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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서태후)

서태후와 의화단 (2)

by 중은우시 2024. 10. 27.

글: 이신우(李新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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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전쟁사상, 이건 유일한 전쟁사례이다: 선전포고를 하고, 공사관을 공격목표로 삼는다.

상식적으로 보면, 이렇게 하는 전쟁은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왜냐하면 공사관은 자신의 영토내에 있기 때문에, 독안에 든 쥐나 다름없다. 마땅히 즉시 성공을 거두어야 한다. 당연히 전쟁이 여기에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진정한 전쟁이 뒤이어 발생하게 될 것이다. 다만 곤혹스럽게도, 6월 20일부터 공격을 시작했는데, 8월 14일 팔국연합군이 북경에 들어와 포위망을 풀 때까지, 50여일동안 대사관을 공격하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한 것이다.

원래, 각국 공사는 청나라조정의 통첩을 받고, 즉시 철수할 준비를 했다. 다만 6월 20일 독일공사가 피살되자, 각국 공사관은 깜짝 놀란다. 미리 예정된 도살을 집행한다고 여겼고, 그리하여 공사관을 떠나면 더욱 안전하지 못하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그들은 공사관에서 철수하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공사관내에서 구원병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다.

의화단이 공격하는 공사관지역에 불이 나다

벨기에,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3개국 공사관은 영국, 프랑스등 주요 공사관과 비교적 거리가 멀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외교인원은 자신의 공사관을 떠나, 영국공사관으로 간다. 이렇게 한 이유는 영국공사관의 면적이 가장 넓었고, 방도 가장 많았으며, 부지내에 아주 큰 화원도 있고, 우물도 5개나 있었기 때문이다.

국면이 악화되면서, 북경에 있던 외국인들도 속속 공사관으로 들어온다. 일부 선교사는 그들의 중국교민들까지 데리고 왔다. 금방 영국공사관ㅇ는 900여명이 모인다. 공사관에 원래 겨우 60명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게 되니 공사관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된다.마굿간에도 사람이 가득찬다. 다행히 외교인원이건, 상인이건, 선교사이건 피난올 때 대부분 약간의 물품을 가지고 왔다. 그리하여 영국공사관내의 150필의 노새, 한 무리의 양, 그리고 젖소 1마리가 있어서, 양식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원래 쌀과 밀가루도 충분히 쌓아두고 있었으며, 지하실에는 포도주가 상자째 보관되어 있었다. 외국인들은 이곳으로 도망쳐와서 비교적 안전하게 느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외국인이 대영제국은 절대로 그들의 대청제국에서 곤란한 지경에 처한 외교관을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공사관에 대한 공격은 6월 20일 오후부터 시작된다. 당시 사람 이희성(李希聖)의 <경자국변기(庚子國變記)>의 기록을 보면, 6월 20일 오후, "동복상(董福祥) 및 무위중군(武衛中軍)이 동교민항을 공격했고, 영록은 격문을 들고 감독했다. 여러 외교사신을 모조리 죽일 생각이었다. 쇠뇌를 쏘는 소리가 밤새도록 끊이지 않았다. 기와가 날아다니고, 성안에는 곡성이 들렸다. 권비가 도와주었다. 무보피발(巫步披髮)로 승옥이호(升屋而號)하는 자가 수만명이었고, 그 소리는 천지를 진동했다."

