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강녕지부(江寧知府)
최근 북한과 남한의 긴장국면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10월 15일 정오12시경, 북한은 군사분계선이북에서 남북도로의 일부구간을 폭파시켰고, 한국군측에서는 총을 쏘아 경고했다. 쌍방은 정식으로 "말싸움"에서 "무기대항"으로 넘어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북한이라는 신비한 국가에 흥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국가는 도대체 어떻게 태어났으며 어떤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서는 그에 관한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한다.
김일성의 원래이름은 성주(成柱)이다. 어려서 부모와 함께 동북으로 갔으며, 어릴 때 김성주는 길림시 육문중학(毓文中學)을 다녔고, 당시 나중에 인민대학 역사학과 학과장이 되는 상월(尙鉞)선생에게 가르침을 받는다.
상월은 초기 공산당원으로 그의 영향하에, 김성주는 1931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한다. 당시 나이 19살이었다.
즉, 김일성의 이력에서 1931-1945년은 중국공산당원이었고, 1945년이후에는 조선노동당원이 된다.
김일성이 입당한 그 해에 마침 "9.18"사변이 벌어진다. 동북인민은 속속 유격대와 의용군을 조직하여 일본의 침략에 맞서싸운다.
당시의 형세에 근거하여, 중공 만주성위(滿州省委)는 간부들을 지방으로 보내 무장투쟁을 전개하도록 한다: 양정우(楊靖宇)는 남만(南滿)의 반석유격대(礬石遊擊隊)로 가고, 주보중(周保中)은 길동의용군(吉東義勇軍)으로 가며, 이조린(李兆麟)은 주하중심현으로 가서 유격대를 조직하고, 조상지(趙尙志)는 파언유격대(巴彦遊擊隊)로 갔고, 최용건(崔庸健)은 길림동부의 보청(寶淸), 호림(虎林)등지로 가서 당조직을 발전시킨다....
1932년 봄, 김일성은 만주성속현위 산하의 동만특위(東滿特委)의 파견으로 안도현(安圖縣, 지금의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속현)으로 가서 안도유격대(安圖遊擊隊)를 만든다.
안도현의 서남쪽에는 저명한 명승지가 있다: 장백산 천지.
젊은 시절은 기억은 항상 좋다. 여러해가 지난 후 김일성이 한반도 절반의 주인으로 등극한 후, 선전부문에서는 이 천지를 왕조의 토템으로 선전하기 시작한다.
안도현 경내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이 유격대는 조선의 역사에서 왕사(王師)의 원류로 취급하고, 적계중의 적계로 본다. "유격대파"로도 불린다.
1932-1937, 김일성은 휘하부대를 이끌고 여러번 일본군과의 유격전을 벌이면서 점차 명성을 높여간다.
1936년의 동북항련대오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김일성의 부대는 동북항련 제1로군 제2군 제6사로 재편된다.
양정우는 제1로군 사령원 겸 정위가 되고, 위증민(魏拯民)은 부총사령 겸 정치부주임이 된다. 이 두 사람은 김일성의 직속상사들이다.
양정우의 원래 이름은 마상덕(馬尙德)이다. 일찌기 고향 하남 일대에서 농민운동을 조직했고, 1929년 소련으로 유학을 떠나는 도중에 심양에 체류하게 된다. 그때부터 동북의 백산흑수에 뿌리를 내린다.
제1로군시기에 김일성의 제6사는 개략 수백명규묘였다; 조선족을 위주로 하여 항련내에서는 "조선사(朝鮮師)"로 불렸다.
중국동북에서 활동하는 조선인으로 1936년말, 김일성은 한반도본토의 유격대지도자 박금철(朴金喆)과 연락하는데 성공한다.
아마 여러분들은 박금철이라는 이름이 낯설 수 있는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명칭을 들어본 바 있을 것이다: 갑산파(甲山派, 북한의 갑산군 일대에서 활동했음)
나중에 조성의 정권을 장악한 "유격대파"는 모두 두 곳에서 온 인원으로 구성되었다: 하나는 김일성이 이끄는 "항련파"이고, 나머지 하나는 박금철이 이끄는 "갑산파"였다.
