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신우(李新宇)
1900년 여름, 북경에서는 많은 일이 일어난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연히 일어난 일들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를 통해 드러난 것은 왕왕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가장 주목을 끌었던 일은 의화단으로 인해 일어난 일련의 사건이다.
권민(拳民)들이 교당(敎堂)을 불태우고, 선교사를 죽이고, 교민(敎民, 신도)을 죽여 열강으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받는다. 그들은 대청국에 보호를 요구했고, 조정은 거절하지 못했다. 그러나 효과는 없었다. 그리고 사정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그리하여, 열강은 대청제국이 외국교민을 보호할 능력이 없다면, 우리가 파병하여 보호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하게 된다. 외국병사들이 오고 또한 북경으로 진입을 요구한다면, 그것이 소수라 할지라도 결코 범상한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누가 대청국을 위해 외적을 막아낼 힘이 있을까? 일부 왕공대신들은 의화단을 눈여겨보게 된다. 의화단이 북경으로 들어오면서 의화단운동은 사상유례없이 거대하게 번져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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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화한 상업가에 큰 화재가 발생했고, 많은 사람들이 핏물 속에 쓰러졌다.
한림원(翰林院) 시강학사(侍講學士) 운육(惲毓)은 그가 쓴 <숭릉전신록(崇陵傳信錄)>에서 이렇게 썼다. 권민은 우안문(右安門) 밖에서 교민의 주택을 불질렀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조리 죽였으며, 이어 순치문(順治門) 안의 교당을 불질렀다.....전문(前門) 바깥의 상가는 경사(京師)에서 가장 번화한 곳인데, 의화단이 불을 질러 4천여채가 불타버렸다. 불길은 성벌(城閥)까지 번지고 3일동안 꺼지지 않았다."
중방씨(仲芳氏)는 <경자기사(庚子記事)>에서 이렇게 썼다: "의화단은 순치문대가의 야소당(耶酥堂)을 불태우고, 또 동화당포(同和當鋪) 봉교지방(奉敎之房)을 불태우고, 다시 순치문천주당을 불태우고, 병원 두 곳을 불태웠다. 사방의 군락 약 300여칸도 모두 모조리 불탔다. 불타죽은 교민이 부지기수이다. 그리고 서성근전마장(西城根拴馬莊), 유방후통(油房胡同), 등롱후통(燈籠胡同), 송수후통(松樹胡同)의 교민이 거주하는 방 수백간을 불태우고, 남녀교민을 무수히 칼로 베어 죽었다."
이는 대책란(大柵欄)이 불에 탄 광경이다: "불길이 다시 크게 일어났고, 불꽃과 연기가 해를 가려, 누런 색이 된다. 대책란에는 노덕기약점방(老德記藥店房)이 있었는데, 서양인이 연 곳이었다. 권비가 가서 그곳을 불태웠다. 서남풍이 크게 불어, 4곳으로 번져가 불이 붙는다. 동쪽으로는 전문대가(前門大街)까지, 서쪽으로는 매시남하연(煤市南河沿)까지, 다시 강을 넘어 월장양하포항(月墻兩荷包巷)에 이른다.정양문(正陽門)의 성루(城樓)에도 불이 옮겨붙었다. 그날, 모두 점포 4천여곳이상이 불에 탔다. 다음 날까지도 불은 꺼지지 않았다."(<서순회란시말기(西巡回鑾始末記)>)
일반군중은 습관적으로 우두머리가 말하는대로 호응하는데 익숙하기도 했지만, 더더구나 이익의 유혹을 거부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차부소공(車夫小工)들도 더 이상 힘은 들면서 별로 돈도 벌지 못하는 본업을 버리고, 속속 의화단에 가담한다. 하릴없는 무뢰한, 깡패들도 적극적인 의화단분자가 된다. "평소에 사적인 원한이 있으면 바로 이때 교민이라고 지목했고, 그러면 일가족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죽은 자가 수십만명에 이르렀다." "사람을 죽일 때 칼과 창을 모두 썼고, 팔다리를 잘라냈다. 피해를 입은 집안은 한달이 되지 않은 영아까지도 역시 죽임을 당했다."