오랫동안 교과서에서의 서술은 모호했다. 그리하여 의화단이 공사관을 공격한 것처럼 알고 있었다. 원인은 분명하다. 청나라말기에 조정이 그렇게 얘기한 것이다. 책임을 모조리 "권비"에게 떠넘기고, 책임을 회피하며, 외국의 양해를 구했다. 나중에도 이렇게 얘기한 것은 공사관과 교당을 공격한 것은 '반제애국'의 혁명행동이기 때문이다. 자연히 서태후와 왕공대신들이 지휘한 청군에게 그런 영광을 넘겨줄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반드시 의화단이 반제애국했다고 말하고, 조정은 일찌감치 투항했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존중하면, 당시의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공사관을 공격한 것은 주로 관병이다. 동복상이 직접 지휘했고, 영록이 직접 독전했다. 의화단은 참가했지만, 제1선은 아니고, 주력도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역할을 했다. "무보피발, 승옥이호"한 것이다. 영국공사 클로드 맥스웰 맥도날드의 보고서, 푸트남 윌의 <경자사관피위기>, 루완텐(鹿完天)이 쓴 <경자북경사변기략>의 작자는 모두 포위당한 직접 경험자이다. 그들은 반복적으로 청군의 공격을 얘기했지, 의화단은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청군의 전과는 있었다. 공격개시후, 먼저 벨기에 공사관과 오스트리아 공사관을 점령한다. 다만 원인은 이 두 개의 공사관인원은 이미 철수했기 때문이다. 지키고 있던 사명은 거의 저항없이 물러났다. 이 두 개의 공사관을 점령한 후, 즉시 불을 질러버린다. 이어서 네덜란드 공사관과 이탈리아 공사관을 공격한다. 네덜란드 공사관은 사관구 바깥에 있었고, 이탈리이 공사관은 병력이 약했다. 그리하여 청군이 공격하자마자 그들은 포기한다.

그러나, 한 가지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다. 6월 20일부터 8월 14일까지 근 2개월동안 군민이 연합하여 공사관을 포위공격했는데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청군은 정말 이 정도로 엉터리였던 말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청군은 대포가 있었다. 만일 연이어 대포를 쏘았더라면 그다지 긴 시간을 들이지 않고 사관구를 평지로 만들어버렸을 것이다.

다만 사실은 증명한다. 외국인이 집중한 영국공사관은 파괴되지 않았다. 각국 공사관의 주요인원도 대부분 평안무사했다. 오직 네덜란드공사관의 벨만이 예외이다. 그는 계속하여 영국공사관의 지하실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공사관의 포위가 풀린 날, 연합군이 이미 도착했다고 듣고, 지하실을 나와 살펴보다가 유탄에 다리를 맞는다.

겉으로 보면, 공사관포위공격에 참가한 것은 동복상의 감군, 영록이 지휘하는 무위중군이다. 그외에 경친왕(慶親王) 혁광(弈劻)이 지휘하는 군대도 있었다. 동복상의 감군은 분명히 힘껏 싸웠다. 왜냐하면 그들의 정신상태는 의화단과 일치하기 때문이다.다만 다른 두 군대는 어떻게 싸웠는지 분명하게 말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영록의 부대는 일찌기 조정이 파견하여 공사관을 보호한 바 있다. 다만 조정이 파견하여 공사관을 공격하기도 했다.

다음으로 공격과정을 보자: 7월 13일, 청군은 숙왕부(肅王府)와 프랑스공사관을 공격했고, 거의 성공에 가까워졌다. 영국공사 맥도날드의 추산에 따르면, 만일 청군이 계속 공격하면 늦어도 7월 20일이면 두 곳을 완전히 점령당할 것이라고 보았다. 다만 7월 14일이후, 공세가 돌연 약화된다. 16일에는 공격을 중단한다. 8월 1일이 되어서 다시 포격을 재개한다. 다만 단지 포성만 울려 사람들을 겁주는 것이었고, 포탄은 대부분 소리를 내며 지나갔고, 목표지점에 명중한 경우는 드물었다. 8월 11일이 되어, 청군의 공세는 다시 맹렬해진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8월 14일 팔국연합군이 북경성으로 진입한다.

일부 기록을 보면, 영록의 수하는 일찌기 명을 받들어 포구(砲口)를 약간 높였다고 한다.

서태후를 따라 서쪽으로 도망갔던 오영의 <경자서수총담>에는 서태후의 이런 말이 실려 있다: "나는 원래 서양인과 싸울 생각은 없었다. 중간에 한동안, 서양인이 너무 심하게 나를 괴롭혀서 약간 화를 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을 막아내지는 못했지만, 시종 그들이 마음껏 행패를 부리도록 놔두지는 않았다. 화가 풀리자, 나는 마음을 바꿨고, 항상 여지를 남겨두었다. 내가 만일 진정 그들과 싸우려고 했으면, 설마 공사관 하나 점령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보기에 모든 것은 서태후의 손바닥안에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진짜 공격할 생각이 아니라면, 왜 선전포고를 한 것인가? 전쟁을 할 것같은 모습을 보였는가? 그리고 진짜 싸울 생각이 아니면, 이렇게 한 것은 도대체 무슨 의도인가> 그러나 실제의 결과는 팔국연합군이 북경으로 진입하고, 황실은 황급히 도망쳐야 했다.

