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심유경(沈惟敬): 정사(正史)이지만 야사(野史)도 그렇게 쓰기 힘들 것이다.

중은우시 2024. 10. 27. 20:04

글: 최애역사(最愛歷史)

만력20년(1592년) 팔월 이십구일, 평양성(平壤城) 밖의 건복산(乾伏山)은 검날이 눈처럴 하얗게 빛나고, 칼과 창이 도열해 있었다. 한 백발장염(白髮長髥)의 노인이 가솔 몇명을 데리고 진영으로 걸어들어갔다. 그의 얼굴에는 조그만치의 두려운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이해 사월,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하여, 조선을 침략한다.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가 육월에는 평양을 함락시켰다. 칠월, 명군은 조선에 원군을 보내나, 평양전투에서 참패한다. 조선국왕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명나라에서 한명의 유격장군(遊擊將軍)이 왔다. 그의 이름은 심유경이다. 비록 무직(武職)이긴 하지만, 그를 따르는 사람은 몇명이 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 나이도 들고 체력도 약해보였지만, 말솜씨는 뛰어났고, 담량도 남달랐다.

그는 조선국왕에게 이렇게 말한다. 명나라조정은 대군을 보내 도와주기로 했고, 선두부대는 이미 관외로 나왔다. "너희 나라를 회복해줄 뿐아니라, 일본의 소굴까지 진격해 들어가 뒤집어 버리겠다." 이어서, 그는 쉬지 않고 평양으로 달려가 왜인의 허실을 알아보고자 한다.

심유경이 평양성의 아래에 도착한 후, 가정(家丁) 심가왕(沈嘉旺)에게 말을 타고 성안으로 들여보내, 명신종(明神宗) 만력제(萬歷帝)의 성지를 내밀며 "조선이 일본에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일본이 이렇게 군대를 동원하는가?"라고 질책한다. 일본군은 이에 팔월 이십구일 직접 만나서 논의하기로 약속한다. 그리하여, 첫부분의 장면이 나나오게 되는 것이다.

심유경은 담담하게 칼날이 가득한 가운데로 들어갔다. 그의 상대편에는 명군에게 패전을 맛보게한 일본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일본이 출병한 원인을 설명한다. 일본은 대명에 조공을 하길 원하는데, 조선이 길을 막았다. 그래서 병력을 일으킨 것이다. 심유경은 말한다: "평양의 서쪽은 바로 중국이고, 동쪽은 조선이다. 우리가 관여할 수 없다." 그 말에 숨은 뜻은 일본군이 침략한 일에 대하여는 잠시 추궁하지 않겠지만, 일본군이 더 이상 진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쉽게 속여넘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지도를 가리키며 질문한다: 여긴 분명히 조선의 토지이다. 심유경이 대답한다. 조선은 항상 이곳에서 성지를 받들었다. 그래서 여러 궁전을 세운 것이다. 비록 조선의 땅이지만, 명나라에 속한다. 이렇게, 쌍방간의 시탐(試探)은 끝이 난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돌아가서 보고하겠다고 말하고, 심유경과 50일간 휴전하기로 합의한다.

이번 교섭에서 심유경은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는 용기를 보여 조선인들에게 찬사를 듣는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50일간 성밖으로 나오지 않게 한 것은 정말 하늘이 놀랄 장거라고 말했다. 그가 돌아오는 도중에 연도에 백성들이 수천수백 모여들이 이 대영웅의 모습을 앞다투어 보고자 했다. "도대체 어떤 남자이기에, 그런 큰 일을 해냈는가?"

고니시 유키나가는 심유경을 만난 다음 날, 서신을 써서 보내면서 그를 칭찬한다: "대인은 칼날 속에서도 얼굴색이 변하지 않았다. 일본인이라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심유경은 만족해하면서 이렇게 대답한다: "그대는 당나라에 곽령공(郭令公)을 들어보지 못했는가? 그는 단기로 회흘만군의 가운데로 들어갔지만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다. 내가 왜 그대를 무서워해야 하는가?" 고대에 곽자의(郭子儀)가 단기로 회흘을 물리친 일을 들어, 지금 심유경 1인이 공격을 막은 일과 비교했다. 이 얼마나 호탕한 말인가.

