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이화(章詒和)
강동벽의 집에 기거하는 동안 나는 3명의 교수를 알게 되었다.
한명은 장장강(張長江)이다. 그는 강유위의 제자인 장백정(張伯楨)의 손자이고, 북경사전문가인 장차계(張次溪)의 아들이다. 대외경무학원(지금의 대외경제무역대학)에서 교수로 있었다. 영어를 유창하게 했으면 서예도 뛰어났다. 십일이나 반달에 한번씩 강동벽의 집을 찾아왔고, 강동벽의 문자류업무를 처리해주었다. 그는 나에게 몰래 이렇게 말해주었다: "네가 천극단에 있을 때, 강씨모녀가 너에게 보낸 회신은 대부분 내가 대필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찌감치 너를 알았다. 다만 만날 연분이 없었을 뿐이지."
장선생은 집으로 들어오면 서두르지 않고 탁자로 가서 앉아서 글쓰는 일로 바빴다. 그는 노인과 한담이나 재미있는 이야기나 길거리소식을 많이 알려주었다. 나와 얘기할 때면 국원구사(菊園舊事), 문단장고(文壇掌故)를 들려주었다. 일단 나의봉과 처리할 일을 얘기할 때, 내가 있으면, 모조리 영어로 대화를 나눴다. 나도 이해한다. 어쨌든 남의 집의 사적인 일이니까. 그는 강동벽의 집에서 한번도 식사를 한 적이 없다. 설사 한밤중까지 글을 쓰더라도. 그는 지서달례(知書達禮, 글을 알고 예의를 차리다), 수화풍취(隨和風趣, 쉽게 친해질 수 있고 재미가 있다)한 사람이고, 인정세고를 잘 알아서, 사람들에게 환영받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장장강이 일단 오면, 강씨모녀는 얼굴에 웃음기가 돈다.
1980년대 중반, 대륙에 미국유학붐이 일어난다. 나는 북해후문 부근에서 예전의 상해아가씨를 만난다. 간단하게 얘기를 나눴는데, 그녀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미국에 갈 건가요. 미국에 가면, 장장강을 찾으세요. 그는 이제 교수를 하지 않고, 미국대사관에서 일한다. 아주 잘나간다. 그는 너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고, 자주 네 얘기를 하지 않았느냐" 우리집은 미국대사관에서 아주 가까웠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었다. 그러나 나는 시종 이미 잘나가는 장장강을 찾아가지 않았다. 듣기로, 강동벽 모녀의 장례식에 참가한 사람에 그가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교수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나이들지 않았는데, 이미 온통 백발이었다. 산동대학에서 교수를 지냈다. 심리학과가 정부에 의해 취소된 후 중문과로 바꾼다. 그는 북경으로 와서 개인적인 일을 처리하기 위해 3일간 휴가를 냈고, 강동벽의 집에서 숙식했다. 그는 나의 아버지가 장백균이라는 말을 듣고, 아주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말했다. "나는 영존대인을 아주 존경합니다. 오늘 우리가 마인초(馬寅初)와 장라연맹(章羅聯盟)에 대해 정치적 결론을 내리는 것은 시기상조입니다. 승부가 이기고 지는 것은 마지막 순간이 될 때까지 알 수 없습니다. 현재의 문화대혁명의 성격은 도대체 혁명인지 반동인지, 역사가 평가할 것입니다."
삼일동안, 그는 매일 강청(江靑)에 대해서 말했다. 그는 말했다: "강청이 바로 남평(藍平)이지 않은가. 심종문(沈從文)도 그녀를 안다. 나에게도 그녀에 대해서 얘기했다. 삼류영화스타이고, 품성도 좋지 않은데, 무슨 문화기수라고 나서다니, 그리고 풍운을 질타하는 영웅이 되다니. 그녀가 정계에 나오면, 극히 저열한 수법들을 모두 쓸 것이다. 우리의 영명한 지도자의 '영명'은 정말 거의 없는 것같다. 가장 내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수백만의 공산당원이 모두 복종하고, 참고 심지어 옹호한다는 것이다." 말을 할 때, 분노한 태도와 담량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아예 무슨 교수나 서생이 아니라, 협객, 장사인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헤어질 때, 그는 내가 강동벽의 집에 오래 머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 집은 너무 냉청(冷淸)하고 사람도 적막(寂寞)하다. 이전엔 이렇지 않았었다."
또 한명의 교수는 바로 황만리(黃萬里)이다.
그 날 오후 나는 강동벽의 집으로 갔다. 한 학자풍모의 사람이 식탁 옆에 앉아 있었다. 그는 키가 컸고, 용모가 당당했다. 약 50여세 되어 보였다. 옷도 잘 입었고, 소가죽구두도 서양기가 드러났다.
나의봉이 말한다: "두 사람은 서로 알지?" 우리는 각자 고개를 흔들었다.
강동벽이 기이하다는 듯이 말한다: "어떻게 서로 모를 수 있지. 한 사람은 황염배(黃炎培)의 공자이고, 한 사람은 장백균의 천금인데."
강씨모녀가 어찌 민맹의 복잡한 구조와 인사를 알겠는가. 아버지와 황염배의 교류는 순전히 공무적인 성격이었고, 사적인 교분이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반우이후, 아예 관계를 단절했다.
황만리는 강동벽의 소개를 들은 후 즉시 몸을 일으켜, 나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저는 황만리입니다. 청화대학에서 교수로 있습니다. 비록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지만, 지금은 당신 아버지의 병졸입니다."
한켠에 서 있던 나의봉이 설명해 주었다: "만리는 너의 부친과 마찬가지로 우파의 모자를 썼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을 내밀면서 말했다: "그의 학문은 아주 뛰어나다. 미국에서 3개 대학을 다녔고, 박사학위를 7개나 받았다. 만리, 만리, 그는 원래 붕정만리(鵬程萬里)했어야 했다."
이런 전제가 있다보니, 화제가 있게 되었다. 나는 황만리에게 왜 우파로 규정되었는지 물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황하(黃河)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삼문협공정(三門峽工程)을 반대했습니다." 원래 황만리는 황하의 특징이 진흙모래에 있다고 생각했다. 황하를 다스리려면 모래를 다스리는 것이 관건이다. 그러나 그 당시 소련전문가의 방안은 진흙모래를 처리하는 것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나중에 삼문협은 모래를 파내는데 드는 돈이 발전으로 얻는 돈보다 훨씬 많아졌다. 댐을 계속하여 개조하여 만신창이가 되고, 댐지역의 백성들이 아래 위로 오가면서 이주를 해야 했다. 그리하여 고난이 말이 아니었다. 사실은 증명했다. 그가 맞았다는 것을. 그러나 그는 우파라는 모자를 이십년간 써야 했다.
강동벽은 칭찬하는 말투로 보충해서 말했다: "소우. 만리는 시도 아주 잘 쓴단다."
황만리는 웃으면서 말했다: "무슨 시같은 것은 말씀하지 마십시오. 1957년에 우파로 규정되는데, 내가 쓴 <화총소어(花叢小語)>(수필소설)도 큰 관계가 있습니다."
개락 1시간여동안 얘기를 나누고 나서 황만리는 가겠다고 인사했다. "청화로 돌아가는 길이 머니, 좀 일찍 떠나겠습니다."
강동벽은 그가 떠나는 것을 아쉬워했다. 그의 손을 잡고 재삼 당부했다. "시내로 들어오면 반드시 와야 한다."
황만리도 계속 다짐해서 말했다: "시내를 들어오면 꼭 들르겠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자 강동벽은 비로소 손을 놓아주었다.
이 세 명의 교수와 강씨모녀는 오랜 친구였다. 그들간의 왕래는 무슨 관계가 걸린 것도 아니고, 무슨 이익이 관련되지도 않았다. 완전히 전통사회의 인정이었다. 그들간에 서로 친절하고, 신뢰하고, 편안히 지내는 것은 지극히 속된 인생의 즐거움이다. 또한 얻기 힘든 심령의 조화이기도 하다. 그들간의 이야기는 문화가 풍부하게 축적된 특별한 분위기가 있다. 그런 분위기가 있기에 여운이 긴 것이다. 흰 구름, 가는 비, 부드러운 바람처럼.
나는 매일 저녁식사후에 동사십조의 강동벽의 집으로 갔다. 어떤 때는 날씨가 좋지 않아서, 아버지가 나보고 조금 일찍 집을 떠나라고 했다. 강씨모녀는 내가 일찍 돌아온 것을 보고, 아주 기뻐했다. 만나서 처음 하는 일은 나에게 그날의 뉴스와 길거리소식을 듣는 것이었다. 다 듣고난 후 강동벽이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지금 밖은 너무 혼란스럽고, 사람들은 너무 나빠졌다. 많은 일들이 어떻게 된 건지 알지를 못하겠구나. 나는 네 조대(朝代)를 보냈는데, 결론은 "불변으로 만변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엣날을 그리워하는 것은 우리들의 또 다른 화제거리였다. 과거얘기를 꺼내면, 강동벽은 말이 많아졌다. 그리고 아주 생생하고 재미있었다. 한번은 모두 거실에서 모여 있는데, 나의봉이 전복과 제비집을 오래하는 방법을 얘기했다. 상해소저는 어떻게 샐러드소스를 만드는지를 얘기했다. 나는 아버지와 내가 서양요리를 좋아하는 일을 얘기했다.