옛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영리함으로는 깡패를 이지기 못하고, 총명함으로는 제왕을 이기지 못한다. 대청국에서 가장 총명한 사람은 당연히 서태후이다. 그러나 역사를 되돌아보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서태후는 스스로 총명하다고 여거 너무나 성실하지 못했다. 실로 총명하게 굴다가 오히려 망친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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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말기역사에서 대표적인 대사건이 몇개 있다. 청일전쟁이 그 하나이고, 백일유신이 그 하나이며, 의화단의난이 그 하나이다. 이들의 의미는 각각 다르다. 청일전쟁은 대청제국이 그저 종이호랑이라는 본질이 들통난 것이며, 백일유신은 중국정치현대화의 한차례 시험이었으며, 의화단의난은 조정이 민간역량을 이용하여 현대화에 저항하려는 한차례 시험이었다.

의화단의 난의 창끝이 향하는 것은 서양인과 교민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조정의 양무파와 유신파도 포함되었다. 유신파는 무술정변이후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광서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권민은 하층에서 왔고, 상층의 투쟁은 알지 못했다. 광서제와 유신파에 대하여도 그다지 큰 원한이 없었따. 다만 상층의 인도와 교육하에 유신파가 서양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이 일으킨 "살모자(殺毛子)"운동은 서로 다른 '모자'를 구분했다. 서양인은 대모자, 교민은 이모자, 강유위당은 삼모자이다. 상층의 인도하에, 그들은 유신을 적대시했고, "서법(西法)"과 "신정(新政)"을 미워하며, 서양인을 미워했다. 유신변법자도 미워했다. 그들은 "일롱(一龍), 이호(二虎), 삼백양(三百羊)"을 죽이자고 했는데, 일룡은 유신을 지지하는 광서제로, 광서제를 죽이자는 것은 그가 서양인에게 배워서 변법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소위 "이호"는 경친왕 혁광과 이홍장이다. 모두 양무파의 영수들이다. 그들의 죄행은 제국의 개혁개방과 현대화를 추진하였다는 것이다. "삼백양"은 300명의 관료인데, 의화단의 말에 따르면, 유신에 절대 반대하는 소수의 대신은 남겨둘 수 있고, 나머지 300명은 모두 죽여버려야 한다는 것이다.(<서순회란시말기>)

의화단운동시기는 조정의 보수파와 하층민중이 가장 밀접하게 결합된 시기이다. 재의, 재훈등은 완전히 권민들과 일체가 되었고, 또한 공동언어가 있었다. 송옥경(宋玉卿)이 편찬한 <무임록(戊壬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의화단은 교(敎)를 미워하여 광서제를 교주(敎主)로 지목하고, 무술변법은 외국을 배우려는 것이니 광서제의 큰 죄라고 여겼다."

역사의 진전으로 보면, 의화단운동의 주요특징은 양무운동과 유신운동에 대한 전면적인 반동이다. 이들은 유신운동에 반대할 뿐아니라, 양무운동도 반대한다. 권민은 원한을 철로, 윤선(輪船)과 전선(電線)에 집중한다. 당시 널리 유행한 현수막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남련의화단(男練義和團), 여련홍등조(女練紅燈照), 감도전선간(砍倒電線杆), 배료화차도(扒了火車道)"(남자는 의화단을 배우고, 여자는 홍등조를 익혀서, 전봇대를 쓰러뜨리고, 기차길을 뽑아버리자). 그들이 극력 파괴한 것은 양무운동이 얻은 성과들이었다. 그들중의 일부 사람은 심지어 위원(魏源)등의 사람까지 청산해야한다고 했다. 당시 한 사대부가 서동에게 보낸 글에서 의화단의 법술이 대단하고, 양인과 싸워서 백전백승한 것을 칭송한 다음 양무파가 현대공업문명으리 도입한 것을 성토했다: "위원은 오랑캐의 사정을 익히고, 오랑캐의 일을 알아서, 오랑캐의 뛰어난 기술을 배워 책을 써서, 천하를 잘못된 길로 이끈 것이 수십년이다. 그 잘못이 심히 크다. 오랑캐의 일을 익히고, 오랑캐의 사정을 알면 매판의 재목을 하나 추가하는 것이고, 매판이 되면 매국노가 하나 늘어나는 것이다...비린내나고 더러운 것은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 즉 전봇대, 철로, 상무, 광물등....모든 것은 서양인의 것이니, 마땅히 금지해야 한다. 이것이 천하를 올바르게 하는 일이다."

