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안금(安錦)
함풍11년, 내우외환을 겪은 후의 함풍제 애신각라 혁저(奕詝)가 승덕 피서산장에서 병사한다. 그리하여 그는 자금성이외에서 병사한 두번째 황제가 된다(북경으로 들어오기 전의 누르하치나 홍타이시는 제외).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인 애신각라 재순(載順)은 자연스럽게 황위를 승계한다. 먼저 숙순(肅順)등 찬양정무팔대신(贊襄政務八大臣)이 정한 새 연호는 "기상(祺祥)"이었다. 그러나 서태후가 공친왕(恭親王) 혁흔(奕訢)등과 손을 잡고 "신유정변(辛酉政變)"을 일으켜 팔대신을 주살하고 정권을 탈취한 후 연호를 "동치(同治)"로 바꾼다.
이때부터 양궁태후(兩宮太后)(즉, 동태후 자안태후와 서태후 자희태후)가 수렴청정하고, 공친왕 혁흔이 정부수뇌인 의정왕이 된다.
- '학습지진아' 황제
동치제 재순은 이런 정치배경하에서 황제가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6살이었다. 6살짜리 어린아이가 무엇을 알겠는가. 그의 주요임무는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양호한 제왕교육을 받아, 나중에 합격점을 받는 황제가 되면 그만이다. 그리하여, 어린 동치제는 가장 좋은 제왕교육을 받는다. 그의 스승으로는 체인각대학사(體仁閣大學士), 도찰원좌도어사(都察院左都御史) 기준조(祁寯藻), 체인각대학사, 병부상서(兵部尙書) 옹심존(翁心存), 문연각대학사(文淵閣大學士), 공부상서(工部尙書) 왜인(倭仁, 몽골 정홍기 사람), 내각학사(內閣學士), 호부좌시랑(戶部左侍郞) 이홍조(李鴻藻)등인데, 이들은 모두 당대에 학식이 가장 뛰어난 선비들이었다.
이치대로라면, 소황제가 이렇게 우수한 스승을 모셔서 배우니 학업성적이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정반대였다. 동치제라는 어린아이는 공부를 아주 싫어하는 전형인 타입이었다. 그는 책을 읽기만 하면 졸고, 정신을 딴데 팔아 정력을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그렇게 14살이 된다. 이치대로라면 황제가 이 나이가 되었을 때, 양궁태후는 황제에게 정무권한을 넘겨주어야 했다.
그러나, 양궁태후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아주 '합리적'인 이유를 내놓았다. 그것은 바로 동치제의 학업성적이 너무 뒤떨어진다는 것이다. 기본적인 상소문조차 해독이 불가능할 정도이니, 어찌 번잡한 조정업무를 처리하겠느냐는 것이었다. 당연히 어떤 사람은 이를 두고 서태후가 최고권력을 탐하여 고의로 동치제에게 권한을 넘겨주지 않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결국 동치제가 스스로 공부를 못한 것을 탓해야 한다. 학업성적이 너무 엉망이었던 것이다. 이때 아마도 동치제는 자신의 선조인 강희제를 떠올렸을 것이다. 강희제는 8살에 등극한 후, 14살에 친정했다. 그리고 그때 그는 이미 아주 성숙한 황제였다. 그러나 자신은 아직 어린아이같다. 그리하여 아예 이왕 버린 몸이라는 심정으로 동치제는 철저히 스스로를 놓아버린다. 무슨 학업성적이니 무슨 스승의 시험이니 모조리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2. 모자불화
모두 알다시피 서태후의 성격은 매우 강인하고 집요하다. 그녀의 아들로서, 동치제의 성격도 그러했다(이후의 광서제도 마찬가지 성격이다. 왜냐하면 광서제의 모친은 바로 서태후의 친여동생이다. 그래서 광서제의 부친은 함풍제의 동생이고, 모친은 서태후의 여동생이다. 광서제 본인도 서태후의 조카이면서 또한 외조카가 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경우, 왕왕 모자 두 사람은 싸움이 그치지 않았고, 기호난하(騎虎難下)의 지경에 처해졌다. 그런 경우 황제의 적모인 동태후 자안태후가 중간에서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 최대한 황제와 서태후간의 갈등을 완화시키려 했다.