강할머니는 내 말을 이어받아 말했다: "선부께서도 서양음식을 좋아하셨다. 런던에서 살 때, 한번은 길거리에서 한 지하식당을 보게 되었다. 그는 식당을 지하에 열었다면 분명 가격도 쌀 것이라고 생각하여 들어갔다. 그런데 메뉴를 뒤져보니 거기에 킹크랩이 있었다. 선부는 크게 기뻐하면서 웨이터를 불러서, 킹크랩을 달라고 주문했다. 술과 음식을 다 마신 후 계산서를 받았는데, 그는 보고 깜짝 놀랐다. 주머니의 돈을 모두 털고, 몸에 걸친 모든 옷을 줘도 부족할 정도였다. 그는 할 수 없이 난감하게 거기에 앉아서, 바깥의 친구가 돈을 가져와서 계산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원래 런던의 지하식당은 가장 비
싼 곳이었다.
노인이 얘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같이 웃었고, 그러다보니 서양음식이 땡겼다. 나는 "라이, 서양음식이 먹고싶어요!"라고 말했다.
노인은 내가 말하자 그녀도 따라서 소리쳤다: "나도 먹고싶다."
상해아가씨가 말했다: "만일 서양음식을 드시려면 샐러드소스는 저에게 맡겨주세요."
나의봉이 투덜대며 말했다: "전부 먹고싶다고 난리인데, 그러면 누가 이백개나 되는 그릇을 씻을건데?"
"왜 이백개나 씻어야되요?" 나는 그 숫자에 깜짝 놀랐다.
나의봉은 우리에게 그러겠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를 재촉하지는 마세요. 언제든지 준비가 다 되면 그때 먹기로 하죠."
강동벽은 기뻐서 손뼉을 쳤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에게 혼났다. 내가 식탐을 하는 병은 어디를 가도 고쳐지지 않는다고. 그리고 지금이 어떤 국세이고 환경인지는 보지도 않는다고.
다음 날, 나는 강동벽에게 말했다: "서양음식은 먹고싶지 않아요."
"아버지에게 혼났구나" 곁에 앉아 있던 나의봉이 바로 원인을 추측해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봉이 말했다: "나는 반드시 너에게 서양음식을 해줄 것이다. 그렇지만, 다시 집에 가서 그런 말을 하지 말아라."
얼마 지나서, 서양음식을 먹고싶다고 난리쳤던 일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돌연 나의봉이 말했다. 오늘 저녁에 양식을 먹을 것이라고. 그는 정말 마법을 부리는 선녀같았다. 사회생활이 이미 모조리 혁명화된 상황하에서, 제대로된 정통의 서양음식을 내놓았다. 길다란 하얀 초를 촛대에 꽂고, 와인잔에는 와인을 가득 채웠으며, 은도금한 나이프와 포크, 하얀색의 사각냅킨, 나는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가 마치 신화세계에 와 있는 것같아요."
모든 게 갖추어져 있었는데, 나의봉이 그 자리에 없었다. 나는 물었다: "라이는 아직 주방에 계신가요?"
강동벽과 상해아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기다리자, 나의봉이 침실에서 걸어나왔다. 그 순간 그녀는 소녀시대로 되돌아간 것처럼 예뻤다. 염색과 펌을 한 머리카락은 빛이 났고, 깔끔하게 이마를 덮었다. 분홍색의 입술 사이로 가지런한 이빨이 보였다. 수려한 눈동자의 위에 눈썹이 화가의 손에서 나온 것같았다. 날씬한 몸매를 흰색바탕의 파란색 소쇄화(小碎花)도안의 치파오가 감싸고 있었는데, 활짝핀 꽃들같았다. 향수를 뿌린 그녀는 온아하고 아름다웠다. 이어서 다시 놀랍게도 그녀의 속눈썹이 평소보다 길어져 있었고, 가슴도 더 커졌다....이건 어떻게 한 거지? 나는 그때 정말 몰랐었다.
요리가 하나하나 나올 때마다 반드시 접시를 바꾸었다. 그릇과 받치는 접시까지. 나이프와 포크의 배합, 입술과 이빨의 맛, 가벼운 대화를 하면서, 나는 점차 서양요리의 감각과 옛날의 분위기를 되찾아갔다. 오렌지색의 촛불아래, 정말 꿈속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서양요리를 먹은 시말과 미묘함을 부모님에게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말했다: "너는 너무 무신경하구나. 한 여자가 그렇게 준비하고 화장했다면, 분명 그녀의 생일을 스스로 축하한 것일 것이다."
"그럼 라이는 왜 사전에 말해주거나, 술잔을 들었을 때 말하지 않았죠?"
"의봉은 자신의 나이를 숨기고 싶은 거겠지."
나는 다시 아버지에게 물었다: "라이의 생활환경은 저렇게 좋은데, 어떻게 그녀는 뭐든지 다 할 줄 아는 거지요. 광동요리도 하고, 점심도 만들고, 서양요리도 하고, 보일러도 만지고, 장미도 기르고..."
아버지가 나에게 말해주었다: "영국 독일 두 나라의 전통적인 귀족들은 어려서부터 엄격한 교육과 훈련을 받는다. 모두 집안을 다스리는 성격과 능력이 있다. 어디 너의 간부자제인 친구들처럼 생활을 모조리 공산당이 알아서 처리해주고, 두 손으로는 그저 돈을 세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줄 모르기야 하겠느냐."
비록 어떤 남자로부터 사랑을 받지는 못했지만, 보편적으로 그녀를 좋아했다. 나의봉은 바로 그런 일류의 여자였다. 가벼운 몸놀림, 순수한 품성, 일상사무를 처리하는데 있어서 온건하고 타당하며 주도면밀한 재지, 그리고 거기에서 풍겨나오는 대가집 규수의 모습을 한몸에 갖추고 있다. 그래서 아버지, 장내기, 진명덕, 등계성부부등이 모두 그녀를 좋아했다. 나도 나의봉을 좋아했다. 그러나 내가 그녀와 아주 익숙하게 되었을 때도 여전히 그녀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녀와 그녀의 모친은 아주 큰 활동공간을 가지고 있고, 명사들과 교유하고, 거유들과 왕래했다. 그러나 그녀가 혼자 있을 때는 마치 전세계가 그녀와 관계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강어르신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마음을 잘 헤아렸지만, 자신의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고 그녀가 연경대학을 졸업한 후 수십년간 어떤 경력을 가졌는지 알지 못한다. 그녀가 어떻게 생활했을까? 일은 해보았을까? 사랑을 받아보았을까? 이들 의문에 대답을 얻기 위해서 나는 그녀에게 그녀의 사진첩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나의봉은 시원스럽게 대답하고, 바로 뒤의 서재로 들어갔다.
나는 먼지가 쌓인 옛사진첩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소리쳤다: "라이, 어째 겨우 한권인가요?"
"나는 사진찍는 걸 원래 좋아하지 않아서." 그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원래 옛날 사진에서 그녀의 과거에 대한 흔적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사진첩 안에는 대부분 강동벽의 사진이었고, 나의봉의 것은 아주 적었다. 우연히 한두장 찾았는데, 그것은 그녀와 여자친구가 같이 찍은 것이었다. 그런 사진도 그녀의 용모는 모호하여 분명하지 않았다. 항상 커다란 선글라스로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진에서 생활이 아주 서양화된 그녀는 곁에 남자가 한명도 없었다. 일찌기 상해아가씨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강어르신은 딸이 남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원치 않았고, 딸을 영원히 자신의 곁에 두고, 자신을 보살피게 하겠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동인당의 낙대고(樂大姑)가 나의봉을 찾아와서 중매얘기를 꺼냈다. 몇분 지나지 않아, 강어르신은 낙대고를 쫓아냈다. 할머니는 유일하게 나융기만은 예외로 두었고 시종 귀한 손님으로 대했다."
나는 사진첩을 다 보고 난 후에 물어보았다; "라이, 왜 사진찍는 걸 좋아하지 않으세요?"
그녀는 사진첩의 검은가죽표지를 쓰다듬으면서 탄식하며 말했다: "이들 사진은 사진을 찍은 사람에게는 당연히 보물이고 귀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느냐. 여러 해가 지나서 낯선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그때는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쓰레기처럼 쓰레기통에 쳐넣거나 폐기물처럼 팔아버리지 않을까? 그런 최후를 생각하니, 설사 눈앞에 아무리 멋진 경치가 있고, 주변이 아무리 좋은 친구들이 있어도 나는 카메라를 마주하지 않게 된 것이다."
"라이, 좋은 사진 한장은 언제든지 감상할 수 있잖아요. 지금 왜 수십년 이후의 일을 걱정하세요." 내 생각에 나의봉이 사진을 남기지 않은 근본 원인은 아마도 스스로가 예쁘지 않다고 생각해서일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처럼 이런 가정에서 살고, 또 혼자라면, 반드시 예산생활을 배워야 한다."
그 집에는 큼직하고 앉으면 편안한 영국쇼파가 한세트 있었다. 그리고 관리도 아주 잘 했다. 그런데 그 상해아가씨가 그 집에서 이사나가겠다고 하자, 아무런 망설임없이 그 쇼파를 그녀에게 선물했다. 나는 물었다: "이렇게 좋은 물건을 당신이 쓸 수 있는데, 왜 남에게 주어버리는 건가요?"
나의봉이 말했다: "나의 소우. 넌 아직 젊구나. 많은 일은 미리 준비해야 한다. 늙은 이후에 하려고 하면 안된다. 특히 진귀한 물건처럼 보이는 것은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처리해야 한다. 나중에 다른 사람이 수습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말하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은 자신의 자손이나 친척을 포함하는 것이다."
"담담하게 일생을 살면, 누가 끼어들 수 있겠는가?" 내가 그녀의 그런 관점을 알고나자, 비로소 점점 그녀의 일처리방식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나의봉은 스스로에게 일처리의 원칙을 정해놓았다. 마치 사전에 유언을 집행하는 것처럼. 그건 어느 정도 잔혹한 일이다.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별론으로 하고, 서방인의 생활원칙을 동경했던 아버지나 나융기도 아마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도 고생을 겪고, 더 이상 젊지않고, 혼자 외롭게 되었을 떄, 그녀의 관점화 행위를 깊이 이해하게되었을 뿐아니라, 철저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의봉은 향수를 좋아했다.