당시 사람들이 기록으로 남긴 대량의 자료는 더 이상 인용할 필요도 없다. 작가 임어당(林語堂)의 <경화연운(京華煙雲)>의 광경은 상상이 아니다. 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그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대모자(大毛子)', '이모자(二毛子)', '삼모자(三毛子)'를 찾았고, 찾으면 모조리 죽여버렸다. '대모자'는 서양인을 가리키고, '이모자', '삼모자'는 신도이거나 양행(洋行)에서 일하거나, 영어를 말할 줄 아는 중국인을 가리켰다. 그들은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교당을 불태우고, 서양집을 불지르고, 서양거울, 서양우산, 서양시계, 서양그림을 파괴했다. 중국인을 죽이는 것이 서양인을 죽이는 것보다 많았다. 그들이 중국인이 '이모자'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혐의가 있는 사람에게 길거리에서 의화단의 신단 앞에 꿇어앉아 그들의 신을 향해 황표(黃表) 한장을 불태우게 했다. 사람이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재가 위로 날아가는지 아래로 떨어지는지로 정했다. 신당은 큰길을 향하고, 해가 떨어지는 방향을 향했다. 의화단을 믿는다고 표시하려면 향을 사를 때 제천대성(齊天大聖) 손오공(孫悟空)에게 절을 해야 했다....."
민중들이 북경으로 들어와 살인방화를 저지르는 것을 역대통치자들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크게 달랐다. 관병이 금지시키지 않았고, 진압하지도 않았다.
금지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지지했다. 자세히 보면 금방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관청이 뒤에서 받쳐주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과감하게 일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이다. 방화, 살인, 약탈하는 사람들 중에는 기실 관병도 적지 않았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기반가(棋盤街) 동곽(東廓)부터, 동교민항(東交民巷), 동성근(東城根), 어하교(御河橋), 동단패루(東單牌樓), 왕부정(王府井)일대의 관민주택(官民住宅)과 포호화산(鋪戶貨産)은 모두 무위각군(武衛各軍)이 총을 쏘고 불질렀다....(중방씨 <경자기사>). 이곳을 불지른 것은 놀랍게도 대청제국의 무위군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동복상(董福祥)의 감군(甘軍)에 있던 병사들 중에서 만주족 장교사병은 다수가 의화단에 가담했다. 군대가 군중조직을 지지하여, 함께 자신의 국가내에서 살인방화약탈을 벌인 것이다. 이는 중국역사상 정말 최초의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살인방화약탈의 뒤를 받쳐준 것은 군대와 관료들만이 아니었다. 제국의 왕공귀족, 재의(載漪), 재란(載瀾), 재렴(載濂), 재훈(載勳)....등이 있었다. 일군의 "재"자돌림의 인물은 모두 황족이고, 진정한 국가의 주인이다.
기실, 만일 눈길을 큰 불이 타오르고 피비린내나는 살인현장에서 사건당사자의 종적을 추적해보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들중 많은 사람은 바로 단왕부(端王府), 장왕부(莊王府)에서 나왔다. 그들은 북경으로 들어온 후, 단왕부와 장왕부로 가서 신고하고, 상을 받았다. 그후에 길거리로 나가 행동에 나선 것이다.
서태후도 입장을 밝힌다. 조서를 내려 의화단을 "의민(義民)"이라고 칭하고, 양만담(兩萬擔)의 면(麵), 십만냥의 은자를 내린다. 이건 괴이한 일이 아닌가? 초고위층이 직접 일으키고 지휘하다니. 그리고 자신의 경성을 공격하고, 부수고, 불태우고, 살인하고, 약탈하게 하다니, 이는 실로 "봉지조반(奉旨造反)", 최고위층을 지시를 받아 일으킨 반란이 아닌가.
