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한팔리(汗八里)
여러해 전에 이중텐(易中天) 교수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대발명은 모두 기술이지, 과학이 아니다." 이 말이 한때 각계의 폭넓은 주목을 받는다.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먼저, 화약, 인쇄술, 나침반의 3개 과학기술발명을 얘기한 학자가 영국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6)이라고 말한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 <노붐 오르가눔>에서 "인쇄술, 화약과 자석의 세 가지 발명은 이미 세계적인 범위내에서 사물이 모든 면모와 상황을 변화시켰다"라고 하였다.
마르크스는 <기기, 자연력과 과학의 응용>이라는 글에서, "화약, 나침반, 인쇄술은 부르조아계급이 도래를 예고하는 삼대발명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할 점은 베이컨이건, 마르크스이건 모두 중국을 "삼대발명"의 발원지라고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 소위 "사대발명"이라는 말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리고 어떤 역사적 배경이 있는 것일까? 자룔르 통해서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 중시받지 못한 "삼대발명"
19세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서학동점(西學東漸)'의 붐에 따라, <노붐 오르가눔>등의 책이 중문으로 번역되어 국내에서 출판되게 되어,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 사이에 일정한 영향을 끼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삼대발명"이라는 말이 널리 각계에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청나라말기의 역사교과서에는 거의 "삼대발명" 혹은 "사대발명"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중화민국이 건립된 이후에 비로소 "삼대발명"이 교과서에 나타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한 단어의 출현빈도가 점점 많아지면서 최종적으로 '상식'이 된다.
학계에서는 최초로 "삼대발명"이라는 말이 역사교과서에 나타난 것은 1913년, 학자 부운삼(傅運森)이 주편(主編)을 맡은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 발행의 <공화국교과서신역사(共和國敎科書新歷史)>라고 본다:
"중국의 기술에 세계에 공헌 것으로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나침반이다. 황제, 주공이 지남거(指南車)를 만든 것이 나침반의 시작이다. 당,송때 해상무역이 성행하고, 시박사를 광주, 항주의 여러주에 두었다. 중국인들이 항해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나침반은 항해에 쓰이게 된다.
둘째는 인쇄술이다. 삼대에 문자가 있는데 대나무에 새기거나 비단에 썼다. 한나라때부터 종이가 나타나는데, 베껴쓰는데 힘이 들어 책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오대에 이르러 인쇄술이 시행된다.
셋째는 화약이다. 중국은 자고이래로 궁노포석을 원거리를 쏘는 무기로 삼았다. 송나라때 대포에 화약을 넣는 것이 시작되고 전쟁에 쓰이기 시작한다.
이 세가지는 유럽에 도입되어 구미의 오늘날 문화를 열게 된다."
1913년에 출판된 학자 장감(章嵌, 1880-1931)이 주편을 맡아, 중화서국에서 발행한 <신제중화역사교과서>에도 "나침반, 화약, 인쇠술의 발명"이라는 문구가 들어간다.
같은 해에 출판된, 학자 탕존덕(湯存德)이 주편을 밭은 <신제중화역사교수서>에도 위의 책과 유사하게 "중국기술이 세계에 공헌한 것은 3가지가 있는데 바로 나침반, 인쇄술, 화약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삼대발명"의 작용에 관하여 1915년에 출판된 북경교육도서사에서 발행한 <실용역사교수서>에서는 "만일 나침반이 항해에 도움이 되었다면, 인쇄술은 손으로 쓰는 것을 대체하여 문명을 수출하는 이기가 된다."
1928년에 출판되고 서경신(徐景新)이 주편을 맡은 <신시대역사교수서>에서는 "화약, 인쇄술, 나침반 이 세 가지 발명은 세계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는 중국문화상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다."라고 적었다.