그녀는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향수가 좋다. 심지어 향수를 담은 병까지도 아름답다." 모두가 그녀의 그런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연경대학에서 공부할 때부터, 사람들이 그녀에게 선물을 줄 때면 약속이나 한 듯이 고급향수를 선택했다. 그녀는 가장 좋은 향수는 소장품으로 하여 하나의 나무상자에 넣어두었다. '문혁'이 폭발하고나서 그녀는 그 나무상자를 열지 않았다. 즉, 그녀는 향수를 "끊은" 것이다: 뿌리지도 않고, 냄새를 맡지도 않고, 보지도 않는다.
나중에 그녀는 상자를 우리집에 보내면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여기 안에 들어 있는 것은 가장 좋은 향수입니다. 어떤 것은 황금보다 귀합니다. 당신은 딸이 둘 있으니 그녀들이 쓸 수 있을 겁니다."
어머니는 못받는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의봉은 한참을 생각한 후에 이렇게 말했다: "그럼 제가 여기에 보관하는 것으로 하면 괜찮겠습니까?"
어머니는 그러자고 했다. 그렇게 향수를 좋아하던 그녀가 자신에게 한병도 남기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녀는 나무상자이야기는 죽을 때까지 하지 않았다.
나의봉은 신발을 좋아했다.
나는 항상 그녀의 복식악세사리중에서 가장 신경쓴 부분은 발아래의 신발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의복에 맞는 신발을 신었고, 계절에 맞추고, 장소에 맞추고, 기분에 맞추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신발을 심미적인 경지로 신었다. 그래서 그녀의 신발은 용품일 뿐아니라, 소장품이다. 홍위병이 초가, '파사구(破四舊)'할 때, 그녀는 어떻게 처치해야할지 몰랐다. 그리고 그것들을 버리기는 아까웠다.
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나의 형부를 불렀다. 그리고 급히 말했다: "홍위병의 명령내용중에는 '하이힐을 신지 못하도록' 규정하는 것만 있다. 우리가 톱으로 모든 하이힐의 뒷굽을 잘라버리면 될까요?" 형부는 그녀의 말을 듣고 동의했다.
깊은 밤에 나의봉은 신발을 모조리 가지고 나왔다. 거의 자그마한 산같았다. 그녀는 톱도 찾아왔다. 먼저 형부가 혼자서 톱질하다가, 나중에는 두 사람이 같이 톱질했다. 십여분동안 신발 한짝의 뒷굽도 잘라내지 못했다. 나의봉은 힘들어서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고 마음이 조급하여 얼굴도 벌개졌다. 북경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형부는 자세히 관찰해보고는 발견했다: 나의봉의 신발은 모두 수입품이었다. 뒷굽이 섬세하게 가는 달처럼 굽어 있지만, 그 안에는 좋은 철사가 지탱해주고 있었다. 그는 땀을 닦으면서 말했다: 국산톱으로 어찌 수입강철을 자를 수 있겠습니까. 라이, 우리가 이렇게 밤을 새워도, 몇켤레 잘라내지 못할 것같습니다.
나의봉은 바닥에 앉아서 그 여기저기서 사모으고, 사계절 신으며, 소장해오던 신발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현실에 굴복했고, 아름다움을 포기하고 신발을 버렸다. 한켤레도 남겨두지 않았다.
나의봉은 꽃을 좋아했다.
그녀 집의 정원에는 프랑스품종의 장미가 있었다. 그리고 10여그루의 품질이 뛰어난 유엽매(楡葉梅)도 있었는데, 대문의 양측에 나란히 배열했다. 50년대의 봄날, 한 부총리급의 고위관료가 차를 몰고 동사십조를 지나가게 되었다. 아름다운 유엽매가 담장 밖으로 나와 있었다. 꽃이 무성하여 그는 걸음을 멈추고 감상했다. 나중에 그의 부하직원이 함축적으로 상사의 뜻을 전했다. 꽃이 진 후에, 나의봉은 유엽매를 모두 파내도록 하여, 보냈다. 한그루도 남기지 않고.
어느 겨울의 밤에, 나는 강동벽의 집에 있었다. 악몽을 꾸다가 잠에서 깨서 침대머리맡에 놓여진 시계를 보았다. 이미 3시가 지났다. 고요한 가운데, 마치 아름다운 선율이 하늘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자세히 들어보니 그 음악은 바이올린독주곡이었다. 다시 더 자세히 들어보니 그 소리는 나의봉의 침실에서 나왔다. 갑자기,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 달이 창문의 커튼을 뚫고 차가운 빛을 뿌리고 있었다. 나는 협소한 침대 위에 누워, 바깥의 미친 세계를 잊어버렸다. "이런 곳은 하늘에서나 들을 수 있다. 인간세상에서 몇번이나 들을 수 있겠는가." 비록 스스로 이런 시간에는 절대로 그녀를 방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앗지만, 그러나 마음 속에서 솟아오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녀의 침실로 통하는 작은 문을 밀어서 열었다.
나의봉은 내가 맨발에 산발을 하고 그녀의 침대머리에 서 있자, 깜짝 놀란다. 원래 혈색이 없던 그녀의 얼굴은 삽시간에 회색, 회색으로 변했다. 그녀의 두 손은 무의식적으로 벽돌 크기의 물건을 끌어안았다. 그것은 달빛이 비치자 금속의 광택을 냈다. 내가 생각하깅, 아름다운 음악은 거기에서 흘러나왔고, 널리 퍼졌다. 바로 그 때, 바이올린선율이 돌연 멈추고, '벽돌' 속에서 영어가 흘러나왔다.
나는 물었다. "라이. 이게 무슨 물건인가요?"
"이건 현대세계에서 가장 좋은 일종의 라디오이다."
그후 나는 그녀에게 뭐라고 말해야할 지를 몰랐고, 그녀도 나에게 뭐라고 설명을 해야할지를 몰라서,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 가운데, 나의봉은 돌연 폭발하여 격분했다. 그녀는 하악골을 떨면서 두 눈을 불처럼 타올랐다. 그녀는 '벽돌'을 품에 끌어안고 저주섞인 어투로 말했다: "소우. 나는 연약한 사람이고, 무능한 사람이다. 나는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다. 평생 그저 약간의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신발을 좋아하는데, 지금 신발을 모두 버려버렸다. 나는 꽃을 좋아하는데, 그 아름답던 장비는 내가 66년 여름 초가당하던 밤에 눈물을 흘리면서 직접 뜨거운 물을 부어서 죽여버렸다. 현재 꽃도 없다. 나는 향수를 좋아하는데, 향수도 없다. 나는 음악을 좋아하는데 음악도 없다. 나는 영문시를 좋아하는데 시도 없다. 나는 한번도 공산당을 방해하지도 할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공산당은 왜 이렇게 나를 침해하는가? 이번 문화대혁명은 우리 집안에 있어서 부저추신(釜底推薪)이다. 나 개인에 있어서 말하자면 경맥을 다 끊어버리는 것이다." 나의봉은 밤하늘을 우러러보면서, 마음 속의 비통함을 억제하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그녀의 눈물을 보았다. 등불아래에 그녀의 눈물이 유리처럼 맑았다.
감정이 조금 가라앉자, 나의봉은 오히려 몸을 일으켜 나를 내 방으로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물어보았다: "수면제가 필요해?"
그날 밤에는 계속 강씨집안의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잠에 들지 못했다. 아버지는 말한 바 있다. 그들 노며는 진정한 귀족이라고. 내 생각에, 옛날의 귀족이 오늘날까지 살아있다보니, 지내기 너무 힘들고, 마음이 너무 고통스럽다고. 강동벽은 항상 말했다. 자신의 처세원칙은 "불변으로 만변에 대응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현실은 그녀들로 하여금 '순종적응'하도록 핍박했다. 교양에서, 그리고 경험에서, 그녀들의 '순종적응'은 왕왕 그들의 노력이 느껴지지 않는 와중의 노력이었다. 이런 노력과 공산당원의 '세계를 개조하겠다'는 노력은 당연히 의미가 다르다. 후자의 노력은 밖을 향하는 것이고, 구체적으로 하늘과 싸우고, 땅과 싸우고, 사람과 싸우는 것이라면, 전자의 노력은 안을 향하는 것이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성하고 자율하고 극기하는 것이다. 노력의 핵심내용은 바로 "참는 것"이다. 괴이하고 세상이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던 시절에, 누구든지 참아야 했다. 강력한 권력앞에서 백성들은 너무나 왜소하고 참아야 했다. 그렇다면, 강씨모녀로 대표되는 귀족가정의 참는 것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경력이 아무리 많고, 세상일에 아무리 이골이 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말살하고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 지혜로 생존할 것인가. 젊은 나로서는 판단할 수가 없었다. 모두 천성을 훼손하고 억제해야 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나는 마음 속으로 맹세하게 되었다: 평생 자신의 천성응 유지하고 절대로 '준종적응'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이후의 상황은 내가 이런 결정을 함에 따라 거의 평생 댓가를 치르게 된다.
강동벽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었다. 유럽과 미국에 유학하고 나중에 사회에 투신한다. 그리고 예술에 종사했다. 이런 경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미신을 믿지 않을 것이다. 미신을 믿지 않는 강동벽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점괘를 봐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오직 한 사람의 점괘만을 믿었다. 그 사람은 풍수가도 아니고, 역경전문가도 아니다. 바로 같이 거주하는 한 여자이다. 그 여자의 성은 임(林)이다. 그래서 모두 그녀를 '임여사'라고 불렀다. 나는 지금도 그분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 강동벽집의 2칸의 평방(1층방)이 그녀가 사는 곳이었다.