심유경은 56세의 몸을 이끌고 이국의 험산준수를 넘어, 매일 오십리를 걸었다. 산은 높고 길은 멀며, 길은 험하고 길었따.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운명의 전기가 도래했다는 것을.

56세, 공을 세우기 좋은 나이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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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격장군에 임명되기 전에, 심유경은 관직을 가진 적이 없고, 일개 평민이었다. 가흥(嘉興) 출신으로 시정에서 살았고, 나이가 들어서 비로소 출세한 것이다. 그는 '무뢰배'식의 인물인데, 어떻게 이렇게 중요한 외교무대에 서게 되었을까?

조선인 신흠(申欽)은 <상촌고(象村稿)>에서 심유경이 스스로 한 말을 기록으로 남겼다: "가정(嘉靖)연간, 절직총독(浙直總督) 호종헌(胡宗憲)의 부하로 간첩을 이용하여 왜구를 독살했다. 그리하여 왜국의 사정을 잘 알았다. 병부에 글을 올려, 왜노에게 상유를 전하길 청했다." 즉, 심유경은 일찌기 군대에 들어가 왜구와 싸웠다. 호종헌의 부하로 전공을 세우고, 일본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유격장군"이라는 직위를 얻어 조선으로 가서 "적정(敵情)"을 정탐하는 임무를 맡은 것이다.

천계(天啓)연간의 <평호현지(平湖縣誌)>에는 더욱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현지부호 심곤(沈坤)은 무술을 익히고, 글은 읽지 않았다. 세금을 거두는 하급관리를 지낸 바 있다. 흉년이 들었을 때 국가의 공용재물을 나누어주어 이재민들을 구한 바 있다. 그리하여 감옥에 갇힌다. 가정연간, 왜구가 침입하자, 심곤은 아들 심유경을 데리고 호종헌의 휘하로 들어간다. 부자 2명은 독을 지닌 약주를 가득 싣고, 명군(明軍)에 주기 위해서 간다고 하면서, 왜구의 군영을 지나간다. 그리고 왜구가 나타나자 약주를 버리고 즉시 도망친다. 왜구는 약주를 얻어 크게 기뻐하면서 나누어마셨고, 적지않은 왜구가 사망한다.

일본 동양문고에서 소장하고 있는 <청계심씨육수가승(淸溪沈氏六修家乘)>이라는 책이 있다. 이는 청나라말기의 관리 심응규(沈應奎)가 편찬한 족보이다. 그 기록에 따르면, 심씨는 평호(平湖)의 망족(望族)이고, 제8대는 가정연간에 활약했다. 그중에는 심곤이라는 사람이 있다. 청계심씨는 동탕의 시대를 살았고, 그들은 병사를 가지고 마을을 지켰다. 아마도 약간의 밀수사업을 벌였고, 왜구와의 관계도 밀접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호종헌은 왜구를 심씨의 집으로 유인한 후 일거에 섬멸하려고 했다. 그러나 어떻게 기밀이 누설되었는지, 왜구가 도망쳐버리고 만다. 호종헌은 심씨가 기밀을 누설했다고 보고 감옥에 가둔다. 심씨일족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서로간에 연락이 되지 않게 된다. 이 버전은 천계연간의 <평호현지>의 기록과 차이가 있다. 심씽리족은 도대체 왜구와 싸운 영웅인가 아니면 왜구에 기밀을 누설한 간첩인가? 혹은 이중신분을 가졌는가. 지금으로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심유경에게는 항왜(抗倭)의 기억이 깊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가정연간 왜구와의 전투와 만력연간의 조선에서의 전투는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마도 아무 상관없는 두 개의 전쟁이지만, 심유경에 있어서는 운명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정왜란이후, 심유경은 경성을 떠돈다. 거기에서 그는 두 명의 중요한 인물을 만난다. 한명은 심가왕(沈嘉旺)으로, 어렸을 때 왜구에게 잡혀갔다가 어른이 되어 경성으로 도망쳐 왔고, 물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다. 나중에는 심유경에게 의탁한다. 심가왕이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심유경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심가왕의 도움으로 심유경은 일본인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한명은 원모(袁某)이다. 당시 병부상서 석성(石星)의 친아버지이다. 일본이 조선을 기습했을 때, 심유경은 이미 경성에서 삼십여년 굴렀다. 그는 비합법적인 유민이고, 비록 생활에 걱정은 없었지만, 앞날에 희망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바로 역사의 큰 변고로 심유경은 위로 올라갈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원모의 도움으로 석성은 민간에 일본을 잘 알고, 일본과 싸운 경험이 있는 능력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본을 상대하려면 반드시 이런 인재가 필요한 것이다.

