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최애역사(最愛歷史)
(안사의 난은 전후로 8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할 점은 이 8년이 단순히 관군과 반군간에 전쟁을 벌인 기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8년간, 조정내부에는 무수한 권력투쟁이 벌어졌고, 그리하여 원래 일찌감치 평정되었어야할 제국의 반란이 꼬박 8년이나 끌게 된 것이다. 그렇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것이 정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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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반란과 평정의 각도에서 보면, 안사의 난은 간단히 3개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제1단계: 천보14년(755년) 십일월, 안록산(安祿山)이 거병하고, 반군이 연이어 낙양, 장안을 함락시킨다; 지덕2년(757년) 정월, 안록산이 아들 안경서(安慶緖)에게 피살당한다.
제2단계: 지덕2년(755년) 구월, 십월, 당숙종(唐肅宗)은 곽자의(郭子儀), 이광필(李光弼)이 군대를 이끌고, 10만 회흘기병(回紇騎兵)을 빌려 연이어 장안, 낙양을 수복하고, 안경서는 업성(鄴城)으로 물러난다; 건원원년(758년) 구월, 조정의 아홉 절도사가 업성을 포위공격하나. 반년이 걸렸지만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다; 건원2년(759년) 삼월, 사사명(史思明)이 병력을 이끌고 안경서를 지원하며, 아홉 절도사를 궤멸시킨다. 사사명은 그 후 안경서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다. 그해 가을, 낙양을 점령한다.
제3단계: 상원2년(761년), 이광필, 복고회은(僕固懷恩)이 낙양을 공격하지만 망산(邙山)에서 대패한다, 그러나 사사명은 그의 아들 사조의(史朝義)에게 피살당한다. 사조의는 스스로 황제에 오른다; 당나라는 다시 회흘에서 병력을 빌려 낙양을 수복한다. 다만 사전에 약정한 대로 "토지는 당에 귀속하고, 자녀는 금은보화와 비단을 가지고 회흘로 돌아간다." 그리하여 낙양은 약탈로 페허가 된다; 보응원년(762년), 사조의는 하북으로 도망친다. 이때 당나라는 반군에 대해 초항분화정책(招降分化政策)을 쓴다. 사조의의 부하장수 전승사(田承嗣), 이회선(李懷仙)등이 속속 당나라조정에 투항한다. 사조의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 다음해 봄에 목을 매어 자결하면서 안사의 난이 종결된다.
대체적으로 말해서, 제1단계에서 반군이 공세를 취하고, 당군은 수세에 처해 있었다. 제2, 제3단계에서는 반군이 수세에 처하고, 당군이 공세를 취했다. 비록 중간에 밀고당기는 일은 있었지만. 당나라에 있어서, 방어할 때는 충신(忠臣)이 있었고, 공격할 때는 맹장(猛將)이 있었다. 이는 조정이 반군을 막아내고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원인이다.
안사의 난 초기 형세도
장순(張巡)은 제1단계에서 수비장수들 중 걸출한 대표이다.
당나라 진사출신의 문관으로서 장순은 원래 앞날이 밝았다. 사서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글을 읽을 때 세번이상 읽지 않아도 평생 잊지 않았고, 글을 쓸 때도 초고를 미리 쓰지 않았다." 그는 당시의 "공부엘레트"였다. 장순은 태자통사사인(太子通事舍人), 청하현령(淸河縣令)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정치적 업적이 탁월했으며, 청렴결백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관료의 길에 들어섰을 때, 장순의 가까운 사람들은 모두 그가 나중에 나라를 잘 다스리는 관료가 되어 역사에 이름을 떨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장순은 뜻이 높고, 사소한 일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용속조비(庸俗粗鄙)한 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했다. 그리하여 그의 관료로서의 길은 계속 진전이 없었다. 그렇게 되자 어떤 사람은 그에게 권상(權相) 양국충(楊國忠)에게 의탁하여, 승진을 도모하라고 권한다. 그러나, 장순은 바로 거절한다: "그렇게 하면 나라가 괴상하게 된다. 조정의 신하로서 할 수 없는 일이다." 관리가 권력귀족에 빌붙어야 승진할 수 있다면, 그것은 국가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순조롭게 경성으로 들어올 수 없었던 장순은 '사다호활(士多豪滑)'의 진원현(眞源縣, 지금의 하남성 녹읍)으로 가서 현령(縣令)이 된다.
진원은 중원에 위치하고 있고, 토호열신(土豪劣紳)이 많았다. 장순이 부임했을 때, 현지에는 이런 말이 돌았다: 남금구(南金口), 명부수(明府手). 이것이 얘기하는 것은 현지에서 세력이 가장 큰 '지두사(地頭蛇)'인 화남금(華南金)이 아문(衙門)에 재직하는 관계를 가지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위세를 부렸다. 장순이 처음 부임하고나서 사람을 시켜 화남금을 붙잡아 오도록 하고, 전체 현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그를 법에 따라 처벌한다. 그후, 그는 다시 일련의 백성들에게 이익을 베푸는 정책을 실시한다. 이 사건으로 진원현에 재임한 수년동안 장순은 현지역사상 치적이 가장 뛰어난 "명신"중 하나가 된다.
