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융소첩(戎小捷)
고대에 서로 다른 인류사회 상호간에 전쟁이 발발하는 것은 아주 통상적인 현상이었다. 그리고 대국, 강국이 소국, 약국을 병합하는 것은 더더욱 흔한 일이었다. 약국, 소국의 제도와 문화는 이로 인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거나 심지어 말살되는 일도 자주 발생했고, 기이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다만, 전체 인류역사상, 많은 이전의 대국, 많은 이전의 강력한 문명, 많은 이전에 찬란했던 문화가 중단되거나 소멸하는 일도 있었다. 다만 유독 중화문명, 중화문화만은 계속하여 남아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서 필자가 연구해서 얻은 결론을 먼저 얘기하겠다: 1. 2개의 서로 완전히 다른 유형의 문명상호간에 전쟁이 진행되면, 패배한 측은 쉽게 소멸되고, 그 문화도 승리한 측에서 받아들이기 아주 어렵다. 2. 두개의 동일한 유형의 문명상호간에 전쟁이 발생하면 패배한 측의 제도와 문화는 일반적으로 소멸하지 않고 왕왕 승리한 측이 일부 혹은 전부를 받아들이게 된다.
아래에서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일찌기 휘황찬란했던 문명, 이전에 화려했던 문화가 필자가 위에서 말한 첫번째 이유때문에 중단되고 소멸한 것이 어떤 것이 있는지, 이어서 다시 중화문명은 필자가 위에서 말한 두번째 이유로 소멸을 계속 회피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온 것인지.
먼저, 우리는 고대그리스문명을 보도록 하자. 고대그리스문명의 휘황찬란함은 우리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단순히 그리스가 전쟁에서 연이어 패배한 이후의 운명을 살펴보기로 하자. 고대그리스는 일찌기 북방의 이웃국가인 마케도니아와 서쪽의 이웃국가인 로마에게 패배, 점령 혹은 병합되었다. 다만, 이들 승리한 점령자, 병합자들은 원래 모두 고대그리스와 동일한 경제문화권이었고, 원레 그리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었다. 그래서 상호간에 네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네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다. 예를 들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의 가정교사는 바로 고대그리스에서 온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리고 로마의 전신인 에르투리아문명은 일찌감치 지중해시장경제권에서 최대의 도기생산지였다. 나중에 로마군대의 원정작전때, 그 뒤에는 항상 많은 그리스각지의 상인들이 있었고, 기다려서 로마군대에 패배한 적국의 포로들을 거래했다. 결국 고대그리스, 마케도니아, 로마는 상호간에 비교적 유사성이 컸다. 그러므로, 고대그리스는 여러번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그 제도와 문화가 소멸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 전승자들이 더 많은 지역을 원정하면서, 그들의 문화를 전파했다. 예를 들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의 원정은 그리스문화를 페르시아, 이집트 및 인도까지 전파한다. 그리고 로마는 지중해지구의 통일제국을 건립한 후, 겸허하게 그리스에게 배우고, 그리스의 문화를 흡수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의 호메로스서사시를 모방하여 본민족의 장편서사시 <아이네이스>를 창작했다. 결국 위의 두번째 이유로, 그리스문명 혹은 그리스문화는 철저히 중단되지 않았고, 더더구나 완전히 소멸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일찌기 휘황했던 로마제국의 운명을 보자. 우리는 알고 있다. 로마제국은 북방의 황무지에서 온 오랑캐에게 멸망당했다는 것을. 그리고 이어 로마제국의 모든 제도, 문화는 사라지게 된다. 승리한 오랑캐족이 계승하거나 흡수하지 않았다. 이건 무엇때문인가? 필자의 생각에 이것은 로마제국의 제도, 법률과 문화는 주로 전체 환지중해의 경제, 상품교류권에서 사용하기 적합한 것이었다. 북방에서 오고 군사적 우세로 로마를 점령한 오랑캐족은 원래 그들의 유목생활에서 무슨 시장경제, 혹은 상품문화의 유전자가 없다. 그저 군사행정의 전통만 있을 뿐이다. 자연스럽게, 그들이 로마제국을 점령한 이후, 로마문명(그들이 계승한 그리스문명도 함께)의 시장경제, 상품문화 일체는 그들에게 있어서 알지도 못하고, 쓸모도 없는 것이었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첫번째 이유로 그저 잔존하거나 중단되거나 소멸되는 길을 걷게 된다. 단지 아주 우연한 이유로, 즉 기독교의 존재로 인하여 고대로마 고대그리스의 문화는 철저히 소멸하지 않고, 기나긴 1000년이 지난 후에 다시 부흥하게 된다.