개인의 운명은 우연이 작용한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항상 필연의 손이 작용한다.

가정제이후, 명나라의 위기는 갈수록 심각해진다. 간단히 말해서, 주원장(朱元璋)이 설계한 조제(祖制)가 이미 갈수록 상업화된 사회에 적합하지 않게 되었다. 동남연해의 왜구가 바로 그 증거이다. 조정은 민간역량의 활약을 무시하고, 해금을 엄격히 집행하여 해적이 창궐하게 만들었다. 조정에 인재가 많았지만, '지저분하고 힘든 일'을 해본 사람은 몇명이 되지 않았다. 밀수를 막고, 해적을 다독이려면 상업규칙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하고, 이익을 제시하면서 이끌어야 한다. 왜구에 대항하려면, 해외의 정보를 수집하고, 해방(海防)을 중시해야 한다. 이런 기술과 능력은 일반적인 과거출신이 갖추기 어려운 것이다.

당연히, 명나라의 조정도 그다지 늦지는 않았다. 호종헌의 막부는 <주해도편(籌海圖編)>을 만들었고, 이는 적극적인 대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책의 출판은 내각수보 엄숭(嚴嵩)의 지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군비를 명목으로 중앙에서 자금지원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편으로 팽창하고 권력이 집중되는 고문기구가 만들어지고, 다른 한편으로 특수한 재정지출이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조제'를 우회하여 현실에 적응하려는 개혁이다.

이런 배경하에서 경험있는 평민이 외교사명을 부담한다는 것은 그다지 신기한 일도 아니다.

호호탕탕한 파도가 밀려올 때 어떤 사람은 방관하고 어떤 사람은 그 속에 말려든다. 운명이 가장 공평한 점은 바로 누가 먼저 죽을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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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유경은 만력20년(1592년) 육월 이십구일, 압록강 남안의 의주(義州)에 도착한다. 당시 병부(兵部)는 많은 간첩을 보내는데 임무는 적의 상황을 정탐하고, 대일교섭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심유경은 바로 그 중의 한명이다. "유격장군"이라는 직위는 그저 거짓으로 붙여준 것이고, 실제로 그가 한 일은 간첩업무였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달성한 정전합의는 기실 완병지계(緩兵之計)였다. 만남이후 심유경은 한편으로 조선에 적극적으로 전투준비를 할 것을 당부하면서, 명군이 도착하면 다시 평양을 탈환하자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계속하여 고니시 유키나가와 연락을 유지하며, 일본인들이 원하는 바를 파악한다. 일본측이 토로한 소식은 주로 다음의 몇 가지였다: 첫째, 일본은 조선의 길을 빌어 명에 조공하기를 원한다. 둘째, 일본은 평양에서 물러나서, 대동강을 경계로 조선을 명과 나누길 원한다. 셋째, 조선은 일본에 조공을 바쳐야 한다.

구월 이십구일, 심유경은 이런 정보를 가지고 북경으로 간다. 조정은 각부구경과도회의(閣部九卿科道會議)를 조직하여, <병부첩(兵部帖)>을 작성하여, 일본의 요구에 대한 대응을 정한다: 조공을 하려면, 조선을 거쳐야할 필요가 없다. 만일 성의가 있으면, 일본이 먼저 명나라의 책봉을 받고 다시 호시(互市)를 진행한다. 그외에 일본은 조선에서 철군하여 일본으로 돌아가고, 평양, 한성을 돌려주어야 한다.