장순이 진원현에서 일하고 있을 때, 안사의 난이 발발한다. 중원에는 수십년간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반군은 순식간에 진격해오고, 조정은 군대를 동원하여 막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각지의 관리들은 안록산의 군대가 진격해온다는 소문만 들으면 도망쳤다. 초군(譙郡, 안휘 박주(亳州))태수 양만석(楊萬石)은 반군의 그림자도 보이기 전에 스스로 안록산에 투항해버린다.
진원현은 초군의 관할하에 있었다. 당나라조정을 배반한 후에 양만석이 처음 한 일은 수하관리들까지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장순은 현지에서 명성이 높던 관리이니, 자연히 양만석이 가장 먼저 투항을 권유한 대상이 된다. 다만 양만석은 장순의 기개를 너무 낮게 보았다. 양만석의 배반행위를 보고, 장순은 분노를 금치 못하여, 분기하여 병사를 일으킨다. 현의 관리와 백성 수천명을 이끌고, 안록산에 저항하는 기치를 내건다.
아이러니한 일은 장순의 이러한 행위는 동료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끌어내지 못한다. 당시 진원현 부근의 옹구(雍丘, 지금의 하남현 기현)현령 영호조(令狐潮)는 투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현지백성들은 자신의 장관이 투항하는데 대하여 멸시했고, 영호조가 성문을 열고 나가 반군을 맞이하는 틈을 타서, 백성들이 성문을 걸어잠그고, 옹구성과 생사를 같이 하겠다고 선언한다. 다만, 옹구현은 군룡무수(群龍無首)였다. 옹구의 백성은 조직적으로 항전할 힘이 없었다. 그리하여 성안의 사람들은 장순을 모시자고 하게 된다.
천보15년(756년) 이월, 장순은 병력을 이끌고 옹구현을 접수한다. 이와 동시에 찾아온 것은 단보(單父, 지금의 산동 단현)현위 가분(賈賁)이 1천여명을 이끌고 온다.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하여, 그들은 먼저 영호조의 가족들을 붙잡아 제사지낸다. 이어서, 방어공사를 진행한다. 그리고 영호조는 반군의 지지하에 실력을 크게 키운다. 장순, 가분이 옹구로 간지 1개월만에, 영호조는 반군대장 이회선(李懷仙), 양조종(楊朝宗)등 4만대군을 이끌고 공격하며 옹구를 평지로 만들고 장순을 산채로 잡겠다고 호언한다.
기세등등하게 몰려오는 적군을 맞이하면서 가분은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용맹하게 성문을 열고 뛰쳐나가 적군을 맞이하나, 불행히 전멸한다. 가분의 죽음은 영구, 진원의 수비군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장순은 차분하게 대응한다. 그는 분석한다. 영호조는 일찌기 옹구를 다스린 바 있으니, 반드시 성을 방어하는데 있어서의 약점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군은 정예병이고, 반드시 우리를 경시하는 마음이 있을테니, 진원, 옹구 두 현의 병력을 가지고 승리를 거두려면 반드시 피동적이어서는 안되고 주동적으로 싸워야 한다.
장순은 기습을 감행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직접 1천의 정예병을 고른 다음 5개부대로 나눈다. 각 부대는 200명이다. 이들은 오직 하나의 임무만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최대한 반군의 진영에 부딛쳐 혼란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적군을 많이 죽일 필요는 없다. 더더구나 양식이나 물자를 빼앗을 필요도 없다. 그저 그들이 우리의 기세를 보고 물러나게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이번 기습은 아주 효과적이었따. 반군이 솥을 걸고 밥을 지으려 할 때, 진원, 옹구의 자제병이 들이닥친다. 그러자 반군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진다. 수만대군은 식사는 신경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저항할 수도 없었다. 뭐가뭔지도 모르는 상황하에 전장에서 궤멸되어 도망치게 된다.
그후, 장순과 영호조는 크고 작은 삼백여회의 전투를 벌인다. 영호조는 연전연패했고, 그의 수하 반군은 예봉이 꺽여 결국 부득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장순은 겨우 수천명밖에 되지 않는 병력으로 영호조의 수만대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나 그후 동도(東都) 낙양(洛陽)이 함락된다. 봉상청(封常靑), 고선지(高仙芝)등 숙장(宿將)은 당현종에 의해 억울한 죽임을 당한다. 당(唐), 연(燕)의 대채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장순, 가분이 옹구에 주둔하기 전날, 안록산의 대군은 이미 진류군(陳留郡, 지금의 하남성 개봉)을 점령한다. 이곳은 당나라때 하남절도사(河南節度使)의 주둔지이다. 또한 당현종이 안사의 난이 발발한 후, 내륙에 설치한 첫번째 번진(藩鎭)으로 의미가 아주 크다. 최초의 설계에 따르면, 하남절도사는 진류, 수양(睢陽), 초(譙)등 13군의 군사를 통할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남절도사의 직위가 결위되면, 장순이 옹구, 진현 일대에서 저항하는데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당나라제국의 하남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기초가 와해될 지경에 처한 것이다.
