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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민국시대 3대 "여깡패"

by 중은우시 2021. 8. 8.

글: 시광고사(時光故事)

 

우리는 모두 "난세에 영웅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고이래로 난세에는 영웅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많은 기이하고 곡절있는 이야기도 나타났다. 민국시기, 여러 종류의 인물들이 등장했는데, 그중에는 시대의 특색을 지닌 전설적인 여성들도 있다. 오늘 얘기할 것은 바로 난세에 상해탄을 질타한 3명의 대단한 여자들이다. 그녀들은 바로 민국시대 3대 "여깡패(女流氓)"으로 불리는 심패정(沈佩貞), 임계생(林桂生)과 사애진(佘愛珍)이다.

 

심패정: 여권주의의 열혈선구, 원세개의 제자

 

먼저 일찌기 원세개와 '인연'이 있었던 심패정을 얘기하기로 하자.

 

심패정의 조적은 절강(浙江)이고 출신이 남다르다. 일찌기 천진북양여자사범학당에서 공부했고, 나중에 일본, 프랑스등 여러 나라로 유학을 갔으며 비교적 일찌기 서방문화의 영향을 받은 젊은 여성중 한 명이었다.

 

신해혁명이 발발한 후, 심패정은 적극적으로 혁명구호에 호응하여, 항주여자결사대(杭州女子敢死隊)에 참가하여, 이 조직의 호장(虎將)이 된다. 정국이 복잡하여, 심패정은 얼마후 상해로 가서, "여자상무회(女子尙武會)"를 조직하여, 계속하여 여성해방을 위하여 분투한다.

 

나중에 몰락한 청나라봉건황조를 무너뜨리기 위해, 심패정은 당시 여성도 국민으로서 당연히 고대의 화목란(花木蘭), 진량옥(秦良玉)같은 건괵영웅(巾幗英雄)들과 같이 군대에 들어가, 남자들과 함께 보가위국(保家衛國)의 책임을 분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912년, 중화민국이 성립된 후, 임시참의원이 제정한 <임시약법>에는 여자의 참정권이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심패정은 크게 불만을 품고, 여자동맹회를 결성하여, 여러번 참의원과 교섭하여, 원세개가 반포한 임시약법에 반대한다.

 

1912년 8월, 동맹회개조대회가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비서장 송교인(宋敎仁)이 국민당의 신당장을 읽을 때, 막 "여하한 여성의 가입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하자, 심패정은 돌연 30여명의 여자를 이끌고 한편으로 질문하며 한편으로 단상을 향해 몰려가서, 송교인의 빰을 여러 차례 때린다. 장면이 혼란스러워져서 회의를 더 이상 진행할 수 없게 된다.

 

다만, 그후 각종세력의 방해와 제지로 심패정은 점점 고립된다. 결국은 자신의 원래 뜻을 배반하게 된다. 초기에 공화를 부르짖고, 민주를 열렬히 사랑했으며, 중국여권해방운동의 선구자중 한명이었던 심패정이 최종적으로 원세개가 황제제도를 부활시킨 후의 진영에 가담하게 된다.

 

1915년 심패정은 스스로 "대총통의 제자"로 자처하며, 적극적으로 원세개의 칭제를 옹호하며 사방을 돌아다닌다; 원세개도 보답을 했고, 그녀에게 "총통참의(總統參議)"라는 직책을 준다. 두 사람의 관계는 애매했고, 서로 눈빛을 주고 받는다. 심패정은 기꺼이 원세개의 지하애인이 된다.

 

심패정은 또한 청왕조의 원로, 민국군대의 실권자들 예를 들어, 강조종(江朝宗), 단지귀(段芝貴)등과도 가깝게 지낸다. 자신의 미색을 이용하여 그들을 "양부" "양숙부"로 삼는다. 그녀는 북경으로 온 신여성들을 결집하여 자주 권력귀족의 저택들을 드나든다. 강조종등은 그녀들을 위해 '사무실'을 만들어 주었는데, 실제로는 고급클럽하우스였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한번은 심패정이 강조종, 단지귀와 함께 한 고급클럽하우스에서 회의개최를 명목으로 난잡한 일을 벌였다고 한다.

 

"타도원세개파"의 인사들은 매체를 이용하여 사방에 이들의 행위를 전파하고, 심패정과 이들 여자들의 스캔들은 당시 상해의 <신주일보(神州日報)>에 폭로된다.

 

심패정은 신문을 본 후에 분노하여, 옛버릇대로 사람들을 이끌고 그 신문사의 사장인 왕팽년(汪彭年)의 집으로 쳐들어가서 가구를 불태우고, 골동품을 때려부수어, 경성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심패정의 이러한 행동은 원세개 스스로도 부끄럽게 여긴다. 그리하여 자신의 '제자'인 심패장을 반년 감금하도록 명한다. 출옥후의 심패정은 더 이상 옛날의 모습이 아니었다. 원세개의 칭제가 실패한 후, 그녀는 북경을 떠났고, 그 이후 소식이 없다. 전해지는 바로는 우울증으로 죽었다고 한다.

