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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과학

중국고대지도의 여러가지 결함들...

by 중은우시 2022. 9. 21.

글: 노적(蘆笛)

 

필자는 <헤르손대첩이 곧 도래할 것인가?>라는 글에서 미국전쟁연구소가 발표한 전황소식을 번역하면서 '주석'을 하나 삽입했다:

 

"헤르손주 드니프르강 우안(右岸)(주: 하류의 흐름에 따라 좌우로 정한다. 예를 들어, 장강중하류의 좌안(左岸)은 강북이고, 우안(右岸)은 강남이다. 드니프르강의 경우 우안은 강의 서북쪽이 된다)의 러시아군이 정식으로 국제법의 주재하에 항복협상을 하고 있다."

 

한 독자는 나에게 말했다. 그는 과거에 "강좌(江左), 강우(江右)"를 어떻게 구분하는지 몰랐는데, 위의 주석을 보고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모르고 있다. 내가 주석을 단 내용은 현대 즉 서방의 규칙이고, 이는 중국고대의 강좌, 강우와 정반대라는 것이다. 만일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으면, 다른 독자들도 그와 같이 서방규칙으로 고대중국의 지명을 해독할까봐 우려된다.

 

고대 혹은 고시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강좌", "강우"라는 단어가 있다. 예를 들어, 신기질(辛棄疾)은 <하신랑(賀新郞)>에서 이렇게 풍자한 바 있다: "강좌침감구명자(江左沉酣求名者), 기식탁료묘리(豈識濁醪妙理)" 아쉽게도 여기의 '강좌'는 하류의 흐르는 방향으로 정한 것이 아니다.

 

고대인들이 말하는 "강(江)"은 장강(長江)을 가리키고, "하(河)"는 황하(黃河)를 가리킨다. 장강은 구강(九江)에서 남경(南京)까지의 구간은 하류가 서남에서 동북으로 흐른다. 고대인들은 강위에서 남쪽을 바라볼 때 왼쪽이 강동(江東)이고 오른쪽이 강서(江西)이다. 그래서, 강동을 강좌라고 부르고, 강서를 강우라고 불렀다. 그런, 강물의 흐름으로 보거나 아니면 "상북하남좌서우동(上北下南左西右東)"의 지리방향결정규칙으로 보거나, 강동이 강서가 되어야 한다. 

 

이런 고금의 차이는 어떻게 조성되었을까? 그것은 기실 '동서의 구분'이다.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현대 중국인들의 눈은 이미 제국주의문화침략으로 개조되어 버렸다는 것을. 단지 우리가 전복가게에 들어가서 시간이 오래 흐르면 냄새를 맡지 못하는 것처럼 그저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고대중국에는 학교가 없었고, 사숙(私塾, 서당)이나 서원(書院)이 있었을 뿐이다. 어느 것이건 단지 사서오경을 가르쳤다. 사서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이고, 오경은 시경, 상서, 예기, 주역과 춘추이다. 이들 고적에는 아무런 과학적 지식이 담겨있지 않다. 그저 '삼강오륜', '충효절의'같은 전통윤리도덕만 가르친다. 후세의 정치과목에 상당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 학문에 익숙해지면 '수신제가치국평천하'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소학교에서 배우는 산술, 자연, 지리등등은 사숙이든 서원이건 가르쳐주지 않았다. 고대문인들 역사상의 명신들도 포함해서, 사칙연산을 할 줄 몰랐다. 왜냐하면 중국숫자를 쓰는 방법은 아라비아숫자를 쓰는 방법과 달라서, 계산하는데 쓸 수가 없었다. 사칙연산을 하려면 주산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문인은 주산을 배우는 것은 하찮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수신제가치국평천하'와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전곡사야(錢穀師爺)', 장방선생(賬房先生)과 상인들이 배울만한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이탈리아의 선교사 마테오 리치는 대명의 관료들에게 수학계산을 시범보인바 있다. 사람들은 감탄하면서 신기하다고 깜짝 놀란다.

 

그래서, 우리가 소학교에서 배우는 산술, 자연과 지리, 중학교에서 배우는 수학, 이학, 화학, 생물, 지리, 음악, 체육, 미술등등은 모두 1900년 청말에 신정을 시행한 후 비로소 서방에서 도입된 것이다. 청말의 가장 중요한 개혁중 하나는 바로 서방을 본받아 '학당(學堂, 나중에 학교로 바꿈)'을 설립한 것이다. 서양교과서를 번역하여 도입하고, 우리가 중학교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기초학과를 개설한다. 그런 지식이 간단하다고 무시하지 말라. 청말개혁이전에 전국에서 그것을 아는 사람이 열명만 되어도 괜찮다고 할 수 있었다. 지리에 관하여, 좌종당같이 야심만만한 자들을 제외하고, 누구도 지도를 한번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상북하남좌서우동'을 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 구결도 서양교회에서 가르쳐준 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여러분들이 이 점을 받아들이기 아주 괴로울 것이라는 것을. 다만 사실상, 중국고대에는 정말 지리학이 없었다. 지리를 가르치려면 먼저 지도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쉽게도 지도를 그리려면, 측량학을 알아야 한다. 측량학을 랄려면 대수, 기하, 삼각법을 알아야 하고, 경위의(經偉儀), 등고의(等高儀), 육분의(六分儀)등 측량도구가 있어야 한다. 서양인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런 것들을 우리는 전혀 알지 못했었다.