"봉지반란"이므로 공격대상은 정해져 있었다. 한무더기의 점포가 불에 탔는데, 왜냐하면 거기에 "양포(洋布)", "양약(洋藥)" 혹은 "양화(洋貨)"를 파는 가게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 무리의 중국민중이 피살되었는데, 그들은 기독교, 천주교를 믿었거나, 혹은 집안에 시계, 연필, 성냥등 서양인이 만든 물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중운동을 이끄는데 조정은 경험이 부족했다. 그리하여 통제불능상황이 발생하는 것은 피하기 어려웠다. 의화단은 교민의 주택을 불태우고 약탈할 뿐아니라, 점포를 불태우고 약탈할 뿐아니라, 한림원과 이부, 예부, 호부의 몇개 아문까지도 불태워버린다. 그리고 몇개의 왕부도 불태웠다. 심지어 그들을 지지하는 대학사(大學士) 서동(徐桐)의 저택까지 모조리 약탈한 후,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잘못 죽이는 일도 허다했다. 대청제국의 안휘제독 요대인은 청나라조정의 관복을 입고 길거리에 나섰다가, 권민들이 곳곳에서 서양인을 죽여라고 소리치는 것을 보았다. 이 제독대인은 상황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들에게 소리친다: "태평성대에 너희는 망언을 하지 말라!" 그리고 그들에게 경고한다. "너희가 귀자(鬼子)를 죽이려 하면 보기에 오히려 귀자에게 죽임을 당할 것같다." 권민들은 대노하여, 그가 분명히 '이모자'라고 여기고, 말에서 끌어내렸다. 제독대인은 자신은 '이모자'가 아니라고 변명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제국의 제독대인이 이들의 대도와 장창에 죽임을 당했다. 친구들과 부하들이 놀라서 달려와 시신을 부여잡고 통곡했다. 그러자, 권민들은 이들도 '이모자'라고 여기고 모조리 죽여버린다.
가장 심각할 때는 심지어 황궁내에도 도처에 의화단이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오영(吳永)의 <경자서수총담(庚子西狩叢談)>에는 서태후의 당시 상황에 대한 약간의 묘사가 들어 있다: "기세도 크고, 사람수도 많다. 궁내궁외에 분분하며, 살펴보니 모두 머리에 홍포(紅布)를 둘러매고 있다. 들어오는 자는 들어오고, 나가는 자는 나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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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화단의 흥기와 서양인의 항의 및 파병하여 북경으로 들어오겠다는 요구에 직면하여, 조정은 양파로 의견이 나뉜다:
일파는 군기대신 왕문소(王文韶), 호부상서 입산(立山), 병부상서 서용의(徐用儀), 이부시랑 허경징(許景澄), 내각학사 연원(聯元), 태상시경 원창(元昶)등을 대표로 하며, 의화단을 진압하고, 이를 통해 서양인이 병력을 파견하여 북경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일부 중요한 지방 봉강대리(封疆大吏)의 의견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양광총독 이홍장(李鴻章), 호광총독 장지동(張之洞), 양강총독 유곤일(劉坤一), 산동순무 원세개(袁世凱)등이 모두 이 주장에 찬동했다. 동시에 광서제(光緖帝)도 이 주장을 지지했다.
다른 일파는 단왕 재의, 장왕 재훈, 보국공 재란, 대학사 서동, 협판대학사 강의(剛毅)등을 대표로 하며, 의화단을 초무(招撫)하고, 의화단을 이용하여 서양인을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중 일부는 군중의 역량을 크게 믿었고, 의화단은 '신의 도움(神助)'을 받고 있으며, '도창불입(刀槍不入)'한다고 믿었다.
6월 16일부터, 연속 4일간 조정에서는 어전회의가 거행된다. 회의의 의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의화단을 토벌할것인지(剿), 아니면 거둘 것인지(撫); 다른 하나는 열강과 전쟁을 벌일 것인지, 협상을 할 것인지. 두 개의 의제는 실제로 하나였따. 의화단을 토벌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열강에 대하여 주화파(主和派)이고, 의화단을 거두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당연히 열강에 대하여 주전파(主戰派)였다.
회의가 시작될 때, 서태후는 마음을 정하지 못한 것같았다. 전통적인 전제통치자에 있어서, 민주적인 모습을 연출하기 위하여 형식적으로 회의를 열 필요도 없었다. 일단 회의를 열게 되면 정말 상의해야할 일이 있는 것이다. 최후의 의사결정은 당연히 최고통치자에게 있다. 다만 최고통치자도 자문이 필요하고, 신하들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있다.
