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관도대전(官渡大戰)"에 대한 의문점

중은우시 2023. 6. 18. 00:01

글: 이경서(李慶西)

 

<삼국연의(三國演義)>에는 관도대전을 쓰면서, 관우(關羽)가 조조(曹操)의 백마(白馬)에서의 포위당한 상황을 풀어준 것부터 시작한다. 그 일은 제25회 후반부에 쓰여 있다. 원소(袁紹)는 대장 안량(顔良)을 보내 여양(黎陽)에서 황하를 건너게 했고, 안량은 황하남안의 백마에서 유연(劉延)을 증원하러 가던 조조의 군대와 부닥친다. 안량은 송헌(宋憲), 위속(魏續) 두 장수를 연이어 참하고, 무예가 뛰어난 서황(徐晃)마저 물리친다. 그리하여 조조군영의 여러 장수들은 전율하게 된다. 이때 정욱(程昱)이 나서서 추천하여 관우가 출전한다. 책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조조가 산 아래 안량이 배치한 진세를 가리키며, 기치가 선명하고 칼과 창이 빽빽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엄정하고 위엄이 있어, 관우에게 말하기를, '하북의 인마들은 이처럼 웅장하구나!' 그러자 관공이 말한다: '제가 보기에는 토계와견(土鷄瓦犬, 유명무실한 것을 가리킴)입니다.' 관우는 말을 몰아 산을 내려가, 바로 전진을 돌파한다. 하북군은 마치 파도가 치는 것처럼 벌어졌고, 갑작스런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안량을 한칼에 베어버린다. 만명의 군대속으로 뚫고 들어가사 대장의 수급을 벤 것이다. 이는 관우의 무예와 용맹함을 보여준다. 소설가의 예술적 과장은 정말 신필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삼국지(三國誌)>의 조조, 원소에 대한 부분에서도 이 장면이 언급된다. 단지 안량이 참해졌다는 것만 말했지, 누구의 손에 의해 참해졌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무제기(武帝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장료(張遼), 관우로 하여금 전등(前登)하게 해서 격파하고, 안량을 참했다." 관우는 하비성(下邳城)에서 포로로 잡힌 후 조조를 위해 싸우고 있었다. 여기에서 '전등'이라는 것은 선봉에서 싸운다는 뜻이다. 장료가 관우보다 앞에 나오는 것은 설마 그가 안량을 죽였기 때문일까? <원소전>에는 이 부분이 아주 간략하다: "태조(조조)가 연(유연)을 구하러 갔고, 안량과 싸워서 격파하고, 안량을 참한다." <후한서.원소전>에도 이렇게 적고 있다: "조조는 유연을 구하러 갔다가, 안량을 치고 그를 참한다." 다만 <촉서.관우전>에는 명확하게 관우의 공이라고 적어놓았다.

 

"원소는 대장 안량을 보내 동군태수 유연을 백마에서 공격한다. 조조는 장료와 관우를 보내 선봉에 서서 그를 치도록 한다. 관우는 안량의 휘개(麾蓋)를 보고 말을 달려 만군의 가운데에서 안량을 죽이고, 그의 수급을 베어서 돌아온다. 원소의 여러 장수들중에 관우를 막을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백마의 포위망을 풀리게 된다."

 

정말 관우가 했다는 것이다. 소설가의 말이 아니다. 안량을 참한 일은 다른 기,전에서는 생략하여 간략히 적을 수 있지만, <관우전>에서도 그렇게 가볍게 넘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단지 관우에게 나서서 싸워달라고 한 사람이 정욱은 아니다. 그때 정욱은 견성(鄄城)을 지키고 있었다(<위서>본전). 백마전투는 전체 관도대전의 서막이다. 그후 원소와 조조의 양군은 관도, 오소(烏巢), 창정(倉亭)의 몇 곳에서 서로 싸운다. 건안5년(200년) 이월에 전투를 시작하여, 건안7년 오월 원소가 패전하고 병사함으로써 끝난다. 2년이나 걸렸다. 이번 전투에 관한 역사기록은 주로 <삼국지.위서>의 무제기, 원소전 및 배송지(裴松之)의 주석에서 볼 수 있고, 또한 <후한서> 원소전 및 이현(李賢)의 주석에서 볼 수 있다. 그외에 조조휘하의 순욱(荀彧), 순유(荀攸), 가후(賈詡), 종요(鍾繇), 정욱, 곽가(郭嘉), 동소(董昭), 최염(崔琰), 왕찬(王粲), 조엄(趙儼)등의 여러 전에고 모두 언급되어 있다. 조조를 따라 전투에 참전한 조인(曹仁), 장료(張遼), 악진(樂進), 우금(于禁), 장합(張郃), 이전(李典), 허저(許褚)등 여러 장수의 전에서도 각각 기술이 있다.

