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회역사(情懷歷史)
황건적의 난은 동한말기의 농민전쟁이다. 한영제 광화7년(184년)에 시작되었으며, 당시 조정은 부패하고, 환관 외척은 권력투쟁이 끊이지 않으며, 변방은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고, 국세는 날로 약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전국은 큰 가뭄으로 수확이 거의 없는데도 세금은 줄여주지 않았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가난한 농민들은 거록(巨鹿)사람 장각(張角)의 호소하에 속속 반기를 들고 모여들었다. 모두 알다시피, 황건적의 난은 직접 동한왕조를 무너뜨리지 못한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 황건적의 난을 일으킨 3명의 우두머리들은 결국 어떤 최후를 맞았을까?
- 장각(張角)
장각(? - 184), 기주(冀州) 거록(지금의 하북 평향 서남) 사람이다. 동한말기, 장각은 제자들에게 법술(法術)과 주어(咒語)를 전수하며 태평도(太平道)를 창립한다.나중에 부수(符水, 부적을 태운 물)로 환자를 치료하면서, 청주(靑州, 지금의 산동성 서북, 교동), 서주(徐州, 지금의 산동성 남쪽, 강소, 장강이북), 유주(幽州, 지금의 하북성 동부, 요녕), 기주(지금의 하북성 중부, 남부)등 8개주에 수십만의 신도를 거느리게 된다.
이런 기초 위에서, 장각은 신도를 조직화하면서 각지에 구호를 를전파하며 거사를 준비한다. 중평원년(184년), 반도 고밀(高密)로 인하여, 거수(渠帥) 마원의(馬元義)의 거사를 실패로 끝난다. 그러나 장각은 성공적으로 황건적의 난을 일으킨다. 36만명이 같은 날 거사를 일으키자고 호소했다. 당연히 진나라말기의 진승, 오광처럼 장각도 금방 조정의 진압을 당한다.
같은 해, 장각은 북중랑장(北中郞將) 노식(盧植)에게 패배한다. 당시 노식의 제자인 유비(劉備)도 병력을 이끌고 장각을 토벌하는데 참가한다. 노식은 연전연승을 거두며, 만여명을 참하고 포로로 잡는다. 그리하여 장각등으로 하여금 광종(廣宗, 지금의 하북성 위현 동쪽)으로 물러나 지키게 압박한다. 같은 해 가을, 장각은 병사한다. 이에 대하여 필자가 보기에, 이런 최후는 그래도 불행중 다행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장각이 지키던 성은 그후 금방 함락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장각이 병사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동한조정의 혹형을 받아야했을 것이다.
2. 장보(張寶)
장보(?-184), 기주 거록 사람. 장각의 둘째동생. 도교 태평도의 창립자중 한명. 동한말기 황건적의 난 수령중 한명. 중평원년(184년) 장보는 장각, 장량(張梁)과 함께, 황건적의 난을 일으킨다. "지공장군(地公將軍)"으로 불렸다.
황건적의 난이 발발한 후, 장보는 하곡양(下曲陽)을 지킨다. 당시 한나라의 중랑장 동탁(董卓)과 거록태수 곽전(郭典)이 공동으로 장보를 공격했다. 비록 황건군은 인원수가 많았지만, 그들은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농민들이었다. 그래서 금방 포위당한다. 같은 해 십일월, 장보는 하곡양(지금의 하북성 진주)에서 황보숭(皇甫嵩), 곽전등에게 격패당하고 전사한다.
3. 장량(張梁)
장량(?-184), 장량(張良)이라고 쓰기도 한다. 기주 거록사람. 장각의 셋째동생. 도교 태평도의 창립자중 한명. 동한말기 황건적의 난의 수령중 한명, 동한 중평원년(184년), 장량은 형들을 따라 반란에 참가한다. 당시 사람들은 "인공장군(人公將軍)"이라 불렀다.
184년 십월, 황보숭과 장량은 광종(하북성 위현)에서 교전을 벌인다. 다른 두 형들과는 달리, 그의 군대는 정예부대였고, 황보숭도 함락시키지 못한다. 다음 날, 황보숭은 군영을 폐쇄하고 병사들에게 휴식을 취하게 하며, 변화를 관찰한다. 장보의 군대는 경계를 느슨하게 했다. 황보숭은 그리하여 야간에 부대를 모아, 공격을 개시하고 한밤중까지 싸워서 황건적을 대파하고, 장량을 참살한다.
전체적으로 장각 삼형제가 죽으면서, 황건적의 난은 결국 실패로 끝난다. 다만, 모두 아는 것처럼, 황건적의 난은 동한왕조의 질서에 침중한 타격을 주었고, 동한말기 제후할거국면을 조성한다. 결국 동한왕조의 멸망을 촉진하게 된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역사학자들은 황건적의 난 이후 동한왕조는 이미 유명무실해졌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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