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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군공파(軍功派)가 황위후계자를 결정한다...

by 중은우시 2024. 11. 22.

글: 자옥(子玉)

황위계승다툼은 황자들간의 경쟁일 뿐아니라, 더더욱 그 배후세력간의 힘겨루기이다. 어떤 정도에서 말하자면, 군공파가 왕오아 황태자선정의 주요역량이 된다.

기원전202년, 한(漢)나라를 건립한 후 유방은 안과 밖에서 새로운 전쟁을 벌인다: 대외적으로는 한신, 영포, 팽월등 이성제후왕(異姓諸侯王)을 제거하고, 대내적으로는 태자 유영(劉盈)을 폐위시킬 준비를 했다.

이성제후왕은 황제가 권력을 집중하는데 중요한 방해자였으니, 반드시 없애야 했다. 황태자의 배후는 강대한 여씨외척(呂氏外戚)과 공신파(功臣派)가 있어서, 황권을 제약하고 있었다. 유방도 황태자를 폐립시킴으로써 여씨외척과 공신파의 권력을 희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목적은 모두 황권을 되찾는 것이다.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유방이 창업한 날로부터 그의 주위에는 이익공동체가 형성된다. 즉 소하, 조참, 주발등을 대표로 하는 풍패원종집단(豊沛元從集團)이다. 그때 여씨가족과 풍패원종집단의 이익은 깊이 묶여져 있었다. 모두 가장 먼저 유방을 따라 천하를 획득하러 나선 사람들이다.

그래서, 창업과정에서 이 두 집단의 이익은 고도로 밀접하게 일치되어 있었다. 유방이 팽성에서의 패배를 겪고, 유영을 황태자로 세운 후, 유영은 이미 동시에 풍패공신과 여씨외척의 이익을 공동으로 대표하고 있었다.

다만, 유방이 한나라를 건립한 후, 풍패공신과 여씨외척은 모두 그가 황권을 집중하는데 장애가 되었다. 만일 이 두 세력의 구속을 벗어나려면, 가장 좋은 방법은 황태자를 폐위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유방은 한동안 빈번하게 유영의 결점을 언급하곤 했다. 그는 너무 유약하다. 조금도 나를 닮지 않았다. 오히려 조왕(趙王) 유여의(劉如意)는 크게 칭찬한다. 이 아이는 바로 자신과 똑같은 성격이다.

솔직히 말해서 유방은 대신들을 떠본 것이다. 그들이 자신의 황태자폐위행위를 지지해줄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그리고, 유방은 유여의에게 그가 황태자에 오를 수 있을 뛰어난 인물들을 배치해준다. 그중 주창(周昌)은 문관의 대표이고, 한신(韓信)과 진희(陳豨)는 무장의 대표이다.

왜 유방은 한신을 죽이지 않고, 그를 이성제후왕의 신분에서 회음후(淮陰侯)로 격하시키고, 그에게 공신이라는 자격으로 유여의를 보좌하게 했을까? 유방은 진희를 대상(代相)의 신분으로 조(趙), 대(代) 두 변방제후국의 군대를 장악하게 하여 유여의를 지지하는 외곽부대를 형성하게 한다.

유방의 행위는 여씨외척과 공신파로 하여금 등골이 서늘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집단으로 유방의 반대편에 서서 유방이 태자를 폐위하려는 것에 반대한다. 심지어 이미 강호에서 물러난 장량(張良)마저도 방관하지 못하고 여후에게 방안을 내놓게 된다.

그외에 주창도 풍패원종집단의 일원이다. 그는 집단이익을 위하여, 명확하게 유방이 황태자를 교체하는 것에 반대한다.

필자는 여기에 의문이 크다. 진희의 반란은 여씨외척과 풍패공신의 압력하에 어쩔 수 없이 거병한 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먼저 불을 붙인 사람이 바로 주창이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다. 한신의 죽음은 여후가 주도적으로 함정을 판 것이다. 유방이 조왕(나중에 대왕) 유여의를 위해 안배한 보좌진들을 제거한 것이다. 동시에 모두 한 가지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한신이 입궁한 것은 소하에게 속아서이다. 그리고 소하는 '군공파'이다. 그리하여, 한신의 죽음은 여씨외척과 군공파가 손을 잡은 결과이다.

그리고, 유방이 군대를 이끌고 회남왕 영포의 반란을 평정하자마자, 장량은 섬서, 파촉, 북지(北地)에서 3만정예를 소집하여 유영의 직속병력으로 삼는다.