 

진수(陳壽)가 <삼국지>를 쓸 때는 조위를 정통으로 삼았고, 조조를 '명주(明主)'로 보았다. 그래서 역사서술경향성이 상당히 명확하다. 반대로, <삼국연의>는 '존류억조(尊劉抑曹)'(유비를 높이고 조조를 억누르는 것)의 입장으로 정반대이다. 이런 입장차이로 인하여, 소설가의 글과 역사가의 서술 사이에는 많이 부딛치게 된다. 그리고 역사가가 기술하는 것이라고 하여 모두 정확한 것은 아니다. 설사 같은 <삼국지>내에서도 서로 어긋나는 기술이 나타난다. 만일 관도대전의 여러 기술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의문점이 여러개 드러난다.

 

첫째, 전투가 왜 일어나게 되었는가?

 

<무제기>에는 명확하게 적혀 있지 않다. <무제기> <원소전>에 따르면, 원소가 먼저 황하를 넘어 침범했다. 서로 영토를 빼앗기 위해 싸우는 것으로 적혀 있다. 마치 예전에 여포가 사방을 침략했던 것처럼. 다만, <촉서.선주전>에 따르면, 원소가 조조를 토벌하려 한 것은 유비(劉備)와 관련이 있는 것같다. 그리고 '광부한실(匡扶漢室, 한나라 황실을 도와 부흥시킨다)'과 관련이 있는 것같다. 먼저, 유비는 조조를 떠난 후, 서주자사(徐州刺史) 차주(車胄)를 죽이고, 하비, 소패(小沛)를 점거한다. 그리고 "손건(孫乾)을 원소에게 보내어 우호관계를 맺는다." <손건전>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선주는 조조를 배신하고, 손건을 보내어 원소와 동맹을 맺었다." <원소전>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유비가 자사 차주를 죽이고 군대를 이끌고 패에 주둔한다. 원소는 기병을 보내어 유비를 도왔다(紹遣騎佐之)" 이를 보면, 유비는 원소와 확실히 동맹관계임을 알 수 있다. 그후 유비는 조조에 격패당하고, 청주(靑州)를 거쳐 원소에 의탁한다. <선주전>에는 또한 이렇게 적고 있다: "청주를 지키고 있던 원담(袁譚)은 유비를 호송하여 평원(平原)으로 보낸다" "원소는 장수를 보내어 길에서 맞이하게 한다. 그 자신도 업에서 이백리를 나가 선주와 만난다." 이때 원소는 이미 기주(冀州), 유주(幽州), 병주(幷州), 청주(靑州)의 네개 주를 차지하고 있었다.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직접 이백리나 나가서 패전하고 낭패하게 도망쳐오는 유비를 맞이했다는 것은 실로 범상치 않아 보인다. 왜 이렇게 유비를 높은 격으로 대해주었을까?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같다. 원소, 유비가 동맹을 맺은 것은 배경이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한헌제(漢獻帝)의 의대조(衣帶詔)라든지? <선주전>에는 유비가 허창(許昌)에 있을 때, 동승(董承), 왕자복(王子服)등과 밀조(密詔)를 받아 조조를 주살하는 일을 도모했다고 한다. 그러나, <무제기>를 보면, 조조가 유비를 동쪽으로 정벌하러 가기 전에 돌연 한 마디가 들어가 있다: "5년 봄 정월, 동승등의 모의가 누설되어 모두 주살당한다." 이 문구는 앞뒤가 이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것이 바로 조조가 유비를 추살하려고 한 진정한 원인임을 토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유비가 허창을 떠난 것은 설마 조조를 주살하라는 밀조를 전달하는 천자의 사자(使者)로 간 것은 아니었을까?

 

