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최애역사(最愛歷史)
송인종 경력2년(1042년), 이미 칭제한지 4년이 된 서하의 이원호(李元昊)는 북송군대에 대해 제3차공격을 감행한다. 그리고 정천채(定川寨, 지금의 영하성 고원 서북쪽)전투에서 송군을 대파한다. 1040년이래 이원호의 서하군대는 송군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고, 이원호는 이에 대해 크게 만족하면서 대외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짐은 직적 위수(渭水)로 가서 장안(長安)을 점령하겠다."
당시 '관우진동(關右震動)'으로 섬서에 이웃한 제국의 수도 개봉부(開封府)에서는 송인종이 초조해져서 식사마저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가 된다. 그는 분노하여 호부상서, 섬서경략안무사 하송(夏竦)과 명장 한기(韓琦), 범중엄(范仲淹)등을 면직시킨다. 재상 여이간(呂夷簡)은 이에 놀라서 이렇게 소리친다: "갈수록 전투에서 밀리니, 정말 무서운 일이다."
연속3년간 대송제국은 정예장병을 수만이나 잃었다. 그리고 적은 심지어 수도 개봉까지 노리고 있다. 이걸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런 위급한 상황하에서 북송의 명신 포증(包拯)은 송인종에게 계책을 올려 말한다: "서하는 나라가 작고 영토가 좁습니다. 재정수입은 절대다수를 '청염(靑鹽)'의 의존합니다. 이런 상황이므로 서하로부터 청염의 수입을 금지하면, 경제적으로 서하의 목줄을 죌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포증의 건의는 대송제국이 전투로는 이기기 힘드니, 무역전을 전개하자는 말이다. 경제적으로 이원호의 서하제국을 무너뜨리자는 것이다.
청염은 서하의 경제에서 명맥(命脈)이다.
1038년, 이원호가 정식으로 서하를 건립하였고, 당시 서하경내에는 암염자원이 풍부했다. 각각의 염지(鹽池)는 함유하고 있는 미량원소의 차이로 적색, 자색, 청색, 흑색, 백색등 서로 다른 색깔을 띄었다. 그중 청색과 백색이 두 가지 색깔을 가진 소금('청염')의 생산량이 가장 많았고, 품질도 가장 좋았다. 그러나, 겨우 300만인구의 서하국에서는 이렇게 많은 소금을 다 먹어치울 수 없었고, 북송에 청염을 수출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서하국의 주요 재정수입원이기도 했다.
당시, 북송은 식염(食鹽)에 대하여 지구전매제도(地區專賣制度)를 시행했고, 소금가격이 아주 비쌌다. 다만 서하에서 수입하는 청염은 "가격도 싸고 품질은 좋았다." 그리하여 서북지구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북송의 막 건립되었을 때, 서하의 청염은 엄격히 금지되지 않았다. 그러나 송태종시기에 이르러, 당항족의 이계천(李繼遷, 이원호의 할아버지)이 요나라에 붙어 자주 북송에 맞섰다. 그리하여 988년, 송태종 조광의는 처음으로 무역전을 전개한다. 청염수입금지를 선언하며, 이를 통해 당항족의 경제력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최대의 재정수입인 청염의 수출이 금지되는 것을 보자 이계천은 바로 송나라의 편에 붙겠다고 선언하게 된다. 그리하여 송나라는 무역전을 멈춘다. 다만 이계천은 실력을 회복한 후, 다시 북송을 배반한다. 이번에는 철저히 송태종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993년, 송태종 조광의는 전운부사(轉運副使) 정문보(鄭文寶)의 건의를 받아, 청염의 수입과 판매를 엄격히 금지한다. 이를 통해 이계천의 세력을 말려죽이고자 했다.
그러나, 소금이라는 것을 정부에서 금지할 수는 있지만, 백성들은 먹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북송이 자체 생산하는 소금의 가격은 아주 비쌌다. 그래서 서북지구의 백성과 소수민족은 서하에서 생산되는 청염을 구매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송태종이 명을 내려, 서하에서 "청염이 한계(漢界)로 들어는 것을 막는다"고 하고, 서하의 청염을 사사로이 판매하면 모두 사형에 처하겠다고 선언한다.
다만, 송태종의 이번 무역전은 완전히 역효과를 내고 만다. 청염이 완전히 금지되자, 관농지구의 백성들은 '먹을 소금이 없었다." 그리고 원래 북송에 귀순했던 1만여호의 토번(吐蕃)인들이 다시 반기를 들고 이계천에 투항한다. 다른 강족부락도 북송의 국경을 침입한다. 이렇게 하여 북송의 변방이 소란에 빠지고, 어쩔 수 없이 993년 음력 팔월, 송나라는 이번 무역전을 중단하게 된다.