용모에서 행동거지까지, 꾸미는 것에서 말하는 것까지 농촌부녀상인 임여사는 평소에 자신의 방안에서 바느질같은 것을 했다. 예를 들면, 신발바닥을 고치거나, 면옷을 꿰메거나, 솜이불을 만들거나. 강동벽 모녀가 부르면 그녀는 정원으로 들어왔다. 우리 앞에서 그녀는 약간 조심하는 것같았고,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설사 누군가 그녀에게 무엇을 묻더라도, 가장 간단한 말로 대답할 뿐이었다. 노인이 그녀를 부르는 것은 두 가지 일때문이다. 하나는 병치료. 즉 안마, 침구, 뜸이고 다른 하나는 점괘이다. 며칠에 한번씩 강동벽은 반드시 임여사를 불러서 점을 본다. 노인은 뭐든지 점을 쳐보았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지? 손님이 오는지? 어느 누구가 오늘 평안한지? 임여사는 뭐든지 점을 쳤다. 그리고 그녀는 풀줄기, 종이카드, 동전에서부터 반믈까지 임여사는 모두 점을 치는 도구로 삼았다.
나는 나의봉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어머님은 왜 점치는 것을 좋아하는지요."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 재미로 하는 거지. 80살이 된 할머니가 뭘 가지고 놀겠는가. 지금 우리가 뭘 가지고 놀 수 있겠는가."
"임여사의 점은 잘 맞나요?"
"아주 잘맞아."
"정말요?"
"정말!"
"왜그렇죠?"
나의봉이 말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운명은 가장 고되고, 마음은 가장 착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치는 점이 가장 정확하다."
"라이, 그녀의 신세내력에 대하여 얘기해주실 수 있나요?"
나의봉은 비록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나는 항상 곁에 서서, 임여사가 강동벽에게 점괘를 봐주는 것을 보았다. 모두 좋은 괘였다. 최소한 평괘(平卦)였다. 그러나 1968년 여름이후, 임여사가 치는 점괘가 어떤 떄는 너무 좋지 않았다. 만일 점괘가 좋지 않으면, 강동벽은 손을 휘저으면서 임여사에게 거실에서 나가라고 했다.
하루는 새벽에, 강동벽이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머리가 어지럽고,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말했다. 막 아침 식사를 마치고, 딸에게 임여사를 불러와서 자신의 신체상황에 대해 점괘를 알아봐달라고 말했다. 그 날은 날찌가 특히 나빴다. 미친듯한 바람이 불고, 검은 구름이 해를 가렸으며, 기온은 급격히 내려갔다. 나의봉은 정오때까지 기다려서 부르자고 말했다. 그러나 노인은 지금 바로 데려오라고 고집을 부렸다. 임여사가 곧 왔고, 점을 친 점괘는 아주 나빴다.
"어째서 이렇게 나오는가?" 노인의 두 눈이 상대방을 직시했다.
"강어르신, 그냥 이렇겁니다." 임여서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고, 태도는 공손했다.
나의봉이 눈짓을 주자, 임여사는 즉시 물러난다.
그낭 오후, 내가 강동벽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막 문을 들어서자 나의봉이 조용히 나에게 말해주었다: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어머니가 다시 임여사를 불러오라고 해서 다시 점괘를 봤다."
"결과는 어땠는데요?" 내가 물었다.
"만일 아침의 점괘가 '좋지 않다'는 것이라면, 정오의 점괘는 '아주 좋지 않다'였다. 그래서 너는 최대한 거실에 오래 앉아서 그녀와 얘기를 나눠줘라. 그녀가 '점괘'을은 잊을 수 있도록. 괜찮겠니."
"당연히 괜찮지요. 라이, 마음 놓으세요."
조금 있다가 강어르신이 낮잠에서 깨어나 거실로 걸어나왔다. 라이는 급히 나무빗을 가져와서 모친의 머리를 다듬어 주었다. 나는 바로 말보따리를 열어서 이 얘기 저 얘기를 했다. 지금까지 얘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던 노인이 우리들의 이야기에 흥취가 없어 보였다. 그녀는 두 손을 무릎위에 놓고 손바닥을 보았다. 다시 뒤집어서 손톱을 보았다. 그후 고개를 들어 딸에게 말한다: "가서 임여사를 데려오너라."
나의봉은 창밖을 가리키면서 "밖에 바람이 많이 붑니다. 내일 오라고 하면 안될까요?"
"아니다. 지금 갔다와라." 어두가 강경하여 도저히 거스를 수 없을 정도였다.
나의봉은 어쩔 수 없이, 그리고 다른 방법이 없어 할 수없이 임여사를 데리러 나갔다.
점은 서탁 위에서 진행되었다. 강동벽은 정신을 집중하여 두 눈으로 임여사의 손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나의봉은 마음이 불안해하면서 모친의 뒤에 서 있었다. 나도 따라서 같이 긴장했다. 또 다시 나쁜 괘가 나올까봐 걱정이 되어서. 임여사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전체 집안이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고택같았다. 사방에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저 창밖에 미친 듯이 맹렬하게 부는 바람소리뿐이었다. 이게 무슨 점괘놀이를 하는 건가. 아예 양군이 대치하는 것이고, 결전의 전야였다. 괘가 나왔다. "하하(下下)" 가장 나쁜 결과였다.
"말해봐라. 이게 무슨 괘냐?" 할머니는 얼굴에 노기를 띄었다. 일거에 기분이 나빠진 모습이었다.
임여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강동벽은 화가나서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나의봉은 급히 임여사에게 입을 삐죽이며 눈짓을 보냈다. 그 뜻은 빨리 나가라는 것이었다.
강동벽이 계속 추궁한다: "물어보는데, 이게 무슨 괘냐고?"
임여사는 여전히 한 마디로 하지 않았다.
"내가 묻고 있잖아. 왜 대답을 하지 않는 거냐." 노인의 심각한 표정은 심지어 어느 정도 독해 보였다. 눈에서는 무서운 빛이 쏘아져나왔다. 그녀의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고통이 보였다.
임여사의 무표정한 모습은 일종의 불길한 예감을 담고 있었다. 대체로 하루에 3번 점괘를 보았는데, 점괘가 갈수록 흉괘가 되고, 임여사는 물어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동시에 노인을 아프게 찔러왔다. 강동벽은 돌연 얼굴이 벌개지고, 콧구멍도 흥분하여 커졌다. 한줄기의 깊은 주름살이 굳게 다문 입술에서 기세흉흉하게 아래턱으로 퍼졌고, 그녀는 죽어라 눈앞에 자신에게 세번이나 액운을 예언한 여인을 노려보았다. 눈에서는 무서운 빛이 나왔고, 이미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분노로 바뀌었다. "짝!" 노인으 오른손으로 임여사의 왼쪽빰을 세게 때렸다. 이런 거동은 아주 돌연하게 발생했고, 의외이며 순식간의 행동이었다. 그녀의 일관된 행동거지와는 큰 차이를 보였다. 그래서 나도 그 자리에서 몸이 굳었다. 아무런 표정없는 임여사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의봉이 놀라서 소리친다: "어머니, 어째서 사람을 때리세요." 곧이어 주전자에서 따뜻한 물을 따라 임여사에게 건네주었다.
강동벽도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놀랐다. 그녀는 손으로 탁자를 집고 눈을 감았다. 마치 머리가 어지러운 것처럼, 이마자락에는 가느다랗게 땀방울이 흘렀고, 얼굴색은 창백했다.
나는 겁이 나서 말했다: "강어르신, 제가 부축할테니 쇼파로 가서 앉으세요."
"필요없다. 소우. 고맙구나." 확실히 그녀는 극력 자신을 억제하고 있었고, 천천히 몸을 돌려 침실을 향해 걸어갔다. 문렴(門簾)을 밀치고 들어갈 때, 갑자기 어깨를 문틀에 기대었다. 내 생각에 그 뺨 한대는 동시에 그녀 자신의 몸모 때린 것같다. 그렇게 하여 그녀의 모든 체력과 정신을 날려버린 것같았다.
저녁식사후 우리는 벽난로 앞에 둘러앉아 있었다. 이때, 강동벽의 눈빛은 다시 청량하게 회복되었다. 검은 구름이 지나간 후, 그 흉흉했던 파도가 달빛을 받으면서 이미 고요해진 것처럼. 그녀는 딸에게 임여사를 다시 불러와달라고 말했다. 내 생각에 이번에는 점괘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임여사를 나의봉이 데리고 들어왔다. 그녀의 온화함과 예의바름은 나로 하여금 어렸을 때 홍콩교회학교에서 공부할 때 만났던 수녀를 생각나게 했다.
강동벽을 그녀를 보자마자, 몸을 일으켜, 그녀의 앞으로 걸어가서 허리를 깊이 숙이면서 말했다: "임여사. 내가 오후에 한 행동을 용서해주시게."
그녀의 이런 거동은 그 뺨때리는 것과 같이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임여사도 약간 황송해 했다. 왜냐하면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평소에 하던 방식은 마음 속으로는 잘못했다고 인정하지만, 말로 내뱉지는 않고, 더더구나 고개를 숙이면서 먼저 사과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내 곁에 서 있던 나의봉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왜 '하하'의 점괘 하나가 강어르신으로 하여금 평소 모습을 잃어버리게 만들었을까요?'
부친의 생각에 내가 말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같다고 했다. 거기에는 철학적인 내용도 있고, 심리학적인 성분도 있고, 사회적인 요소도 있다. 그는 말했다: "중국은 종교가 없는 나라이다. 중국인은 신앙이 없어, 미신을 믿는다. 가난한 사람도 미신을 믿고, 부자도 미신을 믿고, 귀인도 미신을 믿는다. 중요인사들도 미신을 믿는다. 강동벽도 자연히 예외는 아니다." 여기까지 말하고서 아버지는 손가락으로 후원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소우, 우리집 후원 각문(角門)의 네 개의 여닫는 문에 각각 '원형리정(元亨利貞)'의 네 글자가 각각 쓰여있던 것을 기억하느냐. 너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느냐?"
