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정치/대륙과 대만

타이완 핵무기개발의 역사

중은우시 2024. 10. 28. 14:21

글: 아항(阿恒)

최근 들어 핵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펜하이머를 소재로 한 영화 <오펜하이머>가 인기를 끌었고, 관중들은 핵무기탄생의 역사를 이해함과 동시에 '근거리'에서 핵무기의 엄청난 위력을 느낄 수 있었다.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핵무기를 연구개발한 이래, 일본에서 최초로 투하된 원자폭탄은 세계로 하여금 핵무기의 위력을 직접 느끼게 만들었다. 각국은 공포를 느끼는 동시에, 앞다투어 연구개발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중국이 포함된다.

1958년, 타이완해협에서 제2차위기가 발발한다. 미국은 한때 핵무기사용까지 고려하였으니, 최종적으로 소련이 그 기회를 틈타 개입할까봐 우려하는 등의 요소로 포기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이런 생각은 중국으로 하여금 핵무기를 대거 개발해야겠다는 의식을 갖게 만들었고, 하루빨리 핵무기를 보유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만들었다.

1964년 10월 16일, 중국은 제1차핵무기실험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여,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다. 동시에 중국은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의 뒤를 이어 다섯번째로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가 된다. 중국의 핵무기시험성공에 중국의 위협을 받고 있던 장개석은 극도로 우려하게 된다. 한편으로 대만내부의 사기에 크게 영향을 줄 것을 우려했고, 다른 한편으로 미국이 더 이상 대만을 도와서 방어해주지 않을까봐 걱정했다(미국은 사후에 재삼 승락은 불변이라고 약속했다)

여러가지 대만안전에 불리한 요소들이 중첩되면서, 대만은 핵무기를 연구개발하기로 결정한다. 이 역사의 자료는 대만당국에서 여전히 비밀해제를 하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학자 임효정(林孝庭)은 미국의 자료를 인용하여, 미국의 시각으로 우리들에게 이 시기의 극히 중요한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1960년대: 적극준비, 암중구매

1965년 5월, 중국은 제2차핵무기시험을 진행한다. 장개석은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중산과학연구원주비처(籌備處)"를 성립시키고, 핵무기연구개발의 주력팀을 만들게 한다. 1969년 과학연구인재를 배양하고 망라하여, 중산과학연구원이 정식으로 성립되고, 핵무기연구개발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는다.

대만은 비록 자신의 과학연구팀을 준비했지만, 자신의 기술만으로는 성공적으로 핵무기를 연구개발하기에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다. 그리하여 외부의 도움이 크게 필요했다.

미국정보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핵무기의 아버지 보그만이 여러번 대만을 방문했다. 심지어 중산과학연구원의 고문이 된다. 또한 대만측인원이 여러번 비밀리에 이스라엘핵에너지연구센터를 방문했다. 임효정의 연구에서는 이스라엘이 대만의 핵무기개발을 어떻게 도와주었는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이 성공적으로 핵무기를 연구개발한 경험은 계속 대만이 참고하는 대상이 되었다.

1966년, 중국의 제3차 핵무기실험이 진행되고, 핵무기기술이 갈수록 성숙된다. 이는 장개석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미국의 공동방어결심이 동요할까봐 우려했고, 핵무기에 대한 갈망이 더욱 커졌다.

1967년, 원래 대만은 서독에서 핵반응로를 구매하고자 준비했다. 여러 차례의 협상을 거친 후, 대만은 핵무기연구개발에 쓰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그런데, 미국과 서독이 반대하지 않는 상황인데 대만이 겨래를 취소한다. 원래 당시 존경받던 오대유(吳大猷)는 대만의 핵무기연구개발을 적극 건의했다. 단지 경제에 미칠 부담을 고려하여, 장개석은 연구개발을 잠정적으로 중단한다.

아쉽게도, 국제형세는 대만의 편이 아니었다. 대만은 다시 핵무기를 연구개발할 생각을 품게 된다. 1969년 미국대통령 닉슨은 중국과 연합하여 소련에 대항하기 위하여, 대만에 대한 군사약속을 점진적으로 약화시키고, 중국에는 호의를 보인다. 이런 거동은 대만고위층으로 하여금 자신의 운명에 관해 더 많은 카드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핵무기능력을 가지는 것은 필수불가결했다.

1970년대 상반기: 계획적발, 미국진노

1969년부터 1972년까지, 대만은 "연구" "민용"을 명목으로 핵에너지연구가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다만 너무 발전이 빠르다보니 미국에 의해 금방 발각된다.

1972년 11월, 대만은 "민용"을 이유로 비밀리에 서독의 한 회사와 접촉하여 핵연료재처리공장을 구매하고자 한다. 서독의 주미대사관은 미국이 이 일을 통보하고, 미국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는다.

경제적인 각도에서 보면, 한 나라가 방대한 핵관련계획이 없다면, 근본적으로 재처리공장은 필요가 없다. 그래서 개발도상국에 있어서, 재처리공장을 보유한다는 것은 핵무기를 발전시키려 한다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봐야 한다.

