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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과학

중국고대 사대발명(四大發明)의 진실은 무엇일까?

by 중은우시 2023. 2. 7.

글: 진숙함(陳叔涵)

 

중국인의 민족자부심은 상당한 정도로 중국고대의 사대발명에서 나타난다. 그렇다면, 사실은 과연 어떠할까?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사대발명은 종이, 나침반, 화약 및 인쇄술이다. 백여년동안, 중국인은 중국근대의 낙후함을 명청 두왕조의 폐관쇄국때문이라고 치부했고, 중국도 고대에는 대단했다고 자랑해왔다. 그때마다 항상 사대발명을 끄집어내서 얘기했는데, 아마도 경풍제(慶豊帝, 시진핑을 가리키는 말임. 경풍만두(包子)집에서 만두를 사먹는 것이 보도된 바 있음. 만두(包子)도 시진핑을 가리키는 말이 됨.)가 소위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행한다는 것도 이 소위 사대발명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먼저, 우리가 반드시 강조해야할 것은 사대발명은 단지 학술견해이지 검증을 거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기정사실이 아니고, 국제학술계에서 널리 인정받지도 못했다. 중국은 유력한 문물증거를 가지고 소위 사대발명을 증명할 수도 없다. 이는 중국고대문학사상의 당송팔대가는 명나라사람들의 학술발명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중국고대기술사상의 사대발명은 영국인의 학술발명이다. 단지, 당송팔대가는 사실이지만, 사대발명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 점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사대발명을 중국의 공헌이라고 말한 것은 영국인 조지프 니덤(중국명 李約瑟)이 가장 먼저 제기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사대발명은 조지프 니덤의 학술발명이다. 조지프 니덤의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니덤은 과학사를 연구한 적이 없다. 그저 섭렵했을 뿐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대발명은 당시 국정(國情)의 필요에 의해 발명해낸 것이라는 것이다. 1840년 아편전쟁이래, 중국은 가난하고 약했으며, 서방열강은 중국을 거의 갈라서 나눠가졌다. 설사 중화민국시대로 넘어가더라도, 중국은 여전히 가난하고 낙후되어 있었다. 중국인들은 서양인들의 앞에서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숭양미외(崇洋媚外)의 기풍이 성행했고, 이는 통치를 유지하는데 불리한 일이다. 물질적인 것이건 비물질적인 것이든 중국인들은 그저 서양의 것만을 좋아했고, 중국의 것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곤란하다. 바로 이런 상황하에서, 정부와 민간의 일부 국수주의자들이 중국인들의 자신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중국인이 원래는 대단했다는 말을 해주어야할 필요가 있었다. 고대에는 휘황한 문명이 있었는데, 단지 근대에 이르러 서방에 낙후된 것이라고 안위하기 위해서. 중국이 이전에 대단했다는 것을 어떻게 얘기할 것인가? 그것은 바로 남겨진 옛 서적들을 파고들어가서 뭐든지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한번 생각해보니, 이걸 중국인 자신이 하는 것은 좀 부적절하다고 여기게 된다. 왜냐하면 스스로 자신이 대단했었다고 말한다면 좀 쑥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칭찬해주는 것이 훨씬 나은 일이다. 그렇게 하여 영국인 조지프 니담을 중국으로 초청해서, 작업을 시작하고, 영문으로 <중국과학기술사>를 쓰게 한다. 그 목적은 대외선전이었고, 사대발명은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즉, 중국의 사대발명은 조지프 니담이 만들어낸 것이고, 사실과는 차이가 컸다. 그는 이 책에서 그 유명한 '니담난제(Needam's Grand Question)'를 내놓는다: "중국고대의 과학기술은 그렇게 발달하였고, 중국 고대인들의 지능은 그렇게 뛰어났는데, 왜 근대과학이 중국에서 발원하지 않고, 유럽에서 발원했을까?" 기실, 니담은 잘 알면서 고의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한자계통은 영원히 과학발전에 적합한 부호시스템을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을. 그가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은 단지 중국인들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함이다. 니담난제에 대하여, 저명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답안을 내놓은 바 있다. 그는 근대과학이 중국에서 탄생하지 않은 주요원인은 첫째, 중국고대의 선현들은 고대그리스의 형식논리체계를 개발하지 못했다. 둘째, 중국고대의 선현들은 유럽르네상스시대 실험을 통하여 가설을 증명하는 실증정신을 가지지 못했다. 이는 모두 논리가 엄밀한 부호시스템과 관련이 있다. 이는 한자가 제공해줄 수 없는것이지, 중국고대인들의 지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니담을 '한학가'라고 칭하는데, 기실 그는 중국어를 약간 배웠을 뿐이고, 그는 중국동료, 친구들과 서면 및 구두로 의사소통할 때 모두 영문으로 했다. 그는 중문고대문헌을 전혀 읽을 줄 몰랐다. 이걸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류의 절름발이 '한학가'가 발명한 소위 사대발명이라는 것이 제대로 된 것이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다음으로, 니담이 발명한 '사대발명'을 살펴보자.