더 구체적인 내용은 사서에 보이지 않는다. 옛사람들이 역사를 기전체(紀傳體)로 기술할 때, 주체를 기준으로 서술하는 소설기법에 비교적 가까웠다. 권말의 '평왈(評曰)' '찬왈(贊曰)'같은 평어(評語)를 제외하면 통상적으로 서술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사실을 기술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역사서술의 객관성을 표방한다. 그 경향성은 주로 무엇을 쓰고 무엇을 쓰지 않을지에서 잘 드러난다. <삼국지>는 의대조 건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상당히 간략하고 모호하게 적었다. <무제기>에는 아예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동승등의 모의가 누설되어"라는 말 한마디로 끝내버린다. 만일 이 일을 있는 그대로 적어버리게 되면, 천자가 조조를 주살하라는 밀조의 합법성을 부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역사가인 범엽(范曄)은 진수처럼 조조를 옹호하지 않았다. <후한서.헌제기>에는 분명하게 기술한다: "5년 봄 정월, 거기장군(車騎將軍) 동승, 편장군(偏將軍) 왕복(王服, 즉 왕자복), 월기교위(越騎校尉) 충집(种輯)은 밀조를 받아 조조를 주살하려 한다.' 같은 책 <원소전>에서는 비록 원소가 패혹무능(悖惑無能)하다고 크게 적어놓았지만, 그가 조조를 토벌하러 나선 것은 명분이 있다고 말한다. 원소가 천하에 포고한 격문을 전문 실었다. 그중에는 조조의 여러가지 악행을 들고 있는데, "역대 고금의 서적에 기록된 것을 다 살펴보더라도, 탐욕스럽고 잔학하고 포악하며 무도한 신하는 조조가 심하다." 이 격문은 대재자 진림(陳琳)이 썼다고 한다. 의정사엄(義正詞嚴)하며, 기세불범(氣勢不凡)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삼국지>의 여러 전에는 이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의대조에서 토조격문(討曹檄文)까지 보면, 모두 이건 역적을 토벌하는 전투라는 것을 말해준다. 단순히 여러 제후들간의 영토분쟁이 아니라. 

 

토조격문은 <삼국연의>에서 제22회에 나온다. 유비가 손건을 원소에게 보내어 '우호관계'를 맺은 후, 원소는 즉시 거병하여 조조를 토벌하러 나선다. 당시 쌍방은 여양(黎陽)에서 대치하면서 아직 전투를 개시하지는 않고 있었다. 제30회에 이르러, 조조, 원소가 관도에서 대진하며, 피차 진영앞으로 나가 서로를 질책한다. 원소는 의대조를 내세운다:

 

"조조는 채찍으로 원소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천자에게 너를 대장군으로 삼도록 추천했는데, 무슨 이유로 모반을 하는가?' 원소가 분노하여 말한다: '너는 명목상 한나라의 승상이라는 것을 가지고 실제로는 한적(漢賊)이며, 그 죄가 하늘에 닿는다. 왕망(王莽), 동탁(董卓)보다 심하다. 그런데 오히려 나에게 반란을 일으킨다고 모함하는가?' 조조가 말하기를, '나는 오늘 조서를 받들어 너를 토벌하겠다!' 원소가 말한다: '나는 의대조를 받들어 도적을 토벌하겠다.'"

 

'나는 의대조를 받들어 도적을 토벌하겠다(吾奉衣帶詔'討賊)에 대하여 모종강(毛宗崗)은 이런 비어(批語)를 남겼다: "이 일곱글자로 진림의 격문에 견줄 수 있겠다." 이는 의대조와 토조격문을 연결시킨 것으로 소설가가 원소를 대신하여 출병의 합법성을 강조했다. 마치 역사가를 대신하여 대의를 밝힌 것처럼.

 

그러나, 진수가 보기에 난신적자(亂臣賊子)는 원소였다. 그러나, <위서> 무제기, 원소전을 보면, 관도대전의 원인과 시비에 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그러면서, 왕찬, 환계(歡階)의 전에서는 그들의 입을 통해 조조가 원소와 맞서싸운 것이 정의롭다는 것을 얘기한다. 예를 들어, <왕찬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조조가 형주를 취한 후) 태조(조조)가 한수의 가에 술자리를 베풀었고, 왕찬은 술잔을 들고 경하하며 말했다: '원소가 하북에서 일어났을 때 무리가 많은 것에 의지하여 천하를 차지할 뜻을 품었다. 그러나 현명한 자를 좋아하지만 기용할 수 없었가. 그리하여 기사(奇士)들이 그를 떠났다....명공(明公, 여기서는 조조를 가리킴)께서 기주를 평정하는 날 수레에서 내려 병사들을 다독이고, 호걸들을 거두어 기용하여 천하를 횡행할 수 있었다; 이제 강한을 평정하고, 그 현명한 사람과 뛰어난 사람들을 자리에 앉히니, 해내의 인심이 돌아오고 명공의 다스림을 받고자 한다. 문무를 병용하여 영웅의 힘을 다하니, 이는 삼왕지거(三王之擧)이다."