박금철은 1956년 평양종파사건때 김일성을 확고하게 지지하며 연안파와 소련파에 대항한 중요역량이 된다.
1960년대 세력이 너무 커지자 김일성이 견제하게 되고, 1967년 "천리마운동에 반대한다"는 죄명으로 체포되고, 다음 해에 처형당한다.
시간은 다시 항련연대로 되돌아가도록 한다.
1937년 6월, 김일성이 이끄는 항련대오와 갑산파유격대는 연합하여 대일본군작전을 기획하게 된다.
어느 날 깊은 밤에 김일성은 약 100명의 병사를 이끌고 갑산군으로 들어간다. 그들과 갑산의 박금철부대 유격대는 비밀리에 회합하여 약 150명의 총병력을 구성한다.
양군을 합친 후 중국북한변경에 있는 혜산시 산하의 조그마한 마을 "보천보(普天堡)"를 습격한다.
일본에서 이곳에 주둔시킨 무장병력은 겨우 파출소 1개였다. 사건발생당일 모두 5명의 경찰이 지키고 있었다.
김일성부대의 100여명이 쳐들어오자, 파출소의 경찰 5명은 황급히 도주하게 된다.
김일성부대는 파출소를 점령하여, 총기와 탄약을 탈취하고, 현지 정부사무소, 우체국등 공공시설을 불태우고, 전단을 뿌린다.
다음 날 철수하는 도중에 김일성부대와 추격해온 일본경찰간에 전투가 벌어진다. 격전과정에서 일본경찰 7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 부상당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보천보대첩"이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자면,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건 장난같는 소규모 싸움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발생한 당시에는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이는 한반도를 일본이 점령한 후, 수십년만에 처음 조선인 자신의 군대가 쳐들어온 것이다. 비록 하루밖에 머물지 못했지만.
실제로, 일본정부는 이번 사건을 매우 중시한다. <동아일보>의 연속보도를 거쳐, 김일성이라는 이름은 조선의 백성들 사이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원래 동북일본군이 김일성에게 내걸은 현상금은 2000엔이었다. 보천보전투후에는 2만엔으로 급등한다. 10배나 오른 것이다.
정치적 의미로 보자면, 일본인의 여러가지 동작은 김일성을 위해 사상유례없는 선전광고를 해준 셈이다. 그가 나중에 한반도로 되돌아와서 권력을 장악하는데 튼튼한 여론기초를 마련해 주었다.
나중에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보천보전투를 통하여 사라믈에게 일본제국주의도 칼로 베어 두동강이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불을 질러 허수아비처럼 불태워버릴 수 있는 쓰레기같은 존재하는 것을 보게 해주었다. 해와 달도 빛을 일은 조국의 대지에서 보천보의 밤한르에 불꽃이 비추어졌고, 이는 민족부흥의 서광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보천보대첩은 조선혁명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북한당국의 말에 따르면, "이 전투는 망국의 역사를 끝내고, 조국광복을 실현하는 중에 결정적인 전환점중의 하나였다."
이 전투로 인하여 혜산시는 조선의 혁명성지가 된다.
1936, 1937년 두 해는 동북항일연군이 크게 발전한 시기였다. 이전에 만여명도 되지 않던 병력이 1937년말에는 이미 근 3만명으로 늘어났고, 11개군으로 편성된다.
그러나 1939년부터, 일본대본영이 북상하여 소련을 정벌하겠다는 생각으로 중국동북지구에 대거 병력을 투입한다.
5월, 소련과 일본간에 저명한 할힌골(諾門坎)전투가 벌어진다. 소련에 대한 전투를 시작함과 동시에, 병력을 모은 일본군은 전력을 다해 동북항련을 포위소탕하기 시작한다.
그후 1년여동안 양정우, 위증민등 동북항련의 지도자들이 전후로 사망한다. 김일성은 1940년겨울 제1로군 백여명을 이끌고 소련경내로 진입한다.