"삼대발명"의 전파경로에 관하여는 1912년에 출판된 학자 반무(潘武)가 주편을 밭은 중화서국에서 발행한 <중화중학역사교과서>에서, "이것은 모두 서양인들의 말이다. 오늘날 활자인쇄의 편리함은 서양인들이 말하기를 활판은 동쪽에서 그 방법이 왔다고 한다. 그건 우리나라에서 전할 것일 것이다."
"삼대발명"이 유럽에 전해진 시기에 대하여, 민국초기의 학자들은 대부분 당송시기라고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갈수록 많은 교과서들은 "삼대발명"은 몽골제국 혹은 원나라시기에 유럽에 전래된 것으로 보았다.
1915년에 출판된, 조옥삼(趙玉森)이 주편한 <간명중국역사교수서>에서는 "원나라때는 유럽과 아시아가 하나로 되어, 유럽인들이 우리나라로 와서 무역하는 것이 성행했다. 그때 천문, 산술이 우리나라로 전래되고, 지남거, 인쇄술, 화약이 유럽에 전래되었다."
1920년에 출판된 학자 탕제탕(湯濟滄)이 주편을 맡은 <신식국사과본>에서는 "몽골이 대제국을 건설하여 유럽과 아시아간의 교통이 크게 성행한다. 유럽인들도 많이 몽골의 관직을 지낸다. 그후 나침반, 화약, 인쇄술의 세 가지가 점차 유럽인들의 사상계에 크게 영향을 끼친다."
1922년에 출판된 조옥삼이 주편을 맡은 <신저본국사>에서는 "몽골칸은 멀리 있는 사람들 까지 불러들여서 색목인들도 관리로 채용했다. 그리하여 서방의 천문, 산술과 포학(砲學)이 중국에 전래되고, 중국의 나침반 및 인쇄술등이 이 시기에 서방에 전해진다."
주목할 점은 1930년대이전에 절대다수의 중소학역사교과서는 "삼대발명"에 대하여 상세히 기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데이타를 보면 다음과 같다:
1910년대에 발행된 20권의 중소학교과서중 '삼대발명'을 언급한 것은 단지 5권이다;
1920년대에 발행된 25권의 중소학교과서중 '삼대발명'을 언급한 것은 단지 3권이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당시의 적지 않은 학자들은 세계역사발전과정에서 '삼대발명'이 실질적인 공헌을 하지 못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20년에 출판된, 학자 오연인(吳硏因)이 주편을 맡은 <신법역사교과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인쇄술의 내력은 아주 길다. 한나라때 석경(石經)을 새겼고, 이것이 시작이다. 수나라때는 일종의 조판(雕版)이 있었으며 점점 인쇄술을 발명하는 추세가 된다. 당나라에 이르러, 목판을 조각하고, 서적을 인쇄하여 판매하는 것은 송나라때 가장 성행했다. 그리고 활자인쇄의 방법도 있었다."
2. "삼대발명"의 발양광대(發揚光大)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삼대발명"과 관련된 내용이 중소학교 역사교과서의 중요지식중 하나로 된다. 이와 동시에, 일부 교과서에서는 "사대발명"이라는 말도 나타난다. "삼대발명"이 유럽에 전래된 시기에 관하여는 두 가지 견해가 있었다:
견해 1: 몽골제국이 서정(西征)할 때, 혹은 원나라시기에 유럽에 전래되었다.
실제로, 이 견해가 1930년대의 주류관점이다. 그중 1935년에 출판된 학자 응공구(應功久)가 주편을 맡은 <초급중학본국사>의 기술이 가장 상세하다.
"원나라때 교통이 발달한 결과, 서방의 문화가 중국으로 전래될 뿌아니라, 중국의 문화도 서방에 전래된다. 그중 중국문화의 서점(西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침반, 화약, 인쇄술 세 가지이다.
