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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한중관계

발해(渤海) 멸망후 발해인들은 어디로 갔을까?

by 중은우시 2024. 12. 14.

글: 국가인문역사(國家人文歷史)

동북아의 방연대물(龐然大物)

발해국발전의 직접적인 원인은 고구려가 멸망한 후 동북아의 거대한 권력진공이다. 7세기 중엽, 일찌기 현재의 한반도북부, 요녕동부, 길림대부분을 점거하고 있던 고구려왕조가 멸망하면서, 돌궐, 토번등 여러 강적을 상대하는 당왕조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적시에 장악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신라가 기회를 잡아 한반도북부의 대량의 영토를 차지하고, 당나라에서 요동을 관할하던 안동도호부는 요서주랑 동쪽의 광대한 동북지구를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당나라에 항복한 대량의 소수민족을 요서의 영주(營州, 지금의 요녕성 조양)에 집중시켰다. 그중에는 발해국의 건국자인 대조영의 부친 걸걸중상등이 있었다.

<신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발해는 원래 속말말갈(粟末靺鞨)로 고구려에 의부(依附)한 자이며, 성은 대씨(大氏)이다."

대조영(大祚榮)이 이끄는 속말말갈은 원래 고구려정권에 의부했었고, 원래는 대당의 영주 경내에서 기미(羈縻)통치를 받던 여러 부락중 하나였다. 그러나 거란인의 반란은 그들에게 역사적 기회를 주게 된다. 696년, 초기의 거란 우두머리 이진충(李盡忠)이 무주(武周, 이때는 무측천이 여황에 오름)에 반기를 들고, 영주도독(營黈都督) 조문홰(趙文翙)를 살해한다. 이를 역사에서 "영주의 난(營州之亂)"이라 부른다. 무측천은 후돌궐칸국의 카파간 카간(默啜可汗)과 연합하여 남북에서 영주반군을 협공하여 이진충이 전사한다. 다음 해, 무주군은 해(奚)족과 연합하여 이진충의 잔여세력 손만영부(孫萬榮部)를 소탕하여, 영주의 난은 끝이 난다. 이 짧은 이년간, 대조영의 부친은 거란인들과 같은 편이었고, 무주군대의 보복을 피하기 위하여, 그들은 동쪽으로 고구려옛땅으로 도망친다. 그리고 천문령(天門嶺)전투에서 무주의 추격군을 격패시켜, 숨쉴 여유를 갖게 된다.

698년, 돌궐의 카파간 카간과 무측천이 반목하며, 돌궐을 상대하느라 당나라조정은 잠시 동북은 신경쓰지 못하게 된다. 광대한 고구려의 옛영토는 대조영이 발전할 무대가 된다. 그는 진국왕(震國王)이 되어, 백산흑수의 사이에 살고 있던 말갈부락을 흡수하고, 교묘하게 사방의 강국들 사이에서 살아남는다. 수년동안 세력은 신속히 발전하여 고구려이후 동북아지방에 참신한 나라로 성장한다. 역사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발해는) 지방이 5천리이고, 호가 10여만이며, 승병(勝兵)이 수만이다. 서계(書契)를 잘 알고, 부여, 옥저, 변한, 조선해북쪽의 여러 나라를 모두 얻었다."

당현종 이융기가 즉위한 후, 713년, 대조영을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발해군왕(渤海郡王)에 임명한다. 그리고 그가 통치하는 지역을 홀한주(忽汗州)로 하여,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의 관직도 수여한다. 그후 "발해"는 나라의 새로운 국호가 된다. 그후 이백년간, 발해국은 당나라의 정치와 문화를 전면적으로 흡수하여, 당나라를 본받아 삼성육부제와, 관직계급, 훈작제도를 건립하고, 심지어 군사적으로도 당나라를 본받아 16위부병제와 신책군을 둔다. 또한 문화적으로도 중원의 유학경전을 대규모로 수입하고 심지어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내어 공부한다. 그리하여 유가문화와 한어문자는 발해국의 상층부와 보통백성들에게 통용되는 문화양식이 된다. 안사의 난을 전후하여, 요하 동쪽은 점차 발해국이 점거하게 되고, 발해와 당나라같의 왕래는 갈수록 밀접해진다.