 

그리고 <환개전>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태조가 원소와 관도에서 서로 맞서 있었을 때, 유표가 원소에 호응하고자 했다. 환개는 그 태수 장선(張羨)에게 말하기를, '무릇 거사를 하면서 정의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패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그래서 제환공은 여러 제후를 이끌고 주를 떠받들었으며, 진문공은 쫓겨난 숙대를 받아들였다. 지금 원씨가 이에 반하는데, 유표가 그에 응하는 것은 화를 당하는 길이다. 공께서 반드시 공을 세우고 정의를 받들고 화를 멀리하려면 그와 함께하지 않는 것이 좋다.' 장선이 말하기를,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환개가 말하기를, '조공(曹公)이 비록 약하나, 의리를 내세우고 일어났고, 조정을 위기에서 구했으며, 왕명을 받아 죄인을 토벌하니, 누가 감히 복속하지 않겠습니까.'"

 

패왕의 도로 조조를 칭찬하고, 역사적 합법성을 강조했다(태사공 사마천 이후의 사가들도 대다수 이런 기정사실의 정치적입장을 인정했다). 이처럼 전의 주인공의 입을 빌어 이야기하는 것은 기전체 사서의 통상적인 수법이다. 마치 소설의 인물이 서술자의 입장이 되어 말하는 것처럼.

 

둘째, 유비의 관도지전 참전여부.

 

유비가 관도지전에 참가했을까. 참가했다면 어떤 방식으로 했을까도 하나의 문제이다. 다만 관우가 조조를 위하여 첫출전에 공을 세운 것은 하나의 암시이다: 무대를 만든 사람이 유비인데, 그 무대를 부순 사람이 유비의 동생이다. 안량이 사망한 후, <위서.원소전>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원소는 황하를 건너, 연진(延津)의 남쪽에 진을 쳐서, 유비, 문추로 하여금 전투를 도발하게 했다." <무제기>의 기록도 거의 같다. 문추는 바로 이 전투에서 사망한다.(소설에 쓴 것처럼 관우에게 피살당한 것은 아니다). 다만, <촉서.선주전><후한서.원소전>에는 모두 유비가 연진 남안의 전투에 참가한 것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위서.순유전>의 한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태조가 백마(白馬)를 치고 돌아올 때, 물자를 '황하를 따라 서쪽으로(循河而西)' 보냈다. 원소가 황하를 건너 추격했고, 마침내 태조와 부닥친다. 여러 장수들은 모두 겁을 내며, 태조에게 돌아가서 군영을 지키자고 건의한다. 그러나, 순유가 말하기를, '지금 적을 붙잡을 때인데 왜 그냥간단 말인가?' 태조가 순유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 물자를 버려 적을 유인하니, 적이 앞다투어 가지려고 덤벼서 진영이 혼란스러워진다. 그때 보병,기병을 출격시켜 대파하고, 기병장수 문추를 참한다."

 

백마에서 '황하를 따라 서쪽으로' 가면 바로 연진이다. 여기에 유비가 출전하였다는 내용은 없다. 오히려 원소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왔다고 되어 있다. 연진전투는 소설에서 제26회에 나온다. 무제기와 원소전의 주장에 따라 문추와 유비가 전후로 쇄도했다. 단지 소설에서는 간우를 다시 한번 내보낸다. 다만, 유비가 멀리서 "한수정후관운장'의 깃발을 보기는 했지만, 부르기도 전에 조조의 군대에 공격을 받아 흩어지게 된다. 전체 관도전투기간동안,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촛점은 유비, 관우의 형제감정이고, 중간에 관우가 조조를 떠나며, 봉금괘인(封金掛印)하고, 과오관참육장(過五關斬六將)하는 장면을 끼워넣는다. 유지는 한편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관우는 전후로 안량, 문추를 참했다. 원소는 두 번이나 유비를 붙잡아 죄를 묻는다. 여기를 보면 유비가 원소의 밑에서 불쌍하게 지내는 것으로 그렸다. 모두 <삼국지>의 글이 애매모호해서 소설가에게 허구로 이야기를 만들 여지를 주었기 때문이다. 다만, 전후로 모두 유비, 관우가 서로 호응하여, 이 약은약현(若隱若現)의 메인스토리는 전쟁묘사를 더욱 지리멸렬하게 만들었다.

 

유비의 관도지전에서의 활동에 관하여, <선주전>에는 하나의 중요한 사항을 토로한다: 

 

"조공과 원소가 관도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여남(汝南)의 황건적 유벽(劉辟)등이 조조에 반기를 들고 원소에게 왔다. 원소는 선주(유비)에게 장병을 이끌고 유벽과 함께 허하(許下, 허창의 아래)를 경략하게 한다. 관우는 도망쳐 선주에게로 돌아왔다."

