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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조원임(趙元任): 민국제일귀재(民國第一鬼才)

by 중은우시 2022. 6. 30.

글: 시광고사(時光故事)

 

오늘은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여러분들과 노래 한곡을 감상하고자 한다:

 

하늘에는 몇조각 구름이 떠돌고

땅에는 가느다란 바람이 불고 있다. 

아!

미풍은 나의 머리카락을 휘날린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생각지 않을 수 있을지 가르쳐달라

달빛은 바다를 사랑하고

바다는 달빛을 사랑한다.

아!

이런 달콤함은 하얀 밤과 같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생각지 않을 수 있을지 가르쳐달라.

..............................

 

무슨 노래인지 알아들은 사람이 있는가. 이는 중국 초기에 널리 불리던 <어떻게 하면 그녀를 생각지 않을 수 있는지 가르쳐달라>라는 노래이다.

 

이 노래는 기실 문학가 유반농(劉半農)이 1920년에 창작한 신시(新詩)이다. 한자에서의 "타(他)"는 원래 남녀를 구분하지 않았다. 유반농은 <어떻게 하면 그녀를 생각지 않을 수 있는지 가르쳐달라>라는 시에서 처음으로 계집녀를 붙여서 "타(她)"라는 한자를 창조했다. 그리하여 널리 칭송을 받는다. 이 신시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친구 조원임(趙元任)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이 아름다운 시에 곡을 붙였고, 사람들마다 즐겨부르는 노래가 되도록 했다.

 

조원임을 얘기하자면 그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다. 그를 음악가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그는 코넬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할 때, 음악과목을 공부했고, 음율과 작곡에 능통하기 때문이다. 그가 작곡한 노래는 개략 100여수이고, 거기에는 서지마(徐志摩)의 <해운(海韻)>에 곡을 붙인 것도 있다. 두 사람도 가까운 친구사이이다.

 

조원임이 코넬대학을 다닐 때 주전공은 수학이다. 그는 물리도 공부했다. 하버드대학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의 주전공은 철학이다. 그후 다시 코넬대학으로 돌아가 물리를 가르친다. 이렇게 보면, 조원임은 물리학자라고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그것도 정확한 얘기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 수학, 철학, 음악에 정통한 물리학교수는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여러 학문에 능통한 천재"이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볼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점은 언어분야이다. 여기에서 이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조원임에 대하여 한번 알아보기로 하자.

 

조원임은 "중국언어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는 여러 나라의 언어에 능통했다. 그는 33가지 한어(漢語) 방언(方言)을 말할 수 있었다. 조원임에게 가장 감탄하는 점은 그의 언어장악능력이다. 그는 신속하게 한가지 언어의 성운조(聲韻調)의 시스템을 파악하고 하나의 방언 내지 하나의 외국어의 규칙을 찾아낸다. 그는 양계초(梁啓超), 왕국유(王國維), 진인각(陳寅珏)과 함께 청화국학연구원(淸華國學硏究院)의 "사대도사(四大導師)"로 불렸다.

 

전혀 과장없이 조원임은 보기드문 "귀재"이다. 이런 사람은 왕왕 재미있고 잘 노는 사람이기도 하다. "잘 논다"는 단어는 조원임이 항상 입에 달고 다니던 것이다. 딸이 그에게 물은 적이 있다: "왜 언어학을 하셨어요?"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놀기좋잖아."

 

"잘 논다"는 마음을 가지고 조원임은 심후한 학문을 가지고 "놀았다". 그렇게 하여 위대한 성취를 놀아서 만들어낸다. 또한 남다른 인생을 놀아서 만들어낸다.

 

조원임은 1892년에 태어났다. 조적(祖籍)은 강소(江蘇) 상주(常州)이다. 어려서부터 놀라운 언어적 천부를 드러냈다. 아마도 10살전에 관리로 있던 부친을 따라 중국각지를 돌아다니며 살았기 때문인지 그는 서로 다른 방언에 흥미를 나타냈다. 그는 예민한 청력과 모방력으로 금방 방언들을 장악해간다.

 

조원임은 집안에서는 상주화(常州話)를 배웠고, 이모와 백모에게서는 상숙화(常熟話)와 복주화(福州話)를 배운다. 이렇게 하여 그는 10살전에 기본적으로 10가지 방언을 할 수 있었다. 1907년, 15살의 조원임은 남경의 강남고등학당 예과(豫科)에서 공부한다. 여러 지방에서 온 친구들과 둥근 식탁에서 얘기할 때는 그가 8가지 방언으로 친구들과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모두 그에게 탄복했다.

 

그후, 놀기 좋아하는 조원임은 우등생의 길을 걷는다. 18살이 되던 해, 그는 전국2등의 성적으로 청화대학의 "경자배관유미공파생(庚子賠款留美公派生)"에 합격한다. 시험을 보기 전에 이전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던 라틴어도 독학한다. 그와 같이 합격한 동기들 중에는 두명의 유명한 인물이 있다. 한명은 55등으로 합격한 호적(胡適)이고 다른 한명은 28등으로 합격한 축가정(竺可楨)이다. 