발해국홍로정비 탁본

당왕조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외에, 발해국은 신라와 일본등과도 빈번하게 교류했다. 동북아 외교교류상 독특한 지위를 지니고 있었다.

거란의 노복(奴僕): 발해멸국후의 항쟁

8-10세기의 긴 세월동안, 발해국이 위치한 동북지구는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이 모두 정복하지 못하고 반드시 회유해야할 전략지대였다. 당왕조와 막북왕조(후돌궐, 회흘)이 서로를 견제하면서, 왕왕 발해국이 반드시 쟁취해야할 대상이 되곤 했다. 그러나, 당왕조의 번진할거가 가속화하고, 회흘칸국이 멸망하면서, 초원과 중원은 모두 분쟁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이때 동북에 위치한 발해국의 옆에서, 청우백마(靑牛白馬)를 숭상하는 유목민족이 서서히 새로운 정권을 형성해가고 있었다.

동북지구에서 활약하고 있던 거란족은 우문선비(宇文鮮卑)의 후예이고, 농후한 동호(東胡)유목문화특색을 지니고 있어, 어렵(漁獵)으로 살아가는 발해인에 대하여 군사적으로는 천연적인 우세를 점한다. 쌍방이 모두 당나라의 속부(屬部)이던 시기에도 이웃하고 있으므로 그들간에는 분쟁이 빈발했다. 907년, 거란족의 지도자 야율아보기가 칸의 권좌에 오르고, 거란8부연맹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리고 정식으로 발해국이라는 '세구(世仇, 대대로 내려오는 원수)'에 대하여 정복전쟁을 개시한다.

거란은 먼저 발해국통제하의 요동지구를 점령한다. 10년이 되지 않는 시간내에 전체 요동을 정복하고, "요양고성을 수리하고, 한족, 발해호를 채워넣는다." 요하평원지구의 발해인과 한인들이 모두 거란의 통치하에 들어간다. 926년 정월, 야율아보기는 4일내에 발해서부변경의 요새인 부여성(지금의 길림 농안)을 함락시키고, 다시 10일내에 상경용천부를 포위하여, 발해국의 마지막 국왕의 항복을 받아낸다. <요사>는 이 '해동성국'의 최후에 대하여 몇 마디 말만 남겨 놓았다.

"신미(辛未), 대인흡(大諲歙)이 소복(素服), 고색(稿索), 견양(牽羊)하며, 신료 부하 삼백여명을 이끌고 나와서 항복하다....성안에 도착하자, 대인흡이 말 앞에서 죄를 청하다....2월 경인, 안변, 막힐, 남해, 정리등 부 와 제도 절도사, 자사들이 입조하였고, 위로하고 보냈다. 획득한 기물, 화폐, 여러 물건은 장병들에게 하사한다.....대사면령을 내리고, 천현으로 연호를 고친다. 발해를 평정했다는 사실을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알렸다."

결국 발해는 국왕이 포로로 잡히고, 전체 영토가 투항함으로써 끝난다. 그러나 국가의 멸망이 발해인의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백만인구에 달하던 발해족은 소수의 귀족들이 남으로 도망쳐 신라로 간 것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요나라의 신민이 된다.

발해국 천문군(天門軍)의 인장

요태조는 군대를 이끌고 발해국을 멸망시킨 후, 그 옛땅에 동단국(東丹國)을 건립한다. 그리고 발해 상경 홀한성을 동단국의 수도인 천복성(天福城,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으로 삼는다. 그리고, "황태자 야율배(耶律倍)를 왕으로 세우고, 황제(皇弟) 질랄(迭剌)을 좌대상(左大相)으로 삼고, 발해노상을 우대상(右大相)으로 하고, 발해사도 대소현(大素賢)을 좌차상(左次相)으로, 야율우지(耶律羽之)를 우차상(右次相)으로 삼는다." 이는 실제로 일부 발해의 노신들을 회유하여 미래의 황제인 야율배로 하여금 발해의 옛 백성들을 통치하게 하는 시험무대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요군의 서쪽으로 돌아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야율아보기가 병사하고, 야율덕광(耶律德光)이 황위계승전에서 승리를 거둔다. 그렇게 되자 동단국을 차지하고 있는 큰형인 야율배가 눈엣가시가 된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거란대신은 야율덕광에게 상소를 올려, 발해의 옛수도 홀한성은 상경에서 거리가 멀고, 발해는 인구가 많으니, '장래 후환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발해인을 요동으로 이주시킬 것을 건의한다. 요동은 원래 발해인의 옛땅이니, "고향으로 돌아오면, 나무, 철, 소금, 물고기를 풍성하게 얻을 수 있어, 안거낙업(安居樂業)할 것이다"라고 보았다. 그러나 실은 야율배가 발해현지세력과 결합하여, 야율덕광의 통치에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천현3년(928년), 야율덕광은 정식으로 명을 내려 동단국의 발해유민을 모두 요동으로 이주하도록 명한다.