 

<무제기>에는 "여남에서 투항한 황건적 유벽등이 반란을 일으켜 원소에게 갔고, 허하를 경략했다. 원소는 유비를 보내 유벽을 돕게 한다. 조조는 조인(曹仁)을 보내 격파하게 했다. 유비는 도망쳤고, 유벽의 군영은 격파당한다." 유비가 병력을 이끌고 여남(汝南)으로 간 것은 적의 후방으로 가서 전략적인 활동을 벌인 것이다. 이 일은 확실히 연진에서 출전한 것보다 중요하다. 여남은 허창의 남쪽에 있고, 형주에 가깝다. 이번 원정로의 길이는 소설 속 관우의 천리주단기보다 멀다. <선주전>과 <관우전>은 모두 관우가 이때 유비에게 돌아왔다고 적고 있다.(<관우전>에는 원소군의 선주에게 갔다고 적었다). 이를 보면 관우도 함께 남하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진용은 웅장했을 것이다. 기괴한 점이라면, <관우전> <원소전> 및 기타 여러 전에 이 사건이 언급되어 있지 않은 점이다. <삼국지>의 여러 전에서 관도대전을 기술할 때 이쪽에는 적고 저쪽에는 적지 않는 식으로 글을 아낀 경우가 너무 많다. 마치 일부러 어떤 것을 감추려는 것처럼.

 

<삼국연의>의 서술은 약간 다르다. 실제로 유비는 전후로 두번 남하활동을 했다고 적었다. 위에서 인용한 <선주전>의 내용을 쓴 후에 이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조공이 조인을 보내 선주를 공격한다. 선주는 원소군으로 돌아간다. 속으로 원소를 떠날 생각을 하고, 원소에게 남쪽으로 가서 형주목 유표와 연락하겠다고 말한다. 원소는 선주에게 병력을 붙여 다시 여남으로 보낸다. 황건적 공도(龔都)등과 합하여 무리가 수천명이었다. 조공은 채양(蔡陽)을 보내 공격하게 했으나, 선주에게 피살당한다."

 

이 기술이 보여주는 것은 (1) 유비는 유벽과 회합하여 허창을 습격하려는 계획을 완성하지 못한다. 원인은 조인이 막았기 때문이다. (2) 유비는 여남에서 원소의 본부로 돌아온다. 이때까지는 유비와 원소는 동맹관계이다. (3) 그후 유비는 원소를 떠나려 한다. 형주의 유표와 연락하겠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본부의 병마를 이끌고 다시 여남으로 간다. 문제는 진수의 기술이 너무 간략하고 촉박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선주는 원소군으로 돌아간다. 속으로 원소를 떠날 생각을 하고, 원소에게 남쪽으로 가서 형주목 유표와 연락하겠다고 말한다"는 구절을 보면, 두 사건을 함께 모아서 적였다. 마치 이런 서술논리갔다: 유비가 돌아간 이유는 원소에게 자신이 유표와 연락하겠다고 설득하여 그것을 기회로 삼아 원소에게서 벗어나려는 것인 것처럼 보인다. 만일 유비가 당시 원소를 떠나려고 생각했다면, 굳이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었을까? 바로 형주로 넘어가면 되는데. 기실 거기에는 시간간격이 있었을 것이다.혹은 형세변화가 발생했거나, 혹은 원소는 중임을 감당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의식하게 되어서, 유비가 비로소 떠나려 했을 것이다.

 

유비가 떠난 후 원소는 배신감을 느꼈을까. 거기에 대하여는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유비가 처음 여남으로 갈 때, 원소에게 투항한 황건적의 잔당 유벽과 회합하여 함께 허창을 공격했다고 한다. <무제기> <선주전>에 모두 그렇게 쓰여 있다. 그러나 재미있는 점은 유벽이라는 사람은 수년전이 일찌감치 피살당했다는 것이다. 바로 <무제기> 건안원년의 사건중에 "여남, 영천의 황건적 하의(何儀), 유벽, 황소(黃邵), 하만(何曼)등이 각각 수만을 이끌고 처음에는 원술(袁術)에 투항했다가 다시 손견(孫堅)에 의탁했다. 이월, 태조는 군대를 진군시켜 이들을 토벌하여 격파한다. 유벽, 황소등을 참하고, 하의와 그 무리는 모두 투항했다." 유벽은 조조의 장수 우금(于禁)에게 피살되었다. <우금전>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황건적을 따르던 유벽, 황소등은 판량(版梁)에 주둔하고 있었다. 황소등이 야간에 태조의 군영을 기습했고, 우금이 휘하의 병사를 지휘하여 이들을 격파하고, 유벽, 황소등을 참한다. 그 무리는 모조리 투항했다." <삼국지>가 왜 이렇게 괴이하게 적었는가. 청나라때 조익이 <이십사사찰기>를 적을 때 이에 대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의 기(紀) 내에서 서로 모순되는 것이 이러하다." 기실, 그게 일부러 실수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사람을 살려내는 것에는 용도가 있다. 진수가 극력 조조의 입장에서 역사를 썼다는 것을 고려하면, '가짜사건'을 조작하는 것도 일종의 서술책략이 아니었을까?