노신(魯迅)은 <장태염선생으로 인해 생각난 두 세 가지 일>이라는 글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청나라 광서제때, 일찌기 강유위가 법을 바꾸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그 반동으로 의화단이 거사했다."

진독수(陳獨秀)는 <극림덕비(克林德碑)>에서 이렇게 말했다: "경자사변(庚子事變)은 비록 서태후와 재의가 폐립의 일로 각국공사를 적대시하였으나, 그런 사람은 소수이고, 당시 정부에서는 신구지쟁(新舊之爭)으로 인하여, 권비를 종용하고 서양인을 적대시하는 자가 실로 열에 여덟아홉이었다....그들의 눈에 각국오랑캐는 중국성현의 강상예교를 모르니 전부 금수(禽獸)였다; 그런 금수를 배우자고 주장하거나 부화하는 중국인은 더욱 죽일 놈이 아닌가? 그래서 그들은 무술년에 금수에 부화한 신당을 모조리 죽여버리고도 통쾌해 하지 않았다. 경자년에 이르러, 국수(國粹)를 보존하자는 삼교합일(三敎合一)의 의화권이 나타나서 금수를 모조리 죽여버리자고 하니, 그들은 자연스럽게 통쾌해 했고, 근본적으로 해결되었다고 여기게 된다."

진독수는 또한 이런 말도 했다: "우리 국민이 현재 및 장래의 국치기념비를 없애려고 하면, 반드시 의화권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만일 의화권을 다시 발생시키려고 하면, 의화권을 만든 여러가지 원인을 모조리 소멸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현재 세상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공화, 과학, 무신론으로 가는 광명의 도로이고, 다른 하나는 독재, 미신, 신권으로 가는 암흑의 도로이다."

의화단에 대한 평가에 대하여, 백여년동안 여러차례 변화를 겪었다. 당시 조정의 왕공대신부터 일반민중까지, 모두 그들을 찬미하는 사람이 많았다. 신해혁명을 전후하여, 5.4시기까지, 일반적으로 부정되었다. 노신과 진독수가 말한 것처럼, 의화단을 역사퇴보의 표지로 보았다. 다만 1920년대중기이후, 시대정신이 역전된다. 사람들은 신해혁명의 이상에서 벗어나고, 5.4정신과 이별하며, 의화단의 혁명성을 발굴해낸다. 그 이후에는 '반제애국운동'이 되었을 뿐아니라, 태평천국과 함께 중국근대사상 두 차례의 혁명운동으로 승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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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화단운동은 제국황혼의 일대사건이다. 그의 내용에 관하여, 대량의 당시 기록이 남아 있고, 후인의 여러가지 평가가 남아 있다. 아마 더 이상 말이 필요없을 듯하다. 그러나, 의화단의 흥쇠운명, 그리고 그 역사에서의 역할은 실로 음미할 만하다. 그 과정에서 서태후는 회피할 수 없다. 만일 서태후가 없었더라면, 의화단은 역사상의 다른 같은 유형의 조직과 마찬가지로, 약간의 소란을 피우고 역사에 그다지 영향을 끼치지 못했을 것이다. 의화단은 아주 운이 좋았다. 그러나 또한 아주 불행했다. 최고통치자의 인정을 받았고, 잘나가던 시절이 있었따. 그러나 이로 인하여 더욱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러나 역사의 발전으로 보면, 그들의 각종 행위로 인하여 물극필반(物極必反)하여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게 된다.

