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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착융(笮融): 삼국시대 가장 음험한 소인(小人)

by 중은우시 2024. 9. 23.

글: 삼립신문(三立新聞)

삼국시대에는 성격이 선명한 풍운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이들은 용맹함으로 혹은 지혜로 난세를 헤쳐나갔으며, 불후의 공명을 남겼다. 그러나 한 사람이 유명해진 것은 아주 의외이다. 그는 삼국시대 가장 음험한 소인 착융(笮融)이다. 은혜를 배신하고 의리를 저버리는데 전문이며 은인을 죽이는데 전문이다. 그런데, 적지 않은 불교사원에서는 그를 기리고 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착융이라는 이름을 듣고, 아마도 많은 사람은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왜냐하면 소설 <삼국연의>에는 나관중이 그에 관하여 묘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웅할거하던 삼국의 난세에, 착융의 악명은 제후들간에 아주 유명했다.

착융은 처음에 서주목(徐州牧) 도겸(陶謙)의 부하였다. 그는 도겸에 의해 하비(下邳)의 국상(國相)에 임명된다. 즉 태수(太守)의 직무이다. 도겸은 그를 아주 신임하여, 서주의 곡물생산요지 광릉군, 하비군, 팽성의 식량수송임무를 그에게 맡긴다. 그러나, 착융은 무슨 짓을 했던가? 양식의 절대다수를 서주의 관청소재지인 담현(郯縣)으로 수송하지 않고, 사사로이 착복해버린다.

그가 자신이 그것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착융의 행동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착복한 돈으로 하비군에 많은 불교사원을 지었다. 그리고 하비의 백성들에게 불경을 독송하도록 요구했다. 일거에 하비는 삼국시대 불교문화가 가장 성행하는 지역이 되고, 많은 불교신자들이 찾아오는 곳이 되었다.

<삼국지.유요전(劉繇傳)>에 따르면, 착융은 세 군의 돈과 양식을 임의로 사용하여 크게 불사를 지었다. 구리로 불상을 만들고 황금으로 몸을 도금했으며, 옷은 비단으로 입혔다. 동반구중(銅盤九重)을 달고, 아래는 중루각도(重樓閣道)를 두었다. 삼천여명이 기거하며 불경을 독송했다. 불교를 믿는 자에게는 요역을 면해주었고, 매번 부처를 목욕시킬 때면 설치한 음식자리가 수십리에 달하여 큰 돈이 들었다; 한나라때 민간에서 불교사원을 짓고, 불교행사를 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도겸은 비록 착융이 공금을 유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다지 관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193년, 조조가 서주로 진격해 들어와, 전체 서주사람들은 적을 막느라고 바빴기 때문이다. 착융은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을 보자 즉시 자신의 1만여부대를 광릉군으로 보내 현지의 태수 조욱(趙昱)에 의탁한다.

조욱은 착융을 홀대하지 않았다. 좋은 술과 고기로 그를 대접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난다. 착융은 광릉군의 물자가 풍부한 것을 보고 욕심이 들었다. 그리하여 한 술자리에서 착융은 칼과 도끼로 돌연 조욱을 죽여버린다. 그리고 병사를 데리고 광릉군을 약탈한다. 이어서 계속 남하하여 말릉(秣陵)으로 가서 설례(薛禮)에게 의탁한다.

설예도 도겸의 옛부하이다. 그러나 도겸과 사이가 나빠져서 도망쳐아논 것이다. 그러나 설례는 조욱의 교훈을 배우지 못했고, 역시 착융을 잘 대접한다. 그 결과 착융은 또 다시 이전에 했던 방식대로 설례의 부하를 병합한 후, 재물을 모두 약탈하고 현지를 떠난다.

착융의 악명이 전파되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이 망은부의의 인물을 거두려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195년, 양주자사 유요는 자신의 세력을 확충하기 위하여, 막료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착융을 거둔다. 사실은 증명한다. 재차 일어난 일은 재삼 일어난다.

당시 유요는 착융을 예장(豫章)으로 보내 주호(朱皓)가 유표(劉表)를 공격하는 것을 돕도록 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착융의 못된 버릇이 다시 도진다. 그는 조욱, 설예를 죽였던 방식대로 주호를 처리하고, 그의 재물을 모조리 빼앗아버리고, 도주한다.

그러나 유요는 조욱, 설예등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는 예전에 중원의 최고자리까지 노리던 대군벌이다. 당초 유요는 착융이 배반한 것을 알고 크게 분노한다. 즉시 추격병을 이끌고 착융을 체포하려 한다. 이때 착융은 모든 사람에게 욕을 먹는 대상이 되어 있었고, 아무도 그를 도와주려하지 않았다. 그는 할 수 없이 깊은 산속으로 도망쳐야 했다. 도망치는 동안 부하들은 갈수록 줄어들었고, 마지막에는 착융이 산속에서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그의 수습은 유요에게 바쳐진다.

아이러니한 일이라면, 착융이 생전에 사람들에게 욕을 얻어먹는 비열한 인간이었지만, 사후에는 불교도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에서 불교를 발전시킨 관건인물로 인식된다. 왜냐하면 그가 많은 불교사원을 지었고, 그리하여 서주와 하비는 천년동안 불교중심지가 되었으며 지금도 강소종선선사(江蘇宗善禪寺, 원래의 浮屠寺), 구경탑사(九境塔寺)등 많은 절은 여전히 착융을 모시는 사당을 만들어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