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최애역사(最愛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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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이 피살된 5백년후 문천상(文天祥)은 <정기가(正氣歌)>안에 이런 말을 쓴다: "위장수양치(爲張睢陽齒), 위안상산설(爲顔常山舌)". 장수양(수양성을 지킨 장순을 가리킴)의 바로 뒤에 나오는 안상산은 안진경(顔眞卿)의 당형인 안고경이다. 이것도 일가족 충열의 이야기이다.
안사의 난이 발발했을 때, 안고경은 상산(常山, 지금의 하북성 정정)태수를 맡고 있었다. 그의 당제(堂弟) 안진경은 평원(平原, 지금의 산동성 덕주)태수로 있었다. 안진경이 부임한 후, 이미 안록산이 반란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하여 한편으로 부장 이평(李平)을 조정으로 보내어 사실을 보고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전체 성의 병사들에게 병마를 준비하도록 명령하고, 호족들을 불러서, 함께 반군에 대응할 대책을 상의했다. 반란이 발발한 후, 안진경은 사람을 안고경에게 보내 공동으로 의군을 조직할 것을 상의하고, 각각 병력을 나누어 반군을 견제하여 귀로를 막으므로서 반군이 서진하는 발걸음은 늦추고자 했다.
그리하여, 안씨형제 두 사람은 서로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어 반군에 대항했다. 부근 17군도 호응을 받아 참가한다. 안진경이 맹주로 추대되고 병력은 20만에 이르러 효과적으로 반군이 서진하는 것을 속도를 늦추었다. 당시 안록산은 군대를 이끌고 서진하고 있었는데, 하북에 변고가 발생했다는 말을 듣고 즉시 사사명, 윤자기에게 병력을 이끌고 가서 해결하도록 지시한다. 천보15년(756년) 정월, 사사명의 포위공격을 당하면서 안고경은 상산군을 죽기살기로 방어했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결국 포로로 잡히고 상산군은 함락된다.
안고경은 낙양으로 압송되어 안록산을 만난다.
안록산이 너는 내가 발탁하여 상산태수를 맡겼는데, 왜 나를 배반했느냐고 질책한다.
안고경은 이렇게 대답한다: 안씨가족은 대대로 당나라의 대신이다. 충의를 지킨다. 설사 당신이 주청을 드려 관직을 받았지만, 너를 따라서 조정에 반란을 일으키는데 참가해야 한단 말인가?
격노한 안록산은 안고경을 다리기둥에 묶어 놓고, 다리부터 잘라내도록 한다. 전체 과정동안 안고경은 엄청난 고통을 참으면서 욕설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하여 형을 집행하던 자는 그의 혀를 잘라버린다. 그래도 욕을 할 수 있는지 보자는 것이다.
결국, 안고경은 분명하지 않은 욕을 하면서 죽어간다. 그의 아들 안계명(顔季明)과 부하 원리겸(袁履謙)등도 전후로 피살당한다.
다른 한편으로 상산군이 함락되고 안고경이 죽으면서, 이전에 의군에 참가했던 여러 군들도 속속 반군에 점령당한다. 오직 평원군, 박평군(博平郡), 청하군(淸河郡)등만이 남았다. 이전에 안록산반군에 대항할 역량을 강화하기 위하여, 안진경은 자신의 겨우 10살된 독자를 평로장군(平虜將軍) 유정신(劉正臣)에게 인질로 보내면서 그의 의군에 참가할 결심을 굳히게 했다. 그러나 이때, 인심은 흉흉했고, 다시 기세를 끌어올리기 힘들었다. 안진경은 할 수 없이 지덕원년(756년) 십월 평원군을 포기하고, 황하를 건너 봉상(鳳翔)으로 가서 당숙종 이형을 만난다. 이형은 그를 헌부상서(憲部尙書)로 임명하고 그후에는 어사대부(御史大夫)로 명한다.