심유경은 "탐왜(探倭)"의 공로로 "유격장군"의 직위를 실제로 부여받는다. 11월말, 그는 <병부첩>을 가지고 다시 일본군영으로 가서 교섭을 진행하며 일본군을 마비시킨다. 실제로 황제는 이미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에게 명령을 내린다: "기회를 보아 토벌하여 제거함으로써 후환을 막는다." 심유경은 수만개의 모자를 준비하여 일본병사들에게 하사한다. 이를 통해 일본군인의 숫자를 파악하고 이를 조정에 보고한다.

만력21년(1593년) 정월 초엿새, 많은 숫자의 명군이 돌연 평양성 아래에 나타난다. 수백문의 화포가 동시에 발사되니 천지가 갈라지는 것같았다. 겨우 3일만에 평양을 함락시킨다. 그러나, 명나라장수 이여송(李如松)은 승리에 도취하여 가볍게 경기(輕騎)를 이끌고 벽제관(碧蹄館)으로 진격했다가 대패를 맛본다. 그후 쌍방은 대치단계에 접어든

이여송

다.

전장의 상황이 조금만 변화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사람의 운명이 뒤바뀌는지 알 수가 없다. 원래 사기가 올라있던 명군병사들은 점점 전쟁에 흥미를 잃게 된다. 이들은 한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만일 일본이 상대하기 어렵다면 우리가 굳이 조선을 위해 국력은 모두 소진할 필요가 있을까? 평화적인 방법으로 일본이 철군하도록 하면 되지 않을까?

그리하여, 의화(議和, 평화논의)하자는 목소리가 전선과 조정에 울려퍼진다. 백발장염의 심유경이 다시 주목받게 된다.

삼월초, 고니시 유키나가는 심유경에게 편지를 써서 "봉공동귀(奉貢東歸)"를 간청한다. 전쟁을 끝내자는 서신이 마찬가지로 송응창에게도 도착한다. 이 달에 송응창은 심유경의 공로에 상을 내리도록 청하면서, 그가 "여러번 왜군의 소굴로 들어가, 속국에 공을 세웠다"라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참장(參將)으로 승진시킬 것을 건의한다. 사월, 심유경은 다시 기용되어 제3차로 일본군영에 들어갈 준비를 한다.

떠나기 전에 송응창은 그에게 말한다. "이번 화의(和議)는 네가 책임지고 주재해라. 나는 조선을 못살게 수도 없고, 감히 조정을 기만할 수도 없다. 너는 책사 5명을 이끌고 왜군을 일본으로 돌아가게 해라. 그리고 관백(關白)의 항서(降書)를 받아와라." 즉, 심유경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지만 임무는 아주 어려웠다. 첫째, 일본을 철군시키고, 둘째,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죄하는 글을 바쳐야 하는 것이다.

이전에 심유경은 자신의 뛰어난 말솜씨와 대담한 담량으로 삼국의 사이를 오갔다. 명목은 강화(講和)였지만, 실제로는 간첩이었다. 그 결과 명나라조정은 만족하고, 일본은 그를 존중하며, 조선은 감격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그러니 그의 활동은 성공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원래 "왜구를 독살한" 적도 있다. 밀탐의 업무는 그에게 손쉬었다. 그러나 운명은 그에게 호랑이등에 올라탄 새로운 역할이 부여한다. 외교사신.

고니시 유키나가

3

심유경의 외교활동이 처음에는 상당시 순조로웠다. 일본군은 평양성과 한성을 내놓았고, 부산일대까지 철군한다. 조선은 오랫만에 다시 평화를 회복한다. 그러나 곧 협상은 막다른 골목에 몰린다.

