주로 물자수송을 담당한다. 인원수는 개략 100만명이다.

위의 셋은 정부의 역량이다. 다음은 황실의 군사무장역량이다.

피실군(皮實軍). 황제의 심복부대이다. 이 군대는 징키스칸의 케식(怯薛軍)과 유사하다. 주요 인원은 각부의 군사귀족이 바친 인질이다. 이 부대는 비록 칸의 친위군이지만, 그들의 출신때문에 일단 칸과 귀족계급간에 이익충돌이 발생하면, 이 군대의 충성도는 의문스럽게 된다.

궁장군(宮賬軍). 이는 황제가 진정으로 의지하는 군사역량으로 알로타(斡魯朵)라고도 부른다. 이는 황제와 황후의 직속부대이다. 매번 황제가 등극한 후, 그 아래 부락과 주현에서 일부 인구를 바쳐서 새로운 지도자의 등극을 축하하는 예물로 바친다. 장정과 가족을 합쳐서 약 5만가량이다. 이들로 1만의 대군을 구성할 수 있다. 그후 황제는 한 지역을 찾아서 이들을 안치한다. 이후 이들은 원래부락 혹은 정부관할을 벗어나, 소위 "궁인(宮人)"이 된다.

소위 "궁장"은 본질적으로 황제 자신의 개인적인 소왕국이다. 황제는 여기에 제할사(提轄司라고 부르는 소조정을 두어 백성을 관리한다. 평상시에는 백성들을 다스리고, 전쟁시에는 징병한다.

그렇기 때문에 궁장군이야말로 황제가 가장 의지하는 군사력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때는 강력한 황후, 예를 들어 술률평이나 소태후같은 사람은 자신의 알로타를 보유한다.

전대황제 혹은 황후가 사망한 후에는 알로타를 개인재산으로 다음 황제에게 전해주기도 한다.

신황제가 등극한 후에는 자신의 알로타를 조직할 수 있다. 이렇게 대대로 전해져 내려가다보면 후세황제의 가산은 갈수록 풍성해진다. 황통의 전승이 갈수록 안정적이 되는 것이다.

모든 일이 시작이 어려운 법이고, 이런 제도가 효과를 발휘하려면 시간이 비교적 많이 걸린다. 그러나 구세력의 반발은 용납할 수 없다! 이는 야율아보기가 생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다만 야율아보기는 아주 운이 좋았다. 그는 생전에 한문화를 앙모했고, 특히 한고조 유방을 숭배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중문이름까지 짓는다. 유억(劉億).

유방이 있으면 소하(蕭何)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리하여 술률평의 가족을 소씨(蕭氏)로 바꾸게 한다. 이 가족은 나중에 요나라의 황후공급원이 된다. 대대로 야율아보기의 자손과 혼인하여, 황권이 태조계로 전승되도록 보장했다.

술률평부터 소한(蕭翰)까지, 다시 나중의 소사온(蕭思溫) 소태후 부녀까지, 소씨가족은 알로타제도가 아직 제대로 발전하기 전까지의 시기에 야율아보기가족의 황통전승을 가장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힘이 된다.

요성종 야율융서(耶律隆緖)의 통치시기에 이르러, 역대제왕이 백년이상 경영하게 되며 요나라의 황제는 이미 10개의 알로타를 보유하게 된다. 극한적인 상황하에서도 가볍게 10만의 정예병을 동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든 부족군이 함께 모반을 일으키는 경우가 아닌 한, 어떤 귀족이 태조일계의 황위전승에 끼어들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결론

자고이래로 초원에는 전쟁을 통해 강력한 권력을 가진 패주가 나타났다. 그러나 징기스칸처럼 강력한 인물도 사후의 후계자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러나 거란인은 소씨외척을 통해 적자를 지킬 수 있었고, 궁장제도를 통하여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의외로 적장자계승제도에 필요한 조건을 갖추게 되니 기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