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비역사가(神秘歷史哥)
북송과 남송 사이에 두 개의 왕조가 탄생한 바 있다. 하나는 '대초(大楚)'정권으로 개국황제는 장방창(張邦昌)이며, 겨우 33일간 존속했다; 다른 하나는 '대제(大齊)'정권으로 개국황제는 유예(劉豫)이며 7년간 존속했다.
그럼 먼저 장방창의 대초정권부터 보기로 하자. 1127년, 금군이 변경(汴京)을 함락시킨 후, 송휘종과 송흠중 두 황제를 끌고가면서 북송이 만했다. 다만, 당시 금나라는 잠시 직접 이 광활한 중원지역을 통치할 수 없어, 먼저 괴뢰정권을 만들어 대리통치하게 하고자 했다.
이때, 금군은 변량성의 한족대신들을 모아서 조씨(趙氏)가 아닌 신황제를 공개적으로 선출하도록 한다. 이때 대신들은 내심 투표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투표한다는 것은 공공연히 조씨황제의 합법성을 부정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느날 송군이 다시 돌아왔을 때, 어떤 결과가 될지는 뻔하지 않은가?
다만, 문제는 만일 투표를 하지 않으면, 생명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이런 배경하에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투표권을 행사한다. 결국, 북송재상 장방창이 절대다수의 표를 얻어 새로운 황제에 당선된다.
장방창에 있어서 이 소식은 그를 놀라우면서 기쁘게 만든다. 왜냐하면, 자신이 황제에 오른다는 것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문제는 이런 허수아비황제는 당연히 끝이 좋지 않을 것이다. 장방창은 실로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등극때, 병을 핑계로 거절한다. 심지어 자살하겠다고까지 말한다. 다만 금군의 협박과 유혹하에 그는 결국 황위에 오른다. 국호는 '대초'로 한다.
당연히, 장방창이 등극할 이유는 비교적 충분했다. 왜냐하면 금군은 만일 그가 등극하지 않으면 변경성을 도살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로서는 부득이 황제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장방창은 자신을 위해 빠져나갈 방법도 마련해둔다. 성안의 백성의 생명과 재산에 대하여 심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런 면에서 보면 장방창은 변량성의 백성들에게는 은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중에 금군이 북방으로 돌아가자, 장방창은 즉시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퇴위를 선포한다. 그리고 정권을 강왕(康王) 조구(趙構)에게 넘겨준다. 자신은 계속하여 재상의 직무를 담당한다. 이렇게 하여 존속한지 33일만에 대초정권은 멸망하게 된다.
그후 조구가 등극하고, 조정내부의 주전파인사들은 장방창등 매국노를 숙청할 것을 주장한다.
원래 조구는 장방창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 때 어떤 사람이 나서서 장방창이 송휘종의 비를 데리고 잤다고 고발한다. 이런 죄는 겉으로 보기에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범죄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일을 했따면 그것은 장방창이 내심 조씨황제를 대체할 생각이 있었다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장방창은 변량성에서 황족구성원을 체포하고, 금나라에 항거하는 인사를 잡아죽이고, 금군에게 돈과 재물 그리고 미녀를 긁어모아 바쳤는데, 이는 금군이 그를 핍박해서 어쩔 수 없이 저지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설마 금군이 그에게 송휘종의 비와 자라고 핍박했단 말인가? 그래서, 이건 장방창이 한때 자신이 진정한 황제에 오를 생각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래서 이런 선을 넘는 행위를 했다고 봐야하는 것이다.
이어서, 어떤 사람이 나서서 이렇게 고발한다. 장방창은 금군이 철수한 후, 특별히 맹태후(孟太后)를 데리고 나와 수렴청정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 맹태후는 송휘종의 형인 송철종(宋哲宗)의 황후이다. 여러가지 원인으로, 금군이 대송의 황실구성원들을 수색할 때, 그녀는 요행히 겁난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장방창이 황제가 된 후, 맹태후를 데리고 왔고, 전체행위는 예전에 조광윤이 후주세종(後周世宗) 시영(柴榮)의 부인을 대했던 것과 동일한 행동이다. 장방창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결국 사람들의 강력한 요구하에, 조구는 할 수 없이 장방창을 사사하게 된다. 이런 행위를 처벌하지 않으면 이어서 다른 사람이 본받을 것이기 때문이고, 그것은 조씨정권의 기반을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조구는 장방창에 대하여 비교적 은혜를 베풀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장방창의 이런 행위는 원래 고대황권지상의 사회에서 구족을 멸할 일이었으나, 조구는 단지 그 한 사람의 자살로 끝낸다. 이는 법외개은(法外開恩)이라 할 수 있다.
이어서 다시 유예의 대초정권을 보자. 이는 1130년, 금군이 장강을 건너 조구를 추격하였으나 실패하고, 회군하는 도중에 다시 한세충(韓世忠)등의 기습을 받는다. 금군은 그들이 하남, 섬서지역에까지 통치력이 미치기 힘들다는 점을 생각하여, 혹은 직접 이 지역을 통치하려면 비용과 댓가가 너무 크다고 생각해서인지 허수아비정권을 세우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1130년 칠월 이십칠일, 금태종은 직접 조서를 내려, 송나라에서 항복해온 신하이며 전 제남지부(濟南知府)를 황제로 앉힌다. 국호를 "대제(大齊)"로 하고, 북경대명부(北京大名府)를 도성으로 삼는다. 황하고도 이남의 하남, 섬서지구를 관할한다.
대제정권이 건립된 후, 이러한 완충지대가 생김으로써, 송군과 금군은 마침내 한동안의 평화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하여 1130년부터, 남송정부는 강남의 군사, 정치, 경제자원을 통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강회(江淮)지역의 군벌, 의군(義軍), 유구(流寇), 토구(土寇)를 남송중앙정부가 편입시키거나 소멸시킨다.
4,5년이 지난 1135년경, 남송정부는 마침내 유(劉), 장(張), 한(韓), 악(岳), 오(吳)의 5대집단군을 형성한다. 그후 금나라가 일방적으로 남송을 치는 국면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동시에, 송군도 금군에 반격하는 서막이 열린다.
이어서, 유예는 송제전쟁(宋齊戰爭)에서 계속 실패하면서, 금나라는 대제가 금,송간의 완충역할을 해내지 못할 뿐아니라, 금나라의 부담이 된다. 그리고 금나라도 중원을 통치할 효과적인 모델을 찾아낸다. 그리하여 점점 대제정권을 없앨 생각을 품게 된다. 그리하여 1137년 십일월, 금희종은 명을 내려 제나라를 없애고, 변경에 행상서대를 설치하여, 하남, 섬서지역을 통치한다. 이렇게 대제정권을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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