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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만주국 총리 정효서(鄭孝胥): 중국근대 최고의 서예가

by 중은우시 2024. 12. 14.

글: 열독시대잡지(閱讀時代雜誌)

정효서는 1882년 해원(解元, 향시에서 1등을 가리킴)으로 거인(擧人)이 된다. 그는 관료가정 출신일 뿐아니라, 친구들 중에서도 고관대작이 많았다. 이는 그로 하여금 어려서부터 봉건문화교육을 받게 했고, 그는 글재주가 뛰어났다. 그렇지 않았다면 향시에서 1등을 차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장인은 이홍장(李鴻章)과 교분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홍장의 막료가 되고, 그때 엄복(嚴復)과의 관계가 아주 긴밀했다. 그리고 엄복의 아이를 가르치고, 동시에 이홍장으로부터도 크게 인정받는다.

1920년대에 "북우남정(北于南鄭, 북쪽의 于友任, 남쪽의 정효서)"이라는 말이 있었다. 이는 서예계에서 정효서에 대한 존칭이다. 비록 정효서와 우우임은 나란히 거론되지만, 정효서가 나이도 많고 명성도 훨씬 높았다.

청나라 광서연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에게 비(碑)나 편액(匾額)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심지어 어떤 때는 광서제가 하달하는 명령을 모두 정효서가 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05년의 임칙서사당(林則徐祠堂)의 비문도 정효서가 썼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서예계의 지위가 남다른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정효서의 서예에 대한 조예는 심후했고, 그의 글은 풍골건랑(風骨健朗)했다. 글자 한자 한자가 모두 독립된 생명체로 여겨지고, 역량과 활력이 충분하다. 자형과 필획은 수경영일(瘦硬靈逸)하여 사람들에게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미감을 준다. 서지마(徐志摩), 임어당(林語堂)등 여러 국내외명인들도 그에게 배웠으니 정효서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1908년 교통은행의 창시자 양사이(梁士詒)는 은행의 이름을 유명한 사람에게 부탁하여 은행의 명성을 높이고자 했다. 누군가 그에게 정효서를 추천했고, 그는 직접 정효서를 찾아가서 은행의 이름을 써줄 것을 부탁한다. 정효서는 그의 말을 다 듣고난 다음 즉시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높은 가격을 부른다. 4000냥백은.

4000냥백은은 그 시대에 엄청난 금액이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양사이는 두말않고 바로 승락한다. 그리하여 정효서는 "교통은행" 네 글자를 써주게 된다. 현재 우리가 길거리를 다니다가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네 글자이다.

그렇다면, 정효서의 글자 한자는 1천냥의 가치가 있단 말인가? 그의 글씨는 정말 그렇게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1915년, 그는 초판 <사원(詞源)>에 두 글자를 써주고 필비로 500냥백은을 받았다.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은 1만냥 백은을 내고 정효서에게 관명을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글자 5자에 1만냥이니 글자 1자당 2000냥이 된다. 그러나 다 쓰고 난 다음에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어 그 자리에서 불태워버리고 1만냥백은을 포기한다.

진감(陳灨)이 쓴 <기정효서(記鄭孝胥)>에는 이런 말을 썼다: "서(書)라는 것은 신(神), 기(氣), 골(骨), 육(肉), 혈(血)중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된다. 모두 갖추어야 상품이다." 정효서의 글은 바로 모든 것을 갖춘 전형이다.

<정일매선집(鄭逸梅選集)>에서도 그의 해서는 초기에 안진경을 배웠고, 나중에는 당송 여러 서예가를 배웠으며, 주희(朱熹)의 서예와 이곡동공(異曲同工)의 묘가 있다고 하였다.

사람들의 평가에서 알 수 있듯이 정효서의 서예는 역사상 한 자리를 확실히 차지한다. 그 본인은 일대종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의 이름을 많이 들어보지 못했을까? 그것은 그의 말년의 행적과 관련이 있다.

1891년, 이홍장의 아들 이경방(李經方)이 명을 받아 일본에 공사로 부임한다. 떠날 때, 이경방은 글을 올려 정효서를 데려가, 정효서로 하여금 주일대사관의 서기관을 맡게 한다. 그동안 정효서는 고베와 오사카의 영사를 지내며, 일본각계인사들과 교류를 가진다. 이 일은 그의 이후 일생에 화근이 된다.

청일전쟁이 발발한 후, 정효서는 명을 받아 귀국하여 청나라조정의 중임을 맡아 전후로 상광대신(商鑛大臣), 광서무건군통령(廣西武建軍統領), 호남포정사(湖南布政使)가 된다. 무창의거가 발발하자 그는 더 이상 계속 재임할 수 없어 상해로 돌아간다.

신해혁명의 역사변화는 정효서의 심정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는 청왕조의 앞날과 개인의 앞날에 대하여 혼란상태에 빠진다. 중국이 다시 제국주의에 의헤 분할되어, '이화제화(以華制華)'의 국면이 출현하는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자신이 이후 일본제국주의에 무릎을 꿇고 매국노두목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상해에 머무는 동안 그는 '청조유로(淸朝遺老)'로서의 생활에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시시각각으로 청왕조 복벽을 꿈꾼다. 그러나 그는 부득이 새로운 현실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할 점은 그와 부의(溥儀)의 관계가 남달랐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정효서는 부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나중에 정효서는 부의에게 여러가지 아이디어와 계책을 냈고, 부의도 그의 의견은 모두 따랐고, 두 사람은 항상 함께 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정효서는 부의의 지낭이자 심복이 되었고, 결국 그와 부의의 선택은 같아지게 된다.

1931년, 국내외를 깜짝 놀라게 만든 9.18사변이 발발하고, 정효서는 놀라운 선택을 한다. 중화민족의 위기는 신경쓰지 않고, 그는 부의를 "다시 용상에 오르게 하는" 좋은 기회라고 여긴다. 그는 계속하여 일본에 서신을 썼고, 서신에는 일본에 대한 아부의 내용이 충만했다. 이는 그가 매국노라는 확실한 증거로 남는다.

1년후, 정효서는 만주국 국무총리대신이 되고, 얼마 후에는 일본과 <일만협의서>를 체결한다. 이를 통해 일본의 만주에 대한 통치를 확정한다. 협의서를 보면, 정효서는 고위직을 얻기 위해 국가이익까지 팔아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효서의 행위는 그를 존경받는 문화명인에서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매국노로 만들었다.

정효서의 오명으로 사람들은 그를 멸시하게 되고, 그리하여 그의 서예작품들도 인기가 크게 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의 서예수준은 서예계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현재, "교통은행" 네글자는 그가 썼다고 하여 버려지지 않았다. 모든 도시에서 아직도 그의 글씨를 볼 수 있다. 그 개인의 영향이 교통은행에 있어서는 비교적 적고, 또한 교통은행은 이미 백년의 발전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네 글자는 이미 은행의 일부분이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