나는 아무렇게나 추측해서 말했다: "대체로 평안하게 잘 지내라는 거겠지요."
아버지는 신비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고의로 목소리를 깔고서 내 귀에 말했다: "이건 괘사(卦辭)이다!"
"정말요?"
"당연하지. <역경>의 건괘의 괘사이다."
"어이쿠, 복사(卜辭)가 우리 집에도 들어왔군요." 나는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말햇다: "봐라. 이게 바로 미신이 집안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강동벽같은 노인은 그저 장수, 평안을 생각한다. 그래서 흉괘는 그녀에게 있어서 타격이 되는 것이다. 연속으로 3번이나 타격을 받으니, 그녀가 견디지 못한 것일 것이다. 충동적으로 뺨을 한 대 올려친 것인데, 그건 점을 쳐준 사람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녀가 친 점괘에 대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강어르신은 충동이 지나간 후에 다시 가서 허리를 숙이고 사과를 했으니, 그건 용기있는 행동이다. 어떤 사람처럼 자기가 잘못한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데..."
그 후에 발생한 사정은 증명한다: 임여사의 점괘는 영험했다. 임여사 본인도 간단한 사람이 아니다.
1968년, 강동벽은 마지막 생일을 보낸다.
나의봉이 나에게 말했다. 집안에 약간의 제비집을 가지고 있어서, 모친의 생일에 모두 꺼내서 손님대접을 하려고 한다고.
나는 말했다: "저는 평생 제비집은 먹어본 적이 없어요."
"너는 어떻게 그걸 못먹어보았느냐?" 나의봉은 놀라서 물었다.
나는 말했다: "1948년에 홍콩에 있을 때, 말레이시아의 제비집대왕이 아버지에게 두개의 큰 자루로 제비집을 선물했습니다. 귀국후에 아버지도 바쁘고 어머니도 바빠서 모두 먹을 생각을 못했습니다. 계속 물건을 넣어두는 창고에 놓아두었는데, 홍위병이 초가할 때 제비집을 모조리 땅바닥에 쏟아놓고는 발로 밟아서 가루가 되었습니다."
강동벽은 그 말을 듣고 쇼파의 손잡이를 치면서, "생일날은 네가 반드시 여기로 와서 저녁식사를 해야지. 내가 제비집을 먹게 해주마."
나는 기뻐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노인의 생일날, 부친이 위통(胃痛)을 앓아, 나는 부모님과 함께 죽을 먹어야 했다. 하늘이 완전히 시커멓게 되었을 때, 비로소 동사십조에 도착했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바로 강동벽에게 국궁을 하면서 생일축하인사를 드렸다. 얼굴에 기쁜 표정을 짓고 있던 노인은 급히 내 손을 잡아 끌면서 평소에 아침식사를 하던 원형탁자 곁으로 걸어갔다. 작은 그릇을 들어서 내 입앞으로 가져다 주면서 말했다: "이것이 바로 제비집이다. 내가 의봉에게 소우 것을 남겨두라고 하지 않았으면 사람들이 다 먹어버릴 뻔했다."
제비집은 차가웠다. 그러나 나는 어르신의 앞에서 흥분하여 바로 다 먹어치웠다. 먹을 때는 혀와 입술은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지만, 행복과 만족한 느낌은 마음 속으로 스며들었다.
거실에는 손님들로 가득했다. 나를 놀라마지 않게 했던 것은 모든 여자손님들은 하이힐을 싣고 비단 치파오를 입고 있으며 모두 입술에 립스틱을 바르고 아름답기 그지없었다는 것이다. 구리주전자를 들고 계속하여 손님들에게 찻물을 따라주고 있는 나의봉은 흑색의 비단으로 만든 암홍색연단곤변의 치파오를 입고 있었다. 발에는 길다란 검은 실크스타킹을 신고, 발에는 모양이 아주 멋진 성홍전혜(猩紅毡鞋)를 신고 있었다. 머리카락도 길게 땋아서 붉은 비단실로 한쌍의 변자(辮子)를 땋았다. 붉은색과 검은색 두 개의 색깔이 그녀의 모습에서 아주 잘 어울렸다. 순식간에 나는 마치 '만악의 구사회'로 되돌아간 것같았다.
나는 상해아가씨에게 물어보았다: "지금 꽃이 들어간 옷조차도 '사구'라고 단속하는데, 그녀들은 어떻게 감히 이렇게 치장할 수 있는 건가요?"
상해아가씨가 말했다. 그녀들이 올 때는 모두 손에 큰 주머니를 가지고 왔고, 안에 치파오, 하이힐, 빗, 분, 립스틱, 연지, 눈썹그리는 화장품까지 모두 넣어서 왔다고 한다. 강동벽의 집 대문앞에서 사방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즉시 옷을 바꾸어 입고, 화장했다고 한다. 남편은 곁에서 망을 봐주고 있고 다행히 그때는 주민들이 많지 않았었다.
나는 물었다. "그녀들은 왜 집안으로 들어와서 갈아입지 않고, 굳이 바깥에서 그래야 했나요?"
"그게 법도입니다. 또한 노인네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구요. 생각해 보세요. 문을 들어서면 바로 절을 하고 생일을 축하해야 하는데, 혁명화된 제복을 입고 그게 가능하겠어요."
나는 거실의 구석에 앉아서 집안을 가득 채운 귀빈들과 강씨모녀사 수시로 영어를 쓰기도 하고, 광동말을 하기도 하고, 옛날믈을 하기도 하면서, 때때로 우스개도 섞어서 재미있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따스한 분위기 속에 강권정치에 억눌려 있던 영혼들이 해방을 얻은 것같았고, 다시 날아오르는 것같았다. 그중 가장 젊은 여성은 은색연단치파오를 입고 발아래는 은색하이힐을 신었는데, 옅게 화장한 예쁜 얼굴은 청춘의 광채를 발산하고 있었다.
나는 나의봉에게 물었다: "저 여자는 누구인가요? 너무 예쁜데요."
"그녀는 오(吳)씨성을 가졌는데, 발레리나야. 상해 영안공사(永安公司) 오너의 외손녀이지."
이때 나는 강동벽이 그녀에게 묻는 말을 들었다: "너희 어머니는 잘 계시냐?"
오소저가 답했다: "어머니는 1칸짜리 각루(閣樓)로 쫓겨났어요. 각루는 좁아서 겨우 침대 하나를 놓을 수 있을 정도이구요. 매월 그녀에게 15원의 돈을 주는데, 급여를 받는 날 어머니는 반드시 '홍방자(紅房子, 상해의 유명한 서양음식점)'에서 1원을 주고 케이크 한조각을 골라서 먹어요. 그녀는 말했어요. 지금 상해의 자본가집에서 가장 귀한 물건은 식품을 답는 쿠키통이라고. 만일 홍위병이 다시 초가하러 오면, 그녀는 반드시 먹던 것을 입안으로 밀어넣고나서 문을 열어줄 거라고."
오소저는 또한 이런 말도 했다: "어머니는 항상 영어단어를 쓰세요. 급할수록 영어가 튀어나와요. 그래서 비투를 당할 때도 적지 않이 고생했군뇨." 그녀는 어머니의 모습을 흉내내며 영어중국어를 섞어서 말했다. 그 생생한 연기에 사람들은 박장대소를 했다.
또 다른 중년여성은 시종 단정하게 1인용 쇼파에 앉아 있었는데, 태도가 고귀하고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설사 노인에게 몇마디 말을 건넸지만, 내가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는 광동말이었다. 나의봉이 나에게 말해주었다. 그녀는 자기의 친척이고, 북유럽 한 나라의 대사관에서 일하는데 월급여가 300위안이나 된다고, '문혁'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위에서 그녀에게 귀국하라고 명령했고, 그 국가의 대사부부는 생화를 들고 여러번 찾아와서 여러번 그녀가 대사관으로 다시 돌아오면 좋겠다고 말했어. 왜냐하면 현재 외교부에서 그녀가 하던 일을 맡도록 3명을 보냈는데, 셋을 합쳐도 아직 그녀만큼 일을 잘하지 못한다고."
그렇게 미치고 공포스러웠던 환경 속에서도 사람들은 구차하게 살아남았다. 누구도 풍절(風節, 風骨節操를 줄인 말)을 얘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그녀)들은 가능한 한 각종 방식과 방법으로 옛날의 정신과 감정연계를 이어갔다. 강동벽의 집에 손님으로 가면서, 옛날 의관을 차려입은 것은 절대로 고유한 습벽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고, 부자들이 예전에 가졌던 부를 자랑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그녀)들의 고심은 확실히 노인데 한 존중과 축복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구식의관과 예의데 대하여 잊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더 많은 요소가 역시 일종의 역사감정을 배경으로 하는 문화를 표현하는 것일 것이다. 비록 이들은 반드시 당의 말을 들어야 하고, 정치우선을 견지해야 하고, 모택동선집을 읽어야 하고, 모택동어록을 외워야 하고, 혁명화,격식화된 생활을 지내야 했지만, 그(그녀)들은 뼛속으로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역시 우아하고 세련되며 고도로 심미화, 개인화된 나날인 것이다. 그리고 강동벽의 옛집과 구식예의 그리고 의관이 가진 온화한 느낌과 초범한 의경(意境)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정신적인 귀속감과 신분적인 확인을 하도록 해주었다. "감추화어쇠목(感秋華於衰木), 췌령로어풍초(瘁零露於豊草)" 여기까지 생각하자, 나는 내 몸에 걸쳐진 카키색제복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강동벽의 집에 살고 있지만, 이들과 비교한다면 결국 나는 역시 권외인(圈外人)인 것이다.