 

이것은 중국고대에 지도가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당연히 있었다. 다만 그들은 측량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개략적인 인상으로 그려낸 것이었다.

 

이런 류의 지도의 첫번째 결점은 고대인들에게 '평면도'의 개념이 없었다는 것이다. 더더구나 어떻게 서로 다른 색깔로 평면도에 지형의 고도를 표시하는지를 몰랐다. 지도위에 산봉우리를 그려서 지형을 표시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지도는 산수화로 변신하게 된다.

미술작품으로서, 그것은 당연히 상당히 높은 예술가치를 지녔다. 아쉽게도 과학가치는 제로이다. 여하한 실용성도 갖추지 못했다. 청산은 아름답지만, 나는 산이 있는 곳이 어느 지방인지 알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산만 가득 그려넣었으니 지명을 쓸 공간도 남아 있지 않앗다. 

위의 지도는 청나라때 그린 절강항주부지여도(浙江杭州府地輿圖)이다(현재 타이페이 고궁박물원 소장). 이것을 보면, 지도의 산봉우리는 진실한 지형면모를 왜곡시켜서, 사람들에게 이곳에 계림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 것이다. 계림이 아니면 어디에 이런 "산여벽옥잠(山如碧玉簪, 산이 벽옥비녀같다)"같은 곳이 있겠는가? 항주에도 당연히 산은 있다. 그러나 산령(山嶺)이지 하나하나가 단독으로 솟아오른 '독수봉(獨秀峰)'은 아니다. 그리고 그 산들은 그다지 높지도 않다. 그리하여 사실에서 엄중하게 벗어난다. '사의화(寫意畵)'라고 할 수 있다. 산봉우리의 높이를 비교할 수가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지도는 보기 드문 걸작이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상남하북좌동우서'의 방위를 표시했기 때문이다. 비록 서방의 규칙과는 정반대이지만, 어쨌든 독자들에게 개략적인 방향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이 바로 고지도의 두번째 결함이다: 대다수는 방위를 표시하지 않았다.

 

어떤 독자는 이렇게 말한다. 중국의 지리방위는 역경에서 왔다고. 역경, 하도낙서는 선천팔괘, 후천팔괘의 방위가 바로 상남하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방향을 표기하지 않더라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사람들은 팔괘의 방위를 가지고 지도를 보기 때문에.

 

그 독자는 아마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무의식중에 고지도의 세번째 결함을 말해버렸다: 방위가 규칙적이지 않고, 기본적으로 그때그때 달랐다는 것이다. 상남하북으로 한 것도 있다. 상북하남으로 한 것도 적지 않다. 그리고 상서하동도 있다. 방위가 어찌되었건 일반적으로 표시를 해놓지 않는다. 독자들이 스스로 찾아낼 수밖에 없다. 아래의 이 지도가 가장 대표적이다:

작자는 아마도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이 횡폭이었던 것같다. 그리하여 종이의 모양크기에 따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지명을 장사진으로 배치한다. 차례대로 진해(鎭海), 주산군도(舟山群島), 전당강구(錢塘江口), 오송구(吳淞口), 숭명도(崇明島), 태창(太倉)과 상숙(常熟)이다. 

 

그는 방위를 표시해 놓지 않았기 때문에 독자는 스스로 방향을 알아내야 한다. 만일 독자가 오른쪽의 강소지명이 북쪽에 있고, 왼쪽의 절강지명이 남쪽에 있다. 그러면 방위는 '좌남우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상서하동도 유추해낼 수 있다. 이것을 현대인들의 지도보는 습관에 맞추려면 왼쪽으로 90도 회전시켜서 보아야 할 것이다. 

구글위성지도와 비교해보면, 대체적인 방향은 조정되지만, 7개의 표시된 위치는 상호간의 거리가 실제와 크게 차이난다. 그저 신귀막측한 수준이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고지도는 근본적으로 실제 측량한 결과가 아니라, 작자가 신뢰하기 힘든 기억에 따라 그려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지도의 네번째 결함이다.