그후, 청염이 가져다주는 방대한 재정수입은 나라가 작고 영토가 좁고 겨우 300만인구를 가진 당항부락으로 하여금 여러차례에 걸처 4000만인구를 가진 대송제국과 맞서 싸울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열세에 몰리지도 않았다. 여러번의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끈다. 그리고, 북송은 993년의 무역전이 실패한 후, 994년, 1000년에도 서하청염에 대한 무역전을 전개하지만 정부의 금지령으로도 민간의 사염판매까지 완전히 막을 수는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리하여 서하의 청염은 여전히 밀수로 북송경내에 들어왔고, 경제적으로 당항부락으로 하여금 북송과 맞서싸우는 것을 지탱할 수 있게 해준다. 소금과 돈이 있는 당항인들은 결국 이계천의 손자 이원호에 이르러 정식으로 서하국을 건립하고, 북송과 분정항례(分庭抗禮)하기 시작한 것이다.
앞에서 이미 얘기한 것처럼, 포증이 무역전을 건의하기 전에, 북송은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서하의 청염수입금지와 무역전을 시행해본 바 있다. 그러나 북송 자신의 소금가격과 서하의 소금가격간의 거대한 차이로 인하여, 게다가 변망의 방대한 밀수업자들로 인하여, 북송은 이전의 무역전에서 그다지 큰 효과를 얻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 무역전은 어떻게 싸운단 말인가?
이전 무역전에서의 실패를 고려하여, 포증등 신하들은 이전의 경험을 통해 북송도 보다 정교한 계획을 짜게 된다. 이번 무역전에서 북송정부는 구분대우를 하게 된다. 즉 한인에 대하여는 서하청염의 판매를 금지했지만, 강족, 토번부락에 대하여는 금지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소수민족을 안정시키고, 통일전선을 확대한다; 다른 한편으로, 북송은 상인들이 국경부근으로 가서 식염을 판매하도록 독려한다. 북숭의 자체생산소금가격을 인하하여, 가격이 동일하다면, 서하청염의 가격우세는 기본적으로 무너지게 된다. 그러면 밀수는 시장공간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청염을 팔 수 없으면, 밀수도 이익공간이 없다. 군사적으로 속속 승리를 거둔 이원호는 돌연 눈치를 챈다. 서하의 재정수입이 줄어들어 위기에 빠지게 된 것이다.
송나라는 전쟁은 엉망으로 싸웠지만, 경제는 잘 살렸다. 송나라사람들의 수단과 방법은 대단했고, 상업의 재능은 세계최고라고 할 정도로 천부적이었다. 그리고 경험을 축적한 무역전을 통해 송인종의 시대에 마침내 거대한 성과를 거둔다. 이원호의 서하제국은 경제적으로 점차 북송에 목줄이 잡히게 된다.
연이은 전쟁으로 원래 300여만의 인구에 불과한 서하는 이때 병사의 수가 가장 많을 때에는 50만에 이르렀다. 평균 매 5명의 서하인이 1명의 서하병사를 먹여살려야 하는 것이다. 민중의 경제와 요역부담이 얼마나 컸을지 알 수 있다. 청염무역이 금지되자, 서하의 최대재정수입원이 절단되고, 북송은 당항에 대한 무상제공은량, 포필견주(布匹絹綢)와 양식등 "세사(歲賜, 하사품)"이 중단된다. 그리고 변경무역시장도 폐쇄된다. 서하에 식량, 포필, 차 및 기타 각종 생활용품의 판매도 금지된다. 이렇게 되자, 생산능력이 심각하게 부족하고 나라는 작고 국토는 좁은 서하로서는 심각한 경제적 곤경에 빠지게 된다.
북송의 강력한 무역전앞에서, 서하의 국내는 재원이 고갈되고, 물가는 급등하며, 차를 가지고 음식구조를 개선하던 유목민족은 '마실 차는 없어지고, 옷값은 천정부지로 뛰는' 상황이 되자, 속속 대량의 인원이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남은 민중들은 심지어 서하국내에서 '십불여(十不如)'같은 민요를 지어 이원호정부를 풍자했다.