칙령이 내려오자, 눈강(嫩江), 송화강(松花江) 일대의 발해유민들 사이에 큰 파란이 일어난다. 일부 거란국과 관계가 밀접한 귀족들은 야율배를 따라 남으로 내려가 동평군(東平郡, 지금의 요녕성 심양, 나중의 요나라 동경)으로 이주한다. 전 발해 6주 및 그 속주, 현의 유민들도 거란의 협박하에 목단강을 거슬러 올라간 다음, 요하를 따라 내려가서 요하평원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반항의식을 지닌 발해왕족과 신민들도 적지 않았는데, 그들은 거란의 역량이 약화할 때마다, 반요복국의 투쟁을 계속하여 일으킨다. 전 발해왕의 동생은 기회를 잡아 발해고성 홀한성(상경용천부)를 점령하고, 세자 대광현(大光顯)도 서경 압록부(鴨綠府)에서 즉위하며, 다시 남경 남해부(南海府, 지금의 조선 함경도)를 수복한다. 한때 소위 '후발해왕국'을 건립하고, 이어 다시 올야(兀惹)등의 부락과 연합하여, 지방에 할거하고, 거란에 대하여 복속하였다가 배반하기를 반복한다. 발해 옛땅과 요나라간에는 대치국면이 형성된다.

요나라 통치하에, 야율아보기는 발해국의 왕족과 일부 귀족을 거란의 내지로 이주시킨다. 특히 요나라의 상경지역으로 이주시켜서 북면관(北面官)의 관리체계에 편입시킨다. 요나라의 북면관직중에서, 특별히 발해장사(渤海帳司)를 두는데, 거기에는 발해재상(宰相), 발해태보(太保), 발해달마(撻馬)등의 직위가 있었다. 직위명칭은 존귀하지만, 실제로는 실권이 거의 없었다. 후임 황제인 요태종 야율덕광은 발해유민을 대규모로 요동지역으로 이주시키고, 동경을 동단국의 수도로 정한다. 이렇게 이주된 발해이주민들은 남면관(南面官)의 관리체계에 편입되어, 한법(漢法)에 따라 통치했다.

요나라통치하의 동북 여러 민족중에서, 발해인의 문화수준이 가장 높았다. 그들의 문화에는 당나라문화가 많이 유입되어 있었고, 유학을 숭상하고, 불교를 신앙했으며, 사회문화에서 "예의범절이 화하와 같은 풍이었다"는 특징이 있었다. 이런 문화분위기와 농후한 유목민족기질의 거란인은 서로 맞지 않았다. 거란인은 발해의 선진적인 사회조직문화로 인하여 그들에 대해 크게 의심하고 꺼리게 된다. 그리하여 사회통치층면에서, 발해유민에 대하여는 침중한 세금을 부과하고 엄밀하게 감시통제하게 된다. 그리고 당나라문화를 받아들인 발해인은 거란인을 오랑캐로 보았다. 그리하여 요나라통치체제내에서 자리잡기 힘들게 된다.

그런 이유로 인하여, 요나라 통치하의 발해인은 연속하여 3번이나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요나라때 발해인은 요동의 주요민족이었고, 요나라통치하에서 민족의 독립성을 상대적으로 보존하게 된다. 그리고 상당한 부분의 발해귀족은 "비록 억지로 요나라의 통치에 순응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살주파국(殺主破國)의 원한을 품고 있었다."

말갈일가친(靺鞨一家親): 여진과 발해의 밀월

거란인과는 달리, 여진인과 발해인의 선조는 모두 숙신족계의 말갈인이다. 여진인의 조상은 흑수말갈이고 발해인의 전신은 속말말갈이다. 이들은 모두 수당시기의 말갈7부에 속한다. 금태조 완안아골타는 발해인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하여, 일찌기 요나라에 대한 전투과정에서 발해인인 신하를 발해 옛땅으로 보내 이렇게 알리게 한다:

"여진과 발해는 원래 일가(一家)이다. 내가 군대를 일으켜 요나라를 토벌하는데, 무고한 사람들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다."

