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화/중국의 사상

중국의 덕치(德治)전통과 서구의 법치(法治)전통

중은우시 2024. 9. 30. 13:41

글: 융소첩(戎小捷)

중국은 수천년동안 주로 유가의 '이덕치국(以德治國)'의 길을 걸어왔다.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이렇게 내세웠다. 이런 기본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논쟁이 거의 없다. 그러나, 서방에서는 1000여년에 걸친 중세기에 '이덕치국'을 실행한 외에 이전의 고대그리스이건 고대로마이건, 혹은 르네상스이후의 구미각국이건 모두 주로 '이법치국(以法治國)'의 길을 걸었다. 이것도 기본적인 사실이고 논쟁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왜 중국은 덕치, 구미는 법치였을까? 자세히 고찰해보면, 명확한 하나의 역사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어느 사회가 주로 행정지휘수단으로 조직되었을 때, 그 사회에서는 덕치를 시행한다; 예를 들어, 고대이집트, 고대페르시아, 유럽의 중세, 가장 전형적인 경우는 역시 하,상,주이래의 중국이다. 그러나 어느 사회가 시장교환의 수단에 의존하여 성장했을 때, 그 사회는 법치를 시행한다. 예를 들어, 고대그리스, 고대로마 그리고 르네상스이후에 발전하기 시작한 근대,당대의 구미제국이다.

그렇다면, 추가로 물어볼 것은 왜 행정형의 문명 혹은 국가는 '이덕치국'을 시행하고, 시장형의 문명 혹은 국가는 '이법치국'을 시행하는가? 이는 행정으로 사회를 조직하는 수단을 삼는 것과, 시장을 마찬가지로 사회를 조직하는 수단으로 삼는 것과의 근본적인 차이부터 얘기해야할 것이다.

우리는 먼저 추상적으로 사회조직방식인 행정수단을 분석해보자. 행정문명은 분봉제이건 중앙집권제이건 공통된 특징이 바로 전체사회가 위로부터 아래로의 일련의 크고 작은 행정명령으로 연결되고, 하나의 통일체로 조직된다는 것이다. 구별이라면 분봉제는 일련의 서로 다른 명령간의 연결이 비교적 느슨하여, 전체적인 사회구조가 비교적 느슨하고, 중앙집권제하에서의 일련의 명령은 상호간에 긴밀하여 전체사회구조가 비교적 긴밀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아가 분석해야할 것은 확실히 전체국가를 잘 통치하기 위하여, 특히 중앙집권제국가를 잘 통치하기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일련의 위로부터 아래로의 행정명령이 가능한 한 정확하고 오류없이 집행되도록 해야 한다. 이런 일련의 행정명령을 집행하는 사람은 각급의 정부관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 정부관료들이 최대한 현명한 사람으로 구성해야 한다. 그러므로, 각급관리들의 도덕수준이 아주 관건적이 된다. 관리뿐아니라, 명령에 따르고 명령을 집행하는 많은 군중의 도덕수준도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시간만 보내고 실제 일은 하지 않거나, 복지부동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결론은 반드시 힘껏 전체사회의 각급계층의 도덕수준을 배양하고 제고시키는 것이다. 특히 각급관리의 도덕수준을 제고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덕치국'의 사고는 자연스럽게 탄생한다.

우리는 다시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보자. 분봉제의 행정사회에서, 유럽의 중세기에 나타난 기사도정신이건, 중국의 진나라이래 칭송받았던 협사정신이건, 혹은 일본당대이전에 있었던 사무라이정신이건, 그 본질은 모두 당시 행정분봉제사회가 '이덕치국'되었다는 일종의 표현이다. 봉건시대의 지도층은 도덕을 강조했다. 중국의 도덕의 모범은 바로 송양공(宋襄公)이다. 유럽중세의 도덕의 모범은 프랑스의 앙리2세이다. 이 프랑스국왕은 영불간의 백년전쟁때 영국에 포로로 잡힌다. 나중에 프랑스는 다른 일질을 보내어 앙리2세와 교환한다. 얼마 후, 이 교체된 인질이 방법을 강구하여 영국에서 도망쳐 프랑스로 돌아온다. 그러나 앙리2세는 그렇게 하는 것은 비도덕적이라고 여서 자신이 직접 영국으로 가서 포로가 된다.