나침반이 있으면 항해선박이 원거리항행할 때 길을 잃지 않고, 각 대륙에 식민지를 널리 개척할 수 있게 된다; 화약이 있으면 총포를 제조할 수 있고 군사무기를 정비할 수 있어, 공수에 편리하다; 인쇄술이 있으면, 지식을 전파하는데 이로워, 인류문화가 발달할 수 있다. 그래서 유럽의 중세시대말기의 발전은 중국의 이 삼대발명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세 가지의 중요한 발명이 언제 서방으로 전래되었고, 누가 서방에 전래되었으며, 어떻게 전파하였고, 노선이 어떠한지는 모두 명확한 기록이 없다. 지금도 추가로 고증이 필요하다. 아마도 남송에서 서역 혹은 남양으로 전래되고, 페르시아, 아랍인들이 유럽에 다시 전한 것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중국은 11세기 즉 북송때, 이미 완전히 이용했고, 유럽은 14세기에 이르러, 중국에서 오래 성행한 후에 비로소 발명이 있었다. 그렇다면 중국에서 전래되었다는 것을 믿을 만하다!"
1933년에 출판된 요소화(姚少華)가 주편을 맡은 <소학역사과본>에는 유사한 견해가 실려 있다:
"현재 세계에서 쓰이는 나침반, 화약, 인쇄술의 세 가지 문명이기는 모두 우리 한민족이 발명한 것이다. 그것이 점차 서방으로 전해졌다.
13세기때, 원나라는 유라시아에 걸쳐 나라를 세웠고, 이 세 가지 문명이기는 아랍인 혹은 몽골인을 매개로 하여, 차례로 유럽에 전해진다.
유럽인은 이후 나침반을 이용하여 항해하고, 최대한 개량하여 현재는 오히려 중국에서 만든 것보다 훨씬 발전했다."
1934년에 출판된 여사면(呂思勉)이 주편한 <부흥고급중학교과서본국사>에도 이렇게 쓰여 있다:
"문명의 이기를 개발하는데, 나침반, 인쇄술, 화약은 중국인이 발명했고, 모두 대식(大食)의 손을 거쳐 유럽에 전래되고, 근세 유럽에 대변화를 이끌어 냈다."
그외에, 맹세걸(孟世傑)이 주편한 <신표준고급중학본국사(1934)>, 주여동(周予同)이 주편한 <신표준초급교본본국사(1934)> 및 각각 김조재(金兆梓), 백진채(白進彩) 및 나원곤(羅元鯤)등이 1935년에 주편한 <고중본국사>등 저작에서도 유사한 견해를 취하고 있다.
관점 2: "삼대발명"은 송,원시기에 유럽에 전래되었다.
1931년에 출판된 이운파(李雲坡)가 주편을 맡은 <초중본국사>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나침반, 화약, 인쇄의 세 가지는 근세 세계의 3대발명이다. 그러나 이 3대발명의 응용은 중국에서 모두 아주 빨랐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중국에서 가장 늦게 나타난 것은 북송이고 개략 서력 11세기이다. 유럽이 이 세 가지를 사용한 것은 15세기이다. 중국이 이 세 가지를 사용한 것은 유럽과 비교하여 200년이상 빠르다.
남송시기 해외통상, 몽골의 몇차레 서정은 모두 교류를 빈번하게 했고, 이 세 가지 물건이 직접 혹은 간접으로 유럽에 전래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1933년에 출판된 학자 서영천(徐映川)이 주편한 <부흥역사교과서>에서의 논술은 앞에서보다 상세하다.
"송나라는 오대(五代)이후, 당나라를 이어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때 삼대발명이 있었다. 이는 한족의 세계에 대한 대공헌이라 할 수 있다.
첫째는 나침반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중국고대에 자력이 쇠를 끌어당기는 것을 발견하여, 황제가 지남거를 만들었다. 그러나 상세한 내용을 몰라서 나침반이 있는지 여부는 알 수가 없다. 북송에 이르러 나침반이 만들어진다. 항해가와 풍수를 보는 사람들이 모두 방향을 정하는데 썼다.
둘째는 화약이다. 북송때, 화약으로 폭죽을 만들어 사람들이 즐겨놀았다. 남송시기에 벽력포로 금나라군대를 물리치기도 했다. 금나라에서 수성할 때 철포를 만들었는데 벽력포라고 앴다. 이것이 포화의 최초 발명이다.