명나라의 태도는 "일본이 평화협상을 하려면, 반드시 동아시아체제에 편입되어야 한다. 천하질서의 고유규칙에 따라 '책봉'을 받는 것은 입장권이나 마찬가지이고, 평화협상의 전제이다. 일단 들어오고나면 조선과 같은 속국이 되니 더 이상 마음대로 침범해서는 안된다. '소중화질서'를 추진하는 것은 안되고, '일국지하, 만국지상'을 추구하는 것도 안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의화에서의 조건은 주로 6가지였다: 첫째는 화친으로 명나라공주를 취하겠다는 것이다. 둘째는 조공, 호시를 회복하는 것이다. 셋째는 명과 일본이 우호관계를 건립하는 것이며, 넷째는 조선의 경상, 전라, 충청, 강원 4개도를 할양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조선의 왕자, 대신을 일본에 인질로 보내는 것이며, 여섯째는 조선의 권신이 일본에 충성하겠다고 선서하는 것이다.

명나라는 화친의 선례가 없다. 만일 일본이 '화친'을 통하여 명나라의 유일한 사위국가가 된다면, 그것은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크게 끌어올려주는 것이 된다. 그리하여 일본이 다른 명나라의 번속국보다 높은 지위를 갖게 되는 것이다.

조선이 4도를 할양하는 것은 기실 조선의 영토를 명나라와 나누어가지자는 것이다. 그러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아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명군이 조선을 도우러 온 것은 토지를 차지하기 위함이 아니라, 천조상국의 번속국에 대한 비호의 책임을 다하기 위한 것이고, 변방안전을 유지할 필요때문이라는 것을.

조선의 왕자, 대신을 일본에 인질로 보내는 것은 조선이 일본의 번속국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이 세 가지 조건은 명나라가 주도하는 동아시아체계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황제에게 올리는 글에 기재될 자격조차 없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일본은 계속하여 천하질서의 바깥에 있었고, 이 규칙을 깨려고 시도했다. 그들은 천자에 대하여 경외심이 없고, 명나라를 상국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만력21년(1593년) 육월,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그가 내놓은 조건을 한문으로 써서 고니시 유키나가등 4명에게 가지고 부산으로 가게 한다. 동시에, 또 하나의 서신을 심유경에게 보낸다. 서신에는 "심장군은 용맹하게 적의 군영으로 들어가다니 실로 맹장이다."라고 칭찬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의도는 아주 분명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등이 전권대표가 되어 담판을 진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한문으로 쓴 것은 바로 심유경에게 일본측 요구의 최대한을 제시한 것이다.

심유경의 면전에 놓인 것은 혼자서 완성하기 불가능한 임무였다. 그러나 그는 금방 해결의 관건을 찾아낸다. 명나라에 있어서, 천하질서는 동요될 수 없다. 다만, 실제운용에서는 여지가 매우 많았다. 일본이 투항하는 자세만 보이고 조공을 청하며, 명나라를 상국으로 존중하면, 설사 배후에서 약간의 다른 짓을 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교섭한 후, 심유경은 사자(使者) 나이토 조안(內藤如安)을 데리고 북경으로 가서 봉공(封貢)을 청한다. 그러나 항표(降表)의 내용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록 봉공을 청하는 내용이지만, 말투가 건방지고, 법도에 맞지 않았다. 그리하여, 심유경은 다시 부산으로 가서, 새로운 항표(降表)를 가지고 온다. 이번 항표에서 일본은 먼저 전쟁책임을 모조리 조선에 떠넘겼다. 즉, 교활한 조선이 중간에서 이간질하여 일본이 조공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 전쟁이 일어났다고 했다. 이어서 책봉을 청구하면서, 조공호시를 청한다. 일본은 명나라에 대해 "세작번리지신(世作藩籬之臣)"이 되어 "영헌해방지공(永獻海邦之貢)"을 바치겠다고 했다.

심유경이 초조하게 일본측과 계속 교섭하고 있을 때, 명나라의 중앙정부는 장기간의 당쟁에 빠져 있었다. 주전파와 주화파는 서로를 공격했고, 조선은 책봉할지 말지, 호시를 허용할지 말지를 놓고 반복하여 토론했다. 마치 조선의 국면은 이미 완전히 안정된 것처럼 여겼다. 결국 조선국왕은 더 이상 자신의 국토내에 일본군이 남아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직접 나서서 일본을 책봉해줄 것을 청하게 된다. 명나라조정은 그제서야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책봉하기로 결정한다.