 

필자가 위의 지도의 방위를 고증해낼 수 있었던 것은, 강소가 절강의 북쪽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만 그 점을 모른다면 독자는 도저히 방법이 없다. 오늘날의 독자는 그래도 이 난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 지명을 구글위성지도에 대입하고 다시 고지도와 비교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성지도가 없던 고대에 이런 지도는 그저 폐지나 다름이 없다. 

 

설사 구글위성지도의 도움을 받더라도, 어떤 지도의 방위는 여전히 확인되지 않는다. 아래의 지도가 그러하다. 설사 가우스의 IQ를 가지고 있거나 심지어 아인슈타인의 IQ를 지니고 있더라도 동서남북이 어디인지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청나라때의 대청하원유도(大淸河源流圖)(타이페이 고궁박물원 소장)

실측이 아니기 때문에, 나침반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려낸 지도는 어느 방향이든 모두 들어맞지 않고, 계속 약간씩 어긋난다. 이것이 바로 고지도의 다섯번째 결함이다. 아래의 지도가 대표적이다:

위의 상중하 세개의 지도는 각각 고지도, 정상적으로 나타낸 위성지도, 그리고 30도 왼쪽으로 방향을 튼 위성지도이다. 정상적인 위성지도를 보면, 황주의 위도는 무창이나 한양보다 아래이다. 그러나 고지도에 그려진 황주부는 무창부와 한양부의 북쪽에 있다. 황주와 한양을 연결하면 약 25도의 각도가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는 황주와 한양을 연결하면 마이너스5도이다. 위성지도를 이 특징에 맞게 조정하려면 왼쪽으로 약 30도를 틀어야 한다. 이는 고지도의 작자는 정북을 향하지 않고, 북쪽에서 동쪽으로 약 30도 틀어진 방향을 마주하고 그린 것이다.

 

실제측량을 진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도의 방위에 편차가 발생할 뿐아니라, 지리거리도 심각하게 실제거리와 차이가 난다. 무창-황주의 거리는 한양-무창의 거리보다 약간 멀게 그려져 있다. 이것이 바로 고지도의 여섯번째 결함이다: 비례개념이 없다.

 

고인들은 우리들처럼 초등학교 중학교에서 삼각형을 배울 때의 비례관념이 없었다. 그리하여 지도와 실제지형간에 기하학상의 '유사성'관계가 있어야 하고, 반드시 지형을 비례에 따라 축소하여 종이 위에 그려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실제지형과 차이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비례나 축척을 알 수가 없다. 사용자가 지도에서 양지점의 거리가 얼마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아래에서 양주고지도를 가지고 이 문제를 설명하도록 하자.

비교를 위하여 나는 3개의 지점을 골랐다. 시계방향으로 차례대로 대명사(大明寺), 상방사(上方寺)와 문봉탑(文峰塔)이다. 이 셋은 삼각형을 구성한다. 오늘날의 초중생이라도 한눈에 알 수 있다. 고지도의 백색삼각형과 위성지도의 홍색삼각형은 근본적으로 비슷하지 않다는 것을. 백색삼각형은 거의 직각삼각형이고, 홍색삼각형은 예각삼각형이다. 그뿐아니라, 고지도상의 대명사와 상방사는 기본적으로 같은 높이인데, 위성지도에서는 상방사가 대명사보다 훨씬 위에 있다(즉 북쪽). 이는 지도제작자가 나침반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정북을 향한 것이 아니라 북에서 약간 서쪽으로 치우친 곳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기이한 점은 중국고대인들은 일찌감치 나침반을 발명했다는 것이다. 풍수선생이 길지를 고를 때, 혹은 목장이 집을 지을 때(크게는 고궁을 지을 때) 나침반을 사용했다. 고성의 배치는 동서남북이 아주 정확했다. 북경, 서안, 성도가 이를 증명한다. 이런 상황하에서 원래 정확하게 도시지도를 그리는 것은 아주 쉽다. 그러나 양주부의 지도는 축선이 어그러졌다. 그리하여 북에서 서쪽으로 치우친 방향을 향하게 되었다. 한양-무창-황주의 고지도의 방향은 편차가 더욱 크니 말할 것도 없다. 도시를 만들 때는 나침반을 쓰면서, 도시를 지도로 그릴 때는 쓰지 않았다. 보기에 지도를 그리는 사람들은 풍수쟁이나 목장보다 못했던 것같다.

 

고지도의 일곱째 결함은 고인들에게 천문학지식이 결핍되어 있어, 대지가 원이라는 것을 몰랐다. 경위선의 개념이 없었다. 그리하여 지도를 그릴 때, 먼저 경위선으로 격자도를 그려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그리고나서 각 지의 경위도를 측정하고, 그 수치에 따라 격자도의 위치에 그려넣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황주의 위도가 무창보다 낮다는 것을 알 도리가 없다. 유사하게, 대명사의 위도를 조금 높이 그려도 알아채지를 못한다.