이번 반군에 항거하는 의군의 활동중에서 안씨집안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희생한 사람이 30여명에 이른다. 건원원년(758년) 안진경은 비로소 조카 안천명(顔泉明)을 보내 친족의 시신을 수습하게 하여 고향에 안장하도록 시킨다. 그러나 겨우 당형 안고경의 다리 하나와 조카 안계명의 두개골만 수습할 수 있었다.
같은 해 구월 초사흘, 50세의 안진경은 서안(書案) 앞에 단정히 앉아, 최대한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면서, 조카 안진경을 위해 제문(祭文)을 쓰기 시작한다.
<제질문고>
후세에 전해지는 이 <제질문고(祭侄文稿)>에서 우리는 왜 안진경의 감정에 기복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글자와 글자간의 거리, 행과 행간의 거리가 점점 변화한다. 중간에 여러 고친 흔적도 남아 있고, 수시로 고필(枯筆, 먹이 부족한 상태에서 붓을 휘둘러 쓰는 것)이 나타난다. 그리하여 안진경이 이때 다시 조카가 희생당할 때의 참상을 떠올렸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부함자사, 소경난복(父陷子死, 巢傾卵覆)" 이는 제문에서 가장 안진경이 가슴아프게 쓴 몇 글자인데, 그는 가진 깊이 눌러쓰는 필묵으로 한번에 쓰지 못하고, 여러번 수정해야 했다. 마지막에는 고통의 기억으로 거의 그를 무너뜨려 피눈물을 쏟는다.
안록산반군에 항거했기 때문에 안진경은 하루아침에 크게 명성을 얻는다. 그렇다고 그의 후반생이 관료로서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강직하고 청렴한 성격은 관료사회에 맞지 않았고, 평생에 걸쳐 여섯번 공격받고 5번 유배간다.
양국충(楊國忠), 이보국(李輔國), 원재(元載), 양염(楊炎)에서 노기(盧杞)까지, 모든 권상(權相)들은 안진경을 뼛속까지 미워했다. 환제도 전란이 평정되고 나면 이런 충신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당나라의 군대가 장안을 수복한 후, 당숙종 이형은 급히 장안으로 돌아온다. 안진경은 상소을 올려 이렇게 말한다. 황상 바로 들어가면 안됩니다. 광야에 단을 쌓고 동쪽을 향해 3일간 곡을 한 후에 비로소 궁으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주장한 것은 황제가 의식을 통해서 내란의 역사교훈을 다시 되새기게 하려는 것이지만, 이런 제안은 이형을 아주 난감하게 만들었다. 장안으로 돌아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형이 공신에게 대거 관직과 작위를 내리는데, 안진경은 멀리 귀양보낸다.
그후, 안진경의 관료로서의 길은 기복이 심했다. 기본적으로 유사한 사건이 반복적으로 재연된다. 겉으로 보면, 강직하고 줄을 서지 않는 안진경이 권상들과 사이가 나빠져서 권상들의 모함을 받아 귀양가는 것같지만, 실제로는 황권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던 시대에 최종적으로 안진경을 그렇게 만든 사람은 끝까지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오직 전란이 다시 발생하면 충신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이미 당덕종(唐德宗) 이적(李適)이 즉위한 4년째 되는 해인 건중4년(783년) 회서절도사(淮西節度使) 이희열(李希烈)이 반란을 일으킨다. 재상 노기는 이렇게 건의한다. 안진경은 명망이 높으니 그로 하여금 유지를 가지고 이희열의 반군에게 가서 선무하게 하면 분명 싸우지 않고도 반란을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안진경은 이미 75세의 고령이었다. 조정사람들은 이런 건의를 듣자 모두 대경실색한다. 노기가 개인적인 원한을 풀기 위해서 안진경을 사지로 몰아넣는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전에 노기는 권력을 농단했고, 안진경을 조정에서 쫓아낸 것이다. 안진경은 나중에 이를 알고서 노기에게 이렇게 묻는다: "나는 항상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했다. 지금은 나이들고 몸도 약하다.그래서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옛날 너의 부친이 반군에 죽임을 당했을 때,수급을 평원군으로 보내왔다. 나는 감히 옷으로 그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지 못하고, 혀로 깨끗이 닦았다. 그런데, 지금 너는 나를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냐?" 사서기록에 따르면 노기는 그 말을 듣고 부끄러워하며 절을 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내심으로 안진경을 더욱 원망한다. 이제 마침내 명분있게 안진경에게 보복할 기회가 온 것이다.