여씨외척과 군공집단의 지지를 받고, 군대의 호위도 받으면서 유영의 지위는 반석처럼 공고해진다. 이것이 바로 유방이 어쩔 수 없이 척부인에게 조왕을 황태자에 앉힐 방법이 없다고 말한 핵심원인이다.

확실히, 유방은 공신파와의 싸움에서 실패했다.

그리고 공신파가 유영을 지지한 것은 바로 유방이후 "황제는 수공이치(垂拱而治)하고, 공신이 치리천하(治理天下)한다"는 이원적 정치국면을 실행하기 위함이다.

과연 유영은 나중에 황제에 오르기는 했지만, 제국의 주변인물로 남고, 결국 우울하게 살다가 죽는다.

위청(衛靑)이 외척의 신분으로 흉노를 연이어 격파하며 군공파의 레테르를 붙이게 된 후, 한무제도 유방의 옛날 방식을 그대로 복제하여, 태자 유거는 자신을 닮지 않았고, 막내아들 유불릉이 자신을 더욱 닮았다고 말하게 된다.

한무제 유철은 이렇게 대신들에게 운을 띄운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태자를 폐위시키는 것에 동의하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태자 유거와 이익이 함께 엮여 있는 위씨집단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위청의 중량감은 한나라초기의 공신파와 비교한다면 그저 한 가족의 고군분전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한무제의 공세에 큰 타격을 입는다: 태자는 폐위당하고, 위씨외척도 거의 뿌리가 뽑힌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만일 위씨외척과 이익이 깊이 묶여 있지 않았더라면, 태자 유거의 운명은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어쨌든 수성(守城)의 가장 좋은 후보자였기 때문이다. 이 점은 한무제 본인도 인정했다. 역시 군공파에 의해 운명이 결정된 것이다.

그후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모든 왕조는 창업과정에서 방대한 세력의 '군공파'가 형성된다. 수나라의 관농집단도 그 전형이다.

왜 수문제는 태자 양용을 폐위시키고, 진왕 양광을 태자로 세웠을까? 그것은 양용과 깊이 엮여 있는 관농귀족에게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단지 수양제는 관농집단과의 다툼에서 엉망진창이 되어버리고, 결국 강도에서 목숨을 잃는다.

이에 기하여, 당고조 이연은 절대 관농집단에 밉보일 수 없었다. 시종 관농집단의 이익과 깊이 엮여 있는 태자 이건성의 지위를 흔들지 않았다.

단지, 당나라초기에는 사실상 두 갈래의 군공파세력이 있었다: 하나는 관농귀족을 대표로 하는 구공신이고, 관동제장을 대표로 하는 신공신이다.

관동제장은 태자후보인선에서 진왕 이세민을 밀어줌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최대화하려 했다. 그리하여 천하를 깜짝 놀라게 만든 현무문사변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현무문사변은 바로 신구 양대 군공집단간의 무력충돌이었다.

황태자문제가 다시 이세민에게 골치거리가 되자, 군공파는 다시 한번 나선다. 장손무기를 대표로 하는 관농집단은 당태종에게 진왕 이치를 황태자로 세우도록 압박한다.

역사는 다시 한번 재연된다. 서한의 군공파는 유영의 황태자지위를 유지함으로써 조정을 장악하려 했다. 지금은 장손무기가 성격이 유약한 이치를 태자로 삼게 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고자 한 것이다.

당태종은 당시 어쩔 수 없이 이치에게 한 말에서 엿볼 수 있다: "너는 빨리 너의 외삼촌에게 감사해라. 그가 너를 태자로 세운 것이다."

이를 보면, 웅재대략의 당태종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었다. 자신의 사후정국의 안정을 위하여, 그는 군공파와 타협했다. 이는 유방이 옛날에 소하등과 타협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중에 이치를 세우는 과정에서 장손무기가 취한 과정은 본질적으로 제2의 현무문사변이다. 즉 관농귀족을 대표하는 장손무기와 관동제장을 대표하는 이적(李勣)이라는 양대군공집단간의 힘겨루기였다.

결과는 관농군공파의 승리이다.

