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소십일(蕭十一), 육신뢰뢰(六神磊磊)
1
새책이 나온 것을 빌어 진실한 역사를 얘기해보자. 문천상의 죽음에 관하여.
나의 주업은 김용소설을 읽는 것이다. 김용소설 <의천도룡기>에는 절세고수 장삼풍(張三豊)이 문천상의 죽음을 그의 평생 가장 큰 유감이라고 말한다:
"문천상이 강개취의(慷慨就義)할 때, 장삼풍은 아직 나이가 어렸지만, 이 영웅승상을 극히 존경했다. 나중에 자주 탄식하여 말하기를 그때는 무공을 이루지 못하였다. 만일 무공을 완성했다면 목숨을 걸고 그를 구해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적들에게 포위당했을 때는 장삼풍이 문천상의 시구를 읊기도 했다:
"인생자고수무사(人生自古誰無死), 유취단심조한청(留取丹心照汗靑)"
(사람이 살아서 누군들 죽지 않겠는가. 그저 충성스러운 마음을 남겨 역사를 빛내리라)
정상적인 논리대로라면 문천상이 체포되었으면, 남송사람들은 마땅히 장삼풍과 마찬가지로 온
갖 방법을 강구하여 그를 구하려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진실된 역사는 정반대이다. 당시 일부 남송사람들은 오히려 문천상이 죽기를 죽어라 바랬다.
아래의 내용은 주로 새로 나온 책 <역사의 조요경(照妖境)>에 나오는 내용이다.
2
남송 경염3년(1278년) 십이월, 광동(廣東) 오파령(五坡嶺)에서 급히 식사를 하던 문천상은 원나라군대에 추격을 당하게 된다.
문천상은 황급히 휴대하고 다니던 독약 2편의 빙편(氷片)을 복용한 후 급히 찬 물을 마셨다. 빨리 죽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혼절하였을 뿐" 죽지는 않았다.
포로가 된 후, 괴이한 일이 발생한다. 문천상이 체포된 것을 가슴아파하는 사람도 있지만, 문천상이 죽기를 바라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많았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열혈청년 왕염오(王炎午)였다.
왕염오는 자가 정옹(鼎翁)이고, 남송의 태학생(太學生)이다. 엄격하게 말해서, 문천상은 그를 이끌어준 은혜가 있다. 당초 문천상이 거병하여 근왕(勤王)하고자 했을 때, 왕염오는 그의 부대에 참가했었다.
당시, 왕염오는 한편으로 문천상의 항원의거를 칭송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문천상에게 집안재산을 모두 팔아서 군대물자를 조달하고, 병력을 늘이자고 건의한다. 문천상은 기꺼이 그의 건의에 응하면서 그를 칭찬한다: "군대내에 소범(小范)을 한명 얻었다." 여기서 소범은 범중엄(范仲淹)을 가리킨다. 그리고 왕염오를 자신의 막부에 남기고 직위를 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소범'은 떠나버린다. 이유는 "몸이 태학에 있고, 부친의 장례를 아직 치르지 못했고, 모친의 병이 위급"하여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보살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천상은 그의 고충을 이해하고, "가련하게 생각하면서 그가 말하는대로 해주었다"
왕염오가 집으로 돌아가고나서 3년이 지났다. 이 기간동안 문천상이 얼마나 힘들게 싸우든지간에, 그에게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나중에 문천상이 오파령에서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난 후에 열혈청년 왕염오는 피가 들끓어 올랐다.
온갖 방법을 다해서 문천상을 구해주고자 한 것인가? 답안은 정 반대이다. 왕염오는 문천상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말을 듣자, 아주 놀라면서 유감스럽게 여겼다. 그리고 문천상에게 묻는다: "문승상. 구차하게 살아갈 생각을 하십니까. 죽으려고 하지 않고?"
3
도덕적인 견지에서 왕염오는 <생제문승상문(生祭文丞相文)>이라는 글을 쓴다.
제목부터 소름이 끼친다. 소위 '생제(生祭)'는 문천상이 살아있을 때 그를 위해 미리 제문을 짓는다는 것이다.
글에서 왕염오는 "승상이 빨리 죽도록 하기 위하여" 여러 각도로 논증을 했다: 문승상은 왜 죽어야 하는가? 왜 살아서는 안되는가?
그의 기발한 각도는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된다:
- 과거에 급제했고, 시문을 남겼으니, 죽어도 된다;
- 부모에 효도하여, 유감이 없으니, 죽어도 된다;
- 출장입상(出將入相)해서 큰 인물이 되었으니, 죽어도 된다;
- 의롭게 거병하여 근왕하며, 평생 배운 것을 헛되이 하지 않았으니, 죽어도 된다.
결국 당신 문천상은 평생 유감으로 남길만한 것이 없는 일생을 살았고, 오직 죽는 것만 남았다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죽어야 완벽해진다는 것이다. 나 왕염오는 매일 매시 당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자 했는데, 아쉽게도 당신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다. 그러니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는가
그리하여 왕염오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계속 질질 끌면서 죽지 않는게 혹시 다른 생각을 품어서는 아닌가?"