 

셋째, 양군의 병력수에 관하여

 

관도대전은 왕구지역(王寇之役, 왕과 도적의 전투)일 뿐아니라, 역대이래로 이소승다(以少勝多, 소수의 군대로 다수의 군대를 이긴)의 유명한 전투사례로 꼽힌다. 그러나, 소위 '이소승다'의 선전에 핵심은 바로 교전쌍방의 인원수가 현저히 차이나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비례로 근접한다면, 소수로 승리한 것이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후세인들이 계속하여 언급할 정도까지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관도대전에서 <삼국지>에는 쌍방의 병력이 아주 많은 차이를 보여 깜짝 놀랄 정도이다. <무제기>에는 조조, 원소 양측의 인원수가 1대10이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당시 원소는 공손찬을 병합하고, 네개 주의 영토를 자기고 있어, 무리가 십여만에 이르렀고, 군대를 진격하여 허창을 공격했다"라든지, "당시 조공의 병력은 만명이 되지 않았고, 부상을 입은 자가 열에 두셋은 되었다."라든지, 그외에 <순욱전>에서는 조조가 "10분의 1의 무리로 땅을 나누어 수비하는데, 그 핵심관문을 막아서 들어올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제기>에서 서술하고 있는 쌍방의 진영배치는 병력차이가 큰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적혀 있다: "팔월, 원소는 군영을 약간 먼저 차린다. 모래언덕을 따라 주둔하니 동서 수십리이다. 공도 역시 군영을 나누어 상응하게 차렸다(分營與相當)"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만일 상응한 병력이 없다면 어떻게 '분영여상당'할 수 있겠는가? 진수는 조조의 군대가 용맹하여 1대10으로 싸웠다고 하면서, 다시 조조군이 대병력작전진세를 갖추었다고 적었다. 그래서 무제기 및 여러 전의 전쟁상태에 대한 묘사는 다수가 "상거(相拒)", "상지(相持)"라는 용어를 쓴다. 당연히 1대10과 같이 병력차이가 많이 난다면 다른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순욱전>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태조는 관도를 지키고, 원소가 포위했다".

 

<무제기> <원소전>에 따르면, 쌍방이 관도로 병력을 이동시킨 후 기본적으로 대치하는 진지전을 계속했다. <무제기>에는 "원소가 다시 관도로 들어온 후, 흙산을 쌓고  지하도를 만들었다. 조공도 역시 안에서 만들어 대응했다." 실제로 조조군은 원소군에게 포위되지 않았다. 원소는 그렇게 큰 병력우세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원소전의 기술은 비교적 상세하다:

 

"원소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기 위하여, 흙산을 쌓고, 군영으로 화살을 쏘았다. 군영에는 나무방패로 막았고, 모두 크게 두려워했다. 태조는 발석거로 원소의 누각을 공격하여 모두 격파했다. 원소의 무리는 그것을 벽력거라고 불렀다. 원소는 지하도를 만들어 태조의 군영을 습격하고자 한다. 태조는 안에 긴 참호를 파서 이를 막았다."

 

다시 <후한서.원소전>을 보면 관련내용은 거의 같다. <삼국연의> 제30회에서 묘사한 쌍방의 공방전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이런 공사를 해서 대치하는 것은 말을 타고 서로 싸우는 것과는 다르다. 쌍방이 오랫동안 대치할 뿐아니라, 어느 한측도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제기의 배송지(裴松之) 주석은 쌍방의 병력차이가 크다는 점에 대하여 강력하게 의문을 표시한다: 

 