셋째는 활자판이다. 오대때 이미 나무판에 새겨서 서적을 출판했고, 각지에서 유행했다. 북송 인종때, 필승(畢昇)이 활자판을 발명한다. 그 방법은 진흙을 배합해서 글자 틀을 만들고, 불로 태워서 단단하게 만든 다음 쇠로 만든 판 위에 놓고 송진과 납을 가지고 불로 익혀 녹게 하여 편평하게 만들어 하나의 판이 되게 한다. 인쇄할 때 1판씩 인쇄하면 시간이 절약된다. 이 세 가지 발명은 나중에 유럽에 전래되는데 개략 중국의 발명품이 유럽에 전래된 것은 비단이 앞서고, 이 세 가지가 비교적 뒤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책은 "고대중국의 과학기술은 발달하지 못했다"는 주제에 대하여, 상세하게 분석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송이전에 중국의 문화는 찬란했다. 각종 발명이 멀리 유럽에까지 전해진다. 원나라이후, 점차 쇠락하여, 근 삼백년동안 구미각국은 과학이 급격히 진보하였는데, 중국은 오히려 낙호하게 된다. 그것은 서양의 학술이 중국에 전래되었는데, 중국은 급히 따라잡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과학을 발달하지 못하게 만들었는데, 그 요인은 아래의 두 가지이다:
첫째, 북방의 외족으로부터 계속 유린되었다. 요, 금, 원의 삼대가 북방을 통제하고, 이민족이 잡거하면서 한인들이 박해받는다. 그리하여 인구는 줄어들고 생활은 힘들어지고, 문화도 대거 쇠퇴하게 된다.
둘째, 국가가 과거로 지식인을 옥죄었다. 과거는 수,당에서 시작하여, 각왕조에서 연용되었다. 명나라초기에 이르러, 명태조는 이를 수정하여 <사서> <오경>에 사용하였고, 그중 한 문구, 한구절을 제목으로 냈다. 송유의 해석을 근거로 하여, 문체에서도 짝을 맞추고 팔고로 나누게 했다. 속칭 팔고문이다.
이런 시험은 전혀 실용적이지 않다. 사회의 우수한 인재의 사상과 견문이 구속받는 것이다. 오로지 독서를 통해 과거를 치르는 것이 정도라고 가르쳤다. 그외의 일은 모두 할 수 없었고, 모두 추구하지 않았다. 청나라도 이 방법을 그대로 써서, 선비들은 갈수록 몽매해졌다. 그리하여, 명에서 청까지 오백여년간, 중국문화는 극도로 퇴보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1940년대까지, 각 버전의 교과서에서 보편적으로 '삼대발명'을 위주로 썼다. 비록 서로 다른 교과서에서 '삼대발명'의 전파시기와 인식에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삼대발명'이 세계문명의 발전에 끼친 역할은 의심하지 않았다.
3. "삼대발명"에서 "사대발명"으로
비록 각 교과서에서 '삼대발명'에 대하여 비교적 체계있게 논술하였지만, 편자들은 제지술에 대한 인식이 크게 부족했다. 이로 인하여 관련논술에 한계를 갖게 했다.
학자들은 보편적으로 가장 먼저 "사대발명"을 이야기한 역사교과서는 학자 진등원(陳登原)이 주편을 맡고 1933년에 출판된 <진씨고중본국사>라고 본다:
"근대에 중화민족은 세계에 공헌한 것이 없다. 그러나 과거에는 확실히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즉, "사대발명"을 얘기하자면 중국은 전인류에게 크게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종이와 인쇄술은 근대문명의 필수품이다. 군사상 사용하는 화약, 항해에 사용하는 나침반은 그 효과가 어찌 적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네 가지는 모두 중국에서 가장 먼저 발명된 것이다!"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대발명"이라는 말이 점점 전파되기 시작한다. 1940년 민국교육총서편심회에서 발행한 <고소역사교과서>에는 "사대발명"의 탄생과 전파과정에 대해 아주 상세히 논술하고 있다:
"제지술, 인쇄술, 나침반과 화약은 모두 인류문화를 촉진한 중요도구이다. 중국이 가장 먼저 발명하여 전후로 유럽에 전해진다.