고령에 접어든 강동병은 거의 병에 걸리지 않았다. 그저 밤에 소변을 자주 볼 뿐이었다. 그래서, 나의봉은 매일 모친에게 호도를 깨서 먹도록 드렸다. 그녀에게 호도의 살을 먹게 할 뿐아니라, 두 호도조각의 사이에 이쓴 나무재질의 '의(衣)' 반드시 먹어야 했다. 이 것은 오줌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노인은 이마를 찡그리면서 먹었지만, 그래도 밤에 일어나는 횟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내가 자는 방은 화장실에 붙어 있기 때문에, 그녀가 매번 밤에 일어나면 반드시 내 방옆을 지나가야 했다. 겨울의 한밤중은 아주 춥다. 강동벽은 평소처럼 스스로 몸을 일으켜, 침대등을 켜고, 모자를 쓰고 겉옷을 걸치고 벽이나 가구를 잡고 걸어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한번은 고혈압이 있는 강동벽이 낮에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어질어질하다고 소리쳤다. 밤에는 이리저리 부딛치면서 걸었다. 노인이 쿵쾅거리면서 힘들게 걸음을 내딛고 여러번 빈번하게 오가는 것을 들어서, 한번은 나의봉에게 이런 말을 했다. "왜 침실에 요강을 놓아두지 않고, 한밤중에 노인을 힘들게 하시나요."
"그게 어디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겠느냐. 그녀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해서 그렇지." 나의봉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하루는 내가 상해아가씨에게 심한 감기가 옮았다. 강씨모녀는 억지로 내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막았다. 이곳이 여건이 조금 낫고, 약도 있으니 남아 있으라는 것이다. 내가 병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동안, 강동벽은 매일 침대로 걸어와서 "지금 좀 좋아졌느냐?"고 묻고는 손을 뻗어 내 이마를 만져보았다. 열이 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나의봉은 그녀가 내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기만 하변 바로 그녀를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화를 내며 소리쳤다: "소우는 아파도 치료하는게 괜찮은데, 어머니가 아프면 제가 아주 골치아파져요."
할머니는 나의봉이 바깥에서 일하는 틈을 타서 다시 비틀비틀 걸어서 들어오곤 했다. 그녀는 승리자가 된 것처럼 득의만면하여 말했다: "딸은 항상 나를 못하게 막아. 나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을 거야." 조금 지나서 그녀는 나에게 끓인 물을 따라서 비틀거리면서 걸어왔다. 물도 바닥에 조금 흘렸다. 그녀는 그래도 침대 앞에서 내가 몇 모금 마시는 것을 보고서야 떠났다.
강동벽과 함께 살면서, 나는 부지불식간에 고령노인의 세계로 들어갔다. 처음 인생의 마지막 순간의 여러가지 심리과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풍부한 경험과 교양이 있는 그녀는 설사 노년이 되었지만, 극력 사람으로서의 존엄과 자유를 지키고 싶어했다. 그녀는 독립의지와 자생능력을 잃은 생할은 고통이고 수치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노인은 완강하게 도움이나 부축을 거부한 것이다. 이렇게 노쇠해지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나이와 타협하지 않으려는 심리는 기실 노인이 자신의 운명과 서로 주도권을 쥐려는 힘겨루기이다. 그녀는 나의 병세를 물어보고 나에게 따뜻한 물을 가져다주었을 때 스스로 자랑스러워하고 따스히고 즐거워하는 것이 드러났다. 한편으로 노인은 자신이 아직도 다른 사람을 보살펴줄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다른 사람을 보살펴주는 것을 즐거운 일 행복한 일로 여긴다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행동으로 자신이 아직도 여전히 독립하고 자주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나아가 생활의 만족을 쥐고자 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동사십조에서 생활하는 동안, 강유위의 이 가장 재능있는 딸의 특유한 개성, 습관, 기호, 자존과 모종의 괴벽(乖癖)이 합쳐진 인생의 마지막 악장은 나에게 더할 나위없는 감동과 진귀함이었다. 이런 감동과 진귀함은 나의 후반생에 영향을 끼쳤다. 어떠한 노인을 만나든, 나는 낙일여휘(落日餘暉)의 상감(傷感)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해에, 모택동의 위대한 전략적인 배치에 따라 사회총동원으로 계급의 적을 악독하게 붙잡고, 현행반혁명을 붙잡기 시작한다. 나는 반드시 성도의 단위로 돌아가서 일해야 했다. 북경을 떠나기 전날, 나는 강동벽 모녀에게 가서 작별인사를 했다.
"소우. 네가 왜 가야되는데. 부모님의 곁에 있으면 오죽 좋으냐." 강동벽은 말을 하면서도 고개를 흔들어 분명하게 불만을 드러냈다.
나는 그녀에게 어떻게 나의 위험한 처지를 설명해야할지를 몰랐다. 나의봉은 내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자 그녀에게 말한다: "소우의 직장은 사천에 있어요. 북경에 이렇게 오래 머물렀으니, 당연히 돌아가야지요. 최소한 몇달간의 급여는 받아와야지요."
"가라. 급여를 받으면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라. 돌아오면 우리 집에서 살자. 나는 언제든지 환영한다. 네가 받아온 급여는 네가 써라. 아니, 아버님 어머님께 드려라. 이곳에서는 영원히 무상으로 지낼 수 있다. 나는 은혜를 베풀면서 보답은 바라지 않는 사람이다."
우리 세 사람은 모두 웃었다. 나는 강동벽에게 대답했다. 일단 잡무를 처리하고 나면 즉시 북경으로 돌아와서 그녀의 곁에서 지내겠다고.
노인은 나의 대답을 듣고 아주 만족했다. 이어서 손가락 하나를 내밀며 물었다: "너는 1주일만 가는 거다. 좋지?"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다시 손가락 2개를 내밀면서 물었다: "그럼, 2주일?"
여전히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다시 손가락 하나를 추가하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3주일, 그럼 충분하겠지?"
나의봉이 나에게 눈짓을 보냈다. 나는 그래서 황급히 대답했다: "강어르신, 3주일이면 제가 돌아오겠습니다." 노인은 즐거워했다. 기뻐하면서 두 손으로 손뼊까지 쳤다.
기실, 나는 내가 사천으로 돌아가는 길은 흉다길소(凶多吉少)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단 천극단의 대문을 들어가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혁명군중의 전정(專政)이라는 것을. 나를 비투하고, 나를 가두고, 어떻게 나를 괴롭히든 다 괜찮을 것이다. 나는 내 목숨이 아깝지는 않다. 그러나, 부모님이 걸린다. 부모님은 하늘보다 높고, 목숨보다 중요하다. 나이드신 아버지를 생각만 하면 마음이 놓이지 않고, 비애가 느껴지며,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강동벽의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조용한 것과 비교하면, 나는 아버지의 얼마 남지 않은 미래가 어떻게 될지 감히 추측조차 할 수가 없었다. 억누르기 힘든 내심의 우상과 공포를 가진 나는 낮은 목소리로 나의봉에게 말했다: "제가 떠나면 아버지가 앞으로 어떻게 사실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귀를 가까이 댔지만, 강동벽은 내 말을 분명하게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는 급히 딸에게 묻는다: "소우가 지금 뭐라고 말한 거냐."
나의봉은 광동말로 나의 말을 다시 한번 말해주었다. 그녀는 알아듣고나서 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말했다: "소우, 넌 걱정하지 말고 가라. 너의 아버지는 병만 나지 않으면, 앞으로 문제가 없을 것이다. 내가 보증한다!" 그녀의 말투는 아주 굳건했다.
나는 그녀가 위로해주는 말에 감사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물어보게 되었다. "강어르신, 뭘 믿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보증까지 하신다니요."
노인은 말했다: "운명이 나에게 말해주는 것이다. 선친의 경력은 운명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너도 무술변법의 일은 개략 알고 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중고등학교 역사수업때 들었고, 대학에서도 한번 들었습니다. 나는 담사동(譚思同)이 감옥벽에 쓴 것을 가지고 연극대본을 써본 적도 있습니다."
"망문투지사장검(望門投止思張儉) 망명한 강유위와 도망친 양계초를 생각하면 장검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도와주고.
인사수유대두근(忍死須臾待杜根) 죽기를 참고 기다려 두근처럼 일을 성사시켜기를 바란다.
아자횡도향천소(我自橫刀向天笑) 나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늘을 우러러 웃을 것이니
거류간담양곤륜(去留肝膽兩崑崙) 죽고 사는 것이 달라도 간담상조하면서 곤륜산처럼 우뚝 솟기를 바란다."
노인은 큰 소리로 삼사동의 그 감옥에서 벽에 썼던 절명시(絶命詩)를 외웠다.