 

1910년, 조원임은 미국 코넬대학으로 가서 수학을 전공한다. 그러나 그는 수학이 별로 재미없다고 느껴서 물리, 기계, 철학, 논리학, 음악등의 과목을 듣는다. 대학에서는 여러 학과를 돌아다니며 강의를 들었고, 이들 과목도 전문학자의 수준까지 공부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언어학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

 

1918년, 조원임은 하버드대학의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코넬대학으로 돌아와 물리학과에서 강사를 지낸다. 그리고 1920년 8월에는 귀국하여 청화대학의 교수가 된다. 기나긴 교수생애중, 조원임은 물리, 수학, 철학, 중국음악사, 중국언어, 한어어법, 이론언어학, 논리학등등을 가르친다.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에 두루 능통하여 출신입화의 지경에 이른다. 

 

조원임이 청화대학에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이 교육자 듀이와 영국의 철학자 루쏘가 중국으로 와서 순회강연을 한다. 그는 루쏘의 통역을 맡았다. 1920년 10월부터 1921년 7월까지, 루쏘는 상해, 항주, 남경, 장사와 북경등지를 다니며 강의했다. 강의내용은 깊이과 넓이가 있었다. 고등수학, 논리학, 철학과 교육등등이 모두 포함되었다. 박학다식하고 영어에 정통한 조원임은 통역하는데 막힘이 없었다. 루쏘조차도 그를 칭찬한다. 

 

그리고, 조원임은 가는 곳마다 그 지방의 방언으로 통역했다. 한번은 장사로 가서 강의하는 도중에, 그는 장사사람에게 장사화(長沙話)를 배운다. 그리고 통역때 장사화를 쓴다. 강의가 끝난 후, 한 학생이 그에게 달려와서 물었다: "조선생은 언제 호남성으로 돌아오신 겁니까?" 원래 학생은 조원임이 정말 호남사람인줄 알았던 것이다. 이 일에 조원임은 득의양양해 했고, 사람들에게 얘기해주곤 했다.

 

방언외에, 조원임은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고대그리스어, 라틴어, 러시아어등 여러 외국어에 능통했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즐거운 일중 하나는 세계각지로 가서 현지인들에게 '고향사람'이라는 말을 든는 것었다. 한번은 그가 표준적인 프랑스어 발음으로 프랑스의 소르본느대학에서 강의했다. 강의가 끝난 후 청중들이 모두 칭찬했다. "프랑스어를 프랑스사람보다 잘한다." 그는 파리의 기차역에서 현지인과 파리사투리로 얘기를 나누었는데, 상대방은 그가 파리본토박이인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네가 돌아왔구나. 지금은 옛날같지 않아. 파리도 가난해졌어." 그는 또한 베를린에서 베를린사투리의 독일어로 현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한 노인이 그에게 말한다: "하느님이 도우셨구나. 네가 이번 겁난을 피해서, 평안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니."

 

1925년 9월, 조원임은 청화대학의 국학원에서 교수가 된다. 그는 직접 60종의 방언을 고찰하고 연구한다. 저명한 언어학자인 왕력(王力)은 바로 그의 제자이다. 1927년 10월부터 12월까지, 그는 강소, 절강지역에서 오어(吳語)를 조사하고, 오어를 사용하는 지역의 33종 방언을 기록한다. 다음 해에 편찬한 <현대오어의 연구>는 중국 최초의 현대언어학방법으로 방언을 연구한 저작이다. 이는 현대한어방언학이 정식으로 탄생하는 것을 알리는 책이다.

 

그러나 이 대작은 조원임이 '즐기면서" 쓴 것이다.

 

조원임은 조수를 데리고 오어를 조사했다. 하루에도 여러 곳을 다닌다. 마치고 나면 한밤중이다. 자그마한 여관도 찾기 힘들어서 할 수 없이 조건이 열악한 농가에서 머물러야 했다. 조수는 힘들다고 호소했지만, 조원임은 이를 즐겼다. 한번은 그들이 밤을 새워 소주(蘇州)로 돌아왔는데, 4등 경좌(硬座, 딱딱한 좌석)밖에 없었다. 너무 피곤해서 두 사람은 기차를 타자마자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다른 칸은 이미 떠났고, 이 칸만 움직이지 않았다. 조수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조원임은 웃으면서 말한다: "어쨌든 지금 가봐야 여관도 찾기 힘드니, 그냥 여기서 날이 밝을 때까지 자자."

 

조원임은 이렇게 "딱딱한 학문을 재미있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의 말 속에 "놀기 좋다"는 것은 공리주의도 아니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저 진정한 열정이고, 착실한 지식탐구였다.