다만 이렇게 한 사람이사적인 감정으로 보복하는 행위인 것이 분명함에도 당덕종은 동의한다.
원인은 필자가 앞에서 설명한 바대로 평화시대에 황제는 사조원로가 자신의 곁에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하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안진경은 평생 정의를 수호하고, 결국 황제에 의해 사지로 몰려나가는 것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당덕종은 안진경을 이희열의 군중으로 보내는데 동의한다. 그런데 이는 확실히 안진경의 '약점'을 찌른 것이다. 만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길이 흉다길소(凶多吉少)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온갖 이유를 대면서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충신이다. 평생 충의를 자랑으로 여겼고, 죽는다고 할지라도 기꺼이 갈 것이다.
이희열의 군중에 도착한 후, 이희열은 안진경을 온갖 방법으로 회유한다. 그에게 만일 반란에 가담해주면 재상의 직을 주겠다고까지 한다. 그러나 안진경은 욕설로 대답한다.1년후, 이희열은 안진경의 목을 매어 죽이도록 명한다.
다시 2년이 지나, 이희열이 죽었다. 안진경의 유체는 장안으로 운송된다.당덕종은 죽은 안진경이 자신에게 더욱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당덕종은 비통해 마지 않으며 조회를 5일간 폐한다. 그리고 직접 조서를 반포하여, 안진경의 일생을 추념한다. "재우광국(才優匡國), 충지멸신(忠至滅身), 기질천자(器質天資), 공충걸출(公忠傑出), 출입사조(出入四朝), 견정일지(堅貞一志), 구협누세(拘脇累歲), 사이불요(死而不撓), 계기성절(稽其盛節), 실위유생(實謂猶生)". 온갖 찬미의 글을 다 써서 죽은 충신을 칭송한 것이다.
안진경은 최고의 시호를 받는다: 문충(文忠)
당덕종은 기실 노신의 죽음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쇼를 하는 성격의 비통함을 보이고, 죽은 사람에게 모든 애도와 찬미를 보낸다. 이건 모두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보라는 것이다. 너희들 모두 충신이 되어라. 그러면 조정이 절대로 홀대하지 않을 것이다.
4
만일 안사의 난을 하나의 카드게임으로 보면, 조정은 기실 마지막 하나의 히든카드가 있었다. 곽자의, 이광필의 삭방군(朔方軍)이다.
가서한(哥舒翰)의 하서(河西), 농우(隴右) 주력이 영보전투에서 궤멸당하고난 후, 조정이 사방에서 전투를 벌일 때 의존한 것은 오직 삭방군이었다. 그러나 삭방군은 처음에는 신임을 받지 못했다. 그리하여 곽자의는 끝까지 그의 주군들에 의해 의심받고 결국 최후가 좋지 못하게 된다.
당연히, 조정에서 가장 시급한 일은 삭방군을 중앙군대로 삼아 사방으로 보내는 일이었다. 곽자의, 이광필은 하동, 하북에서 전투를 전개한다.