만력22년(1594년) 십이월, 나이토 조안은 1년여를 기다려 마침내 북경에 도착하고, 그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명나라와 "삼사(三事)"협역을 맺겠다고 맹세한다. 즉 "부산의 왜군은 모조리 퇴각한다" "일봉(一封)외에 다른 공시(貢市를 요구하지 않는다." "조선과 우호관계를 맺고, 같은 속국이 된다." 여기에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광망하던 일본인이 왜 갑자기 이렇게 고분고분해진 것일까?

일반적으로 심유경과 고니시 유키나가는 화의를 달성하기 위하여 각자 자신의 군주를 속여, 각각 상대방이 모든 조건을 승락했다고 보고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심유경과 고니시 유키나가의 평화협상은 진전이 많았다. 그가 속인 점은 있지만, 그렇다고 명나라의 이익을 팔아먹은 행위는 하지 않았다.

만력23년(1595년) 사월하순, 심유경은 다시 부산으로 가서, 명신종의 책봉칙유를 읽는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신속히 일본으로 돌아가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고한다. 그리고 풍신수길이 내린 최신 명령을 가지고 온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조선의 왕자를 인질로 보내주면 일본이 점령한 땅은 모조리 둘려주고, 일본의 군사거점도 모조리 파괴하겠다는 것이다.

조선에서 나중에 일본으로 왕자를 보내지 않았지만, 일본측은 여전히 대부분의 왜성(倭城)을 파괴한다.

불가능한 임무가 거의 완성될 상황이었다. 비록 심유경이 명나라조정에 조선왕자를 인질로 보내는 조건은 숨겼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공시(貢市)회복'에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어겼지만, 이건 이미 사신의 지혜와 능력의 극한이었다. 다른 누구라 하더라도 더 나은 협상을 이루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 사람이 전선을 오고가는 사자로서 설사 자기의 권한범위내에서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다지만, 그가 무엇을 결정할 수 있겠는가. 그의 위로는 경략, 제독이 있다. 경략, 제독의 위에는 병부상서 석성이 있다. 석성의 위에는 내각이 있다.내각의 위에는 희노무상의 황제가 있다.

명,일 양측이 회의에 거의 도달했을 때, 조선의 이익은 고려되지 않았다. 조선이 보기에 일본은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우리의 종묘를 불사르고, 우리의 백성을 도륙했으며, 우리의 능묘를 발굴하고, 우리의 왕자를 붙잡아갔다." 그러니 불공대천의 원수인 것이다. 의화는 조선을 망국지경에 처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명나라에 화를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저 불만을 심유경에게 터트릴 뿐이었다. 그들은 계속하여 이렇게 말한다. 명나라황제는 의화를 원하지 않는데, 심유경같은 주화파들에게 눈과 귀가 가리워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존경하던 대영웅은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간적(奸賊)'이 되어버린다.

심유경은 일찌기 조선대신 유성룡(柳成龍)에게 이런 서신을 보낸 적이 있다. 그 안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얼음길은 걷기 힘들고 말도 약하며, 조선의 신하들은 모양이 왜소하고 재능도 없다. 이러한데 어찌 일본측과 교섭할 수 있겠는가. 그는 국왕에게 서신을 보내는 것도 생각해보았는데, 적절하지 않다고 여겨 유성룡에게 도움을 구한 것이다. 그가 중간에서 알선해 국왕을 설득해달라는 것이다. 대국적인 견지에서 출발해서 도움을 달라는 것이다. 이를 보면, 조선이 고의로 평화협상의 진행을 방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은 높고, 길은 멀다. 길은 장애물이 있고 또한 멀다. 심유경은 겨우 출로를 찾았는데, 다시 번속국의 원한까지 고려해줄 수 있었겠는가?

4

만력24년(1596년) 팔월, 명나라사신단과 조선통신사 정사, 부사가 함께 일본으로 가서,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책봉하고자 한다. 원래 조선은 사람을 보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명나라, 일본 양국 외교집단의 고집을 꺽지 못하고 마지 못해 소규모의 사절단을 보낸 것이다.