 

고지도를 그리는데 이상의 여러가지 결함이 있었던 것은, 필자가 보기에 두 가지 방면의 원인때문인 것같다. 먼저, 고대인들은 자연계의 비밀에 대한 호기심이 결핍되어 있었다. 그저 실제문제를 해결하는데만 관심이 있었다. 기초이론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고대중국에는 기술은 있어도 과학은 없었다. 그리고 기술은 단지 노동자들이 알고 있었고, 노동자들은 학습을 하지 않았다.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모조리 과학을 알지 못했다. 당연히 기하학과 삼각법으로 측량고도와 거리를 측정할 줄도 몰랐고, 반드시 각지의 경위도를 측정하고 이를 근거로 그들의 지도상의 위치를 정해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그런데 어떻게 정확한 지도를 그릴 수 있겠는가?

 

또 다른 중요한 원인은 정치적인 것이다. 제왕의 유일한 관심은 영원히 정권을 장악하는 것이다. "위로는 천문을 알고, 아래로는 지리를 아는" 민간의 '와룡선생'은 큰 위험요소이다. 그들이 반란을 꾀하는 자의 군사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리하여 서방과 달리, 고대중국에서 지리학은 항상 현학(顯學, 인기학문)이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고지도는 비율에 따라 축소한 실제지형의 유사도가 아니다. 그래서 실제의 지형을 알아낼 수가 없다. 더더구나 비례와 축척으로 두 지점간의 거리를 재지 않았으므로, 그저 기억에 의존하여 그린 그림이어서 근본적으로 사용가치가 없었다. 특히 군사적 가치는 없었다. 이런 지도를 가지고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다.

 

웃기는 점은 <삼국연의>에서 장송(張松)은 주군 유장(劉璋)이 연약하고 무능하다는 것때문에 허창으로 가서 조조에 투항하면서 사천의 지도를 바친다. 그리고 자신이 안내할테니  조조에게 군을 이끌고 유장을 치라고 한 것이다. 다행히 조조는 그가 못생겼다는 것으로 인하여 그를 경시한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도가 있었기 때문에 길안내는 필요없다는 생각이었을까? 아마도 지도만 밎고 사천으로 들어갔다가는 전군이 산골짜기에서 굶어죽었을 것이다.

 

이와 비교하면, 서방은 대항해시대(15-17세기)에 지도제작기술을 완벽하게 발전시킨다. 영국인이 18세기초에 그린 인도대륙지도는 위성지도와 완전히 똑같다.

다행히 삼천년만에 수리를 좋아하는 강희제가 나타난다. 선교사들의 가르침으로 지금의 고등학생 수준의 과학실력을 쌓는다.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고금왕래의 황제들 중에서, 그리고 당시의 전체 청나라백성들 중에서 그는 유일무이한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1708년, 그의 명으로 선교사들이 주재하여 전국 600여개지점의 경위도를 측정하여 10년의 시간을 들여, 중국최초의 경위선이 있는 전국지도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를 완성한다.

현대인이라면 한번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이 지도도 여전히 부정확하다는 것을. 한반도가 명확하게 넓게 그려졌다. 수준이 동시대 영국인이 제작한 인도대륙지도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어쨌든 아마추어이고, 비전문가이니 그렇게 까탈스럽게 굴 일은 아닐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아마추어수준의 <황여전람도>도 그저 한때에 지나지 않았다. 강희제가 죽은 후, 전국의 선비들의 과학수준은 다시 소학생이하로 떨어진다.

 

서양인이 쳐들어왔을 때, 조정은 겁먹고 급해져서, 비로소 양무운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서양전함을 가지고 전투를 해야 하려니, <사서오경>으로는 더 이상 먹고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을 외국에 유학보낸다. 북양수사의 함장들은 모두 영국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었다. 아쉽게도 수준은 선교사가 가르친 강희제만 못했다. 아래는 그들이 청나라 동치9년(1870년)이후 그린 <북양분도(北洋分圖)>이다.

이 지도는 <황여전람도>를 표절한 느낌이 있다. 한반도를 <황여전람도>와 마찬가지로 넓게 그렸다. <황여전람도>보다 못한 점은 산동반도의 그 낙타입을 거의 한반도와 입맞춤할 정도로 가까이 붙여그린 것이다. 그리고 요동반도 주변의 섬과 암초도 너무 크게 그렸다.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필자는 알고 있다. 본문에서 지적한 것은 그저 간단한 역사적 사실이다. 분명 중앙선전부에서는 '역사허무주의'라고 욕할 것이다. 일반인들은 아마도 받아들이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여러분들도 과거에 아Q어르신의 말을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우리 조상은 옛날에 조씨어르신보다도 훨씬 잘 살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