김일성이 소련으로 데려간 이 100여명은 조선인을 위주로 했으며, 나중에 대부분 조선의 개국공신이 된다.
전체 항련 제1로군의 고위장령들 중에서 제2군 제6사의 사장 김일성과 제2군 독립여단 여장 이준산(伊俊山, 만주족)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희생당했다.
1942년, 분산하여 포위망을 돌파해 소련경내로 들어온 동북항일연군의 각 부대는 소련극동방면군독립제88보병여단으로 재편된다. 대내적으로는 보통 "항련교도려(抗聯敎導旅)"로 불린다.
소련군번호를 단 것은 기밀유지를 위함이었다. 당시 소련과 일본은 상호불가침조약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소련군은 중국군사분야의 업무에 간섭할 수 없었다.
항련교도려는 모두 1000여명이었고, 그중 300여명은 소련국적의 중국계 혹은 조선인이었다.
주보중이 여장을 맡고, 이조린(李兆麟)이 정치부여장(정위), 최용건이 부참모장을 맡는다. 전직부여장과 참모장은 모두 소련인이 맡았다. 부대의 직속상사는 소련극동방면군 부참모장 솔로킨 소장이었다.
항련교도려의 관병은 정치, 물질적인 대우에서 소련군과 동등하게 받았다. 복장도 모두 소련군군장이고, 군관은 급여제를 실시했으며, 부대는 완전히 소련식 장비로 교체한다.
여기에서 김일성은 1영의 영장이 되고, 소련에서 대위계급을 수여받는다. 당시 조선인 중에서는 가장 높은 계급이었다(또 다른 한 명의 대위는 최용건이다).
같은 조선족인 최용건은 김일성보다 10살이 많았고, 조선의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태어났다.
최용건은 20년대에 운남강무당(雲南講武堂)을 졸업하고, 1924년 황포군관학교의 군사교관이 된다. 당시의 경력을 보면 최용건의 서열은 김일성보다 위였다. 그러면 왜 나중에 김일성이 북한지도자로 뽑혔을까?
거기에는 여장 주보중의 추천이 큰 역할을 했다.
1941-1942년 주보중은 여러번 소련상사에게 서면으로 보고하였다: "김일성은 가장 뛰어난 군사간부이다. 고려인동지들 중에서 가장 우수한 인물이다. 그는 남만주 제1로군에서 현재 유일하게 남은 중요간부이고, 양정우, 위증민 두 사람이 희생된 후, 오직 김일성만이 남만유격대를 지휘할 책임을 질 수 있다."
한편으로 상사의 추천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김일성 자신도 매우 노력했다.
군사적 자질과 유려한 러시아어외에 김일성은 여러번 보고강연에서 소련지도자 스탈린을 칭송했다. 스탈린을 이렇게 비유했다: "조선인민을 해방시킨 구원의 별이자, 인류평화의 수호자이고, 세계인민의 태양이신...."
이뿐아니라 그는 직접 몸을 실천한다. 1945년 김일성이 평양으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소련홍군기념비를 세우는 것이었다.
정치적으로 줄을 잘 서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김일성과 소련고문들의 단체사진. 표정이나 좌석위치를 보면 당시 지위격차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1945년 8월, 소련이 정식으로 일본에 선전포고한다.
중국동북뿐아니라, 조선, 남사할린과 쿠릴열도가 소련군의 군사행동범위내에 들어오게 된다.
항련교도려는 주보중의 지휘하에 관동군에 대한 정찰작전과 대동북대도시의 접수업무에 참여한다. 그후 그들은 해방군의 부대를 맞이하고, 동북민주연군의 일부가 된다. 주보중 본인은 동북민주연군의 부사령관이 된다.
그러나 김일성등 조선족 군관은 주보중을 따라 동북전장으로 가지 않는다.
조선에 친소정권을 세울 생각에서, 소련의 화물선 "푸가초프"호는 김일성등 조선영의 66명 군관을 원산항으로 호송한다. 그후 평양신정권의 건립에 참여한다.