제1차회의에서, 황제가 아주 활발했다. 무술정변이후 그는 권력을 잃었고, 쉽게 발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번 회의에서 그는 많은 말을 했다. 아마도 이번 일을 그가 담당하고 싶었던 것같다. 그래서 발언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허경징에게 묻는다: "국가의 운명과 안위가 이번 결정에 달렸다....너는 여러 해동안 외교를 담당해왔으니 서양의 일을 잘 알 것이다. 마땅히 대세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제국이 각국과 전쟁을 할 수 있겠는지, 너는 감추는 것없이 솔직하게 얘기하라." 허경징이 대답한다: "시비득실을 불문하고 한나라의 힘으로 여러 나라를 모두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허경징의 대답에 광서제는 크게 찬동했다고 한다. 그 이후의 토론에서, 황제가 크게 주장한 것은 바로 "동시에 여러 나라와 전쟁을 벌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청일전쟁의 교훈을 잊지 말라고 얘기한다. "갑오일전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했다. 하물며 여러 나라들은 강하기가 일본의 열배이다. 모두 합쳐서 우리를 공격한다면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황제의 태도는 여러 조정신하들의 지지를 받았다. 군기대신 왕문소는 황상의 영명함에 그 자리에서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땅바닥에 대면서 "황상의 생각이 거기에 미치다니, 나라의 복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서태후는 자신의 태도를 이미 표명했다. 원창의 일기를 보면 이렇게 기재되어 있다: 이날의 회의에서 그는 "난민(亂民)을 처리하는 것보다 급한 일은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즉 당장 시급한 일은 의화단을 토벌하는 것이고, 그 후에 외국인이 병력을 북경으로 쳐들어오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이에 대하여 서태후는 이렇게 말한다: "현재 민심이 이미 변했다. 민심에 순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너의 말은 옳지 않다."
제2차회의가 시작되었다. 황제와 주화파대신이 여전히 주인공이었다. 의화단에 대한 "민심가용(民心可用)"주장에 대해 황제는이렇게 지적한다: 민심으로 외국의 침략을 막겠다는 것은 원래 헛소리이다. 하물며 난민은 오합지중이고, 민심을 대표하지도 못한다. 그런데 어찌 그들로 하여금 적과 혈육상박(血肉相搏)하기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전쟁을 하자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국이 쇠퇴하여 병력이 상대할만하지 못한데, 난민을 이용하여 이길 것을 기대하다니, 온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강유위(康有爲)는 해외에 있었고, 계속하여 광서제가 인애영명지주(仁愛英明之主)라고 선전하고 다녔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증거는 거의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무술변법의 결과는 광서제도 강유위와 마찬가지로 영명하지 못하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화단의 난때 연속 4일간의 어전회의는 광서제가 확실히 깨어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준다. 아마도 시간이 흘러 이립의 나이가 된 황제는 이미 성숙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황제의 주장에 주화파대신들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기뻐하기는 아직 일렀다. 이때 서태후는 열강의 조회(照會, 공문)를 보고 있었다. 그 중 하나의 내용은 "태후귀정(太后歸政, 태후는 권력을 황제에게 돌려주라는 의미임)"이었따. 이 조회는 재의등이 16일에 위조한 것이고, 강소양도(江蘇糧道) 나가걸(羅嘉傑)의 아들이 한밤중에 영록(榮祿)에게 전달하고, 17일 아침일찍, 영록이 이를 서태후에게 전했다. 서태후는 보자마자 대노한다: "저들이 어찌 나의 집안일에 간섭한단 말이냐. 이걸 참으면 뭘 또 참을 수 있겠는가. 외국인의 무례가 이 정도에 이르렀으니 내가 맹세컨데 반드시 갚아주겠다."
이 거짓 조회가 어전회의의 국면을 완전히 뒤바꾼다. 그리고 태후와 황제의 갈등도 격화된다. 재의 등의 책략은 성공을 거둔다.
또한 이날, 조정은 양강총독 유곤일, 호광총독 장지동등의 전보를 받는다. 전보는 그들의 주장을 표명했다: 의화단에 대하여는 토벌을, 열강에 대하여는 협상을. 장지동은 이렇게 경고했다: 의화단에 대하여 "만일 망설이고 속히 토벌하지 않다가, 각국의 병력이 도착하면, 월조대포(越俎代庖)하는 것이니 화가 눈앞에 닥칠 것입니다." 만일 대외선전포고하게 되면 결과는 차마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예로부터 사술(邪術)로 적을 막ㅇ르 수는 없었으며, 난민(亂民)이 나라를 지킨 적도 없습니다. 외국군대가 깊이 들어와서 각성을 횡행하면,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날 것이고, 대국이 엉망진창이 될 것이니, 그때가 되어 후회해도 늦을 것입니다...."