청염등 중요한 재정수입원을 잃게 되자, 서하의 각 부락의 우두머리들도 전쟁에 반대한다. 당시, 서하의 병사제도는 평상시에 생산에 종사하고, 전시에 싸우는 것이었다. 병사들은 반드시 스스로 말과 양식을 준비해야 했다. 그리고 북송과의 해마다 이어진 전쟁에서 원래 인구가 적은 서하에서는 많은 인원이 사상당하자, 농업생산이 심각하게 영향을 받게 된다. 소와 양은 방목할 사람이 부족하고, 기초생산이 정체에 빠진다. 이런 상황하에서, 서하의 국력과 민력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되어, 많은 부락의 수령들이 속속 전쟁에 반대한다. 이는 이원호에게 큰 압력이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지구전은 먼저 국력을 다투는 것이다. 나라가 작고 영토가 좁으며 인구가 겨우 300만에 재정수입을 청염에 크게 의존하며, 경제구조가 단일하고, 북송에 크게 의존하던 서하로서는 군사적으로는 속속 승리를 거두었지만, 오래동안 지속되는 전쟁앞에서는 서하의 상하는 모두 국력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당시 서하의 지식인은 이렇게 지적했다: "국가(서하)는 청백염이 호시(互市)에서 유통되지 않으면서, 비옥했던 토지가 점차 망가지고, 병사들은 백일먹을 식량이 없고, 창고에는 3년치 양식이 쌓여있지 않다." 그리고 북송이 무역전을 실행한 후, 거란과 소규모의 무역만 진행할 수 있었는데, 그것으로 국가을 풍요롭게 할 수 있겠는가>
북송의 무역전은 본질적으로 말해서 "병사들이 백일치 식량이 없게" 만들어 더 이상 북송을 침략할 수 없게 하기 위함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당초 장안과 개봉까지 직접 쳐들어가겠다고 큰소리치던 이원호는 부득이 자세를 낮추어야 했다. 여러번 사신을 파견하여, 북송으로 하여금 서하에 대한 청염수입금지를 풀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군사적으로는 약했던 북송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실력이 있었다. 서하가 무역전을 중단하기를 요청하자, 북송의 명신 구양수(歐陽修)는 송인종에게 이렇게 말한다. 무역전은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킬 수있는 방법이다. 서하에서 청염에 대한 수입금지를 해제해줄 것을 요청하지만, "안된다. 그렇게 해주면 우리에게 손해가 크지는 않지만, 상대방에게 이익은 아주 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당시 아직 젊은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은 더욱 직접적으로 예를 들어 말했다. 서하는 영아와 같다. 완전히 대송이라는 어미의 젖을 먹고 자란다. "서하인들이 우리와 시장을 통해 무역하기를 원하는 것은 마치 영아가 어미의 젖을 바라는 것과 같다." 거대한 국력과 경제적인 우세를 가지고 결국 북송은 장기적인 무역전에서 점차 승리의 서광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정천채에서 대승을 거둔 2년후에 승리자인 서하측이 부득이 북송과 화해를 달성한다. 송인종 경력4년(1044년), 송,서하 양측은 정식으로 합의를 이룬다. 승리자인 서하의 이원호는 북송에 칭신(稱臣)하며 머리를 숙이는 댓가로, 북송이 매년 서하에 "세폐견15만필, 7만냥은과 3만의 차엽"을 선물로 받기로 한다. 이는 역사에서 말하는 "경력화의(慶歷和議)"이다.
이전의 사서에서는 이런 "세사(歲賜)"를 실질적으로 북송이 서하에 지급한 평화를 위한 '배상금'으로 인식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장사에 능하고, 계산에 빠른 송나라사람들은 조금도 손해보지 않았다. 경력화의 이후, 북송은 서하와의 변경무역에서의 상세(商稅)로 적지 않은 돈을 번다. 왜냐하면 청염무역을 계속 금지하는 기초 위에서, 북송의 물자에 크게 의존하는 서하인들은 매년 부득이 많은 은자를 북송정부에 세금으로 내야 했다. 송과 서하의 무역에서 북송은 거의 일방적인 무역흑자를 나타낸다.
명목상으로는 배상금이지만, 실제로는 국경무역을 개방함으로써 북송이 오히려 큰 돈을 벌었다; 마찬가지 상황이 송과 요의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당시, 북송은 비록 전연지맹이후, 매년 요나라에 "세례은 10만냥, 견 20만필"을 진공했지만, 북송 자신의 농업경제가 요나라의 유목경제보다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고 있어서, 북송은 개방과 요나라와의 변경무역을 통하여 매년 하북 한 곳에서만 북송세수가 "40만관"에 달했다. 실제적으로 경제적으로는 전혀 손해를 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하에서, 송휘종 선화4년(1122년), 북송의 신하 송소(宋昭)는 일찌기 이런 비밀을 털어놓은 바 있다. 북송정부가 서하, 요등 소수민족정권에 지급하는 '세사'는 명목상으로는 배상금이지만, 실제로는 변경무역을 통하여 북송이 오히려 돈을 벌었다고.
"무릇 역대조종에서 세비로 지급한 것은 모두 변경무역에서 얻은 세금에서 나왔다. 오랑캐에게 얻어서, 오랑캐에게 다시 준것이니. 중국에는 털끝만큼도 손해가 없었다."
비록 군사적으로는 얻어터지는 상황이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송나라사람들은 경제를 잘 운영했고, 실력과 방법이 있었다. 그리고 몇번 승리를 거두지만, 무역전에서 막대한 피해를 보게 되어 어쩔 수 없이 북송에 '신속(臣屬)'된 이원호는 송나라에서 보내온 사신을 모조리 막았다. 사서기록에 따르면, 북송에서 사절이 가면, 이원호는 일률적으로 유주(宥州, 지금의 섬서성 정변 동쪽)에서 맞이한다. 그리고 한번도 그들 서하국의 도성 흥경부(은천)으로 오지 못하게 했다. 이는 서하의 신민들이 송나라사신을 손님을 맞이하는 예의로 접대하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무역전을 통하여 이익을 얻기는 했지만, 군사적으로 약했던 북송과 남송은 결국 여진과 몽골의 말발굽에 짓밟힐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란인이나 여진인과는 달리 돈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목숨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송나라사람들로서는 방법이 없게 된다.
그래서, 무역전도 할 때는 해야 한다. 그러나 주먹도 키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한번 송나라처럼 되지 않겠는가?
'중국과 역사사건 > 역사사건 (송)'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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