서독외에 미국도 이 소식을 듣는다. 대만이 비밀리에 벨기에회사와 접촉하여 나머지 핵시설을 구매하고자 한다는 것을. 미국은 즉시 강경하고 명확한 조치를 취하여 대만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을 제지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영향은 상상하기 힘들 것이었다.

CIA의 당시 분석에 따르면, 순조롭게 진행되면, 대만은 1976년에 핵무기발사능력을 가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CIA는 대만이 고도로 미국에 의존하고 있어서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핵무기를 함부로 발전시키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비록 미국측이 여러번 대만에 절대로 핵무기를 발전시켜서는 안된다고 얘기했고, 대만도 여러번 민용핵에너지만 발전시킬 것이라고 말했지만, 미국과 중국이 매년 관계개선을 하면서 오히려 대만은 더욱 초조해지고, 더욱 핵무기를 가지고 싶었다.

1974년, 미국은 중국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장경국에게 말한다. 대만에 이미 10여년간 배치되어 있던 핵폭탄을 철수시킬 것이라고. 이는 대만의 불안감을 가중시켰고, 대만의 핵무기에 대한 갈망을 조장했다.

1970년대 후반기: 표면영합, 포기않음.

1976년, 미국 주네덜란드대사관은 이렇게 보고한다. 대만이 네덜란드, 벨기에의 두 핵에너지회사와 사적으로 접촉했고, 극히 민감한 핵연료재처리기술을 취득하고자 했다. 그리고 얼마 후, IAEA는 대만에 대한 정례검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 500여그램의 플로토늄이 사라진 것을 발견한다. 대만의 여러가지 행위는 미국의 인내심을 상실하게 만든다.

장경국은 미국을 다독이기 위해, 먼저 미국주중대사를 만나서, 다시 한번 대만은 핵무기를 발전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다. 외부의 의심을 풀기 위하여, 장경국은 현연료재처리기술연구를 중단하도록 명한다. 그리고 미국에서 인원을 대만에 보내 상주시며 모든 핵시설을 시찰할 수있도록 할 것을 건의한다.

비록 장경국이 재삼 핵무기를 발전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미국측은 대만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그리고 대만은 여전히 암중으로 각국에서 핵기술을 구매했다. 1977년, 미국측은 대만이 여전히 네덜란드와 접촉하여 우라늄과 플로토늄 제련기술을 취득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미국은 즉시 사람을 대만으로 보내 모든 핵시설을 시찰한다. 그리고 대만측인원에게 비밀리에 핵무기를 연구개발하는지 질문하고, 대만에 중단할 것을 압박한다.

미국은 재삼 대만에 핵무기연구개발을 하지 말 것을 경고한다. 그러나, 대만이 비밀리에 연구개발할 결심을 포기시키지는 못한 것같다. 1977년, IAEA는 다시 대만에서 정기검사를 한다. 전문가는 핵반응로에 손을 쓴 것을 발견하고, 즉시 미국에 통보한다.

미국은 더 이상 참지 못한다. 엄정하게 대만에 4가지를 요구한다. 거기에는 모든 핵시설을 민생을 위해서만 써야 하고, 중수반응로는 반드시 폐쇄해야 하며, 플로토늄금속은 미국에 넘겨주고, 대만의 모든 핵에너지발전은 사전에 미국전문가와 소통해야한다는 등이다. 대만이 명확하게 집행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미국은 장경국에 4가지 요구에 서면으로 동의할 것을 요구하고, 결국 장경국도 동의한다.

1979년 미국은 중국과 정식으로 수교하고, 대만이 비밀리에 계속하여 핵무기를 연구개발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미국은 마음을 놓지 못했고, 대만의 핵에너지발전을 밀접하게 주목한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의 계속되는 압박에 직면하여 대만은 핵무기개발을 포기하지 않았다. 1988년, 중국과학연구원 장헌의(張憲義) 상교(上校, 우리나라의 대령에 해당함)가 미국으로 망명한다. 그리고 전세계에 대만의 핵무기연구개발의 비밀을 폭로했다. 그리하여 미국은 깜짝 놀란다. 대만에 다시 한번 핵무기를 절대로 개발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이번에는 대만도 약속을 지켰다.

결론: 대만의 생각

대만의 핵무기비사를 전체적으로 되돌아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대만이 핵무기를 연구개발한 것은 자신의 국가안전우려에 대한 반응이었따. 첫째는 중국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어서 전략적으로 우세를 점하고 있었고, 둘째는 미국과 중국의 관계개선으로 대만공동방어에 대한 결심이 약화될 수 있었다. 여러가지 대만에 불리한 요소가 중첩되면서, 대만은 동맹국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하여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했던 것이다.

아쉽게도 대만의 관련자료는 여전히 기밀해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대만의 시각은 엿볼 수가 없다. 대만이 기밀을 해제하여 이 시기 역사를 보완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