혹시 도망칠 생각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가? 미안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대송은 이미 끝났다. 당신은 대송과 함께 순장되어야 한다. 다른 변명은 모두 필요없다.
그레서, 왕염오는 아주 세심하게 문천상이 잘 죽는 방법까지 얘기해준다: 마땅히 7일전에 금식하여야 한다. 소위 "인불실일곡측폐(人不七日穀則斃)"(사람이 칠일간 곡기를 끊으면 죽는다). 이렇게 하면 여릉(廬陵)에 도착할 때쯤이면 마침 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문물이 흥성한 여름과 충열의 문천상은 짝이 잘 맞는다. 문천상의 죽음은 태산보다 무거울 뿐아니라, 아름답게 된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왕염오는 쓰는 것이 빠를 뿐아니라, 집행력도 끝판왕이다. 전혀 미루는 법이 없다. <생제문천상문>을 완성한 후, 그는 자로 수십번 초록해서 감주(贛州)에서 홍주(洪州)에 이르는 역참(驛站), 담벼락, 성벽등에 모두 붙여놓았다. 그리고 문천상이 지나가는 길에 이 글을 보고서 자살하기를 바란 것이다.
4
왕염오의 이런 행동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대체로 '이중기준의 극치라 할 수 있다
당초 자신은 전쟁을 앞두고 겁을 먹고 물러났으면서, 이유는 노모가 집에 있어 봉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천상도 그것을 이해해주고 부대를 떠나는 절차를 밟아주었다.
그러나 문천상에게도 노모가 있고, 처가 있다. 그런데 어찌 그는 굳이 죽어야 한단 말인가?
사실상, 문천상은 집안의 장남이다. 부모와 처외에 두 명의 동생, 한 명의 여동생, 두 명의 아들, 여섯명의 딸이 있다.
이들은 모두 마음이 쓰이는 대상이다.문천상은 그들을 위해 많은 시문을 지었다 예를 들어, <모(母)>, <곡모대상(哭母大祥)>, <장모부감도서창(將母赴贛道西昌)>, <처(妻)>, <처자(妻子)>, <장자(長子), <차자(次子)>, <이녀(二女)>, <득아녀소식(得兒女消息)>, <기혜주제(寄惠州弟)>, <별제부신창(別弟赴新昌)>, <곡처문(哭妻文)>등이 있다.
이런 직접적이고 질박한 제목만 보더라도, 문천상이 마음 속으로 얼마나 가족들을 그리워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처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천상천하(天上地下), 유아여여(惟我與汝), 오호애재(嗚呼哀哉)"
처자식들에 대한 미안함도 있다; "아위강상모(我爲綱常謀), 유신부득고(有身不得顧), 처혜막망부(妻兮莫望夫), 자혜막망부(子兮莫望父)"
동생들에 대한 그리움도 있다: "유매유매가유리(有妹有妹家流離), 양인거후휴제아(良人去後擕諸兒)" "대상소소격(對床小疏隔), 연연제형정(戀戀弟兄情)"
자녀에 대한 그리움도 있다: "안리유종경사별(眼裏遊從驚死別), 몽중아녀위생리(夢中兒女慰生離)"
왕염오와 비교하면, 문천상의 일가노소는 모두 나라에 충성을 다했고, 온갖 고난을 겪었다. 경염2년(1277년) 팔월,문천상과 장남 문도생(文道生)이 공갱지역(空坑之役)에서 겨우 포위망을 뚫었다. 그러나 처인 구양부인(歐陽夫人)은 원군에 포로로 잡힌다. 그리고 차남 불생(佛生), 이녀 유낭(柳娘), 삼녀 환낭(環娘)과 함께 대도(大都)로 압송된다. 요행히 포위망을 뚫었던 문도생도 다음 해 병사한다. 나이 겨우 13살이었다.
차남 문불생은 압송도중 실종된다. 그때 나이 겨우 11살이었다. 문천상은 소식을 듣지 못해 둘째아들이 죽었다고 여겨 비통해 마지 않았다. 그리하여 동생 문벽(文璧)의 아들 문승(文陞)을 양자로 삼는다.
한가지 사례를 보면, 문천상이라는 사람은 원칙을 견지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동생 문벽은 자신과 함께 과거에 급제한 진사였다. 애산지전(崖山之戰)이후, 송나라는 멸망했고, 문벽은 혜주를 지키고 있었다. 그가 거느리는 병사는 겨우 몇백명이었다. 백성들이 도륙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문벽은 투항한다. 문천상은 이를 시로 읊어 탄식한다: "제형일수일승마(弟兄一囚一乘馬), 동부동모부동천(同父同母不同天)" 그는 충성, 절개에 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다.