더욱 심각한 일은 진,한이래, 조운관동(關東, 함곡관 동쪽)은 장안에 물자를 공급하는 중요모델이었따. 수,당때 조운은 '동남지혹(東南之粟)'을 취한다. 즉, 소위 강회에서 거둔 세금이다. 이들 돈과 양식은 평화로운 시대에는 강도(江都, 강소성 양조)에서 운반하기 시작하여, 장강, 회하, 황하등 수로를 거쳐 낙양까지 도달한다. 다시 낙양에서 수레 혹은 나귀로 내륙운송을 통하여 섬서로 간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세금으로 나오는 물자는 조운을 통해 운송되며, 군국대사는 강회에 의존한다." 그래서 수양제이후 여러 군주는 나라가 망할 위험에도 불구하고, 대운하를 건설한 것이다 .이를 통해 강회지역의 조운을 보장하려 했던 것이다.
수당대운하와 통하는 통제거(通濟渠)는 마침 옹구, 영릉(寧陵, 지금의 하남성 영릉), 수양(지금의 하남성 상구)등지를 지나서 강회(회하, 장강)으로 내려간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옹구, 영릉, 수양의 삼선을 잘 지키면, 안록산의 반군이 강남을 차지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강회의 중요성은 안록산도 당연히 알고 있다. 당나라중앙정부의 재정수입과 양식물자공급을 끊기 위하여, 진류군이 함락된 날로부터, 그는 수하대장 이정망(李廷望)을 하남절도사로 임명하여, 진류를 지키게 한다. 동시에 양조종, 최건우(崔乾佑)등을 파견하여 연도에 병사를 거두면서 동쪽을 공략하고, 저항세력을 토벌할 준비를 한다. 이를 통해 미래에 때가 오면 강남으로 쳐들어가 철저히 국면을 역전시키고자 하였다.
양조종, 이정망의 부하로서 영호조는 새로운 상사들에게 크게 기대를 받는다. 그는 스스로 장순을 이길 수 없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사병을 데리고 옹구의 북쪽에 주둔하면서 거기에 기주성(杞州城)을 지어 밤낮으로 경계하며, 장순의 의군에 대한 양초지원을 끊는다.
장순은 비록 문관이지만, 군사사상은 아주 시대를 앞서갔다. 영호초가 잠시 옹구, 진원에 대한 공세를 늦추자, 그는 성안에서 대담하게 병사를 훈련시킨다. 그의 훈련방식은 전통적인 장수들과는 달랐다. 그는 각 영의 지휘관에게 무조건 자신에 복종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에게 최대한도로 병사를 지휘하는 창의성을 발휘하도록 요구한다. 어느 직급의 장령이든 장순의 눈에는 모두가 상황에 따라 스스로 전투방안을 조정하여 돌발사건이 발생하면 즉시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권리를 가졌다고 보았다.
장순의 이런 '무조직 무기율'의 훈련방식에 당군내부에서는 의문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하여 장순은 이렇게 설명한다; "지금 호인(胡人)들은 돌진하고 돌파하는데, 모였다 흩어지면서 온갖 변형이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병사들이 장수의 뜻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장수는 병사의 상황을 파악하고, 상하가 서로 배워, 사람마다 스스로 싸워야 하는 것이다." 신축성을 가지고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장순이 반군을 상대하면서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호조가 일으킨 소모전은 확실히 장순이 옹구를 지키기 시작한 이래 맞이한 가장 큰 도전이었다.
옹구는 토지는 적고 사람은 많아서, 성내의 물자준비에 한계가 있다. 전투한지 오래되면서, 당군의 화살은 일찌감치 바닥난다. 그리하여 야간기습에 뛰어난 장순은 또 다른 계책을 생각해낸다. 그는 사람들에게 허수아비를 만들게 한 후, 그들에게 야행복을 입혀서, 사병이 밧줄로 끌고 성벽위에서 성밖으로 내보낸다. 그리하여 야간에 반군을 기습하는 듯한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밤에 수비하던 반군은 멀리서 당군이 성을 나와 '기습'하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무수한 화살을 쏘게 된다. 장순등 수비관병은 성위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가 허수아비를 당겨서 화살을 얻는다. 이렇게 며칠간 진행되다보니, 당군은 성공적으로 수십만개의 화살을 얻을 수 있었다. 나중에 나관중이라는 문인이 장순의 "허수아비차전(稻草人借箭)"이야기를 듣고 <삼국연의>를 쓸 때 제갈량의 신기묘산중 하나로 묘사했다.