책봉전례때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이 겨우 일본국왕이라는 허울뿐인 직위를 얻었을 뿐, 나머지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얼굴을 붉히면서 욕한다: "대명이 나를 일본국와에 봉하다니, 이게 무슨 말이냐. 나는 자연히 일본왕인데, 왜 명나라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가." 분노한 나머지 그는 다시 조선을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이 서술은 일본 에도시대 학자의 기록이다. 그리고 일본학자들은 다시 명나라때의 사학자 제갈원성(諸葛元聲)의 <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을 참고했지만, 사실상 이 기록은 사실이 아닌 부분이 많다.

명나라 사신이 책봉이후 병부에 보고서를 제출한다. 이 보고서는 조선의 <선조실록>에 나온다. 그 안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즐겁게 책봉의식을 완성했고, 각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심유경이 하루빨리 철군해달라고 말하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이 성의가 없다고 말하면서, 명나라에서 조선을 혼내달라고 말한다.

조선사신 황신(黃愼)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원래 그들도 책봉전례에 참가하게 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의 협조하지 않자, 화를 내며 그들이 전례에 참가하는 것을 거절한다. 그리고 조선의 무례가 이 정도이니 강화(講和)는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서방선교사인 루이스 프로이스는 <일본보고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만력제가 그의 체면을 크게 살려주었다고 생각하여, 심유경등에 대하여는 아주 잘 대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인에게는 화가 났고, 그들이 책봉의식에 참가하지 못하게 막았다. 심유경은 조정을 시도했고,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서신을 써서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아마도 징벌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설사 그들을 징벌하더라도, 당신은 거기에서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풍신수길이 그 편지를 읽을 때, "내심은 악마가 점령한 것같았다. 그는 큰 소리로 욕을 하면서, 땀이 솟아났고, 머리에는 증기가 솟아올랐다."

이를 보면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갑자기 화를 낸 이유는 조선의 불경때문이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왜 조선침략전쟁을 일으켰는지에 관하여, 여러가지 주장이 있다. 그러나, 그 본인의 말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목표를 전혀 감추지 않고 말한 적이 있다: "곧바로 군대를 조선으로 진격시켜, 명나라의 400여주를 석권하여 황국(皇國)의 판도로 삼는다." 그는 또한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태어날 때 어머니는 해가 배에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점술가가 말하기를 햇빛은 비치지 않는 곳이 없다. 해는 만물을 비친다. 결국 천하를 모두 가진다는 것이고, 중국을 취하여 대체한다는 것이다."

전쟁전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나눠가질 생각을 했다. 그는 부장(部將)들과 약속한다. 만일 명나라를 점령하면, 가토 마사요시(加藤淸正)에게 "명토이십국(明土二十國)"을 주기로 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한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금방 반포한다. "명정복이십오조계획(明征服二十五條計劃)" 그중 18조, 19조는 이렇게 되어 있다. "천황을 북경으로 모시고, 경성주위 10국의 땅을 기내(畿內)로 삼는다; 히데스쿠(秀次, 즉 토요토미 히데스쿠, 토요토미의 양자)를 대당의 관백으로 삼아, 그에게 백국(百國)의 땅을 준다."

그러나, 명나라군대가 출동하자,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대외확장계획은 좌절된다. 그리하여 앉아서 협상을 하게 되었고, 동아시아세계의 규칙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로서는 차선책을 취한 미봉책이고, 또한 유일하게 남은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은 계속하여 조공,호시를 계속하여 간청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실 이는 자신의 야심을 위장한 것이다. 영토를 확장하여 조선의 종주국이 되는 것이 진실한 목적이었다. 이를 위하여 일본은 계속하여 양보했고, 마지막까지 조선이 여전히 신복하지 않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화를 내게 된 것이다.