전체 안사의 난을 살펴보면, 중흥명장(中興名將)들중에 곽자의를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모두 번장(蕃將, 오랑캐장수)출신이다. 이광필도 번장출신이다. 그의 부친 이해락(李楷洛)은 당나라조정에 귀순한 번장이다. 무측천의 구시원년(700년), 거란추장의 신분으로 소속부대 7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무측천에게 투항해 온 것이다. 재미있는 일은 이해락이 당나라조정에 귀순하면서 스스로 자신은 한나라의 장수 이릉(李陵)의 후손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한무제때 명장 이광(李廣)의 손자 이릉(李陵)은 군대를 이끌고 외척 이광리(李廣利)를 따라 흉노를 정벌하러 나선다. 그러나 이릉은 돌아오는 도중에 흉노선우의 주력에게 공격당한다. 인원이 부족한 이릉은 끝까지 싸웠지만, 결국 흉노에 투항하고 만다. 그후 한무제는 이릉에게 죄가 있다고 보아, 이릉의 장안에 있는 가족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이릉은 혼자 대막에 남아 있게 된다. 한나라때부터 당나라까지 수백년이 지났고 초원에는 이미 여러번 패주가 바뀌었다. 누구도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릉의 후손이 살아 있는지 아닌지. 이에 대하여 학자 마치(馬馳)는 이렇게 보았다; 고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해락이 "스스로 이릉을 그의 먼 조상이라고 하였는데 믿기 힘들다" 당시 이당은 자칭 농서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당나라에 귀순하는 소수민족들은 많은 경우 스스로 이릉의 후손이라고 말하였다. 이는 소수민족의 주체민족과 통치집단에게 의지하려는 심리라 할 것이고, 당나라의 강력한 구심력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이해락이 당나라에 귀순한 후, 당군과 함께 여러 전투를 치른다. 그 기간동안 그이 4명의 아들이 차례대로 출생한다. 이광필은 그중 넷째아들이다.
자고이래로, 군인은 모두 '마혁과시(馬革裹屍)'를 영광으로 여긴다. 이해락이 66세 되던 해, 토번(吐蕃)이 병력을 보내 하원(河源, 지금의 청해성 서녕)으로 침입한다. 당나라조정은 노익장의 이해락에게 정예기병을 이끌고 참전하게 한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이해락의 기습으로, "놀란 적군이 사방으로 궤멸하여 흩어지고, 포위망은 풀리게 된다." 그러나, 이해략은 회군하는 도중에 병사한다. 이해는 천보원년(742년)이고, 35세의 이광필은 부친을 잃는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군대생애의 귀인 왕충사(王忠嗣)를 만나게 된다.
이광필은 비록 거란인이지만, 어려서부터 경조(京兆) 만년현(萬年縣)에서 자랐다. 그의 모친은 관료가정출신의 내져로 "재숙관족(才淑冠族)"으로 높이 평가받았으며 상당히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이광필은 어려서부터 한문화의 훈도를 받고, 부친을 따라 거란족이 잘하는 말타기와 활쏘기를 배우는 외에 <한서> <좌씨춘추>등도 읽었다. 이해락이 죽은 후, 이광필은 한족처럼 부친을 위해 수상(守喪)을 한다. 정우(丁憂, 부모상을 당한 것) 기간동안 금욕하고, 한번도 처의 방을 들어가지 않았다. 사가들은 이를 남다른 모습이라고 생각하여 기록으로 특별히 남겼다. 이를 보면 그는 한문화수준이 비교적 높았던 번장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군대에 들어갔고, 당나라에 충성했다. 삭방절도사 왕충사의 휘하에 들어간 후, 이광필은 상사로부터 높이 평가받아 그가 아끼는 부하장수가 된다. 후돌궐잔여부대를 토벌하는 전쟁에 가담하여 적지 않은 공로를 세운다. 왕충사가 하옥된 후, 다시 몇년이 지나 소무구성(昭武九姓) 출신의 안사순(安思順)이 이임보(李林甫)의 추천을 받아 삭방절도사가 된다. 안사순은 이광필이 인재라는 점을 알아보았다. 그리하여 이광필과 사돈관계를 맺고자 한다. 그리하여 조정에 상소를 올려, 이광필을 삭방절도부사로 임명해줄 것을 청한다. 그러나, 이광필은 이 혼사를 거절했을 뿐아니라, 군직을 사임한다. 당시 쉬면서 병치료를 하고 있던 옛동료 가서한이 그 말을 듣고, 이광필을 도와 당현종에게 주청을 올려 그를 장안으로 불러들이게 한다.
이 사건을 보면,이광필은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다. 옛상사 왕충사가 이임보에게 무고를 받아 죽었다. 새로운 상사 안사순은 이임보가 추천한 인물이다. 이광필은 도의적으로 그의 편이 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시비의 장소에서 멀리 떠난 것이다.