 

먼저, 나침반이다. 중국인들은 고대서적에 기록된 사남(司南)이라는 물건을 나침반의 시조라고 말했다. 그러나 문물로서 소위 사남이 방위를 가리키는 공능이 있는지를 확인할 수가 없다. 그래서 기껏해야 가설에 불과하다.

 

이어서 인쇄술이다. 중국인은 북송때의 필승(畢昇)이 1040년에 진흙활자(泥活字)를 발명했다고 말한다. 근거는 북송 심괄(沈括)의 <몽계필담(夢溪筆談)>이다. 다른 사료에는 그와 유사한 기록이 없다. 그러므로 이는 '고증(孤證, 다른 증거로 뒷받침되지 않는 유일한 증거)'이다. 사학계에서 고증만으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사서의 유사한 기록으로 증명이 되어야 이런 주장이 근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가장 관건적인 것은 중국은 니활자로 인쇄한 문물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는 활자인쇄술을 중국이 발명했다고 사람들을 설득하기 어렵다. 더더구나, 현대의 저명한 학자 호적(胡適), 나진옥(羅振玉)은 일찌기 실험을 통해 진흙활자는 정상적으로 사용할 수가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다시 제지술을 보자. 중국은 서한초기에 종이가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동한에 이르러, 채륜(蔡倫)이 제지술을 개선하였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은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서한초기 글씨를 쓰는 주류재료는 죽간(竹簡)이었고, 위진시기에 이르러서도 죽간은 여전히 주류의 글씨쓰는 재료였다. 이 기간은 4백여년이나 된다. 중국인들은 극단적으로 공리주의적이고 실용을 중시한다. 종이는 죽간보다 절대적으로 장점이 많은데, 왜 그렇게 오랜 기간동안 대체하지 못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도 물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채륜의 제지술로 만들어낸 종이에 쓰여진 여하한 서적이나 문헌도 남아 있지않다.

 

마지막으로 화약을 보자. 중국인은 고대의 방사(方士)들이 연단(煉丹)을 할 때 폭발이 발생하여 화약을 발명했다고 말한다. 듣기에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긴 한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각해보라. 중국이 당나라때 화약을 발명했다면, 남송말기에 이르러서는 중국인들이 화약기술을 알게 된지 이미 5백년이 지났으니, 당연히 그런 기술은 성숙되어야 한다. 만일 화약을 잘 만들었다면 그 당시 가장 선진적인 무기가 되었을 것이다. 몽골인들이 아무리 잘 싸우더라도, 기껏해야 활과 칼이다. 즉 순수한 냉병기이다. 그것을 가지고 어찌 화약을 가진 중국인들의 상대가 되겠는가. 그러나, 사실은 이러하다: 몽골인들은 중원으로 쳐들어와서 중국인들을 개돼지처럼 죽였고, 중국은 나라가 망한다. 마찬가지 사실이 다시 한번 중복된다. 청나라가 중원으로 쳐들어왔을 때, 몽골인이 한인을 죽이는 것처럼 만주인들도 한인을 죽였다. 중국은 다시 나라가 망한다. 근대에 이르러, 중국인들은 이미 화약기술을 확보한지 천년이 지났다. 그런데 결과는 어떠했는가? 1840년 아편전쟁이 발발했을 때 결과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상의 역사적 사실로 알 수 있는 것은 고대 중국인들은 아예 화약을 몰랐다는 것이다. 중국인이 화약을 발명했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

 

이상의 사실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대발명이라는 것이 단지 영국인 조지프 니담이 제기한 학술관점이지 실제 그런 물건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슬프게도, 백여년동안 중국인들은 그런 관념에 도취하여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상식은 이러하다. 발명은 왕왕 과학기술과 연계되어 발생한다. 그런데 고대 중국에는 과학이 없었다. 간단한 사실은 고대그리스인은 지구가 구체라는 것을 알았고, 에라토스테네스는 기원전에 비교적 정확하게 지구의 둘레가 40000킬로미터라고 추산했다. 이는 오늘날 현대측량수단으로 계산한 결과인 40076킬로미터와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런 내용은 2천년후에 중국인들에게 인식된다. 그동안 중국인들은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아무도 대지가 네모나다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표시하지 않았다. 만일 지구를 인류의 세계로 본다면, 중국인의 세계관은 수천년간 잘못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번 물어보자. 자신이 생존하는 이 세계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민족이 어떻게 세계의 문명발전에 그렇게 큰 공헌을 할 수 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