중국고대의 역대봉건왕조에서 가장 기본은 "효"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이었따. 동치제는 일국의 군주로서, 마땅히 만민과 전국의 모범이 되어야 했고, 그의 생모인 서태후와 화목하게 지내야 했다(동태후는 사람됨이 온화하고 성격도 부드러워 동치제와 적모 동태후간의 관계는 비교적 괜찮았다. 기실 여기에 동태후에도 아픔이 있다. 왜냐하면 동치제는 어쨌든 서태후의 친아들이고, 자신이 너무 엄격하게 단속하는 것은 적합치 않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동태후 본인의 성격적인 이유도 있어서, 동치제의 동태후에 대한 호감은 자신의 생모인 서태후에 대한 것보다 훨씬 컸다.)
성년이 된 후, 동치제가 서태후를 미워하는 점은 주로 서태후의 권력에 대한 탐욕때문이었다. 일반 백성집안에서도 모자간에 갈등이 발생하면 완화되기 어려운데, 하물며 복잡한 최고권력의 각축장인 황실에서는 더할 나위가 없다.
3. 고부갈등
동치제의 황후는 아루터씨(阿魯特氏)이다. 그녀는 성격적으로 매우 특징이 있는 여성이다. 영화드라마를 보면 아루터씨는 여러번 서태후와 말다툼을 벌인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루터씨가 이렇게 고함을 친 것이다: "나는 대청문으로 들어온 중궁황후이다. 서태후는 자신을 처벌할 자격이 없다!"
원래 동치제의 결혼전에, 그의 황후를 고르는데 있어서, 서태후는 아루터씨에게 불만이 있었다. 첫째는 아루터씨가 그다지 예쁘지 않았던 것이고, 둘째는 아루터씨의 부친이 장원출신으로, 아루터씨는 학식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동치제가 아루터씨를 좋아한 원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서태후는 위기를 느낀다. 일단 아루터씨가 그녀와 같이 정치에 관심이 많으면 서태후는 분명 문화적 소양에서 아루터씨를 따라갈 수 없다. 셋째, 아루터씨는 동치제만 좋아한 것이 아니라, 동태후도 아루터씨를 아주 좋아했다. 이는 서태후를 실망시켰다. 고대에 자녀의 혼인대사는 부모의 명을 따른다. 자신의 친아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경쟁상대인 동태후의 말을 듣다니, 그녀로서는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하여 혼인후 고부갈등이 격화된다. 서태후는 며느리에 대한 불만을 표현함으로써 동시에 아들에 대한 불만을 표현했다. 그러나 동치제라는 무능한 자는 정치적으로 아무런 업적도 내지 못했을 뿐아니라, 가정문제에서도 제대로 처리를 하지 못해 고부갈등이 갈수록 격화된다.
4. 행위가 단정하지 못하다
함풍제의 호색은 역사상 유명하다. 아마도 동치제가 어려서부터 보았기 때문인지, 동치제도 여색을 밝혔다. 조정의 일도 그가 할 수 없고, 가정의 갈등도 해결할 수 없으니, 아예 스스로를 버리고 궁을 나가서 즐거움을 찾았다.
다만 동치제의 주위는 모두 태감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에 가야 여자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태감은 그런 '오락장소'에는 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동치제에게 방법을 알려준다. 그는 바로 공친왕 혁흔의 아들 재징(載澄)이다.