지방독무의 반대로 결의는 형성되지 못했다. 그래서 18일에 계속하여 회의를 진행한다. 태후로부터 비판과 반박을 받고, 재의등에게 모욕을 당한 후, 황제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주전파가 아주 활발해진다. 선전포고하자는 주장이 높아갔다. 왕문소, 연원등은 계속하여 의화단을 초무하는데 반대했다. 서태후는 탁자를 내려치면서 말했다: 그 말은 이제 더 이상 듣기 싫다. 그리고 말했다. 능력이 있으년 너희가 외국병사들에게 북경으로 쳐들어와보라고 해라. 태후가 이번 회의를 소집한 목적은 선전포고의 결정을 통과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회의의 결과는 그다지 바람직스럽지 않았다. 주전파의 목소리가 높기는 했지만, 주화파도 여전히 고집을 꺽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왕문소등에게 외국공사관으로 가서 교섭을 하여 외국군대의 북경진입을 저지하도록 한다. 이 방법은 아주 고명했다. 만일 교섭에 성공하면 일은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이다. 만일 교섭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왕문소등은 계속하여 선전포고에 반대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광서제는 여전히 수수방관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영록에게 말한다: "우리 군대는 믿을만하지 못하니, 일에 신중해야 한다. 다행히 병권이 모두 너의 손에 있으니." 그는 영록이 입장을 지켜서 중요한 순간에 군대를 통제하여 전쟁을 가볍게 개시하지 않도록 하기를 희망했다.
6월 19일 제4차회의가 소집된다. 서태후는 더 이상 관리들에게 토론할 기회를 주지 않고, 대외선전포고의 결정을 내린다. 그녀는 자신의 분노를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귀정(歸政)의 일은 조정이 알아서 결정할 것이니, 외국에서 간섭할 일이 아니다...현재 이미 양인과는 갈라서기로 결정했고, 더 이상 만회의 여지는 없다."
서태후는 허경징에게 명하여 각국사관에 조회를 보내게 한다. 그리고 사관인원으로 하여금 24시간내에 북경을 떠나도록 명하고, 정부에서 병력을 보내 천진까지 호송하겠다고 한다.
이 결정은 광서제와 주화파관리들을 경악하게 만든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황제는 갑자기 얼굴색이 창백하여 재처럼 되었다. 그는 군신의 존엄도 내팽개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허경징의 손을 붙잡고 그에게 말한다: "천하의 수억생령이 도탄에 빠질 것이다. 너는 그 말을 해서는 안된다." 태후가 엄하게 질책한다: "황제는 손을 놓으시오. 일을 그르치지 마시고." 허경징은 여러 해동안 외국주재대사를 지냈고, 이 결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잘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 대신의 표현은 "황제의 옷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태후가 엄하게 소리친다: "허경징, 무례하구나!"
주화파는 실패했다. 서태후는 선전포고의 결정을 내렸다.
태후도 결과가 심각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선전포고를 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보기에, 서양인이 그녀에게 너무 심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사 대청천하를 망하게 할지언정 그녀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는 말했다: "오늘의 일은 여려 대신들이 모두 들었다. 나는 강산사직을 위하여, 부득이 선전포고한다.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만일 전쟁을 시작한 후, 강산사직을 지켜낼 수 없으면, 여러분들이 오늘 모두 여기에 있었으니, 나의 고심을 알 것이니, 잘못은 나 한 사람에 돌려서 황태후가 조종삼백년천하를 망쳤다고 말하지는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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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1일, 조정은 정식으로 "선전조서(宣戰詔書)"를 반포했다. 