당연히, 차전(借箭)은 장순의 유일한 목적이 아니다. 양군이 대치한지 오래되면서, 쌍방은 모두 소모가 많았다. 반군의 후방에서 무기물자를 전선까지 운송하는 외에 정기적으로 영호조등을 위해 식량을 운송했다. 장순은 이 소식을 듣고, 즉시 성동격서의 계책을 결정한다. 그는 자신이 소규모부대를 이끌고 야간기습을 하여 영호조를 공격하는 척하여 상대방으로 하여금 군영에서 나오도록 만들고, 그후에 다시 심복으로 하여금 대부대를 이끌고 반군의 양식운송물자를 기습하게 한다. 영호조가 속은줄 알았을 때는 식량을 가득 얻은 장순은 장계취계로 오백명의 결사대를 보내어 허수아비모양으로 하여 적군의 군영을 돌연 기습한다. 이렇게 되자 영호조는 철저히 혼란에 빠진다. 역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영호조의 군대는 크게 혼란에 빠져, 군영을 불태우고 도망치며, 십여리를 추적했다."
비록 장순이 이처럼 대단했지만, 영호조는 알고 있었다. 양군이 소모전을 벌이게 되면, 정수는 '버티는' 것에 있다. 그저 버티기만 하면, 이길 수 없는 전투는 없다. 장순과 비교하면, 영호조의 장점은 병력도 많고, 후방에서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영호조가 성을 포위하고 물러나지 않는 것을 보자, 장순은 스스로 성을 버리겠다고 제안하며, 상대방에게 자신과 장병들에게 살길을 열어달라고 한다. 단기간내에 장순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고려하여, 영호조는 상안무사(相安無事)의 심리로 자신의 군대에게 삼십리를 물러나도록 명령한다. 장순이 도망친 후 자신이 옹구를 점령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큰 공을 세우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영호조의 대군이 '기주성'을 버리고 물러나자, 장순은 사람을 보내 적군의 성루를 파괴한다. 그리고 건물을 철거하면서 얻은 목재를 가지고 옹구로 돌아와 다음번 전투를 대비한다.
이렇게 하여 장수는 전후로 옹구를 1년이나 지켜낸다. 영호조는 시종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장순의 지휘하여 그의 수하에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맹장들이 나타난다. 그중 사람들이 "목두장군(木頭將軍)"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뇌만춘(雷萬春)이 가장 탄복할 만하다.
한번은 영호조가 군대를 이끌고 옹구를 공격했다. 뇌만춘은 성위에서 전투를 독려하고 있었다. 영호조는 수합여사들에게 화살을 일제히 쏘도록 명령한다. 뇌만춘은 피하지 못하고, 얼굴에 화살을 6발이나 맞는다. 그러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영호조는 의문을 품게 된다. 장순이 다시 허수아비를 놓아서 자신을 속이려는 것이 아닌지. 그래서 탐자(探子)를 불러서 물어보니, 허수아비가 아니고 수비장수 뇌만춘이라는 것이다. 영호조는 깜짝 놀라서 성아래에서 장순에게 소리쳤다: "뇌장군을 보니, 비로소 귀하의 군령(軍令)을 알았고, 군령이 천도(天道)같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 장순이 큰 소리로 회답한다: "그대는 인륜(人倫)도 모르면서 어찌 천도를 얘기하는가" 너같은 난신적자는 천도를 논할 자격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장순이 혼자 옹구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여전히 당군대부대가 안록산부대에 파죽지세로 패배당하는 대세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천보15년(756년) 육월, 동관, 장안이 연이어 무너진다. 반군은 장안으로 쳐들어가고, 당현종은 황급히 서쪽으로 도망친다. 천하의 군사국면은 천지가 개벽하는 변화가 일어난다. 반군이 대거 하락(河洛), 관중(關中)으로 쳐들어가고, 노군(魯郡, 산동군 연주), 동평(東平, 지금의 산동성 동평동북), 제음(濟陰, 산동성 정도 서남)을 차례로 함락시킨다. 원래 명을 받아 영천(潁川, 하남성 허창)을 지키던 산남절도사(山南節度使) 노경(魯炅)도 반군의 포위공격에 남양(南陽, 지금의 하남성 등주)으로 물러나서 지켰다. 옹구는 일거에 사면에 적군뿐인 고립된 성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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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은 강회를 보호하는 전략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옹구를 나와서 영릉(寧陵)으로 철수하여 고수하기로 결정한다. 그가 다행이라고 여겼던 점이라면 하남에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또 다른 문관이 한명 있다는 점이다. 그는 바로 수양태수 허원(許遠)이다.