여진마애석각(길림성박물관)

여진의 이런 정치구호는 일부 발해옛땅의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얻어낸다. "함주, 빈주, 상주의 3개주와 철리, 올야는 모두 요나라에 반기를 들고 여진에 가담한다." 그러나, 요말금초의 대부분 발해인은 확실히 자신의 국가를 따로 세우고 싶어했다. 예를 들어 고영창(高永昌)은 대발해국을 건립하는데, 실제로는 반요((反遼), 거금(拒金)이다. 요,금이 혼전하는 틈을 타서, 독립된 발해국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전투력이 요군의 몇배에 이르는 금나라사람들이 발해국의 독립을 허락할 리가 없다. 금군의 정예가 요양 교외의 옥리활수(沃里活水)와 수산(首山)에서 발해군을 대파한다. 이어 요양을 함락시키고, 부흥한지 몇년밖에 되지 않은 대발해국은 다시 소멸한다. 금나라는 고영창의 발해국을 멸망시킨 후, 신속히 요동의 주현을 점령하고, "맹안모극(猛安謀克)을 설치하여 본조의 제도와 같이 했다." 즉 발해인에 대하여 완전히 여진화통치를 실행한 것이다.

여진인의 강력한 정복하에, 발해인은 부득이 금나라의 통치를 받게 된다. 금나라사람들의 발해에 대한 통치방식은 요나라가 '한제'로 발해를 통치하던 것과 전혀 달랐다. 주로 무력압박과 동족선전을 위주로 하는 강력한 동화정책이었다. 그 목적을 거란인들처럼 발해인을 자신들에게 부속된 다른 민족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여진족군의 사회조직체계에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발해인에 대한 흡수와 겸용은 금나라 초기 통치집단의 인원구성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여진인의 건국초기, 국가제도창건에 중국제도를 잘 알면서 신뢰할 수 있는 인재가 시급히 필요했다. 일찌기 적이었던 거란인은 신뢰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여진본족의 사람은 오랫동안 무력에는 뛰어나지만 문화, 예악은 잘 몰랐다. 그리하여, 여진족은 명의상의 동족인 발해인을 기용하게 된다.

금나라때, 발해족의 걸출한 인물로는 상서좌승(尙書左丞) 고경예(高慶裔)가 있다. 그는 투항전에 요나라의 '동경호부사'에 재직했고, 한문과 여진어에 정통했으며 풍부한 관료경험이 있었다. 태사(太師), 상서령(尙書令) 장호(張浩)는 발해의 박학한 선비로서, 아골타에게 계책을 제시한 바 있다. 상서령 이석(李石)은 그 가족의 요양에서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완안옹(完顔雍)의 등극을 지지했고, 이를 통해 금나라의 통치핵심에 들어간다. 금세종시기 4명의 상서령중 2명이 발해인이었다.

송나라때 이런 기록이 있다: "발해가 먼저 투항하였다. 그리하여 여진은 발해인을 요직에 많이 기용했다." 발해인의 무력은 독립하기에는 부족했고, 그 지식인들은 자연스럽게 여진인들의 회유를 받아들여, 금나라에서 중요한 직무를 갖게 된다. 금나라도 이들 발해신하들을 충분히 신뢰했다.

고관후록과 더불어 나타나는 것은 정략결혼이다. 금나라의 발해고관의 가족구성원은 대부분 여진황실과 혼인관계를 맺었다. 발해의 "왕은 예로부터 대(大)를 성으로 하였고, 귀족성으로는 고(高), 장(張), 양(楊), 두(竇), 오(烏), 이(李)등 몇몇에 불과했다. 부곡(部曲), 노비들중 성이 없는 자들은 모두 그 주인의 성을 따랐따." 발해 요양의 대씨, 이씨, 장씨등 세 갈래의 발해왕성과 귀족성가족들은 모두 여진종실과 대대로 통혼했다.

<금사>기록에 따르면, 발해왕족 대씨는 최소한 4명의 딸이 각각 금나라황제 및 기타 황족에게 시집간다.