조서는 군기장경(軍機章京) 연문충(連文冲)이 썼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문장이 아주 좋다고 말했고, 연문충은 이로 인하여 명성을 얻는다. 기실 이 조서는 정말 한번 읽어볼 만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중국식의 정치모략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조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我朝二百數十年,深仁厚澤,凡遠人來中國者,列祖列宗,罔不待以懷柔。迨道光咸豐年閒,俯准彼等互市;並乞在我國傳教,朝廷以其勸人為善,勉允所請。初亦就我範圍,遵我約束,詎三十年來,恃我國仁厚,一意拊循,彼乃益肆梟張,欺淩我國家,侵佔我土地,蹂躪我民人,勒索我財物。朝廷稍加遷就,彼等負其凶橫,日甚一日,無所不至,小則欺壓平民,大則侮慢神聖。我國赤子,仇怨鬱結,人人慾得而甘心。此義勇焚燬教堂,屠殺教民所由來也。朝廷仍不肯開釁,如前保護者,恐傷吾人民耳。故一再降旨申禁,保衞使館,加恤教民,故前日有拳民教民皆吾赤子之諭,原為民教解釋夙嫌。朝廷柔服遠人,至矣,盡矣,乃彼等不知感激,反肆要挾,昨日公然有杜士蘭照會,令我退出大沽口礮臺,歸彼看管,否則以力襲取。危詞恫喝,意在肆其披猖,震動畿輔。平日交鄰之道,我未嘗失禮於彼,彼自稱教化之國,乃無禮橫行,專恃兵堅器利,自取決裂如此乎!朕臨御將三十年,待百姓如子孫,百姓亦戴朕如天帝;況慈聖中興宇宙,恩德所被,浹髓淪肌。祖宗憑依,神祇感格,人人忠憤,曠代所無。朕今涕泣以告先廟,慷慨以誓師徒,與其苟且圖存,貽羞萬古,孰若大張撻伐,一決雌雄?連日召見大小臣工,詢謀僉同。近畿及山東等省,義兵同日不期而集者,不下數十萬人,下至五尺童子,亦能執干戈以衞社稷。彼仗詐謀,我恃天理;彼憑悍力,我恃人心。無論我國忠信甲冑,禮義干櫓,人人敢死;即土地廣有二十餘省,人民多至四百餘兆,何難翦彼凶燄,張我國威,其有同仇敵愾,陷陣衝鋒,抑或尚義捐貲,助益餉項,朝廷不惜破格懋賞,奬勵忠勛;苟其自外生成,臨陣退縮,甘心從逆,竟作漢奸,朕即刻嚴誅,決無寬貸。爾普天臣庶,其各懷忠義之心,共洩神人之憤。朕實有厚望焉。欽此
(개략적으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음: 우리 대청왕조는 이백수십년동안 깊고 두터운 인덕으로 멀리서 중국으로 오는 자들에 대하여 역대조상들은 품어주었다. 도광, 함풍연간부터 그들에게 호시(互市)를 허용하고, 우리나라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싶다고 요청하여, 조정에서는 그들이 사람들에게 착하게 살라고 권하는 것이라 요청을 받아주었다. 처음에는 허용된 범위내에서 규칙을 따랐다. 그러나 삼십년동안 우리나라의 인후하고 다독거리는 것을 믿고 그들은 더욱 기고만장하여 우리나라를 업신여기고, 우리 토지를 침범하고, 우리 백성을 유린했으며, 우리 재물을 빼앗아갔다. 조정이 조금 관대하면 그들은 더욱 횡행했고, 날이갈수록 심해져서 그 흉악함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다. 적게는 평민을 괴롭히고, 크게는 신성을 모욕했다. 우리나라의 백성들은 원한이 쌓여서 사람들마다 이를 풀고자 했다. 이번에 의롭게 용기를 내어 교당을 불지르고, 교민을 도살한 것이 그런 유래때문이다. 조정이 그럼에도 피를 흘리지 않고, 나아가 보호한 것은 우리 인민이 다칠까 우려해서였다. 그리하여 여러번 성지를 내려 금지시키고, 공사관을 보위하고, 교민을 구휼해주었다. 그리하여 이전에 권민과 교민이 모두 우리 백성이라는 유지도 내린 것이다. 원래는 권민과 교민간의 숙원이 풀리기를 원한 것이다. 조정은 멀리서 온 사람을 보살피는데 최대한 노력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감격할 줄 모르고, 오히려 협박하며, 어제는 다시 공공연히 두사립(杜士立)의 조회를 보내, 우리에게 대고구포대(大沽口砲臺)에서 물러나, 그들이 관리하겠다고 말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힘으로 빼앗겠다고 했다. 겁주는 말로 협박하며 창궐하여 북경주변을 진동시켰다. 평상시에 이웃나라와 교류하는 이치에서 우리는 그들에게 예를 벗어난 적이 없는데 ,그들은 스스로 교화지국(敎化之國)이라고 하면서, 무례하게 횡행하고 있으며 병력이 강하고 무기가 날카로운 것을 믿고 이렇게까지 우리와 맞서려고 한단 말인가. 짐이 다스린지 근 삼십년동안 백성을 자손처럼 대하고, 백성들도 짐을 천제(天帝)처럼 대했다. 하물며 자성(慈聖)은 우주를 중흥시키고, 은덕이 그들에게 디쳐 골수와 피부에 미쳤다. 