그녀는 나를 그녀의 옆자리로 옮겨 앉으라고 하면서, 딸에게는 자기에게 차를 따라달라고 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그녀가 나와 진지하게 얘기하려는 것이라고 여겼다. 과연, 그녀는 강유위의 운명에 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무술년(1988)년 팔월 선친은 변법을 실패했다. 만일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초엿새 새벽에 정변이 발생했다. 황상(광서제)는 갇히고, 서태후가 임조청정했으며 유신파인사들을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남해선생(강유위를 가리킴)은 가장 중대한 범인이었다. 그는 마침 이날 오전 11시에 자신의 짐을 초상국(招商局)의 해안윤선(海晏輪船)에서 내려, 영국 태고공사(太古公司)의 충칭호(重慶號) 윤선으로 옮겨타고, 천진을 떠났다. 영록(榮祿)은 비응전함(飛鷹戰艦)을 파견하여 추격했다. 비응전함의 속도는 중경호보다 배나 빨랐다. 그러나 도중에 전함에 석탄이 부족하여 어쩔 수 없이 천진으로 회항해야 했다. 소우야. 이게 운명이 정한게 아니면 무엇이겠느냐. 초팔일에 배가 연대(煙臺)를 지났다. 선친은 상륙하여 과일을 샀다. 영록은 상해도(上海道), 연대도(煙臺道)에 '중경호를 붙잡아 수색하여 강유위를 비밀리에 체포하라'는 밀전(密電)을 보냈다. 마침 연대도가 외부에 일이 있어 나가는 참이었으므로, 들어온 전보를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나중에 꺼내서 읽어보고는 놀라 급히 연대로 돌아왔는데, 그때는 중경호가 이미 떠난 후였다. 소우야. 이게 운명이 정한게 아니란 말이냐. 상해도는 밀지를 받고, 밤을 새워 직접 오송(吳淞)을 지켰다. 천진방향에서 오는 윤선은 모조리 배에 올라가 수색했다. 상해의 유신당인사는 많은 병사들이 그 곳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자, 이번에는 강유위가 죽을 수밖에 없겠다고 여겨, 모두 통곡을 하고 돌아갔다. 그런데, 바로 이때, 배에 타고 있던 브레난이라는 영국인이 사진을 대조하면서 선친을 찾아가 '황상은 이미 돌아가셨다. 급히 강유위를 체포하여 그 자리에서 처결하라'는 전보를 보여준다. 그후 이 영국영사관이 있는 사람이 선친에게 즉시 자기와 함께 작은 윤선을 타고 영국군함에 올랐다. 군함에 오르자마자 상해도가 보낸 자들이 그 작은 배를 나포하여, 중경호에 붙였다. 소우야. 이것도 운명이 아니겠느냐. 선친의 배 위에서의 심정은 아주 좋지 않았다. 황상이 이미 서태후와 영록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살도 생각한다. 배 위에서 그는 시를 하나 남긴다. 나는 지금도 외울 수 있다. 홀쇄용서예태음(忽灑龍犀翳太陰), 자미이좌제성침(紫微移坐帝星沉), 고신고부전의대(孤臣辜負傳衣帶), 벽해청천야야심(碧海青天夜夜心). 선친은 시를 지은 후, 집에 보내는 서신을 써서 사람들과 결별하려 했다. 그 영국인은 그의 모습을 보고,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은 아직 확인된 것이 아니니 강선생깨서는 좀더 기다려보시지요."라고 권했다. 영국의 두 척의 전함이 호송하면서 선친은 홍콩에 도착한다. 그제서야 황제가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래서 나중에 선친은 우리 집안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번에 위험을 벗어난 것은 죽을 수 있는 기회가 열한번이나 있었다. 그중 하나만 만났어도 목숨은 없었을 것이다."
여기까지 얘기한 후, 강동벽은 손가락을 들어 세는 모습을 하면서 말했다: "소우야. 봐라 남해선생이 죽을 위기가 몇번이나 있었는지를. 예를 들어, 황상이 그에게 즉시 북경을 떠나라고 재촉하지 않았다면 그는 분명 죽었을 것이다. 만일 서태후의 정변이 하루만 일찍 발생했더라도 그는 분명 죽었을 것이다. 만일 북경을 하루라도 늦게 떠났더라면 그는 남해회관에서 체포되었을 것이고 분명 죽었을 것이다. 만일 천진에서 객잔에 머물렀다면 윤선을 탈 수 없었을 것이고 분명 죽었을 것이다. 만일 탄 배가 초상국의 해안륜이었다면, 영국영사관의 사람이 그를 구해줄 수도 없었을 것이어서 분명 죽었을 것이다. 만일 그를 추적하는 비응전함이 석탄부족으로 천진항에 되돌아가지 않았더라면 분명 죽었을 것이다. 만일 연대도가 외출하지 않아서, 전보를 받은 즉시 병력을 보내어 체포하라고 했으면 역시 분명 죽었을 것이다. 만일 그 영국인이 전함을 보내어 호송하지 않았다면 중간에 붙잡혔을 것이고, 분명 죽었을 것이다. 소우야. 선친은 이렇게 죽을 위기가 많았지만,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이게 명명중에 귀신이 보우해준 것이 아니겠느냐. 내 생각에 이런 것이 운명이다. 운명으로 정해진 것이다. 모든 사람은 모두 자신의 운명이 있다."
이어서, 노인은 돌연 일어나서 내 앞에 섰다. 그리고 말했다: "현재 너의 아버지가 힘든 상황인 것만 보지 말라. 그의 운명은 결국 좋아질 것이다. 홍태양이 지금 붉은 것만 보지 말라. 그의 부인도 이름을 떨치고 있으나, 장래 그 일가의 운명은 모두 좋지 않을 것이다. 소우야, 웃지말고 들어라. 내가 하는 말을 진실이고, 솔직하며 엄숙한 말이다." 나는 확실히 웃음을 띠었다. 다만 약간은 억지로 웃음을 지은 것이다
강동벽은 내가 그녀가 단언하는 말을 그다지 믿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래서 표정을 엄숙하게 하고 가슴을 치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너의 아버지는 운명이 정해져 있다. 분명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장선생 자신이 더 이상 살고싶지 않는 경우만 아니라면. 너는 안심하고 성도로 가라. 걱정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곤란한 일을 만나면 내가 있지 않느냐." 확실히, 노인이 이 말을 할 때는 하루종일 두부유만 먹는 처지도 잊어버렸고, 야간에 일어나서 어렵게 발을 떼는 나이라는 것도 잊어버렸고, 밖은 홍색공포로 가득하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녀의 어깨위로 끌어안았다. 마치 악독한 바람이 바깥에서 불고 있으며 온천지에 피바람이 불지만, 누군가 나를 보호해주고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려주는 것처럼.
그렇다. 살고 죽는 모든 것은 존망의 어려움은 모든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는 바가 있지만, 미리 알 수는 없다. 나중의 일은 마치 강동벽이 말한 것처럼 되었다: 1년후, 부친은 병으로 죽는다. 궁극적인 원인은 스스로 더 이상 살고싶어하지 않아서이다. 친척을 비롯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심령에 상처를 입혀, 정신적으로 고독하고, 치욕스럽고, 피곤하며, 의기소침해졌다. 그리하여 그는 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번잡한 세계를 떠나고자 했다. 생명은 부친에 있어서 그저 사치스러운 글자에 불과했다. 가슴 속에 고통과 비분을 가득채우고 떠났다. 이것이 바로 강동벽이 말했던 운명 혹은 명이 정해준 것이 아닐까.
나는 성도로 돌아왔다. 바로 혁명위원회에 의해 갇히고, 행동자유를 잃었다. 1969년 가을, 이미 현행반혁명분자이던 나는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한번 보겠다는 생각과 죽어도 나의 집에서 죽겠다는 결심을 하고, 한밤중에 담장을 넘어 천극단이 사적으로 만든 감옥에서 도망친다. 그리고 북경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검문할 때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피했고, 이틀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잠을 자지도 못하면서 북경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에 어머니는 나에게 말해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1969년 5월 17일)이후 3개월만인 1969년 8월 17일에 강동벽도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강동벽은 처음에 그저 감기를 앓아서 집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지 못하게 병세가 위중해져서 병원으로 갔고, 관찰실에 놓아두었다. 좁은 병상은 마침 문을 마주하고 있어서 바람이 계속 들어왔고, 오가는 사람들도 끊이지 않았다. 나의봉은 재삼 간청했다. 병실로 옮겨달라고.
그러나 병원측의 사람은 그녀를 흘겨보면서 대답한다: "너의 어머니는 사회명사가 아니냐. 이렇게 있으면 된다."
며칠 후, 강동벽은 관찰실에서 죽는다.
한번은 이런 한담을 나눈 것을 기억한다. 나의봉이 나에게 서방의 이야기를 하나 해주었는데, 한 큰 건물에 여러 국가의 사람들이 살았다. 영국인, 프랑스인, 유태인, 독일인, 그리고 중국인이. 어느 날 밤, 건물에 갑자기 불이 붙었다. 영국인은 처를 구하러 갔고, 독일인은 딸을 구하러 가고, 프랑스인은 애인을 구하러 가고, 유태인은 돈주머니를 챙기러 갔다. 중국인은 어떻게 했을까? 늙은 모친을 안고 건물아래로 달려갔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가가대소했다. 웃으면서 생각해보니 바로 나의 라이가 중국의 정치풍파속에서 모친을 안고 피곤하게 뛰어다닌 사람이 아니었던가. 지금 모친은 그녀의 등에서 미끄러졌고, 그녀는 아마도 숨을 쉬거나 잠시 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북경으로 몰래 숨어들어온 짧은 기간동안, 어머니가 주도면밀하게 안배하여 나의봉을 만날 수 있었다. 1년여가 지났는데, 그녀의 모습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완전히 노부(老婦)의 모습이었다. 두 뺨과 눈은 푹 파였고, 얼굴색은 납색이었다. 원래 마르고 약했던 그녀는 아미 온몸이 뼈와 신경으로만 이루어진 것같았다. 특히 이전에 그 아름다웠던 눈동자는 백년은 황무지로 놓아둔 토지처럼 아무런 윤택도 없었다. 계산해보면 그녀는 60세가 되지 않았다. 이 나이에 외국에서라면 아직 잘 먹고 잘 놀 시기이다. 혁명은 그녀에게 있어서, 그녀의 말 그대로 경락을 모조리 끊어버린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나를 똑바로 주시하며 말했다. "소우야. 우리가 만나게 되었구나. 그런데 너에게는 아버지가 없고, 나에게는 어머니가 없어졌구나."
우리 둘을 서로 머리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그녀는 반시간정도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켜 떠났다.
어머니는 식사를 하고 가시라고 권했지만, 그녀는 사양했다. "여기까지 온 것은 그저 소우를 한번 보기 위해서입니다."
