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한국/한중관계

김약산(金若山)과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중은우시 2022. 8. 27. 23:06

정리: 원빈(袁斌)

 

사마로(司馬璐)는 18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19살때 연안에서 항일군정대학 도서관장을 맡았으며, 20살에 <신화일보(新華日報)> 연안판사처 주임이 된다. 그는 중국공산당을 떠난 후 오랫동안 당사(黨史)연구에 종사하여, 당사전문가로 불린다.

 

사마로는 연안의 신화사에서 일할 때, 그의 직접상사는 그의 '조직관계가 불분명하다'고 생각하여, 그를 신화사에서 내보낸다. 이어서 다시 '조직'은 그를 연안에서 내보닌다. 그에게 국통구(國統區)로 가서 '시험'을 받으라고 한 것이다. 이 직접상사의 이름은 서빙(徐氷)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몇년후, 사마로는 중경에서 서빙을 다시 만난다. 그리고 여기서 주은래(周恩來)와 사마로가 얽힌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1940년 8월, 사마로는 중경으로 간 후, 그가 연안에서 중공의 외곽조직인 중국청년기자학회(약칭 '청기(靑記)')에 참여한 적이 있었으므로, 장가화원(張家花園)의 청기숙사에 들어가 살게 된다. 얼마 후, 청기의 책임자인 범장강(范長江)이 그를 조선의용대 총대장 김약산(金若山)에게 소개하여 김약산의 비서 겸 중문부 주임이 된다. 

 

사마로의 진술에 따르면, 조선의용대의 대원은 당시 모두 국민당의 간부훈련단에서 훈련받았고, 전체 대원은 약 300여명이었다. 인원수는 비록 많지 않지만, 자질이 아주 뛰어났고, 정치문화수준도 높았다. 그들은 25세가량으로, 조선의 망국이후,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계속 혁명의 훈도를 받았을 뿐아니라, 체력이 건장하고, 힘든 생활도 잘 견뎠고, 의지도 굳건했으며, 사상도 순결했고, 사회관계도 단순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최소한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의 3가지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그들은 국민당과 공산당 양쪽이 모두 회유하려는 대상이었다.

 

사마로는 당시 김약산의 비서를 맡고 있고, 중공의 <신화일보> <군중>과 <국제신문사>에 조선문제에 관한 글도 발표하고, 2권의 책도 발표한 바 있었으므로(한권은 <조선의용대승리의 4년>(1942년)이고 다른 한권은 <조선혁명사화>(1944년)이다), 중공은 그가 당에 유용하다고 보았다. 연안에 있을 때 그의 직접 상사인 서빙은 이때 중경에서 주은래의 정치고문을 맡고 있었고, 그를 '주공관(周公館)'으로 초청한다.

 

주은래와 만났을 때, 주은래는 사마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중조관계(中朝關係)는 장래에 확실히 너무 중요하다. 제1차중일전쟁때 중국은 조선에서 실패했다. 이는 만청제국 붕괴의 신호였다."

 

그후 서빙은 다시 사마로와 몇번 만나고, 그를 통해 조선의용대의 모든 것을 알아낸다. 예를 들어, 조선인중 중국에서의 당파활동, 그들과 중국당국의 관계, 조선의용대의 내부조직상황, 조선혁명자 개인의 개별분석등등.

 

한번은 서빙이 사마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당이 시험을 통과했다. 진짜 금은 불을 겁내지 않는다. 당은 현재 너를 완전히 신임하고 있다. 나도 너를 아주 잘 안다." "네가 당을 떠난 후, 아주 잘 행동했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현재 나는 너의 조직관계를 회복시켜줄 생각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 조직에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네 의견은 어떤가?" 사마로는 처음에 입당했을 때처럼 흥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서빙의 그 말을 듣자 마음 속으로 기뻤다. 그래서 바로 이렇게 대답한다: "만일 조직에서 나를 신임해주고, 내가 혁명공작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 얼마후 사마로는 정식으로 당적이 회복되었다는 통지를 받는다. 그리고 주은래와 동필무(董必武)가 직접 대면하면서 그를 중공주조선의용대 대표로 임명한다. 구체적인 업무는 주은래의 또 다른 정치비서인 진가강(陳家康)에게 보고했다.

 

사마로는 이렇게 회고한다: "주은래, 동필무의 지도하에, 나의 주요업무는 조선의용대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주은래는 이렇게 말했다: '조선혁명과 중국혁명이 협력하게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임무중 하나이다.' 나의 안배하에 주은래와 김약산은 상청사(上淸寺) 반산(半山)의 한 조선인의사의 집에서 만나기도 했다.

 

주은래는 그의 비서 진가강을 통해 나와 일상적으로 연락했고, 중대한 문제는 주은래 혹은 동필무가 직접 처리했다. 진가강은 중국어 영어를 모두 잘했고, 마르고 키가 작았다. 단소정간(段小精幹)했다. 그의 기억력은 아주 좋아서, 왕왕 내가 한 말 혹은 숫자를 날짜가 흐른 후에도 그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진가강이 김약산을 만날 때면 항상 남안대불사(南岸大佛寺)의 김약산의 집에서였다. 김약산의 부인은 한국음식을 잘 했고, 진가강은 아주 좋아했다. 김약산 부부는 진가강을 아주 존경했으며, 같이 식사하면서 얘기를 나누었는데, 일가족같았다. 얘기하는 도중에 공산당이나 팔로군의 얘기가 나오면 김약산 부부는 일종의 존경을 표시하는 천진한 웃음을 보였다.

