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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사상

"중(中)": 염석산(閻錫山)의 간명철학

by 중은우시 2024. 10. 9.

글: 시화(施化)

꼬박 100년전인 1924년 5월 21일,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중국시인 서지마(徐志摩)의 안내로 산서(山西) 태원독군부(太原督軍府)에서 당시 산서독군, 산서성장을 맡고 있던 염석산을 만난다. 이때 시인과 군벌간의 재미있는 대화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타고르: 염선생, 동방문화는 무엇입니까?

염석산: 동방문화는 바로 "중(中)" 한 글자입니다.

이 "중"자에 대하여 염석산은 자신의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중"을 생명력을 지닌 하나의 씨(種子)로 비유해서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생명력을 가지고, 스스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것이다. 우주간의 조화를 바로 이 씨가 장악하고 있다. 만일 만물의 씨를 뽑아낸다면, 지구는 메말라버리게 될 것이다.

무엇이 "중"인가? 염석산이 말하기를 "알맞은 것(洽到好處)"이다. "중"은 존재를 위함이고, 존재는 일체이며, 일체가 존재이다. "중"의 비밀을 알게 되면 만물과 교류하는 패스워드를 장악하는 것이다. 문제를 파악하는 것이건 일을 처리하는 것이건 좋은지 나쁜지를 묻지 말고, 틀린 것가운데 올바른 것을 찾지 말고, 그저 그런지 아닌지, 해야하는지 아닌지, 할 수 있는지 아닌지만 물으면 된다.

듣기에 약간 황당무계하지 않은가? 급할 것없다. 그저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세히 생각해보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염석산의 깨달음이 이치에 맞는 점이 있다는 것을. 아쉽게도 중국의 필리(筆吏)는 지금까지 성패를 가지고 영웅을 논해왔다. 염석산은 패배한 지방군벌이고, 그 어느 역사연구자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다행히 필자는 공리를 따지지 않고, 그저 호기심만 있다. 아래에서는 간단하게 개인이 염석산의 철학을 읽고 얻은 생각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서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한다.

"중"은 중용(中庸)의 원시적 본뜻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후인들은 불편불의(不偏不倚, 어느 한쪽에 치우치거나 기울어지지 않은 것)의 기장(騎墻, 담장에 걸터앉은 것)으로 오해받았다. <중용>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희노애락이 드러나지 않는 것을 '중'이라고 한다. 드러나더라도 모두 알맞으면 '화'라고 한다. 중이란 천하의 근본이고, 화라는 것은 천하의 도리이다. 중화를 이루게 되면, 천지가 제자리를 찾고, 만물이 자란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천지의 자연적인 천성, 우주의 본래상태이다. 천지간에 사는 사람이 일단 이런 조화로운 상태를 가지게 되면,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만물이 조화롭고 구애받지 않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사람은 천지와 일체로 되어, 자유자재로 살아가고 즐겁게 지낼 수 있다. 사람이 자체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염석산이 한 말대로라면,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를 따지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마음 속으로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 하는 것은 자연만물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인류 자신이 만들어낸 관념이다. 화산, 지진, 쓰나미, 홍수가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인류에게는 당연히 나쁜 일이다. 그러나 지구에게는 좋은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구속의 에너지가 배출될 수 없고, 나중에 모여서 한꺼번에 폭발하면 지구는 사라지게 될 것이고, 인류는 멸종될 것이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좋고 나쁘고, 맞고 틀리고의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하면, 어느 각도 어느 입장에 서서 판단해야 하고, 갈수록 극단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극좌 혹은 극우라고 얘기하는데, 기실 이건 모두 그에게 덧붙여진 것이다. 단지 '극'의 한쪽 끝과 '극'의 다른 한쪽 끝이다. 좌우는 서로 바뀔 수 있다. '중'은 자유롭다. 그저 실제에 맞추어, 해야할 일은 하고, 극단을 추구하지 않을 뿐이다.