어머니는 굳이 그녀를 시내버스정류장까지 바래다 주었다. 돌아온 후에 나에게 말했다: "가련한 의봉, 걸음이 나보다도 느리구나. 말하는데 기운도 없다."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나의봉 본인은 정치적 박해를 받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 이렇게 쇠약해지고 처량해졌단 말인가.
어머니가 말했다: "강어르신이 죽은 후에도 의봉의 오빠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다. 혁명정권은 모든 사유주택의 재산권을 국가에 바치도록 규정했다. 그래서 외교부의 고관에게 임대해주던 수입도 없어졌다. 경제적으로 돈줄이 막힌 그녀는 그저 싸구려차와 간단한 식사만 하면서 돈을 아끼며 살고 있다. 집안에서 일하던 남자일꾼 노곽과 이진을 내보낼 때, 의봉에게 1인당 3천위안의 이주비용을 달라고 했다. 주지 않으면 거민위원회에 고발하겠다고 했다. 강씨집안에 무슨 돈이 있겠느냐. 의봉은 겁이 많고, 공농병이나 가도판사처에 밉보일 수가 없었다. 분명히 공갈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저 꾹 참아야 했다. 6천위안을 마련하기 위하여, 그녀는 마음이 조급하여 거의 미칠 지경이 된다. 낮에는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가구, 의복, 물건을 팔고, 밤에는 초조함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그런 힘든 세월을 보냈으니 그녀가 늙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겨울이 되자, 의봉은 이미 난로를 땔 수 없게 도었고, 할 수 없이, 물을 끓여서 주머니에 넣어 가슴에 안고 자야 했다. 그런 힘든 세월을 보내니 그녀가 늙지 않을 수 있겠느냐. 다시 말해서, 이전의 모든 생활내용과 모든 사회관계가 단절되었다. 마치 하루종일 이미 물이 마른 우물 속에 앉아있는 것같았을 것이다. 그래서 의봉이 늙은 것은 마음부터 늙어간 것이다."
어머니의 말은 바늘처럼 내 마음을 찔렀다. 그리고, 그때의 나의봉은 아마도 전차에 앉아서,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차밖을 쳐다보면서 죽어있는 것같은 눈동자로 계속 바뀌는 거리평경을 보면서 희망없는 미래를 생각했을 것이다.
밤새도록 나는 이런 저런 궁리를 했다. 나의 라이가 새롭게 살 길을 찾아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러나, 아무 것도 생각해낼 수 없었다. 옛날의 꿈은 이미 지나갔고, 새로운 꿈은 오지 않는다. 기실 우리의 이런 환경 속에서, 그녀가 새로운 꿈을 꿀 수도 없었다. 그녀가 살아가는 방식은 신사회에서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신정권이 주창하는 획일적인 생활, 관념 및 사고방식은 그녀의 마음 속의 마지막 틈마저도 모조리 막아버리게 되었다. 이런 특정인물 및 생존환경은 나로 하여금 중국역사상의 유민(遺民)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명청교체기의 사대부문제를 연구하던 학자가 이런 말을 한 것도 이해가 된다: 중국역사상 '유민들은 많은 경우 죽기를 기도하고, 죽기를 기다리고, 삶을 죽음으로 여겼던 사람들이다." 아버지에 있어서 강씨모녀는 중국최후의 귀족이다. 그 말이 맞는 것같다.
나는 나의봉이 언제 돌아가셨는지 모른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문혁'후기 가도의 적극분자와 남자일꾼이 고발하여 나의봉은 갇히게 된다. 그리고 그녀에게 사도뢰등(司徒雷登, 민국시대 미국의 주중대사, 북경대학 교장을 역임함)과의 반혁명관계를 실토하라고 요구했다. 그녀는 16살에 연경대학에 입학하여, 나이가 가장 어리고, 공부를 가장 잘하여 이 교장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나의봉은 자신은 경궁지조(驚弓之鳥)로 가장 두려워한 것이 정치라고 말했다. 내 생각에 중국의 가혹한 정치가 그녀의 목숨을 줄인 것이다. 하물며 영혼이 고귀한 사람은 왕왕 취약하기 마련이다.
1978년 나는 명예회복되어 감옥에서 나오고, 북경으로 돌아왔다.
구정전날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신원리(新源里)의 섭감노(聶紺弩)의 집으로 가서 섭노인의 생일축하인사를 드렸다. 정오에 장수면을 먹고난 후 모친은 바로 인사를 하고 나왔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항상 오래 머물다가 돌아왔는데, 오늘은 왜 예외인지?
섭가를 떠난 후, 어머니는 나에게 말해주었다: "사람에게 부탁하여 나의봉이 나중에 살던 곳은 알아냈다. 아마도 이 부근인 것같으니, 오늘 우리가 찾아가보자."
어머니는 길을 걸어가면서 계속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쪽지에 적힌 건물, 동번호와 문패번호를. 우리 둘은 마침내 보통주민주택건물의 1층을 찾아낸다. 그 건물은 아주 낡았고, 복도는 빛도 어두웠다. 초인종을 누르자 백발의 할머니가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놀라서 소리쳤다: "임여사님 아닙니까?"
"네가 소우냐?"
머리가 온통 백발인 것을 제외하고는 임여사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그때 그녀는 젊지 않아 보였는데, 지금도 그다지 나이들어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아주 공손하고 예의를 차렸다 마치 옛날에 강동벽을 대하듯이.
그녀는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강어르신과 나소저의 모든 물건은 여기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방안의 문을 열었다.
원래 이곳은 두 칸으로 나누어진 집이었다. 안쪽의 그 방은 바깥쪽의 방보다 약간 더 컸다. 가구, 가죽상자와 잡물들이 전체 공간에 가득 쌓여 있었다. 천정에 이를 정도로. 나는 자세히 이들 옛날 물건들을 살펴보면서, 작은 물건 하나를 기념으로 가지고 싶었다. 돌연 나는 흑갈색 필리핀목재로 만든 원형식탁을 발견한다. 그건 옛날에 두부유와 구운만두편을 놓아두던 식탁이다. 거기에는 작은 제비집그릇이 내가 먹기를 기다리던 식탁이다. 갑자기 가슴이 아파왔다.
"앞으로 이 옛날 물건들을 어떻게 처리할 건가요." 모친이 임여사에게 물었다.
그녀는 대답한다: "처리하지 않을 겁니다. 저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강씨집안의 친척이 찾아오기를. 강씨집안의 사람이 오지 않은 제가 계속 지키고 있어야지요."
임여사와 헤어질 때 그녀는 우리들을 향해 허리를 숙여 절을 하면서, 연이어 감사하다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마음은 어떻게 해도 좋아지지 않았다. 저녁에 가족이 연말식사를 한 후, 9치짜리 흑백텔레비전으로 프로그램을 보았다. 나의 눈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지만, 마음은 동사십조의 하가구로 가 있었다. "한해표류연(翰海漂流燕), 사귀래(乍歸來), 의의난인(依依難認), 구가정원(舊家庭院)." 나는 그곳의 사립문, 석판로, 어사태평화, 파내버린 유엽매, 끓인 물을 부어 죽여버린 매괴, 그리고 내가 잠자던 작은 나무침대....
밤에 나는 어머니와 나란히 누웠다. 모친은 피곤해했지만, 나는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그 동사십조 하가구의 사합원은 강동벽의 집으로 개인재산인데, 임여사는 마땅히 거기에서 강어르신과 라이를 위해 유물을 지키고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어머니가 말했다: "그 집은 일찌감치 다른 사람이 차지했다."
"누가 차지했나요?" 내가 물었다.
"섭도영(葉道英)이다."
"섭검영(葉劍英)의 동생인가요?"
"그렇다."
나는 소리쳤다: "그가 왜 강씨집안의 개인재산을 차지한단 말입니까."
"강산이 그들 것이니, 집이야 말할 게 뭐 있겠느냐."
"나쁜 놈!" 나는 몸을 일으켰는데, 감옥에서 배운 욕이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왔다.
어머니는 엄하게 질책했고, 나에게 감옥에서 배운 나쁜 습관은 버리라고 명령했다. 나는 가만히 누워서 칠흑같은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마지막으로 본 나의봉의 기름이 말라버린 등잔같은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나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만일 나의봉이 나처럼 욕을 배웠더라면, 그녀도 분명 나처럼 살아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어머니에게 강씨모녀의 유골을 어디에 두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얻어낸 소식은 강동벽의 아들이 돈을 내서, 정협과 협의한 후 강동벽 모녀를 복전공묘(福田公墓)에 안장했다고 한다. 그때 아들은 이미 휠체어를 타고 있었고, 바다를 건너 모친과 여동생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도 없었다. 그들 모녀가 가지고 있던 강유위의 유묵(遺墨), 수고(手稿), 장서(藏書), 거기에는 진귀한 <대장경(大藏經)>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생전의 강동벽의 뜻에 따라 모두 국가에 무상으로 기부했다.
사정이 여기에 이르자, '입토위안(入土爲安)'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나는 다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강동벽은 북평의 평화로운 해방과 중국부녀해방운동에서 공헌이 있고, 또한 그들 모녀는 고급주택과 진귀한 장서를 모조리 나라에 바쳤는데, 어찌 3치도 되지 않는 묘혈과 두 개의 유골함을 놓아두는데, 그것마저 미국의 아들이 돈을 내야 했단 말인가? 설마 강동벽의 경력과 공헌이 우리의 부국장급 간부에도 미치지 못한단 말인가?
이미 신성이나 순수라는 것은 말할 수도 없는 오늘날,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강동벽은 일종의 절향(絶嚮)이다: 내가 그녀를 존경하고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는 행복이었다.
2002년 8월-11월 수우재(守愚齋)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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