"신 배송지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위무제(조조)가 처음 거병할 때, 이미 무리가 5천에 이릅니다. 그후 백전백승했고, 다친 사람은 열에 두셋입니다. 다만 일단 황건군을 격파하면, 투항한 병졸이 삼십여만인데, 거둔 사람의 숫자는 얼마인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비록 전투에서 손상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병사수가 적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무릇 군영을 차리고 서로 마주보며  대치하는 것은 직접 부딛쳐 결전을 벌이는 것과는 다릅니다. 본기에 이르기를 "원소의 무리는 십여만이고, 군영이 동서로 수십리"라고 하였는데, 위태조가 비록 임기응변이 강하다 하더라도 어찌 수천의 병사로 대항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치대로라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원소가 수십리에 군영을 차리고, 공이 '분영여상응'할 수 있었다면 병력이 그다지 적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 이유입니다. 원소가 만일 10배의 무리를 가지고 있었다면, 당연히 힘을 다하여 수비군을 포위했을 겁니다. 그리하여 수비군의 출입을 막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공은 서황을 보내어 운송수레를 기습하게 하고, 조공도 스스로 순우경등을 치러 갔다고 깃발을 날리며 되돌아왔는데 아무도 막지 않았습니다. 이는 분명 원소의 힘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며, 조조의 군대가 아주 적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둘째 이유입니다. 여러 책에서 말하기를 조조는 원소의 무리 8만을 갱살(坑殺)했다고 하고 또 어떤 책은 7만을 갱살했다고 하는데, 무릇 8만명이 흩어지면 8천명으로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원소의 8만무리가 가만히 앉아서 살륙을 당했다니 도대체 무슨 힘으로 그들을 제압한 것이란 말입니까. 그러니 조조의 군대가 아주 적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세번째 이유입니다. 기술자들은 적은 수로 승리하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고, 그것이 사실을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 <종요전>에 따르면, "공이 원소와 대치하고 있을 때, 종요는 사예(司隸)로서, 말 2천여필을 군대에 보냈다"고 되어 있는데, <본기>와 <세어>는 조조가 기병 6백여필이 있었다고 했는데, 도대체 종요가 보낸 말은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배송지의 주석에서의 반박은 아주 철저하다 하나하나가 모두 설득력이 있다. 조조군이 승리를 거둔 후 원소군 7,8만명을 갱살했다는 것만 보더라도(<헌제기거주>에는 7만이라고 되어 있고, <후한서.원소전>에는 8만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절대 1만명도 되지 않는 병사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조조가 1만의 병력으로 원소의 10만인마에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은 소설가가 보기에도 상리에 어긋났던 것같다. <삼국연의>에서 얘기하는 쌍방의 총병력은 비록 이 비율이지만, 인원을 모두 10배로 늘였다. 즉 조조군은 7만, 원소군은 70만이라고 한 것이다. 다만 관건은 소설에서 원소군은 모든 병력을 관도대전에 투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30회에는 원소군의 배치에 대하여 이렇게 적고 있다:

 

"원소는 군대를 옮겨 관도에 가까이 군영을 차린다. 심배(審配)가 말하기를 '지금 10만을 뽑아 관도를 지키게 할 수 있습니다. 조조의 군영 앞에 흙산을 쌓아, 병사들로 하여금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화살을 쏘게 하면....' 원소가 그의 말에 따랐다."

 

70만대군인데 왜 10만만 관도를 지키게 했을까? 나머지 60만은 어디로 갔을까? 소설에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다만, 소설가는 1대 10의 대치로는 진지전을 벌이게 할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조조군의 7만이 원소군의 10만을 상대한다면 말이 된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부득이 <삼국지>의 너무나 현격한 비율을 조정했던 것이다. 소설가가 역사를 얘기할 때는 현실감이 없어서는 안되지만, 사가(史家)가 이야기를 쓸 때는 그저 혁명낭만주의로 흘러가게 된다.

 

넷째, 승리의 관건이 양초(糧草)인가

 

조조가 관도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주로 원소군의 양초(糧草, 사람이 먹을 곡식과 말이 먹을 풀)를 끊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번은 서황을 보내어 운량수레를 기습했던 것이고(<무제기>에는 원소군의 운량수레가 '수천승'이었다고 한다), 다른 한번은 조조가 직접 5천명을 이끌고 양초를 보관하는 기지인 오소(烏巢)를 공격한 것이다. 뒤의 공격은 허유(許攸)의 계책이다. 허유는 원래 원소의 모사였는데, 뇌물을 탐하다가 처벌받게 되자 조조에게 투항한 것이다. 원소는 오소가 공격당하는 것을 알고 잘못된 결정을 내린다. 소수의 기병을 오소로 보내어 지원가고, 장합(張郃), 고람(高覽)등의 주력부대를 조조의 군영으로 보내 공격했다. 이는 대체로 '위위구조(圍魏救趙)'의 전법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장합등은 공격을 성공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순우경(淳于瓊)이 오소를 지키는데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자 조조에 투항해 버린다. 그리하여 원소의 부대가 궤멸하고, 원소는 병사를 버리고 원담(袁聃)을 데리고 도주했다.