이스라엘의 가자에 대한 점령이 미국대학생의 눈에는 나쁜 일이다. 전쟁은 그들이 교육받은 자유평등의 이념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수업거부를 하고 항의시위를 하는 것이다. 아쉽게도 여기에 또 다른 입장도 있다. 즉 이스라엘과 세계이 모든 반폭력민족의 입장이다. 만일 하마스를 없애지 않으면, 세계는 영원히 평안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럼 문제가 있다. 이스라엘, 하마스 충돌을 예로 들어 보자면, "중"은 어디에 있을까? 염석산은 말은 아주 간단하다: 그런지 아닌지, 해야하는지 아닌지, 할 수 있는지 아닌지. 하마스는 잔인한가? 그렇다. 나는 영상을 하나 본 적이 있는데, 하마스분자가 발가벗은 이스라엘 소녀에게 폭력을 가하는 내용이다. 장면이 너무나 잔혹하여 도저히 말로 옮길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들의 모든 무장을 해제시켜야 하는가? 일찌감치 그렇게 해야 했다. 그럼 할 수 있는가?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현재 군사력으로 외부인이 간섭만 하지 않으면, 완전히 해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갈등은 해소되고, 학생들은 돌아가서 씻고 자면 될 것이다.

당연히 사정의 배후에 있는 힘겨루기는 이렇게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항상 천하가 혼란해지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압도적 다수를 이루는 일반민중의 마음 속에 "중"자를 품게 된다면, 부추기지 말고, 극력지지하지 말아야 한다. 단지 이제 처음 세상에 나온 대학생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은 표현의 자유가 있다. 당연히 이 일을 무한히 격화시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군대를 동원하여 강제로 해산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미국판 6.4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고, 미국은 철저히 분열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태평양 건너편에 있는 또 하나의 대국에게는 아주 좋은 일이라 할 수 있다.

여기까지 쓰다보니, 반드시 염석산을 간략하게 소개해야겠다. 염석산(1883.10.8 - 1960. 5. 23), 자는 백천(百川), 백천(伯川), 한족이고 산서성 오대현(五臺縣) 사람이다. 1905년 도쿄에서 중국동맹회에 가입한다. 1909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다. 중화민국 북양정부 장군부 "동무상장군(同武上將軍)", 중화민국 국군(및 그 전신인 국민혁명군) 육군일급상장, 북양군벌 "진계(晋係)"의 우두머리이다. 일찌기 중화민국 행정원 원장, 국방부 부장 및 총통부 자정(資政)등의 직위를 맡았다. 염석산은 산서성을 관할했고, 1911년 신해혁명후에 건립한 후 여러번의 내전, 항일전쟁 및 국공내전을 거치면서도 여전히 산서성을 지켜냈다. 1949년 4월 태원전투가 끝난 후, 중국인민해방군에 의해 점령당할 때까지 전후로 38년간 산서성을 경영했다. 이는 여러 국군군벌중 최장기간기록이다.

염석산이 산서를 통치하는 기간동안 그는 촌정(村政)건설을 대거 추진했다. 1917년부터 1930년까지 10여년간, 산서성은 점차 전국에서 이름난 모범성이 된다. 촌정건설에서, 염석산은 특히 향촌교육을 중시하고, 병역, 납세, 교육을 국민의 3대의무로 규정한다.

교육에 관하여, 염석산은 이렇게 말한다: "국민교육은 의무적이고, 저급하다. 사회에 아무런 보수도 없다. 이 교육을 받은 자도 발전이 없어 사회에서 중시되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열국이 병립하고 있는 세계에서 이쪽 사람들이 저쪽 사람을 만나면 우열을 따지게 된다. 그때 다수인민의 지식으로 겨루지, 소수의 우수한 인재로 겨루지 않는다. 오늘날 중국은 4억의 사람이 있지만 다른 나라 2천만도 안되는 나라를 당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다수인이 지식이 없어,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당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건 대외적으로 말하는 것이고, 대내적으로 말하자면, 공화국가의 주체는 인민이다. 반드시 인민의 지식이 발달해야 좋은 정치를 운용할 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 정권은 반드시 다수의 인민에게서 소수인의 손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소수인에게 넘어가게 되면, 소수인이 운용하는 정치는 반드시 소수인의 이익을 위해 운용된다."