허원은 이렇게 생각했다. 대적을 맞이하면서 영릉이 비교적 수양군의 아래에 있는 하나의 현에 불과하지만, 수양성과 영릉성의 거리는 사십리에 불과하여, 일단 영릉을 빼앗기면, 자신이 지키는 수양도 버틸 수가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영릉이 함락되는 것을 그저 눈 멀거니 뜨고 바라볼 수만은 없었다.
장순, 허원의 병마를 영릉에 모아놓았다. 이건 반군의 양조종, 영호조등의 시선을 벗어날 수 없었다. 허원, 장순의 부대가 완전히 자리잡기 전에, 반군은 기습을 감행하여, 영릉수비군과 꼬박 하루밤낮을 싸운다. 그러나 다시 한번 반군은 패배한다. 장순, 허원은 "적군 만명을 죽이고, 시신이 강물을 막고, 적은 밤을 틈타 도망쳤다."
이때, 당현종은 <명삼왕제(命三王制)>를 반포한다. 삼왕(三王)으로 하여금 태자 이형(李亨)을 도와 천하를 평정하라는 것이다. 그후 당현종의 당제이자 괵왕(虢王) 이거(李巨)를 새로운 하남절도사로 임명하여, 장순, 허원의 수양, 영릉병을 포함한 하남13군의 군사를 책임지고, 영남절도사 하리광(何履光), 검중절도사 조국진(趙國珍), 남양절도사 노경의 삼진대부대도 통할하도록 했다. 이거는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고, 모략이 있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남양절도사 노경의 포위를 풀어준다. 장순이 진원, 옹구, 영릉일대에서 반군과 싸우면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것에 비추어, 그는 장순을 하남절도부사(河南節度副使)에 임명하고, 그에게 더욱 큰 권한을 부여한다.
다만, 전쟁으로 인한 소모는 돈과 양식이다. 장순은 부하병사들이 굶주리는 것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장병들이 공을 청한다는 것을 이유로 이거에게 추가로 식량을 공급해달라고 요구한다. 이거는 장순의 뜻을 완전히 곡해하여, 사람을 시켜 30장의 절충도위(折冲都尉)와 과의도위(果毅都尉) 임명장을 보내고, 전쟁에 필요한 식량이나 돈은 한푼도 보내지 않았다. 화가난 장순은 크게 욕을 한다: "종사가 위기에 처해 있고, 포위공격을 당해 고립되어 있는데, 무슨 상과 직위를 원한단 말인가?"
사실상 이는 완전히 이거의 허위나 인색때문은 아니다.
만일 역사의 시야를 넓혀보면, 당현종의 <명삼왕제>의 반포는 태자와 삼왕이 상호견제하도록 하는 권력갈등을 조성했다. 하루빨리 등극하기 위하여, 태자 이형은 자연히 당현종의 종실이 합심하여 강산을 지켜내자는 책략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현종이 서쪽으로 도주한 후 2달도 되지 않아, 이형은 두홍점(杜鴻漸)등 대신들의 옹립으로 황제에 오른다. 이는 당현종, 당숙종이 안사의 난에 대항하는데 있어서 의견불일치를 보이는 시기를 앞당기게 된다.
바로 이러한 때, 전 북해태수 하란진명(賀蘭進明)이 영무로 가서 당숙종 이형에게 업무보고를 한다. 당숙종은 재상 방관(房琯)에게 지시하여 하란진명으로 하여금 어사대부(御史大夫)의 신분으로 남해태수 겸 영남절도사를 맡게 한다. 그런데, 당현종의 아래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방관은 하란진명에게 내리는 조서를 살짝 건드리게 된다.
하란진명은 정치적 두뇌가 재빠른 관리였다. 당숙종에게 감사인사를 하면서 방관을 오히려 공격한다. "진(晋)나라는 왕연(王衍)을 삼공(三公)으로 삼았는데, 허황된 짓을 하여 중원이 혼란에 빠졌다. 이제 방관이 큰소리만 치고 허명을 세우려 하며, 인용하는 것이 모두 허황된 것이니, 왕연에 비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재상으로 쓰시는 것은 사직의 복이 아닌 듯합니다."
하란진명은 당숙종의 앞에서 충성심을 표할 기회를 가졌을 뿐아니라, 그 기회를 틈타 당숙종의 방관에 대한 신뢰도 이간질했다. 이렇게 한 결과 그는 금방 새로운 직위를 얻게 된다: 하남절도사.