나중에 이융기가 왜 황태자가 되고 당현종이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이융기는 당륭정변을 통하여 자신에게 '군공파'라는 레테르를 붙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큰형 이성기는 할 수 없이 황태자의 자리를 그에게 양보해야 했다. 그후 이융기는 선천정변을 통하여 다시 한번 황위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중의 당숙종 이형은 왜 황위에 앉을 수 있었을까? 철저히 당현종을 허수아비로 만들면서. 그것은 바로 안사의 난을 평정한 군공들이 그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오대의 역사는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군공파는 드러내놓고 황위를 다투었다: "천자에 씨가 따로 있느냐. 병력이 많고 말이 강한 자가 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말해서, 조광윤이 동생 조광의를 후계자로 삼은 것도 군공파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번진, 절도사들은 비록 군권을 박탈당했지만, 능력이나 영향력은 남아 있었다. 그는 부득이 공신이라는 레테르를 가진 조광의를 후계자로 삼음으로써 대송의 황권이 평온하게 넘어갈 수 있게 하였다.

원나라는어떠한 가. 전형적인 군공정치였다. 왜 원나라에서 자주 정변이 발생했고, 황위교체가 빈번했는가. 바로 초원, 한지 양쪽의 군공세력이 대도의 황권을 놓고 계속하여 부딛쳤기 때문이다.

명나라초기도 전형적인 군공정치이다. 군공파의 황권에 대한 구속을 벗어나기 위해, 주원장은 일찌감치 공신에 대한 숙청을 시작한다. 새로운 군공파를 이용하여 옛 군공파를 타격한다. 그리고 남옥, 부우덕 등은 희생양이 된다.

다만 주원장이 실수한 것은 연왕 주체를 대표로 하는 번왕도 소위 군공파였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황권을 좌우할 수 있었다. 결과는 이성군공파가 모조리 소멸한 상황하에서, 건문제는 동성군공파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황위를 내놓아야 했다.

역시 군공파가 황권을 좌지우지했다.

당연히 청나라도 전형적인 군공정치이다. 본질적으로 말해서, 홍타이시, 순치 두 황제는 군공파에서 선출한 것이다. 즉 모두가 동의하여 천연두를 겪은 현엽으로 하여금 순치제에 오르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4대보정대신을 임명하여 새로운 황제를 보좌하게 하였고, 황권을 나누어 가진 셈이 되었다.

청나라초기의 정치는 항상 군공파가 결정했다.

강희제가 권신 아오바이를 제거한 것은 기실 전체 군공파와 싸운 것이다. 아오바이를 전형으로 하여 그를 타도하고 황권을 되찾은 것이다.

동시에 군공파도 후계자의 인선을 좌지우지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을 이어나가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황팔자 윤사(胤禩)를 그들의 대변인으로 내세운다. 황팔자를 지지한 사람들의 면면을 보자:

이번원 상서 아링아(阿靈阿), 강희초기 보정대신 어비룽(遏必隆)의 아들로 뉴후루씨의 핵심인물이다; 영시위내대신 어룬다이(鄂倫垈), 퉁자씨의 핵심인물이다; 공부우시랑 쿠이쉬(揆敍)는 나라씨의 핵심인물이다....

가장 전형적인 경우는 아링아이다. 그의 할아버지 어이두(額亦都)는 당시 태조 누르하치를 따라 천하를 얻을 때의 공신이다. 그는 확실한 '공신파'였다.

왜 강희제는 결국 황팔자를 버렸을까? 그것은 바로 강희제가 군공파들이 계속하여 대청의 정국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자 윤잉이 무너진 상황하에서 그는 과감하게 황사자 윤진을 선택한 것이다.

왜 윤진인가? 왜냐하면 황사자는 주변이 깨끗했다. 그의 곁에는 군공파 세력이 달라붙어 있지 않았다.

다만 기실 윤진이 후계자가 된 것도 역시 공신파간의 힘겨루기가 포함되어 있다. 연갱요를 대표로 하는 신예군공파와 아링아를 대표로 하는 구세력 군공파간의 투쟁이라고 볼 수 있다.

역시 군공파가 결과를 좌우한 것이다.

옹정제는 황위가 공고해진 후에 군공파들이 다음 대까지 좌우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연갱요, 융과다 두 공신을 제거한다.

이는 연갱요의 야심이 팽창했는지 아닌지와는 관계가 없다. 황권의 안정을 위하여, 옹정제는 언젠가 그렇게 해야할 터였다.

다만 청나라의 이후 역사는 여전히 군공파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왜냐하면 팔기는 시종 애신각라가족이 의지하는 주력이기 때문이다. 다만 후계자선정에 있어서의 간섭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을 뿐이다.

팔기를 대표로 하는 군공파는 증국번, 좌종당을 대표로 하는 신진군공파의 굴기이후에 점점 발언권을 잃고, 철저히 역사무대에서 사라진다.

군공파는 항상 역사의 메인스트림이었고, 영향력이 아주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