장안으로 돌아온 후 이광필은 하루종일 집안에서 지내고, 한동안 세상 일과 담을 쌓고 지낸다. 안사의 난이 발발한 후에 비로소 다시 삭방군으로 되돌아간다.
곽자의의 추천으로, 이광필은 다시 군대에 들어온 후 하동절도사가 된다. 이건 의미를 곰씹어볼 인사조치이다.
비록 곽자의, 이광필은 중흥명장으로 나란히 칭해지지만, 두 사람은 삭방군에 있을 때 서로를 잘 몰랐다. 안사순이 절도사로 있을 때, 곽자의, 이광필은 군대내에서 "비록 같이 식사를 하고, 자주 서로를 보았지만, 한 마디도 나눈 적이 없다." 이건 왕충사사건과 관련이 있다. 이광필은 왕충사가 발탁한 부하이다. 그리하여 새로 부임한 안사순에 대하여 그다지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곽자의는 안사순과 관계가 남달랐다. 곽자의, 이광필은 서로 다른 파벌에 속했으니, 서로간에 그다지 함께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외에 곽자의와 이광필은 군대를 지휘하는 방법도 전혀 달랐다. 이광필은 뇌려풍행(雷厲風行)으로 신속하고 엄격했으며, 군기가 엄했다. "군대내에서 지시를 하면 여러 장수들은 감히 그를 쳐다보지 못했다." 수하장수들은 그를 경중(敬重)했다고 할 수 있지만, 경애(敬愛)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곽자의는 "윗사람을 성의를 다해 모시고, 아랫사람은 관대하게 대했다." 그는 상사들의 환심을 샀지만, 부하들에게는 관대했다. 그래서 부하들은 그에게 감사하고 좋아했다.
두 사람을 비교하자면, 곽자의는 인간관계를 중시했고, 이광필은 인간관계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 나중에 같이 삭방군을 지휘하지만, 여러 장수들은 "곽자의의 관대함을 받들고, 이광필의 영을 두려워했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결말을 맞이한 것도 아마 이런 점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결국 안사의 난을 평정하기 위하여, 곽자의와 이광필은 이전의 서먹서먹함을 버리고, 어깨를 나란히 하 전투를 하게 된다.
당숙종 이형이 즉위한 후, 곽자의와 이광필은 영무(靈武)로 가서 황제를 알현한다. 그후 군대를 조직하여 동쪽으로 가서 안록산의 반군에 맞서싸운다. 지덕2년(757년) 장안, 낙양을 수복하는 외에 당군은 하남, 하동의 많은 실지를 여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건원원년(758년), 부친을 죽이고 황제에 오른 안경서를 토벌하여 죽이기 위해, 당숙종은 이광필, 곽자의등 구진절도사들에게 출정을 명한다. 쌍방은 업성(鄴城)에서 반년에 걸친 공방전을 벌인다. 이번에, 당숙종은 장수들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총사령관을 임명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각로의 당군은 군룡무수가 되어 지휘가 통일되지 못했다. 동시에, 당숙종은 군사를 모르는 환관 어조은(魚朝恩)을 "관군용선위사(觀軍容宣慰使)"로 임명하여 여러 장수들을 견제하도록 한다.
이광필은 반군을 분할시켜 그 주력을 견제한느 전략방안을 제출하는데, 어조은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원래 기세를 몰아 안경서를 섬멸하려던 당군은 오랫동안 공성전을 벌이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상하가 분리되는 난감한 국면에 빠진다. 안경서에 의해 소모전을 벌이다가, 사사명이 안경서에게 보낸 지원군이 오자 당군에 대해 진격을 감행한다. 결국, 병력이 우세했던 당군이 궤멸적인 패배를 당하고 만다. 이광필과 왕사례(王思禮) 두 명의 장군만이 "부대를 정비하여 전체 부대를 퇴각시켰다" 사후, 어조은은 업성의 패배책임을 곽자의에게 떠넘기고, 결국 곽자의는 잠시 병권을 박탈당한다. 이광필은 잔여병력을 수습하여 위기국면 혼자서 버틸 수밖에 없었다.