하란진명은 즉시 부임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장순이 하남절도부사로 있을 때 그의 상사인 하남절도사가 두 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각각 신황제, 구황제의 대리인이다. 피차간에 서로를 용납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하란진명이 도착하자, 이는 하남의 전쟁국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최소한 그가 하남절도사로 있는 동안 영창태수, 하남도지병마사 허숙기(許叔冀)는 명을 받아 휘하의 정예병을 이끌고 팽성, 초군으로 가서 방어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장순, 허원의 사활은 신경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두 사람을 대표로 하는 영웅들은 그저 반란을 평정하는 업무에만 신경쓰지, 당현종, 당숙종 두 황제간에 얼마나 큰 갈등이 있는지는 신경쓰지도 않고, 두 사람은 어느 한쪽 편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군이 이미 반격할 준비를 마치자, 반군은 더욱 시급하게 강회의 땅을 차지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안경서가 부친을 살해하고 권력을 차지한 후, 반군으느 대장 윤자기(尹子奇)에게 병력 13만을 이끌고 영릉을 우회하여 직접 수양을 친다. 안경서가 이렇게 조치한 것은 장순, 허원이 고립무원이고, 수양은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라는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옹구, 영릉과 비교하면, 수양성은 강회를 통제하기에 편리할 뿐아니라, 더더욱 당나라때 송주(宋州)의 치소(治所)였다. 동으로는 괵왕 이거의 팽성주둔지와 연결되어 있다. "형세가 서로 연결되어 있어, 동남을 보장하고, 관섬(關陝)을 막는데 충분했다."
장순, 허원이 윤자기의 진실한 목적을 발견한 후, 그들은 이전에 영릉을 보위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속히 병력을 모아 수양으로 가서 죽기살기로 방어한다.
이때, 여러번의 큰 싸움을 거치면서,장순, 허원의 부대는 다 합쳐도 7천명이 남지 않았다. 그러나 윤자기가 조직하여 쳐들어오는 13만명의 부대는 반군중 가장 정예병인 유주병(幽州兵)외에 동라(同羅), 돌궐, 해(奚)등의 부족정예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인원수로 보나 장비로 보나 양자간의 실력차이는 현격했다.
수양보위전은 악전고투가 될 상황이었다.
자신들보다 근 20배에 달하는 적군을 보면서도, 장순은 전혀 겁을 내지 않았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양군이 접전을 벌이면서, "장순은 사병들을 격려하여 방어했고, 하루에 스무번 싸우면서도 기세가 꺽이지 않았다." 옹구, 영릉을 방어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지구전을 하겠다는 생각을 수양보위전에서도 도입했고, 수시로 적군의 방어가 허술한 틈을 타서 기습을 감행하고, 장비를 획득했다.
"금적선금왕(擒賊先擒王)"의 각도에서 출발하여, 장순은 윤자기를 사살할 생각을 한다. 그리하여 계책을 낸다. 그는 성루에서 짚을 화살로 삼아 반군장령을 쏘도록 지시한다. 짚으로 만든 화살을 본 반군장령들은 크게 기뻐하며 수양은 화살이 바닥났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급히 윤자기에게 보고한다. 이렇게 하여 윤자기의 위치가 드러났다. 이어서 장순의 휘하대장 남제인(南霽仁)은 화살로 그의 왼쪽눈을 맞추고, 결국 윤자기는 패전한다.
장순이 이처럼 신기한 힘으로 수양을 지켜내는 것을 보자 허원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겁이 많고 병법을 모릅니다. 공은 지용을 겸비하였으니, 제가 공을 지키고, 공이 싸워주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여 두 사람 사이에는 묵계가 이루어진다. 허원은 군수를 책임지고, 장순이 군사를 주관하게 된다.
개략 반년후, 윤자기가 권토중래한다. 이때 장순은 그들이 양식조달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차린다.
이전에 이거는 하란진명에 대항하기 위하여, 모든 인원을 동원한다. 그리하여 휘하부대의 양식소모가 거대했다. 그리하여 이런 일막이 발생한다. 이거는 하남절도사의 명의로 장순에게 양식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수양에서 원래 적과 싸우기 위해 준비했던 양식중 절반을 이거에게 바쳐야 했던 것이다.
장순이 수양을 지키는 동안, 전투는 더욱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가 당숙종에게 보낸 보고서에 쓴 것처럼, "신은 포위당한지 47일동안 1,800여회의 전투를 하였습니다." 이 숫자는 아주 정확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성을 지키는 수비병사들의 체력소모가 얼마나 컸을지 알 수 있고, 식량도 자연스럽게 빨리 소모되었다. 수양을 계속하여 지켜내기 위하여, 장순은 남제운에게 하란진명에게 가서 지원병력을 구해오도록 시킨다. 동시에 성안에서 양식의 정량배분제도를 실시한다. 1선장병은 한 사람이 하루에 1홉의 쌀을 먹을 수 있다. 배부르지 않으면 목피, 지장, 차엽등을 끓여서 먹는다.