 

이것은 소설 제30회 후반부의 이야기 대강이기도 하다. 소설은 세부적인 부분에 복선을 깔아서 읽기에 그다지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특히 마지막에 원소의 군대가 궤멸한 부분은 비교적 잘 처리했다. 배송지는 <위서.장합전>에 주석을 달아서 <무제기> <원소전>에 나타난 문제를 비판한다: "본전에서 장합등이 조조에 투항한 것은 대세가 이미 기울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무제기> <원소전>에서는 장합이 투항하여 원소군이 대패했다고 하였다. 피차 인과관계가 혼동되고 있다.

 

기실 어느 것이 원인이고 어느 것이 결과인지 너무 간략하고 대충이다. 비교해보면 소설의 내용이 어느 정도 수준이 있다. 조조에 투항한 장합, 고람이 원소의 군영으로 쳐들어가면서, 업군을 공격하고, 여양을 취하며, 원소군의 퇴로를 차단하겠다고 큰소리쳤으며, 다시 조조군이 8로에서 출격한다....그래서 원소군이 투지를 잃고 철저히 붕괴된다. 이런 내용을 추가해서 역사서의 서술에서 신뢰성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한 것이다.

 

양초가 승부를 결정했다는 것은 언뜻 보기에는 이치에 맞는 것같다. 그러나 그건 전혀 사실이라고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원소군은 소규모부대로 적진 깊숙히 쳐들어와 있던 것이 아니다. 그리고 십만대군의 양초를 오소 한 곳에만 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관도대전은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백마에서, 연진서남까지 이백여리에 걸쳐 있다. 여러 사서에서도 원소의 전쟁동원능력이 부족하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반대로, <위서.조엄전>에 따르면, "당시 원소는 병력을 일으켜 남쪽을 쳐들어갔다. 사신을 보내어 예주의 여러 군을 설득하고, 여러 군은 그의 명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허창이남의 예주의 여러 군들까지 원소에 호응했다. 가까운 하내, 동군일대에서 물자공급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때문에 십만대군이 어찌 졸지에 무너질 수 있을 것인가.

 

다시 <삼국지>와 <후한서>의 원소전을 보자. 모두 현지백성들이 다수 조조를 떠나 원소에게 왔다고 적고 있다. 하나는 "태조와 원소가 오래 대치했는데, 백성은 피폐하여 많은 사람이 배반하여 원소에게 갔다. 군대도 먹을 것이 부족했다". 다른 하나는 "백여일을 대치했는데, 하남인들이 피폐하고 곤궁해져서, 많은 경우 원소에 호응했다." 이것이 민심의 향배였다. 사가의 서술에서는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기실, 조조군도 양식이 부족했다. 상대방의 운량수레를 빼앗았지만, '모조리 불태웠다.' 원소군은 양초가 없어지니 바로 무너지고, 조조군은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면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건 너무 이상하다. 진수는 <가후전>에서 승리이유를 제시한다. 간단히 말해서 '파부침주(破釜沉舟)' 즉 결사전을 벌인 것이다.

 

"원소는 태조를 관도에서 포위했다. 태조는 식량이 거의 바닥났다. 가후에게 계책을 물었다. 가후가 말하기를 '공은 총명함에서도 원소를 이기고, 용맹함에서도 원소를 이기고, 용인술에서도 원소를 이기며, 기회를 잡아 결단하는데서도 원소를 이깁니다. 이 네가지를 다 이기면서도 반년이나 승리를 확정하지 못하는 것은 만전을 기하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기회를 잡아 결단을 내리시면 순식간에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겁니다.' 태조가 말하기를 '맞는 말이다.' 그리고 병력을 출동시켜, 원소의 삽십여리 군영을 둘러싸고 공격하여 격파했다. 원소군은 대패하여 궤멸하고, 하북이 평정되었다."

 

원래는 상대에게 포위당해 있었는데, 이번에 조조가 목숨을 걸고 싸움에 나서니 순식간에 오히려 역으로 포위할 수 있었다. 이런 서사는 최소한의 신뢰도도 부족하다. 가후가 조조에게 '네가지를 모두 이긴다'고 칭찬하면서, '기회를 잡아 결단하는 것에서도 원소를 이긴다'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도 반년이나 상대방을 이기지도 못한 것은 만전을 기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조조의 '기회를 잡아 결단하는 것'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역사서로서, 관도전투에서 유일하게 의문이 없는 점은 조조가 이기고 원소가 패했다는 것뿐이다. 그 시대에 남겨진 역사는 부분적으로 되어 있고 전체적이지 않다. 오히려 역사를 조작한 특징이 있다. 마치 사가에 있어서 그저 과정은 상상과 서술 혹은 모종의 필요에 따른 구조이고, 결과야말로 가장 본질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결과는 이미 나왔고, 성왕패구(成王敗寇), 이기면 왕이 되고 지면 도적이 되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