건원2년(759년), 안경서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 사사명은 병력을 넷으로 나누어 황하를 건너 변주(汴州, 지금의 하남성 개봉)에서 회합한다. 그후 승기를 틈타 서진한다. 사사명의 군대가 대거 몰려오는데, 이광필과 동경유수 위척(韋陟)은 의견이 달랐다.
위척은 3년전의 방식대로 동관우로 물러나 험준한 요새에 의지하고 적군을 기다리자고 한다.
그러나 이광필은 이렇게 말한다: "그건 병사의 통상적인 수법이지만, 용기지책(用奇之策)은 아니다. 양군은 실력이 비슷한데, 상대방에게 500리의 땅을 고스란히 내주게 되면 상대는 더욱 기고만장할 것이다. 차라리 군대를 하양(河陽, 지금이 하남성 맹주 서쪽)으로 옮겨 사사명군과 결전을 벌이는 것이 좋다. 승리하면 사사명을 붙잡을 수 있고, 패배하면 지키면서, 안과 밖에서 서로 호응하면 적병이 감히 서쪽으로 침입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을 "독비지세(獨譬之勢)"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광필과 위척의 논쟁을 듣고난 후, 누군가 반대의견을 내놓는다. 낙양은 제택(帝宅)인데, 너 이광필은 왜 그것을 지키려 하지 않느냐고.
이광필은 이렇게 반박한다: "만일 냑양에 남아 있게 되면, 주변의 사수(汜水), 악령(崿嶺), 용문(龍門)에 모두 병력을 배치해야 하는데, 지켜낼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이광필의 지휘하에, 전군은 무기, 양초를 가지고 하양으로 물러나 사사명의 20만대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린다. 이광필의 군대생애중 대표적인 전투인 하양전투가 서막을 열고 있었다.
구월, 사사명이 낙양으로 진입한다. 그러나 낙양성은 일찌감치 비어있어서 아무런 수확도 거두지 못한다. 다시 하나의 성을 차지하려면 하양밖에 없다. 사사명이 하양성으로 다가오자, 이광필은 성 위에서 큰 소리로 말한다: "우리집안 삼대는 장지(葬地)가 없다. 나는 반드시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겠다. 너는 역적이고 나는 왕신이어 세불양립니니, 네가 내 손에 죽든지, 내가 네 손에 죽든지 할 뿐이다."
전투에서 이광필은 단도를 신발에 숨겨둔다. 그리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엄숙하게 수하장수들에게 말한다: "전쟁은 위험한 일이다. 우리 조정의 삼공중신이 적의 손에 죽을 수는 없다. 만일 형세가 불리하면 여러분은 전장에서 죽어라. 나는 여기에서 자결하겠다. 절대로 여러분들이 혼자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 이광필이 결사의 항전의지를 보이며 격려하자 당군의 기세가 크게 오른다. 특히 이광필 휘하의 번장은 이번 전투에서 아주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다.
전투가 시작되자 사사명은 맹장 유룡선(劉龍仙)을 선봉으로 내세워 성아래로 보내 욕설전부터 시작한다. 유용선은 한 발로 말갈기를 밟고 이광필에 대해 마구 욕을 하기 시작한다. 첫전투는 전군의 사기에 관련되므로, 이광필은 아주 중시했다. 그리하여 부하들에게 누가 나서서 싸울 것인지 묻는다.
철륵족(鐵勒族) 출신의 삭방절도부사 복고회은(僕固懷恩)이 나설 것을 청한다. 다만 이광필은 복고회은은 고위장군으로 이런 험한 일을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보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어서 좌우에서 비장(裨將) 백효덕(白孝德)을 내보내자고 추천한다. 백효덕은 안서호인(安西胡人)으로 쿠차(龜玆)왕실의 후예이다. "용맹하고 담력이 있으며" 쌍창을 잘 썼다.
이광필은 백효덕에게 묻는다. 너는 몇명의 병마가 필요하냐?
백효덕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가서 취해오겠습니다." 그는 단신출전하겠다고 말한다.