 

조선의용대의 경비와 장비는 모두 국민당이 지원해 주고 있었다. 진가강은 나에게 김약산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해서,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국민당에게 돈과 장비를 더 요구하라고 말했다. 나는 직접 주은래와 동필무를 만나 이 문제를 논의했는데, 주은래의 의견은 편제표와 예산을 가짜로 꾸며 국민당을 속이자는 것이었고, 동필무의 의견은 이치를 들어 국민당에게 따지자는 것이었다. 당시의 조선의용대는 실제로 중국공산당이 암중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이 일은 주로 나와 진가강이 한 것이다. 진가강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은래 동지가 지시했다. 너의 임무는 김약산을 설득하여 조선의용대를 화북(華北)으로 보내는 것이다." 나는 많은 자료를 김약산에게 제공했고,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본인이 조선인을 화북에 대량으로 이민보내고 있다. 조선의용대는 적의 후방, 화북에 있어야 발전할 수 있다. 그 본인도 나를 신뢰했고, 그의 주위에 있는 심복들도 나의 의견에 동의했다. 80%의 조선의용대대원을 화북으로 보낸 다음에야 국민당이 알아차리게 된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이 일을 회고하면서 사마로는 침통하게 말한다: "이 일은 내가 죄인이다!" 

 

조선의용대를 중국공산당이 빼내간 후, 국민당 당국은 크게 진노한다. 사마로에게 먼저 책임을 추궁한다. 사마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어떻게 조선인을 지휘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국민당은 김약산을 찾아간다. 김약산은 미리 주은래가 말한대로 대답했다: "이것은 박효삼(朴孝三, 조선의용대 부총대장)이 나의 명령을 어기고, 임의로 병력을 이동시킨 것입니다. 내가 박효삼의 직위를 박탈하고 조사처벌하겠습니다." 실제로 이때 박효삼은 이미 화북에서 중국공산당의 직접 지휘를 받고 있었다. 이름도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으로 개칭했다. 김약산이 어떻게 그의 지위를 박탈하고 조사처벌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국민당은 그저 김약산의 조선의용대를 해산시키게 된다.

 

조선의용대가 사라지자, 사마로의 이용가치도 사라진다. 김약산의 이용가치도 마찬가지로 사라진다.

 

김약산의 부하간부들을 중국공산당이 모조리 빼내간 후, 김약산은 다시 사마로를 통해 중국공산당에 요청한다. 그도 화북으로 가고 싶다고. 이때 주은래는 거절한다. 이유는 당당했다. "주은래 동지의 뜻은 김선생은 계속 중경에 남아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곳의 일은 과거보다 훨씬 중요해졌습니다. 혁명공작은 어디에 있든 똑같습니다." 이것은 진가강이 사마로에게 한 말이다.

 

그러나 진짜원인은 바로 김약산이 당시 조선혁명운동의 가장 명망있는 지도자였고, 그는 조선인민중에서 영웅적이고 전설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공산당은 처음에 그를 이용하려고 생각해서, 조선청년들을 속여 화북으로 보낸 것이었다. 그러나 만일 김약산도 화북으로 가게 되면, 지휘권은 완전히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중국공산당이 직접 장악할 수 없을 터였다.

 

김약산은 사마로에게 주은래와의 만남을 잡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주은래는 사마로조차도 만나주지 않는다. 김약산이 국민당에게 들은 소식에 의하면, 국민당의 강택(康澤)이 이 건으로 주은래와 한바탕 싸웠다고 한다. 강택은 주은래에게 "너희는 말로는 공동으로 항일하자고 하면서, 왜 뒤에서 우리 사람을 빼내가느냐?" 그러자 주은래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네가 말하는 그 일은 내가 전혀 모르는 일이다. 네가 말하는 중공간부 마의(馬義, 사마로)를 나는 모른다. 너희가 붙잡던 처벌하든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동시에 주은래는 그의 좌우에 사마로와 접촉하지 말 것을 지시한다.

 

2차대전후, 김약산은 한국으로 귀국한다. 먼저 서울로 갔다. 남한정부는 그가 좌파라고 여기고, 그를 공산당으로 여겨 그를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평양으로 간다. 북한은 그를 노동상(勞動相)에 앉힌다. 당시 북한에는 친중파, 친소파의 두 파가 격렬하게 투쟁을 벌이고 있었고, 김약산은 당연히 친중파에 속했다. 얼마 후 중국국민당의 특무라는 죄명으로 김일성에 의해 처형된다.

 

이 일을 떠올리면 사마로는 마음 속으로 미안함 뿐이다. "김약산의 처지를 생각하면 평생 마음이 좋지 않다. 지난 일이 마음에 걸리고, 그의 모습이 떠올라 나는 항상 눈물을 흘린다. 김약산. 김약산. 정말 미안합니다."

 

사마로도 좋고, 김약산도 좋고, 기실 모두 주은래의 눈에는 장기알이었다. 오늘 네가 쓸모 있으면 내가 온갖 방법을 써서 너를 이용하고, 내일 네가 이용가치가 없으면 전혀 망설임없이 버린다. 이를 보면 주은래가 얼마나 교활하고 무정한 사람인지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