일본은 동아시아체계에 도전하는 것은 포기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조선도 일본에 굴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명나라는 일본이 동아시아체계에서 조선의 위에 놓이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불가능트라이앵글"이다. 조선에서는 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토요토미가 분노한 그날, 심유경은 자신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혹은 자신의 모든 노력은 처음부터 허망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는 비록 '천하'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동아시아체계의 이단아, 일본의 생각까지는 완전히 알지 못했다. 그리고 조선인의 반발도 그가 충분히 예상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가 모든 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는 했다. 최선의 경우는 의화대표를 맡지 않는 것이지만, 아쉽게도 이건 그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5

만력25년(1597년) 정월 중순, 가토 마사요시는 7천여명의 부대를 이끌고 조선의 남부 해안 기장(機張), 서생포(西生浦)에 상륙하여, 조선을 재침략하려는 모습을 보이며, 조선을 무력으로 압박한다. 반달후, 소식이 북경에 전해지고, 이때는 주전파가 주류를 이루고, 주화파는 지지를 잃었다. 명나라는 더 이상 평화협상에 기대를 걸지 않고 파병을 결정한다.

이렇게 되니 주화파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가 조정이 고려해야할 큰 일이 되었다.

화의를 진행할 때, 적지 않은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어떤 사람은 주화파가 화친을 받아들여 나라의 위세를 욕보였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조건은 시작하자마자 부결되어버린다. 심유경은 대일평화협상의 수석대표이고, "화친"의 스캔들에 빠져서 한때 삭탈관직의 처분을 당한다. 이에 대하여 병부상서 석성은 그가 억울하다고 말하며, 주전파가 고의로 모함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심유경에 대하여 벌도 주지 말고 상도 주지말자고 건의한다. 조선의 전선보다 북경의 전장이 더욱 공포스러웠다.

육월, 일본은 조선왕자를 반드시 인질로 보내야 한다고 고집하면서, 명나라에 철군하지 않겠다고 통보한다. 그리하여 조정은 즉시 전선에 나가 있던 심유경을 체포하여 북경으로 압송한다. 두달 후, 다시 석성을 체포한다. 마지막에 심유경은 "잠통외국(潛通外國)", "기군(欺君)", "모반(謀叛)"죄로 심리한다.

만력27년(1599년) 구월의 가을 어느 새벽, 석성은 형부의 감옥에서 병사한다. 며칠 이후, 심유경은 목이 달아난다.

심유경이 수감된 후, 조선인은 아주 미안해 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국왕에게 상소를 올려 구해주자고 얘기한다: "심대인은 작은 나라를 위해서 왔고, 여러 해동안 이곳에 있었는데, 이제 중죄를 받게 되었으니, 작은 나라의 군신은 모두 안타깝고 억울하다는 생각을 품고 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모르고 있다. 어떻게 하면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조선은 어쨌든 명군에 의지하여 왜군을 격퇴해야 했다. 그러니 황제의 역린을 건드릴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이 일은 흐지부지된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심유경을 그리워하면서, "그는 역시 우리를 위해서 결정한 것이고, 다른 마음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자책한다: "우리는 앉아서 석성, 심유경 두 사람의 화를 보고만 있었다. 아무도 나서서 도와주려 하지 않았으니 어찌 차마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시비와 공과는 이미 구분하기 어렵게 되었다.

만력37년(1609년), 만력제때 한반도의 전쟁이 끝난지 10년후, 일본이 유구왕국을 침략하고, 성공적으로 유구의 종주국이 된다. 명나라는 그 소식을 듣고, 유구의 2년에 한번 조공을 10년에 한번조공으로 바꾸어 징벌했다. 유구는 도잇에 명나라, 일본 양쪽에 조공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동아시아체계는 이미 해체된 것이다. 규칙을 지키지 않는 도전자는 확장의 환상을 버리지 않았다. 여진인이 천하를 차지하게 되자, 동아시아각국은 마음이 더욱 체제에서 멀어지게 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비록 일찌감치 죽었지만, 유령처럼 섬나라의 위를 떠돌아다녔다. 근대이래, 일본은 계속하여 전쟁을 일으켰고, "동아해방" "공존공영"을 외쳤다. 그리고 아무런 거리낌없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사람을 죽이고, 종묘를 훼손했다. 일본은 서방에 배우고, "탈아입구"하였지만 필요할 때는 아무런 망설임없이 국제질서를 버렸다.

이 점을 보면, 일본은 동아시아세계의 대표도 아니고, 근대국가의 일원도 아니다. 그것은 16세기에 머물러있는 하나의 유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