이광필은 그의 용기를 높이 칭찬하면서도 여전히 얼마의 병마가 필요한지 묻는다.
백효덕은 오십정예기병으로 후원(後援)을 담당하고, 군중에서 북을 쳐서 기세를 북돋워달라고 말한다.
백효덕이 성을 나선 후, 유용선의 진앞에 다가기기 전에, 복고회은이 이광필에게 축하인사를 한다: "적을 이길 수 있겠습니다!' 이광필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자 복고회은이 이어서 말한다: "저는 백효덕이 고삐를 아주 편안하게 잡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침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과연 그러했다. 유용선은 백효덕이 혼자서 다가오는 것을 보자, 아예 그가 싸우러 온다고 생각지 못했다. 백효덕이 10보 거리에 왔을 때, 비로소 유용선은 전투준비를 한다. 백효덕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시중(李侍中, 이광필)을 대표하여 말을 전하기 위해 왔고, 다른 목적은 없다. 그러자 유용선이 경계심을 늦춘다. 그때 백효덕이 돌연 눈을 부릅뜨고 말한다: "적장(賊將)은 나를 알아보겠는가?"
유용선이 뭐라고 할지 몰라서 가만히 있을 때, 백효덕이 소리친다: "나는 백효덕이다" 그는 아마 유용선에게 누구에게 죽임을 당했는지 알 수 있게 하려는 것같았다.
유용선은 그저 크게 소리치는 것으로 놀란 것을 가리려 했다: "너는 무슨 개돼지냐?"
성위에서 북을 치면서 응원하고, 백효덕은 손에 쥔 쌍창을 들고 달려든다. 그의 뒤에는 50기의 기병이 말을 몰아 달려왔다. 마음을 놓고 있던 유용선은 활을 잡고 화살을 쏠 여유조차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급히 부근의 제방으로 도망친다. 백효덕은 쫓아가서 그의 수급을 베어 돌아온다. 이렇게 하여 당군의 사기는 크게 오른다.
원래 일개 편장(偏將)에 불과했던 백효덕은 이 전투로 크게 이름을 떨치고, 나중에 지방절도사와 조정중신에까지 오른다.
이전의 여러 전투에서와 마찬가지로, 번장은 하양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양삼성을 지킬 때, 소무구성출신의 이포옥(李抱玉)은 출기제승(出奇制勝)하여 최고의 공로를 세운다; 양마성(羊馬城)에서 적을 막을 때, 강족(羌族) 출신의 여비원례(荔非元禮)는 결사대를 이끌고 출전하여, '적을 격파했다.'; 하양북성을 지키던 토번사람 논유정(論惟貞)은 정관연간 토번대상(大相) 녹동찬(祿東贊, 論東贊)의 후손이고, 이광필을 여러해 동안 따랐다....
이광필 본인도 일류의 군사능력을 발휘한다. 낙양을 버리고 하양을 지키는 전략을 취하여, '독비지세'의 전략적 의사결정을 내렸을 뿐아니라, 전투에서도 지혜와 용맹으로 여러번 기이한 전술로 상대를 격파한다. 당시 사사명은 좋은 말이 천여필 있었다. 매일 성밖의 강남쪽에서 말을 씻겼다. 이광필은 군영에서 500필의 암말을 골라 집중적으로 강의 북안에 배치한다. 반군의 말이 강안에 도착했을 때 이광필의 암말들이 북안에서 소리를 내고, 반군의 좋은 말들이 강물을 건너게 만든다. 그 결과 반군의 좋은 말을 이광필이 부하들이 하나하나 붙잡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미마계(美馬計)"이다.
여러번의 교전을 거쳐, 하양전투는 이광필의 대승으로 끝난다. 사사명이 철군할 때 놀라서, "마음 속으로 겁을 먹어 삼일간 불을 피우지 못했다." 이 전투이후, 관군의 사기는 크게 오른다. 이광필은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환하여, 실지를 수복한다. 이어 다음 해의 망산(邙山)전투가 벌어진다. 여기에서 환관세력과 복고회은의 간섭으로 대패를 맞는다.