역사에서 재징에 대한 평가는 이러하다: 완세불공(玩世不恭), 품행패괴(品行敗壞), '공자가(公子哥)'기의 패류(敗類). 그는 불학무술(不學無術)하며, 하루종일 여자나 찾고 술이나 마셨다. 패륵(패륵은 친왕과 군왕의 바로 다음가는 작위이고, 종실귀족장위중에서는 서열3위이다)의 신분으로 그 자신만 깨끗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어린 황제 동치제를 데리고 팔대후통을 돌아다녔다. 나중에 동치제가 성병을 얻게 된다(이 견해는 현재 아직은 실질적인 증거가 없다. 다만 이인(李寅)교수의 <피영황제: 이인평설동치제>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후 다시 동치제가 일생동안 자식을 두지 못하고, 사망전의 발병증상 그리고 그의 평상시 단정치 못한 행위를 보면 성병에 걸렸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다만 천화로 죽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필자는 여기에서 성병으로 사망했다는 설을 채택했다). 결국 19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재징도 28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후사를 전혀 두지 못한다. 결국 둘째동생 재형(載瀅)의 아들 부위(溥偉)를 양자로 들여 대를 이었다. 그리고 이후 공친왕의 작위를 승계한다(공친왕은 서태후가 세습망체하도록 봉한 철모자왕이다. 그래서 대대로 친왕이다).
5 정서불안
이 점은 한 가지 사실만으로 알 수 있다. 세상에 감출 수 있는 비밀은 없다. 원래 재징이 황제를 데리고 심화문류(尋花問柳)하는 일을 공친왕 혁흔이 알게 된다. 혁흔은 황제의 숙부이며, 철모자친왕, 군기대신, 정부수뇌로서 국가와 가정의 각도에서 황제에게 행위를 단정하게 할 것을 권해야 했고, 혁흔은 확실히 그렇게 했다. 그러나 동치제는 벌컥 화를 낸다.
황제의 출궁 '미행(微行)'은 원래 그다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온 북경성이 다 알게 되었으니 황제로서 체면을 어떻게 할 것이냐. 동치제가 교활하게 변명하자, 혁흔은 이렇게 말한다: "나의 아들 재징이 나에게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 둘이 어디를 어떻게 돌아다녔는지 상세하게 얘기한다.
그러자, 동치제는 기분이 나빠져서, 조서를 내린다. 공친왕의 세습망체(世襲罔替)의 권력을 박탈하고, 불입팔푼진국공(不入八分鎭國公)으로 격하시킨다(청나라의 종실작위서열은 친왕, 군왕, 패륵, 패자, 진국공, 보국공, 불입팔푼진국공, 불입팔푼보국공...이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그날로 다시 한번 조서를 내려, 혁흔을 서민으로 격하시키고, 종인부(宗人府)에서 엄격히 관리하도록 명한다.
그렇게 되자 양궁태후가 나서게 된다. 동치제는 양궁태후의 면전에 꿇어앉았고, 양궁태후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만일 공친왕이 없었다면 어찌 너의 오늘이 있을 수 있겠느냐." 결과는 분명했다. 공친왕 혁흔에 대한 모든 처분은 없는 것이 되고, 동치제는 한바탕 욕만 더 얻어먹어야 했다.
정말 유치한 일이다. 일국지군, 만민지주가 이런 수준이라니. 서태후가 권력을 장악한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다. 이런 황제가 재위하면 대권은 반드시 딴 사람에게 넘어간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서태후가 황제의 생모로서 권력을 장악함에 따라, 외척의 난을 일어나지 않았다. 그건 그래도 좋은 점이었다.
위에서 본 것처럼, 동치제는 무식하고 재주도 없으며, 가족에 대한 정도 없다. 그리고 변통할 줄 모르고, 행위도 단정치 못하다. 성격은 과격하며, 이왕 버린 몸이라고 생각하고 마구잡이로 놀았다. 이런 사람이라면 보통사람이라고 해도 문제일텐데, 하물며 일국의 군주라니, 그를 청나라에서 가장 무능한 황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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