 

임계생(林桂生): 상해 청방의 진정한 창시자. 두월생을 발탁한 여인.

 

모두 상해탄의 흑방거물 두월생(杜月笙)은 잘 안다. 그러나 청방을 창립한 사람이 기실 한 여성이고, 그녀는 바로 두월생을 발탁한 백락(伯樂) 임계생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1877년, 임계생은 소주(蘇州)의 보통집안에서 태어난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미녀였고, 겉으로 보기에는 유약해 보이지만, 실은 외유내강이었다. 그녀가 20살이 되었을 때, 임계생을 집을 떠나 혼자서 상해탄으로 간다.

 

20세기초, 임계생은 "연화간(煙花間)"이라는 기원(妓院)을 연다. 이를 통해 당시 상해 프랑스조계에서 탐장(探長)을 맡고 있으며 '혼세마왕(混世魔王)'으로 불리던 황금영(黃金榮)을 알게 된다.

 

황금영은 임계생을 만나서 첫눈에 반한다. 임계생의 미모뿐아니라, 그녀가 아직 젊은 나이에 두뇌가 기민하고, 말도 잘하여 기원을 인기높게 운영하여 돈을 끌어모으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금영은 즉시 임계생에게 애정공세를 펼친다. 임계생도 자신이 성공하려면 황금영과 같은 '백도'의 보호산이 필요하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부부로 맺어진다.

 

결혼 후, 부부 두 사람은 중국인과 외국인이 섞여 살며 '삼불관지대(三不管地帶)'였던 십육포(十六鋪)에 거주한다. 정명한 임계생은 이곳을 깁ㄴ으로 하여 상해에서 공개적으로 제자를 끌어모은다. 금방 천명이상으로 늘어나고, 당시 상해에서 최대의 흑사회방파인 '청방(靑幇)'이 형성된 것이다.

 

임계생의 지휘하에, 상해청방은 도처에 기원, 도박관, 아편관을 열고, 납치협박, 살인강도를 저질렀다. 이들은 손속이 악랄하고, 온갖 나쁜 짓은 다 자행했다.

 

임계생은 이로 인하여 상해탄에서 유명한 "여깡패"가 된다. 황금영은 그녀의 말이라면 다 들어주었따. 나중에 풍운을 질타한 청방거물 두월생도 임계생의 눈에 들어 직접 길러준 인물이다.

 

두월생이 강호에 나오면서 보여준 담량과 능력은 임계생으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임계생을 그를 키워볼만한 '싹'이락 여긴다. 두월생을 몇번 시험해본 후에, 임계생은 청방에서 하는 총기밀수, 아편판매등 위험한 사업은 모조리 그에게 맡겨버린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황금영이 상해탄의 최대 깡패거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부인 임계생의 공을 벗어날 수 없다.

 

다만 재물과 권력을 갖게 된 황금영은 나중에 여색에 빠져, 젊고 예쁜 명배우 노란춘(露蘭春)에게 빠져, 그녀를 정실부인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강호의 험악함을 제대로 꿰뚫어본 임계생은 철저히 절망하여, 오직 5만위안의 양로비만 가지고 황씨집안을 떠나버린다.

 

그런데, 노란춘이 황씨집안에 들어온 후 황금영의 토지권리증, 채권, 금궤등이 모조리 사라지고 행방이 묘연해진다. 타격을 입은 황금영은 두월생에게 이렇게 탄식하며 말했다: "나의 일생은 성공도 여자때문이고, 실패도 여자때문이다."

 

황금영은 원래 임계생과 다시 결합하고 싶어했지만, 임계생은 결연히 거절한다. 나중에 황금영은 자신의 집안에 600그루의 계화수(桂花樹)를 심어 조강지처 임계생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황금영을 떠난 임계생은 상해 막서마로(莫西摩路)의 작은 서양식건물에 혼자 산다. 강호에서 멀리 떠나,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1981년, 상해탄에서 혈풍성우를 몰고 왔던 전설적인 여인 임계생이 세상을 떠난다. 향년 104살이었다.

 

사여진: 왕정위정권의 "모독사(母毒蛇)", 호란성(胡蘭成)의 마지막 여인

 

민국시대 3대여깡패를 얘기하자면 가장 마음이 악독하고, 손속이 매서웠던 사람은 아마도 왕정위정권 '살인마굴'의 사여진일 것이다.

 

사여진은 상해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 사명삼(佘銘三)은 차상(茶商)이었다. 그는 딸이 가업을 진흥시키길 기대했고, 그래서 사명삼은 그녀를 계수여중(啓秀女中)에 입학시킨다. 당시의 계수여중은 현재의 상해계수실험학교의 전신으로, 백년역사를 지닌 명문학교이다.

 

그러나, 사여진은 용모가 청수했지만, 성격은 과감하고 발호했다. 그녀는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다. 더욱 좋아하는 것은 담장을 타고, 나무를 오르고, 싸움을 벌이는 것이었다. 학교를 마친 후 그녀는 금방 사회의 건달들과 어울린다.