망산전투에서 조정이 파견한 환관 어조은이 이광필의 군중으로 온다. 어조은은 황제가 급히 승리를 거두길 원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광필이 "적의 예봉이 아직 날카롭기 때문에 경솔하게 공격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이광필에게 출전을 재촉한다. 그리고 이광필과 사이가 좋지 않은 복고회은을 회유하여 함께 이광필의 결정에 반대한다. 그 결과, 당군은 평원개활지에서 야전에 익숙한 반군과 부닥치고, 대패하여 도망치게 된다. 망산전투의 패배이후, 조정은 환관의 말을 맹신하여 모든 책임을 이광필에게 씌운다. 그리하여 이광필은 조정과의 골이 점점 더 깊어지게 된다.
보응원년(762년), 금방 즉위한 당대종(唐代宗)은 아들 이적(李適)을 천하병마원수로 임명하고, 신임 삭방절도사 복고회은을 천하병마부원수로 삼는다. 부친 사사명을 죽이고 황제에 오른 사조의(史朝義)는 마지막 총공격을 감행한다. 이광필은 병력을 진류(陳留, 지금의 하남성 개봉 동남쪽)에서 북상시켜 복고회은등의 군대와 회합한다.사조의는 패배를 당한 후,겨우 수백기를 데리고 도주한다. 결국 부하들이 모두 떠나면서 목을 매어 자결한다. 이렇게 8년에 걸친 안사의 난은 종결된다.
안사의 난을 평정한 후 공로를 평가하면서, 이광필은 "전공으로 중흥제일"로 인정받아, 임회왕(臨淮王)에 봉해지고, 철권(鐵券)을 하사받고, 그의 화상이 능연각(凌煙閣)에 모셔진다. 그러나 위기는 소리없이 찾아온다.
환광의 중상과 조정의 삭방장수들에 대한 불신으로, 전공이 혁혁한 이광필은 시종 의심을 받고 위기에 처하게 된다.토번이 장안으로 쳐들어와서, 당대종이 섬주(陝州)로 도망쳐야 했을 때, 이광필은 정원진(程元振), 어조은이 해를 끼칠 것을 겁내, 병력을 서주(徐州)에 주둔시키고 황제를 도와주러 가지 않는다. 토번군이 물러난 후,이광필은 당대종의 의사에도 불구하고 동도유수(東都留守)로 부임하는 것을 거절한다. 그는 이렇게 하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거스오 알았으나 점점 위망을 잃어갔다. 심지어 그를 따랐던 장수들조차 속속 그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와 같이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자신의 뜻대로 하는 대장은 제2의 안록산이 되는 것이 아니냐고.
이광필은 조정과 주변의 의심을 받으면서 우울함에 빠져 병에 들고, 광덕2년(764년) 서주에서 병사한다. 향년 57세였다. 부하장수들이 그의 영구를 경사로 호송한다.
비록 조정에서 이광필의 장례식을 융중하게 치러주었지만,이광필의 말년의 처지는 일부 지방의 대장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다. 하물며, 이광필이 유일하게 곤란한 처지에 있던 반란평정의 공신이 아니었다. 그보다 앞서, "내작철(來嚼鐵, 작철을 쇠를 씹는다는 뜻임)"이라고 불리던 내전(來瑱)이 환관의 모함을 당해 유배가던 도중에 죽어버렸다. 그의 뒤를 이어, 일가 46명이 희생된 복고회은도 의심을 받았고, 결국 그는 반란을 일으켰다가옛날의 동료 곽자의에게 평정당한다.
이에 대하여 역사학자 범문란(范文瀾)은 이렇게 말했다. 당나라때 "조정의 명령을 따른 조정신하들에 대하여 공적과 명망의 정도에 따라 서로 정도는 다르지만 의심을 갖게 된다...공신들은 이로 인하여 조정에 대하여 어느 정도 거리낌을 갖게 되고, 쉽게 병권이나 방어지를 벗어나지 않으려 했다." 이렇게 되다보니, 각지의 번진은 더욱 할거를 도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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