중앙집권제를 실행하는 행정문명은 덕치에 대한 요구가 더욱 절박했다. 중앙집권의 고대이집트에 있어서 전체 사회는 위로부터 아래까지 이런 관념이 주입되어 있었따. 즉 네가 살아 있을 때 만일 비도덕적인 일을 하면 네가 죽은 후 전문적으로 너의 시신을 검사하는 지하의 신령이 너의 심장의 무게에 이상이 있음을 발견하면 너에게 '피안'으로 가는 증서를 발급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영원히 지하에 머물게 된다. 마찬가지로 고도로 중앙집권을 실행했던 고대중국에서는 각급의 조정관리들이 이런 말을 듣는다. 만일 네가 업무집행시에 나쁜 짓을 많이 하면, 반드시 탐관오리라는 악명으로 역사책에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자손들이 이를 수치로 여기게 될 것이다. 만일 네가 업무집행을 잘하고 청렴하면 반드시 청백리의 명성으로 역사책에 기록될 것이며, 자손들이 이를 영광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등등.

바로 도덕수준이 행정형사회에서 중요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전체 국민이 보편적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중국역사상 반복해서 발생하는 현상이 있게 된다. 즉, 하나의 신왕조가 구왕조를 대체한 후, 신왕조의 통치자는 항상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구왕조를 무너뜨린 것은 구왕조의 통치자가 너무나 비도덕적이었다(사실이 그렇든 말든간에). 나아가 어느 왕조의 내부관료사회의 투쟁에서 승리자는 항상 패배자가 도덕적으로 문제있었다고 극력 지적하게 된다(사실이 그렇든 말든간에). 이에 대응하여, 행정형문명제도의 건설에서, 각급관리의 도덕수준을 감찰하는 체계는 아주 발달한다. 진나라이래의 어사(御史), 청나라때의 순안(巡按), 그리고 오늘날의 기율감독위원회가 모두 그러하다. 심지어 손중산이 서방을 배워서 주장한 오권분립의 헌법에서 감찰권이 별도로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형법체계에서도 대량의 도덕행위를 위반한 것에 대한 처벌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고대중국에서 삼강오륜을 위배하거나, 간통을 하는 것도 모두 극히 중한 처벌을 받았다. 도덕수준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이 원칙은 문화예술분야에도 침투한다. 만일 어떤 문인이 도덕적으로 문제있으면, 그의 시, 회화, 서예가 아무리 출중하더라도, 사회에서의 명성은 크게 약화된다. 이 분야의 사례는 너무나 많다. 마지막으로 중국고대전통에서 아주 중시한 소위 "삼립(三立)"의 입덕(立德), 입공(立功), 입언(立言)에서 가장 앞에 놓인 것은 바로 도덕이다. 당대에 주창하는 간부는 "덕재겸비(德才兼備)"해야한다는 것을 보더라도 덕을 앞에 두었다.