2세기초, 한족인 채륜(蔡倫)이 제지술을 발명하고, 5세기에 중앙아시아로 전해진다. 8세기초에 이르러 중앙아시아가 아랍인에게 정볻괴면서, 제지술이 아프리카의 이집트와 모로코를 거쳐, 유럽의 스페인으로 전해지고, 다시 이탈리아와 프랑스등 국가로 전해진다.
손으로 베껴쓰는 것에서 인쇄로 진화한 것은 6세기때 중국 수문제가 칙령으로 판을 조각하여 책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한다. 10세기초 당의 풍도(馮道)가 구경(九經)을 새겨서 인쇄하고, 11세기, 송나라의 필승이 활자판을 만든다. 중국의 인쇄술은 이미 크게 발전한 것이다.
13,4세기때 몽골세력이 서진하면서, 인쇄술이 서방에 전해진다. 15세기초, 독일인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만들고, 그후에 파스퇴르, 시포르자등이 개량하여 유럽의 인쇄술을 더욱 정교해진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황제가 이미 지남거를 발명했다. 그러나 이건 믿을만하지 못하다. 자석이 쇠를 당기는 것을 발견한 것은 개략 전국시기이다. 북송에 이르러, 풍수를 보는 사람과 해상에 종사하는 사람이 나침반이 남북을 가리키는 것을 알고는 그것을 통해 방향을 측정했다. 원나라때는 동서방의 교통로가 열리면서 나침반이 유럽에 전래되고, 이탈리아인들이 가장 먼저 항해에 응용했다.
북송때, 화약을 발명하여 폭죽으로 사용하며 오락거리로 삼았다. 남송에 이르러, 우윤문(虞允文)이 화약으로 벽력포를 만들었고, 이를 가지고 금군을 격퇴한다. 원나라때 교통이 열리면서, 화약의 제조법이 유럽으로 전래된다. 유럽인은 그 폭발력을 이용하여 봉건 성채를 무너뜨렸다. "
맺는 말
국세가 날로 쇠퇴하는 배경하에서, 역사교과서는 관방에 의해 "국가와 민족의식을 응집시키고 민족자신감을 제고시키는" 엄숙한 사명을 띄게 된다. 이에 대하여 저명한 역사학자 양인편(楊人楩)은 <초본본국사>의 서문에 이렇게 지적했다:
"본서의 목표는 중화민족이 점차 형성된 경위를 연구하면서, 특별히 그 역사상의 영광을 설명하고, 이를 통해 학생들의 민족부흥의 사상을 격발시키고, 그것을 발양굉다(發揚宏多)할 정신을 배양하며, 우리나라 문화발전의 개황을 서술하며 특히 세계문화에 대한 공헌을 설명함으로써 학생들이 우리 선조의 위대한 역사를 알게 하고, 고상한 뜻과 자강불식의 정신을 양성하게 하는 것이다."
결국 소박한 민족주의감정이 과학진리추구의 이념을 이긴 것이다. 역사교과서는 더 이상 지식의 정확도와 과학성을 중시하지 않는다. "일종의 과학적 검증이 필요한 학술상의 가설도 교과서의 전파와 훈도로 신속히 확고부동한 역사적사실이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사대발명"이라는 말이 각계에 널리 컨센서스를 이루고, 갈수록 많은 중국인들이 굳게 믿게 되었다. "사대발명"의 소유권은 중국에 있다고. 설사 국제사회에서는 그렇게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이상의 여라가지는 모두 우리가 귀따갑게 듣던 그 말을 떠올리게 만든다: "우리가 보는 역사는 본질적으로 당대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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