 

그 시대에는 자주 기담괴론이 나타났다. 한어가 중국인의 과학적인 사유를 막고 있어서 중국이 낙후한 근원이라든지. 이에 대하여, 조원임은 분연히 반대한다: "한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으로서 내가 말하는데, 한어는 과학적으로 서방언어보다 우수하다."

 

한어의 문자와 언어가 상대적으로 독립성을 가지고 있음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는 여러 편의 동성동운(同聲同韻) 단음자(單音字)를 가지고 절묘한 단문을 쓰곤 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시씨식사사(施氏食獅史)>이다. 전문이 92자인데, 모든 글자의 발음이 shi이다. 다만 성조가 다를 뿐이다. 기문(奇文)이라 아니할 수 없다. 뉴스아나운서라고 하더라도 제대로 읽기가 어려울 것이다.

 

1960년, 이 기문은 <대영백과사전>에 수록된다. 흥미가 있는 사람은 한번 시도해봐도 좋을 것같다. 언어학은 조원임에 있어서, 심오한 학문만이 아니라, 도움이 되는 도구이고, 가장 재미있게 놀 수 있는 친구이다.

 

당연히 조원임에게는 "언어"라는 친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음악도 있다. 조원임은 음악을 좋아했고, 여러 악기에 정통했다. 평생 피아노와 함께 했다. 그는 중국최초의 피아노작품을 창작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딸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그가 언제 시간을 내서 작곡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수염을 깎을 때가 아닐까?"

 

한번은 조원임이 항주 서호로 놀러갔다가 한 목어점(木魚店)에 들어섰다. 그는 이것도 쳐보고, 저것도 쳐보면서 재미있게 놀았다. 순식간에 십여개의 목어를 나란히 놓고 선율을 만들어 냈다. 앞에서 언급한 <어떻게 하면 그녀를 생각지 않을 수 있는지 가르쳐달라>라는 곡은 바로 이렇게 목어로 작곡해낸 것이었다.

 

조원임은 1920년부터 "5.4"이래의 신시를 가지고 작곡을 해왔다. 1928년에는 최초의 가곡집 <신시가집>을 출판한다. 그는 자신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이 가곡집에 쏟아부었다. 그저 열정만 있을 뿐 다른 것은 없다.

 

그는 이렇게 박학다식하여, 언어학자, 수학자, 철학자등등의 수식어를 붙일 수 있다. 그렇게 하더라도 그의 성취를 모두 담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를 "학자"라고 부르고, 더더구나 "문예부흥식의 지자(智者)"이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조선생은 영원히 틀리지 않는다" 이는 미국 언어학계의 조원임에 대한 신뢰를 나타내는 평가이다. 많은 사람들은 조원임과 같이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통재(通才), 귀재에 탄복했고, 그의 순수한 학자로서의 본색을 존경한다.

 

루쏘의 통역을 하는 동안, 조원임은 그의 일생을 바쳐 사랑하는 양보위(楊步偉)를 만난다. 양보위는 일본에 유학한 의학박사였고, 북경에서 삼인의원(森仁醫院)을 만들었다. 결혼전에 그는 양보위와 이렇게 약속한다: 무슨 말을 해도 따르겠다. 다만, 관리가 되라고 하지는 말아달라.

 

조원임은 항상 순수학 학자로 남고 싶어했다. 그가 안신입명(安身立命)할 수 있는 것은 학문이지, 관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성격이 관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 번잡한 행정사무는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국내유명대학의 총장 자리도 여러번 거절했다.

 

1947년, 당시 국민정부 교육부장이던 주가화(朱家驊)는 미국에 있는 조원임에게 여러 통의 전보를 보낸다. 그에게 중앙대학(中央大學, 민국시대 최고의 국립대학)의 총장을 맡아달라고 청한 것이다. 조원임은 다섯 글자로 회신한다: "干不了, 謝謝"(할 수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양보위는 그에게 총장임명의 풍파가 지난 후에 귀국하자고 말한다. 누가 생각했으랴. 이렇게 미국에 남았다가 20년이나 머물게 된다. 1973년이 되어서야 부부는 다시 중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놀기 좋아하고, 놀줄 알고, 영원히 즐겁게 공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조원임의 흥미있는 일생을 관통한다.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의 중국어 로마자에 대한 흥취는 친구의 친구에 대한 사랑과 같다. 정신을 풍족하게 해준다; 자신의 학술에 대한 흥취는 여인의 남자에 대한 사랑과 같다. 영원히 변치않는다. 자신의 예술에 대한 흥취는 남자의 여인에 대한 사랑과 같다. 그녀가 없으면 생활에 아무런 빛이 없다. 조원임은 일생동안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했다. 얼마나 얻기 힘든 즐겁고 멋있는 사람인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의 침대곁에는 여전히 어릴 때 가장 좋아했던 <당시삼백수>가 놓여 있었다. 죽기 전날 저녁에 그는 상주사투리발음으로 두보(杜甫)의 <여야서회(旅夜書懷)>를 읽었다: 

 

성수평야활(星垂平野闊)

월용대강류(月湧大江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