우리는 다시 일찌기 휘황했던 고대이집트제국의 운명을 보자. 첫째, 고대이집트제국은 고대그리스, 고대로마와 다르다. 그것은 시장형의 문명이 아니었고, 행정형의 문명이었다. 즉, 행정위주, 시장보조로 국가를 통치하는 문명이었다. 고대이집트는 일찌기 전후로 여러번 외래문명에 패배, 점령당한다. 비교적 저명한 것은 마케도니아, 페르시아, 로마등에 의한 군사적 정복이다. 다만, 그들을 정복한 것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유형의 군사행정집단이었기 때문에, 고대이집트 자체문화는 대부분 보존되었고, 완전히 소멸하지 않았다. 그들이 반포한 행정문건은 왕왕 고대이집트문자와 전승자의 문자를 병용해서 사용했다. 다만 나중에, 완전히 다른 유형의 아랍문명이 이집트를 정복한 후, 고대이집트문명 혹은 고대이집트문화는 철저히 소멸한다. 왜냐하면 비록 마찬가지의 군사정복이지만, 이번에는 행정군사집단에 의한 정복이 아니라, 종교군사집단에 의한 정복이었기 때문이다. 종교군사집단이 이집트를 정복한 후, 행정명령은 더 이상 사회를 조직하는 수단이 아니었고, 오히려 종교신조가 사회를 조직하는 수단이 된다. 고대이집트가 원래 행정수단에 따른 소유제도와 문화는 아랍종교습속문명에게는 쓸모가 없을 뿐아니라, 유해한 것이었다. 그래서 반드시 뿌리뽑아야 했고, 개종시켜 신앙을 바꾸어야만 했다. 결국 고대이집트문명과 문화는 철저히 중단되고 소멸되어버린다. 그 자신의 행정문명도 철저히 종교문명으로 바뀌게 되고, 지금에 이르게 된다.
(마찬가지 이유로 같은 행정형문명인 고대페르시아제국은 마케도니아나 로마에 패배했을 때는 문화가 소멸되지 않았다. 다만 나중에 마찬가지로 종교문명의 아랍인들에게 정복당했을 때는 고대이집트와 마찬가지로 고대페르시아문명 혹은 문화는 철저히 중단되고 소멸한다. 그 자신도 종교문명으로 바뀌게 되고, 지금에 이른다.)
좋다. 그럼 중화문명을 살펴보기로 하자.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광대한 중화지구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것은 한족이다. 여러번 북방 초원에서 굴기한 소수유목민족에게 패배하거나 정복당했다. 구체적인 원인 혹은 과정을 여기에서 일일이 소개하지는 않겠다. 다만, 왜 중화문명과 문화는 중단되지 않고 더더구나 소멸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바로 중화문명이 전형적인 행정문명에 속하고, 전후로 군사정복한 그 북방의 유목민족(혹은 반유목반농경민족)도 역시 행정문명에 속했다. 완전히 동일한 문명유형에 속하는 것이다. 구별이 있다면, 중화민족은 행정수단으로 농업생산을 조직하고, 북방의 유목민족은 행정수단으로 목축업생산을 조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북방에서 온 유목민족은 아주 쉽게 중국의 제도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이를 배우고 흡수하여 자신들이 새로 점령한 광대한 지역을 통치했다. 이렇게 되어, 중화문명과 중화문화는 중단되거나 소멸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소수유목민족들이 통치하는 시간이 길어지게 되면 왕왕 인원수가 많은 한족에 동화되어버리고, 중화민족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즉,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두번째 이유로 중화문명은 계속하여 전승되어 지금에 이를 수 있었다.
당연히, 만일 중화문명이 시장형문명이었다면 북방오랑캐의 행정군사집단에 패배하고 점령당했을 때, 중단괴거나 소멸될 운명을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고대로마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혹은 중국이 비록 행정문명이지만, 점령한 측이 종교군사집다니었다면, 중화문명은 중단되거나 소멸될 운명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고대이집트나 고대페르시아와 마찬가지로. 다행히 이 두 가지 상황은 모두 출현하지 않았다. 이것은 아마도 전체 세계인류문명발전사에서 아주 보기드문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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