일반교과서는 모두 의화단을 '반제애국운동'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대청제국의 조정, 특히 서태후를 대표로 하는 세력은 '매국투항'으로 본다. 이런 해석에 대하여, 사람들은 이런 곤혹을 느낄 수밖에 없다: 대청제국은 서태후등의 손아귀에 있었는가, 아니면 하층 권민의 손아귀에 있었는가? 만일 국가가 권민의 손아귀에 있지 않다면, 왜 황실, 대신, 부상, 선비들이 앞장서서 반제애국하지 않고, 하층의 권민이 반제애국의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는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은 중국역대왕조의 국가성격과 그 교체상황으로 인하여 하층민중의 애국열정은 크게 저평가된다. 이 점은 조정이 아주 잘 알고 있다. 아편전쟁부터 청일전쟁까지, 조정은 백성들이 애국하지 않는 것으로 고민했고, 분개하여 '한간(漢奸)'이라고 욕했다. 일부 지방관료의 상소문을 보면, 그들은 심지어 민중의 대다수를 '한간'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의화단 권민의 애국열정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나와 같은 민족이 아니다라는 생각, 그리고 이족에 대해 싫어하는 감정이 서양인을 배척하는 이유가 된다. 다만 이건 주요원인이 아니다. 중국백성은 외국을 미워하는 전통이 없다. 당나라때의 장안, 송나라때의 변경에는 모두 대량의 이족이 살고 있었다. 한인은 그들과 평화롭게 공존했다. 노신의 말에 따르면, 심지어 한인은 이족통치를 받아들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원인은 원나라와 청나라의 통치를 겪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화단은 왜 그렇게 강렬하게 서양인을 배척했을까?

주요원인을 살펴보면, 기실 관부(官府)의 교육과 인도이다.

이건 간단하지 않은 운용과정이다.일부 교안(敎案, 종교사건)의 자료를 보면, 관부와 사신(士紳)이 자주 주요작용을 한다. 교민이 전통예의를 지키지 않고, 영신새회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비교민들로 하여금 교민들에게 원한을 갖도록 가르친다. 그후 창끝을 선교사, 즉 서양인에게 돌린다. 이건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소위 민교충돌(民敎冲突, 일반백성과 교민의 충돌)을 대부분 관부와 사신이 이끈 결과이다.

의화단의 내력을 살펴보면, 그의 전신인 "의화권"이 반항한 대상은 서양인이 아니었다. 죽이려고 한 것도 교민이 아니었다. 변화의 관건적인 전환점은 초안(招安)을 받아들인 것이다. 1899년, 관직을 돈주고 산 한족출신 기인(旗人) 육현(毓賢)이 산동순무(山東巡撫)가 된다. 그는 초안을 통하여 '의화권'을 '의화단'으로 바꾼다. 그리하여, 이 조직은 아마도 원래 반항의 색채가 없었고, 일부사람들의 '반청복명(反淸復明)'의 옛날 생각을 '부청멸양(扶淸滅洋)'의 현실임무로 바꾸게 된다. 초안의 과정은 바로 권민들이 교육과 인도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의화단"은 탄생한 날로부터, 관부의 인도와 격려하에, 본국통치자에 대한 원한을 서양인에 대한 원한으로 바꾸게 된다.

의화단운동이 한창일 때, 많은 왕공대신은 직접 지휘자가 된다. 전후로 산동순무와 산서순무를 맡은 육현을 얘기했는데, 의화단의 두 명의 통수(統帥)는 한명이 감수(鑒帥) 이병형(李秉衡)이고 다른 한명이 자기 자신이다. 의화단이 북경으로 들어간 후, 지휘에 참여한 사람은 대신일 뿐아니라, 왕야들도 있었다. 단왕, 장왕은 모두 직접적으로 의화단의 배양, 교육과 영도에 참여한다. 대학사 서동도 의화단을 고무하고 격려했다.

이 모든 것의 배후는 서태후의 태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