남제운은 성을 나가서 하란진명이 주둔하고 있는 임회(臨淮, 지금의 강소 사홍 동남)로 간다. 그에게 수양의 참담한 상황을 보고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하란진명은 전혀 대국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남제운에게 이렇게 말한다. 수양은 곧 함락될 것이다. 장군은 앞날이 창창한데 왜 하필 거기를 지키다 죽으려 하는가.
남제운은 분노해 마지 않았다. 그는 칼을 뽑아 자신의 중지를 자르면서 맹세했다: "반군을 평정한 후 반드시 하란진명을 죽여버리겠다."
다른 한편으로, 반군은 수양성내에 식량이 부족하여 사병들이 굶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운제(雲梯)를 걸치고, 구거(鉤車), 목마(木馬)로 공성을 진행한다. 이런 곤경에 처해 있었지만, 장순은 의연하게 윤자기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강공이 통하지 않자 윤자기는 돌연 "기주성"을 설치해서 옹구를 포위공격하던 경험을 떠올리고, 즉석에서 참호를 파고 목책(木柵)을 세워 지키기로 결정한다. 장순과 소모전을 벌이기로 작정한 것이다.
형세는 갈수록 장순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오랫동안 보급을 받지 못한 수양의 병사들은 점점 굶어죽기 시작한다. 살아있는 장병도 대다수 기운이 없었다. 예전의 전투력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장순은 할 수 없이 장병들에게 "참새를 잡고, 쥐를 잡고, 갑옷과 노(弩)를 삶아먹도록" 했다. 그러나 양식이 갈수록 부족해지면서 장순은 부득이 깜짝놀랄 조치를 취한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첩을 데리고 나와 장병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이 오랫동안 먹지 못했다. 그러나 충의는 전혀 약해지지 않았다. 나는 내 살을 베어 여러분들에게 먹이지 못하는게 한스러웠다. 차러리 첩을 버릴 지언정 여러분들이 굶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다." 말을 마치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소첩을 죽여, 수양의 장병들에게 군량으로 삼게 한다. 이에 대하여, 성을 지키던 장병들은 울음과 눈물을 흘리며 차마 먹지를 못했다. 장순은 "강제로 먹게 했다" 그리하여 가련한 장병들은 그의 말을 비로소 따른다.
장순이 첩을 죽인 선례가 있다보니, 허원도 자신의 집의 동복(童僕)을 끌고나와 죽여서 병사들이 먹도록 한다.
그 후에 수성병사들이 밤낮으로 분전하는 것을 보고, 많은 백성들도 자발적으로 자신을 "양식으로 내놓는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사람들은 반드시 죽을 것을 알았고, 배반하는 자는 없었다. 남은 자는 겨우 4백명이었다." 고대의 전쟁은 성을 포위하고, 성을 도살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수양전투처럼 백성들이 스스로를 바쳐서 수성장병의 군량이 된 일은 아주 드물다.
전황이 이렇게 참혹한데, 장순은 왜 끝까지 투항하거나 철수하지 않았을까?
기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수양성내에서도 포위망을 돌파하여 동쪽으로 달아나자는 목소리가 나온 적이 있다. 그러나 장순의 견해는 달랐다: "수양은 강회의 보장이다. 만일 버리고 도망치면 적이 반드시 승기를 잡아 끝까지 밀고들어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강회는 없게 된다. 게다가 우리는 굶어서 멀리 도망칠 수도 없다."
이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그는 수양을 포기하면, 강회를 지킬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강회를 지키지 못하면, 천하는 위기일발이 되고 더욱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둘째, 설사 백보를 양보하여 수양을 포기하더라도 병사들은 병들고 굶주려 약해져 있는 상태이므로 포위망돌파를 강행하더라도 더욱 많은 사상자를 낼 뿐이다. 성밖의 윤자기 대군은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므로 우리군이 성을 나가게 되면 방어할 험준한 장애물도 없어지고 그 결말은 결국 죽음일 것이다. 결국 죽는 길이라면, 끝까지 싸우면서 영웅이 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최후의 시각이 마침내 도래했다.
지덕2년(757년) 십월, 윤자기는 다시 대군을 집결하여 공성을 진행한다. 이때의 수양성은 성내에 싸울 병사가 없고, 성밖에는 지원오는 병력이 없었다.
이런 결말을 장순은 마치 일찌감치 담담하게 받아들인 것같았다. 수양성이 함락될 때, 그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서방을 향해 세번 절을 하고 크게 소리친다: "신은 힘이 다해서, 성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살아서 폐하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했으니 죽어서 귀신이 되어서라도 적을 죽이겠습니다!"
이런 장순을 보고 윤자기는 어느 정도 간담이 서늘했다. 그는 장순에게 묻는다. 듣기로 너는 매번 전투를 할 때마다 이를 악물어, 이빨이 모두 끊어졌다고 들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것인가?
장순이 대답한다: "나는 역적을 삼키고 싶었다. 그러나 힘이 따르지 못했을 뿐이다."