한 딸은 금덕종 완안종간의 측실이 되고, 한 딸은 해릉왕의 원비(元妃)가 되고, 한 딸은 금세종의 유비(柔妃)가 되고, 한 딸은 종실 완안아호리의 처가 되었다. 금세종은 이석의 딸, 장현정(張玄征)의 딸을 원비로 삼았다.

심지어 금나라의 10명 황제들 중에서, 해릉왕 완안량, 금세종 완안옹, 위소왕 완안영제 세 명의 황제는 모두 발해비빈 소생이다(금선종의 모친 유씨도 요양사람이어서 발해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보면, 금나라황족과 발해명문가족의 정략결혼이 많았고, 양족의 관계가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여진 경내의 보통발해인은 통일적으로 병민일체의 "발해팔맹안(渤海八猛安)"에 나뉘어 속했다. 맹안은 삼천호를 관할하므로, 당시 금나라에 재적중인 발해인은 2만4천호이고 인구는 10만가량이었을 것이다. 설사 금나라의 관리체계에 편입되지 않은 산촌의 야호(野戶)까지 감안하더라도 발해인구는 전성기의 백만과 비교하면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수치가 보여주는 것은, 전쟁으로 인한 인구손실과 요,금시기의 민족융합으로 발해민족신분인식을 가진 인구수량이 점차 감소했다는 것이다.

발해인은 요동의 옛땅에서 수량이 급감한 것뿐만 아니라, 전쟁원인으로 계속 남으로 이주했다. 송,금전쟁때, 발해인은 금나라의 중요전투역량으로 남하하여 송을 정벌하는 전쟁에 참여한다. 금나라에 투항하고, 금나라군대를 안내한 발해총사령관 곽약사(郭藥師)는 바로 발해인이다. 그와 그의 부하는 금군을 따라 남하하여 개봉을 함락시키고, 송휘중, 송흠종 두 황제를 포로로 잡는다. 이렇게 금나라에 큰 공을 세운다. 발해왕족 대고(大㚖)도 완안종필을 따라 남하하여 남송을 정벌하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심지어 장강을 도하하는 전투에서 가장 먼저 장강남안에 상륙한 금나라부대가 된다. 위에서 언급한 발해장수와 군대는 전투이후, 대부분 황하중하류지역에 남아 위수부대가 되어, 여진, 한족과 섞여서 거주하게 되면서 점차 금나라 역사속에서 매몰된다.

여기저기 흩어진 발해인이 원래의 생활상태와 전통습속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유일하게 남은 것은 요양에 거주하던 명문거족 대, 고, 장, 양, 두, 오, 이등의 가족이다. 이들은 상호 혼인을 통해서 여전히 상대적으로 통일된 문화와 혈연권을 유지하고, 금나라사람들에게 발해인으로 불렸다. 그러나, 이들 혁혁한 가족들이 비록 발해출신이라는 인식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점 약화된다.

금희종시기부터, 금나라의 발해인에 대한 정책은 한인에 대한 정책과 기본적으로 같아진다. 예를 들어, 천권원년(1138년)의 조서에서 여진,거란, 한인은 각각 자신의 문자를 사용한다고 규정하면서, 발해인은 한인과 같다고 한다. 대정9년(1169년) 정월, 금나라는 추가로 한인, 발해는 수계혼의 적용을 받지 않도록 한다. 금나라정부의 추진하에 발해인과 한인의 일체화정책으로 발해인은 신속히 한화하고, 일찌기 혁혁했던 발해의 명문거족들은 결국 금말원초의 역사에서 점차 와해되고, "조상이 요양에 살았다"는 지명에 대한 인식만 남아 있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발해라는 명칭이 마지막으로 나타난 것은 원나라말기 도종의(陶宗儀)의 <남촌철경록(南村輟耕錄)>의 "씨족.한인팔종(漢人八種)"이라는 것이다:

거란(契丹), 고려(高麗), 여진(女眞), 죽인알(竹因歹, 漢人), 술리활알(述里闊歹), 죽온(竹溫), 죽적알(竹赤歹), 발해(여진동)(渤海(女眞同))

고대중국북방에 웅거했던 거란과 여진은 물론 한쪽 지방에 치우쳐 살고 있던 발해까지 모두 민족융합과정에서 한인으로 되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