1945년 10월 김일성을 따라 함께 조선으로 귀국한 사람들은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인물일 것이다.
최용건 대위, 당시 여단 부참모장. 조선인민군 초대 총사령관, 조선노동당 부위원장, 공화국원수(김정은과 같은 계급이다. 그는 김씨일가를 제외한 유일한 인물이다)
김일(金一) 상위, 당시 부영장, 나중에 조선노동당 정치국상위, 내각총리, 국가제1부주석이 된다.
최현(崔賢) 상위, 당시 연장, 나중에 조선노동장 정치국위원, 인민군대장, 최용해(崔龍海)의 부친.
최용진(崔勇進) 상위, 당시 연장, 나중에 조선인문군 대장이 된다.
오진우(吳振宇) 상사, 나중에 조선인민군원수가 된다.
이을설(李乙雪) 상사, 나중에 조선인민군원수가 된다.
항련교도려의 하나의 영(營)은 조선 전체 개국장군을 배출하게 된다.
그는 소련군장교에게 빌린 양복을 입고, 왼쪽가슴에는 메레츠코프원수가 수여한 홍기훈장을 달고, 유려하지 않은 조선말로 연설을 했다.
메레츠코프는 2차대전 소련군의 유명한 장군이고, 1945년 3월 대독작전을 끝낸 후 극동으로 와서 제1방면군사령관이 되었다.
같은 해 8월, 항련교도려를 방문하여, 주보중에게 조선영 영장 김일성에 관한 상세한 보고를 요구한다.
그는 내용을 파악한 후, 방면군 정치처의 처장 한명을 불러 지시한다: "이 사람에 대헤 연구해라. 그는 조선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거기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가 아는 사람은 아주 적다. 거기에서 그를 잘 가르치고, 그 국가에 대해 잘 알게 하고, 거기의 사람들과 잘 익히게 해라."
소련 선전부서의 업무능력은 아주 뛰어나다. 포장과 미화를 거쳐 김일성을 조선이 일본침략에 항전한 영웅으로 선전했다.
이런 진실과 허위를 섞은 화장과 사적을 쌓아가면서 오늘날 김일성의 이력은 수수께끼가 되어버렸다. 심지어 미국정보부서조차도 어지러워하고 있고, 김일성과 김성주의 관계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김일성은 가짜조선인이다"라는 남한 이승만의 공격을 깨기 위하여, 소련은 기자와 김일성을 함께 보내어 만경대 고향으로 가서 친척을 찾는다.
금의환향한 김일성은 20여년동안 만난 적이 없었던 친척친구들과 만나 크게 잔치를 벌인다.
소련측의 최초 구상에 따르면, 김일성은 조선독립운동의 지도자인 조만식(曹晩植)의 부수(副手)로 삼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만식이 소련의 말을 듣지 않자, 소련인은 암중으로 김일성을 시켜 그를 몰아내도록 한다. 그리하여 1946년 조만식은 탄핵당해 하야하고, 나중에 처형당한다.
1946년 2월 조선임시인민이원회(임시정부)가 성립될 때, 위원장은 이미 김일성이 맡아버린다.
김일성이 최종적으로 조선의 최고지도자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또 한 사람의 추천과 지지를 빼놓을 수 없다: 스티코프.
스티코프는 당시 소련극동제1방면군 군사위원회 위원(1948년 소련주북한대사를 맡음)이었고, 그는 모스크바에 김일성을 조선의 최고지도자로 극력 추천한다.
김일성이 너무 젊은 것을 고려하여, 많은 소련의 고위관리들은 한때 스티코프의 건의에 반대했다.
최종적으로 스탈린이 결정해야하게 된다: "조선은 젊은 국가이다. 젊은 지도자가 필요하다."
그의 한 마디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
김일성의 건국을 돕기 위해, 소련은 사람을 조직하여 조선헌법을 초안한다. 이 자료는 아직도 모스크바의 자료실에 보관되어 있다.
이렇게 하여 하나의 새 국가가 탄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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