윤자기는 그걸 믿지 않고, 칼로 장순의 입을 벌렸다. 그랬더니 정말 겨우 3,4개의 이빨만이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윤자기는 장순의 인격적 매력에 감동받는다. 그리하여 그에게 투항을 권한다. 그러나 장순은 시종 반군에 욕설을 퍼붓는다. 결국 투항권유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윤자기는 대노하여, 그를 죽여버린다. 장순과 함께 죽은 사람은 뇌만춘, 남제운등 여러 수성영웅들이 있다. 그리고, 허원은 수양태수이므로, 윤자기가 자신이 함부로 죽이지 못하고, 안경서에게 보내어 처리하게 한다. 그러나, 금방 안경서가 낙양에서 철수하는 명을 내리기 전에, 허원도 굴복하지 않고 장렬하게 순국한다.
안타까 일은 수양성이 함락된 3일후, 장순이 생전에 그렇게 기다리던 원군이 도착한다.
원래, 장순이 수양을 사수하고 있는 동안에, 당숙종은 동남의 병력을 통합하기 위하여, 자신의 곁에 있던 재상 장호(張鎬)를 보내 하란진명을 대체한다. 장호는 대국을 볼 줄 알며, 큰 뜻을 가진 관리였다. 장순이 시급하다고 요청했다는 것을 알고, 그는 바로 호주자사(濠州刺史) 여구효(閭丘曉)에게 병력을 이끌고 증원가도록 명한다. 그러나 여구효는 재능이 자신보다 뛰어난 장순, 허원 그리고 자신의 손에 죽은 시인 왕창령(王昌齡)등을 질투해 마지 않았다. 그는 명령을 받은 후, 고의로 시간을 지연시켜, 수양성이 함락되고 장순이 죽도록 만든 것이다.
비록 장호가 나중에 여구효를 죽여 장순의 복수를 해주었지만, 당숙종도 이한(李翰)등의 건의를 받아 수양성을 지킨 병사들을 표창한다. 그러나 그때 천하의 여론은 장순등의 희생을 제대로 봐주지 않았다. 당나라사람들은 장순이 앞장서서 사람을 먹은 일이 있어, 한때 역사문명의 곤경에 빠지게 된다.
장안,낙양을 수복하면서, 지덕2년(757년) 십이월, 안사의 난은 잠시 일단락된다. 당숙종은 특별히 명을 내려 공신들에게 상을 내린다. 대당의 이부(吏部)는 장병들의 공로를 명확히 한 후, 다시 나라를 위해 희생한 열사의 명단을 정리한다: 안고경(顔杲卿), 장개연(張介然), 허원, 남제운, 뇌만춘, 원리겸(袁履謙).....이들 열사들에 대하여 당숙종과 조정문무백관은 모두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유독 명단에 올라있는 한 사람의 이름에 대하여는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바로 얼마전에 수양을 사수하다가 죽은 어사중승 장순이다.
<신당서>에 기록된 바대로 당시 사람들은 "장순이 수양을 지키면서, 육만의 무리들이 양식이 떨어졌는데, 다른 살 길을 찾지 않고 사람을 먹었으니, 어찌 온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일부 관리들은 장순이 수양을 방어하는 기간동안 "사람이 사람을 먹는(人相食)" 비참한 국면을 조성했으니 그는 역사의 죄인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일부관리들 예를 들어 장담(張澹), 이서(李紓), 동남사(董南史), 장건봉(張建封), 이한(李翰)등은 장순의 공로가 아주 크고, "천하가 망하지 않은 것은 그의 공이다"라고 했다.
장순의 생전 가까운 친구이자 한림학사인 이한은 이렇게 말했다. 장순이 사람을 먹은 것은 실로 어쩔 수 없어서 한 일이다.모두 수양에 "구원병이 오지 않고 먹을 것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먹을 것이 떨어져서 사람을 먹은 것은 그의 뜻을 거스른 것이다. 하물며, 장순은 성을 지키고 천하를 지켜낸 공이 있으니 마땅히 그냥 묻어서는 안된다.
결국 장순이 공을 세운 것을 감안하여 당숙종은 그를 양주대도독, 등국공(鄧國公)에 봉하고, 그의 아들에게 관직을 수여한다.
확실히 앞장서서 사람을 먹은 것은 어떤 고상한 목적을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문명사회에서는 용인될 수 없는 야만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장순의 죄는 당시 수양성 전체 군민의 공동선택이 아니었떤가? 명나라때 사람 이지(李贄)가 <사강평요(史綱評要)>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장순은) 옛법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싸웠는데 비록 옛날의 대장이라고 하더라도 그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배반하는 자가 없었고, 호령이 이처럼 엄명했으니 충분하다. 하필 오(吳), 백(白)같은 무리들 처럼 독수를 쓸 것인가. 성패로 영웅을 논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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