우리는 다시 추상적으로 조직사회방식이 시장수단인 경우를 분석해보자. 시장형문명은 전체사회가 크고 작은 상대적으로 독립된 수량이 방대한 상업계약관계로 연결되고, 조직되어 있다. 구별이 있다면 가장 원시적인 상업계약은 왕왕 단순한 구두약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경제가 발달한 후의 상업계약은 서면계약이며, 왕왕 제3자를 입회인으로 세운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한편으로, 어떤 상업계약을 구체적으로 체결하는 쌍방에 있어서, 비록 경제이익관계는 관련되지만, 피차의 도덕수준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많은 사회구성원에 있어서, 해당 상업계약이 정확한지 여부는 더더욱 문제되지 않는다. 또한 도덕적인지 여부도 문제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시장형의 문명에서 상품교환을 중개하는 모든 상인은 한편으로 공급자와 계약을 체결하고 다른 한편으로 구매자와 계약을 체결한다. 그리고 운송자 및 다른 협력자들과도 계약을 체결한다. 그러므로, 어떤 상인이 계약을 위반하면, 그 자신에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전후방의 여러 상인의 이익에도 관련된다. 그리하여, 모든 계약체결자는 이미 체결한 계약을 준수해야 하는 것이다. 즉 계약을 준수하는 것은 사회경제의 정상운행에 극히 중요한 일이 된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무조건적으로 이미 체결한 계약을 이행해야 한다. 철회할 수 없다. 새로 체결하자고 요구할 수도 없다. 더더욱 위약할 수는 없다. 위약자는 크게 처벌받는다. 오랫동안 이렇게 되니 계약은 신성불가침이 되고, 반드시 무조건 준수해야 하는 것이 되며, 사회의 전체 상인들에게 컨센서스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거상들이 사회정치의 발언권을 장악하게 된 후, 혹은 이후 자산계급이 정권을 장악한 후, 서면계약으로 국가를 통치하는 사고는 자연스럽게 탄생한다. 그렇게 되면, 사회의 모든 법률은 상업계약의 일반적인 신성성을 갖게 된다. 여하한 신법률의 제정도 상업계약탄생의 방식을 취해야 하고, 관련당사자들의 협상, 담판을 거쳐 최종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간단하게 관련역사사실을 살펴보도록 하자. 당대구미국가중에서 법률을 신성하게 여긴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여기에서 하나하나 언급하지는 않도록 하겠다. 여기에서는 고대그리스만 살펴보도록 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고대그리스는 상품교환 혹은 시장경제가 아주 발달한 사회였다. 그러므로 장기간 계약신성관념의 훈도를 받아, 전체 사회가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탄생한 결정(즉 법률)을 극히 중시했다. 저명한 사례는 바로 대철학자 소크라테스이다. 아테네길거리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사상을 소개하고 전파하면서 사회의 여러 권력자들에의 견해와 다른 내용을 설파했기 때문에, 공민대회의 표결로 유죄에 처해지게 된다. 나아가 법정은 청년들에게 유해한 사상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한다. 이 판결은 확실히 감정적인 것이고, 불합리하다. 판결이 내려진 후, 어떤 친구는 소크라테스가 탈옥하도록 도와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 판결이 정확한 것이든 아니든 이미 정상적인 표결절차를 거쳐 통과되었다면 법률이 된 것이고, 그것은 자신이 반드시 준수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법률을 준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탈옥을 거부하고, 엄격하게 법률판결에 따라 음독자살한다. 또 다른 사례로 시장형의 경제력이 풍부했던 아테네와 경제력이 약했던 스파르타는 잔혹한 펠레폰네소스전쟁에서, 아테네의 아주 우수하고 연전연승한 군사지휘관이 아주 사소한 일은 소홀히 하고 부당하게 처리했다는 이유로 사상당한 많은 가족들의 불만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공민대회에서 파면당한다. 비록 군대에서는 이렇게 하면 큰 재난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법률은 신성하고,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 이 우수한 군사지휘관은 할 수없이 군대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생사존망을 건 전쟁에서 결국 패배하고 그후 다시는 힘을 쓰지 못하게 된다.

이상의 두 가지 사례에서, 우리는 이미 법률이 고대그리스인들의 마음 속에 얼마나 신성한 지위를 가졌는지 알 수 있다. 이는 중국인들이 왕왕 법률을 그저 공문(空文)으로 보는 것과 천양지차이다. 마지막으로 다시 비교하면서 몇 마디를 추가하겠다. 고대그리스와 고대로마에서, 법률제도의 건설에 호응하여, 변호사도 아주 일찌감치 출현했다. 그러나 당대에 그리고 중국의 방대한 기율감찰체계와 비교해보면, 서방에서 건립한 것은 방대한 법률가체계이다. 그리고, 서방에서는 법률이 신성한 것과 상대적으로 전통적인 도덕풍속은 왕왕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고대그리스와 고대로마부터 간통 혹은 공개적으로 애인을 가지는 것은 전체 사회의 상하에서 모두 용인되었다. 설사 국왕이나 고관의 부인이 다른 사람과 간통하더라도, 그 본인과 전체 사회는 대체로 받아들였다. 여기에서 더 자세히 논하지는 않겠다.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결론은 아주 간단하다. 즉, 덕치는 행정문명 혹은 관료사회에 대응하는 조치이다. 법치는 시장문명, 혹은 상인사회에 대응하는 조치이다. 중국은 자고이래로 행정문명이고, 그래서 덕치의 전통이 생겼다. 구미는 자고이래로 시장문명이었고, 그리하여 법치의 전통이 생겼다.

그렇다면, 덕치가 좋은가, 법치가 좋은가. 혹은 도대체 행정문명이 더 우수한가 아니면 시장문명이 더 우수한가. 이건 또 다른 주제일 것이다 .이후 기회가 되면 다시 진지하게 논의해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