민국시대 교육가 도행지(陶行知)는 전후로 3차례에 걸쳐 산서로 가서 의무교육시행현황을 깊이있게 연구한 바 있다. 그는 이렇게 지적했다: "현재까지, 산서성의 소학교에 자금지원하는 제도는 가장 완비되어 있다. 그들의 방법은 이러하다: 도시에서는 점포와 건물의 소재지구의 등급에 따라 과세하고, 도시 소학교에 자금지원하는데 사용한다; 농촌에서는 토지의 질에 따라 과세하여 향촌소학에 자금을 지원한다." "현재 이 성은 이미 72%이상의 학령아동이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다. 그외에 또한 25세이하의 성인문맹은 성인업여보습학교에 다니게 하여 상용한자, 산술과 공민상식을 배우게 하고 있다." 도행지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중국에서 산서성외에 모두 의무교육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염석산은 산서에서 계속 "촌정자치(村政自治)"를 제창했다. 일찌기 1921년, 그는 <십년춘출순대민음(十年春出巡對民吟)>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국민교육요보급(國民敎育要普及)

정리촌범우요급(整理村範尤要急)

고이촌중자동판(告爾村衆自動辦)

조속삼년편가득(粗俗三年便可得)

시에는 조속(粗俗, 거친 풍속)을 썼다. 그러나 아주 실질적이고 헛소리가 없다. 즉 백성들에게 보라고 쓴 시이다. 그는 일찌기 이런 말도 한 적이 있다: "무엇이 민간인가? 성은 민간이 아니다. 현도 민간이 아니다. 실제로 촌이 민간이다. 그래서 성,현은 무슨 기관이든 관치(官治) 아니면 신치(紳治)이지, 민치(民治)는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민치주의를 하려면 반드시 촌치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동란의 시대에 산서성은 사회가 안정되고, 생산이 발전했다. 하남, 산동, 하북등 인근 성의 이재민들이 대량으로 산서로 유입되어 안거낙업을 곳으로 찾아왔다. 산서성은 일찌기 '모범성'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수년내에 광산, 야금, 석탄, 발전, 기계, 화공, 병기, 시멘트, 피혁, 모방, 제지, 담배, 성냥등 중공업, 경공업을 만들고, 서북실업공사는 860여킬로미터에 이르는 동포철로(同蒲鐵路)를 건설하고, 산서성영업공사를 세워서 산서성은행을 정돈하고, 철로, 염업, 간업(墾業)등의 은행을 만든다. 그리고 네 개의 은행을 위하여 실물준비고를 성립한다. 항일전쟁전날까지 산서성은 방대한 자본체계가 형성되고 총자산이 2억은원에 이른다.

그러나, 산서의 쇠락은 염석산이 패주하면서 시작된다.대만으로 물러난 후, 장개석의 적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는 계속하여 배척당한다. 염석산의 말년은 양명산(陽明山)의 한 누추한 민가에서 칩거했고, 하루종일 옛날에 쓴 원고를 정리하면서 보낸다. 현재 대만에 가서 염석산의 능묘를 참관한다면 묘앞의 계단가운에 커다란 "중(中)"자가 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마치기 전에, 다시 한 가지 에피소드를 적고자 한다. <인민일보>는 8년전에 중요한 평론을 실은 바 있다: "정치적으로 전복성(顚覆性)의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경제적으로 훼멸성(毁滅性)의 타격을 받지 않는 한, 제도적으로 단층식(斷層式)의 파동이 출현하지 않는 한, 다시 6,7년이 지나면 우리나라(중국)는 성공적으로 '중등수입함정'을 뛰어넘을 것이라는데 아무런 우려가 없다. 그때가 되면 첫 백년분투목표가 실현되고, 소강사회가 건설되어 있을 것이다."

2004. 4.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