조상이 뒤를 받쳐주고, 신이 감동하니, 사람들마다 충성심에 분기탱천하여, 이전에 보지 못한 정도이다. 짐은 오늘 눈물로 종묘에 고하며, 비분강개하여 군대를 일으키기로 맹세한다. 구차하게 삶을 도모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수치를 당하느니 크게 들고 일어나 자웅을 결할 것이다. 연속 며칠간 대소신료를 소집하여 만나고, 계책을 물어 결정했다. 경기지역 및 산동등의 성에 의병으로 약속도 없이 모인 사람이 수십만명이 넘는다. 오척동자까지 창과 방패를 들고 사직을 지킨다. 그들은 여전히 기만적인 계책을 쓰고 있으나, 우리는 천리를 믿는다. 그들은 힘을 내세우나 우리는 인심을 믿는다. 우리나라의 충신갑주(忠信甲胄)이건 예의간로(禮儀干櫓)이건 사람들마가 결사대가 되어 토지가 이십여성으로 넓고 인민이 사백여조에 이르니, 그들의 흉악함을 꺽고 나라의 위엄을 떨치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는가. 합심하여 적에 대한 원한을 품고, 적진으로 돌진하거나, 의롭게 물자를 기부하거나 군량을 제공하면 조정에서는 파격적으로 큰 상을 내리고 충성에 훈장을 내리는데 인색하지 않겠다. 전투에서 도망치거나, 적군을 따르거나, 매국노가 되면 짐이 즉각 엄하게 주살할 것이며,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 신료, 백성들이여, 모두 충의의 마음을 품고 신과 사람의 분노를 함께 풀기를 짐은 실로 깊이 바란다. 이상.)
확실히 정리에 부합하는 내용이고, 기세도 당당하다. 대국의 도량을 보여주면서, 신민의 애국열정을 끌어내고 있다. 그러나, 선전포고문으로서는 역사학자들이 대부분 이상한 점이 있다고 본다. 첫째, 선전포고라면 명확한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없다. 조서의 전문을 살펴보더라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피(彼)" "피등(彼等)"이다. 현재의 말로 하자면, "그" "그들"이다. 그들이 도대체 누구인가? 마치 대청제국이외의 전세계를 모두 적으로 삼은 것같다. 전세계에 선전포고하다지 서태후는 정말 기백이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상, 선전에 구체적인 대상이 있다. 거기에는 11개국가가 포함된다: 독일, 오스트리아, 벨기에, 스페인, 미국,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일본, 네덜란드, 러시아. 그러나, 조서에는 그 어느 국가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 조서는 여하한 형식으로든 외국정부에 송달되지 않았다.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지방관리는 적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 성경장군(盛京將軍) 증기(增祺)는 조정에 문의하게 된다: "이번에 중국과 외국의 전쟁에 도대체 어느 나라와 불화가 생긴 것입니까? 들리는 바도 상세하지 않습니다. 명확한 지시를 내려주시면 적에 상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하에서, 각국은 응전할수도 응전하지 않을 수도 있는 문제가 생긴다. 역사에 남겨진 사실은 이러하다. 팔국연합군이 북경으로 쳐들어올 때까지, 그 어느 나라도 응전을 선포하지 않았다. 기실, 조서는 그저 동원령에 불과하다. 전체 내용이 자신의 신하백성들에게 하는 말이다. 조정이 왜 선전포고하는지를 설명하고 공동으로 적을 막아내자고 호소하는 등등의 내용이다.
조서를 반포한 후, 의화단은 "의민(義民)"으로 칭해지고, 의민들이 의화단을 편성하게 된다. 그리고 단왕, 장왕과 강의가 통솔한다. 선전조서가 반포된 후, 대청제국과 열강각국은 전쟁상태에 접어들게 된다. 조정은 전국에 전쟁상태에 진입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남방의 이홍장은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 "이건 난명(亂命)이다. 월(粤. 광동)은 따르지 않겠다." 양강총독 유곤일, 호광총독 장지동도 상호 연락하여 공동으로 명을 거부하겠다고 결정하고, "동남호보(東南互保)"전략을 채택한다. 이 일은 작은 일이 아니다. 지방의 봉강대리가 성지를 거부하고 따르지 않는다니, 이건 제국의 통치가 이미 해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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