 

15살때, 사여진은 오(吳)씨성의 부잣집 아들과 좋아하여 임신을 한다. 오씨공자가 책임질 생각이 없는 것을 보자, 그녀는 오씨집안으로 쳐들어가 난리를 피운다. 결국 오씨집안에 성공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이 혼인은 결국 이혼으로 끝난다.

 

나중에 사여진은 도박장에서 "요항여랑(搖缸女郞)"이 된다. 구상해에서, 이 일을 하려면 얼굴에 예쁠 뿐아니라, 성격도 발랄하며, 두뇌도 기민해야 한다.

 

사여진은 도박장에서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여, 상해탄에 인기를 끈다. 그리하여 금방 청방의 거물 계운경(季雲卿)의 첩 김보사낭(金寶師娘)을 알게 되고, 그녀의 양녀가 된다.

 

1920년대의 상해는 흑방두목 황금영, 두월생을 제외하고, 또 한명의 이들과 나란히 이름을 떨친 별명이 "상해마왕(上海魔王)"인 오사보(吳四寶)가 있었다. 그때의 오사보는 왕정위정권의 특무기관인 "살인마굴" 76호의 경위대장(警衛隊長)을 맡고 있었다.

 

오사보를 회유하기 위해 계운경은 사여진을 그에게 보낸다. 생각지도 못하게, 사여진은 그후에 오사보의 막후총지휘자가 되고, 그들은 죽을 힘을 다해 일본군을 위해 일한다. 사여진은 상해사람들에게 76호 살인마굴의 "모독사"라고 불린다.

 

사여진도 자신의 별명에 들어맞게 말하는 것이나 일처리가 예리하고 독랄했다. 완전히 여깡패의 모습이었다.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사여진은 양녀를 널리 거둔다. 각종직업과 각종계층이 모두 망라된다. 위로는 은행이사장이나 행장의 부인부터, 아래로는 무녀와 기녀까지. 그녀는 몇몇 "76호"의 관리부인을 끌어모아 "부인집단"을 만들어, 자주 "76호"의 군사행동에 참여한다.

 

1937년, 일본군이 상해를 점령한 후, 사방을 횡행했다. 그러다가, 영국조계에서 막혀버린다. 76호 특무들이 영국조계로 들어갈 때면 매번 순포에게 검문을 당했고, 사여진은 이것이 번거로운 일이었다.

 

1941년 봄, 사여진은 핑계를 대고 백락문(百樂門)으로 가서 머리를 해야한다는 핑계를 대고 영국조계로 직진한다. 그녀는 운전기사와 보디가드에게 초소에서 차를 멈추지 말고 액셀을 밟아 돌진하라고 명령한다. 그 결과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진다. 영국조계의 순포의 절반이 사상을 당했고, 사여진의 운전기사와 보디가드도 총을 맞아 사망한다. 그러나 그녀는 기적적으로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는다.

 

사여진의 이 '망나니행동'은 나중에 '외교사건'으로 비화된다. 일본의 외교압력하에, 영국조계는 앞으로 일본인과 왕정위주석의 특무인원이 조계을 드나들때 검문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데 동의한다. 이 풍파는 이렇게 해결되었고, 사여진은 76호의 대공신이 된다.

 

오사보는 흑도에서 돈을 벌면벌수록 욕심이 커졌다. 이미 집안에 엄청난 재산이 있음에도 오사보는 황금을 운반하는 자동차를 강도하다가 체폭되어 감옥에 갇힌다. 사여진은 갖은 수단을 써서 남편을 감옥에서 구해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출옥한 다음 날 오사보는 급사해버린다.

 

오사보가 죽은 후, 당시 왕정위정권의 선전차장(宣傳次長)으로 있던 호란성은 사여진에게 애정을 느끼고 계속하여 사여진에게 접근한다. 두 사람은 점점 더 가까워진다.

 

1945년 항일전쟁이 끝난 후, 사여진은 감옥에 갇혀 4년간 수감된다. 1949년, 그녀는 보석으로 출감한다. 홍콩에서 3년간 머문 후 다시 일본으로 간다. 거기에서 사여진이 만난 것은 자신을 쫓아다니던 호란성이다. 두 사람은 동병상련으로 서로를 보살핀다. 1954년 3월, 사여진과 호란성은 결혼하고, 일본에 장기거주한다.

 

비록 이전에 장애령(張愛玲)과의 짧은 혼인을 했던 호란성은 풍류로 유명했지만, 그는 사여진을 잘 보살피고 사랑했다.

 

호란성과 결혼한 후, 사여진은 마약밀수, 기원개설로 살았다. 1981년 호란성이 죽고, 사여진은 일본에서 고독하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젊었을 때 얼마나 기가 세고 대단했더라도, 어쨌든 시대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다. 남자들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에 호기가 넘치던 여인도 '부속품'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세월은 그녀의 빛나는 모습도 새겼지만, 또한 탄식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