그러나 그는 그렇다고 해서 동생에게 죽으라고 핍박하지 않는다. 문벽도 송과 함께 순장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양자 문승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렇게 적는다: "나는 재상, 장군의 자리에 있었으니, 마땅히 순국해야 한다. 너의 생부와 너의 숙부, 고모는 종중의 제사를 지내기로 했다. 충성과 효도를 각자 자신의 뜻대로 하는 것이다."
이 말을 보면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다. 그 뜻은 나는 송나라의 장군이자 재상으로 반드시 순국해야 한다. 죽음 뿐이다. 그러나 너의 생부, 숙부, 고모는 살아서 종중의 제사를 보전하는 것을 선택했다. 나는 그들까지 죽으라고 강요하지 않겠다. 그저 각자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니 너도 그들을 이해해야 한다.
이는 전형적으로 최고의 도덕기준을 자신에게 적용하고, 남에게는 적용하지 않는 것이다.
왕염오는 당초 전투 한번 해보지 않고, 전선에서 도망쳤다. 그리고 되돌아와서, 결사적으로 최후의 순간까지 싸운 문천상을 용납하지 못하고, 그에게 죽으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신의 심미관을 완성하고, 영웅의 이미지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5
문천상이 하루빨리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왕염오만이 아니었다.
그의 글에 대해 당시 많은 사람들이 지지했다. 유요거(劉堯擧)라는 사람은 왕염오의 글을 읽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나중에 한 호사가가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문천상이 홍도의 부두에서 <생제문>을 읽고는 매우 감동받았다. 그리고 옥중에서 300여자의 <사왕염오생제문(謝王炎午生祭文)>을 쓴다. 이런 스토리는 오늘날 쇼츠에서 퍼트리는 유언비어와 비슷하다.
일시에 문천상에 대한 도덕적인 족쇄는 수은이 땅바닥에 뿌려진 것처럼 빈틈이 없게 되어버린다.
그리고 일부 남송의 항신(降臣)들도 문천상이 빨리 죽기를 바랐다. 예를 들면 송나라의 반상(叛相) 유몽염(留夢炎)이다.
두 사람은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같이 송나라말기에 장원급제한 승상인데, 문천상은 불굴의 의지로 결사적으로 싸웠고, 유몽염은 싸우지도 않고 바로 항복했다.
문천상이 포로로 잡힌 후, 두 사람은 북경에서 만난다. 인품이 강직하고, 명성이 높은 문천상에 대하여 유몽염은 분노하면서 꺼려했다.
당시, 남송의 구신들을 집단으로 쿠빌라이에게 문천상의 목숨을 살려주고 그에게 도사가 되게 해달라고 요청하려고 준비했었다. 쿠빌라이도 문천상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문천상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때 유몽염이 일어나서 정확하게 치명적인 일격을 날린다: "문천상이 살아남아서 다시 강남에 호소하면, 우리 열명은 도대체 어디로 간단 말이냐?" 그 말의 뜻은 만일 문천상이 다시 나톼서 항원의 깃발을 내걸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다가, 아무도 책임지고 싶어하지 않았고, 결국 그냥 각자 집으로 흩어진다. 문천상은 이렇게 유일한 생로를 잃게 된다.
결국, 끝까지 원나라의 관직을 맡지 않겠다고 버틴 문천상은 죽임을 당한다. 옷과 허리띠에는 이런 유언을 남긴다: "공왈성인(孔曰成仁), 맹운취의(孟云取義), 유기의진(惟其義盡), 소이인지(所而仁至). 독성현서(讀聖賢書), 소학하사(所學何事)? 이금이후(而今而後), 서기무괴(庶幾無愧). 송승상문천상절필(宋丞相文天祥絶筆)"
문천상이라는 대조물이 없어지자 유몽염은 바라던 대로 승진을 거듭하여 원나라의 승상에 까지 오른다.
6
이 일에는 한 가지 뒷이야기가 있다.
문천상이 죽었다는 소식이 대강남북에 전해지자, 열혈쳥년 왕염오는 그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는 다시 붓을 들어 <망제문승상문(望祭文丞相文)>을 써서, 문천상의 죽음은 "일월도광(日月韜光), 산하개색(山河改色)"(해와 달이 빛을 감추고, 산과 강이 색을 바꿀) 죽음이라고 하면서, "3천년간(三千年間), 인불양견(人不兩見)"의 죽음이라고 하였다. 즉 의미있는 죽음이고 가치있는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왕염오 본인은 항원, 순국하여 문천상의 뒤를 따랐을까? 미안하지만 왕염오는 살아남는 것을 선택한다.
문천상이 죽은 후, 왕염오는 태평무사하게 41년을 더 살다가 73세의 나이로 죽는다. 그가 남긴 사(詞)를 보면 그가 얼마나 편안하게 잘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세사무정(世事無情), 천공유의(天公有意), 세세동풍세세화(歲歲東風歲歲花)
변일소(拚一笑), 차성래배주(且醒來杯酒), 취후배차(醉後杯茶)
'중국과 역사사건 > 역사사건 (송)'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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