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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육군양가자(六郡良家子): 동탁(董卓)이 권력을 잡은 기반

by 중은우시 2024. 9. 25.

글: 자귤(紫橘)

양한(兩韓, 서한 및 동한)은 무덕(武德)이 충만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한나라때 북방에서 전투를 벌이던 병사들과 장수는 대부분 )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민풍이 사납고, 집안자산도 충분하고, 장비도 우수하였다. 그들은 우림군(羽林軍)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관직과 작위를 얻으려년 적극성이 아주 높았다. 이것이 바로 한나라군대가 강대했던 주요한 원인이다. 양한은 이로 인해서 흥했고, 동한은 바로 육군의 후인이다. 그러나, 동한말기 군벌할거가 일어나면서 우림군 건제는 사라지고, 육군양가자라는 집단도 역사에서 인멸되어버린다.

  1. 육군(六郡)과 양가자(良家子)

소위 양한의 육군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이다. 그러나 그는 육군이 구체적으로 어디어디인지는 적지 않았다.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에는 우림군의 중랑장(中郞將)은 한양(漢陽), 농서(隴西), 안정(安定), 북지(北地), 상군(上郡), 서하(西河)등 6곳의 사람들로 항상 뽑았다는 말이 나온다. 동한의 복건(服虔)이 <한서>에 단 주석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육군은 금성(金城, 지금의 청해 서녕), 농서, 천수(天水), 안정(지금의 영하 고원), 북지(지금의 감숙 평량, 경양), 상군(지금의 섬서 유림)을 가리킨다고. 다만 당나라때의 안사고(顔師古)는 이렇게 생각했다. 금성은 한소제(漢昭帝)때인 기원전81년에 설치되었으므로, 전통의 육군에는 들어가지 않는다고. 전통의 육군은 마땅히 <한서.지리지>에서 언급하는 천수, 농서, 안정, 북지, 상군, 서하의 육군이라고. 이 여섯 지역의 사람들은 자주 흉노의 약탈을 당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민풍이 사나웠고, "전쟁무기와 물자를 준비하고, 힘과 기개가 있는 사람을 중시했다." 현재 사학계에서는 안사고의 육군을 기준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양가자'라는 명칭은 진,한때 계속하여 존재했다. 예를 들어 <사기>에 이런 기록이 있다. 한문제때 흉노가 소관(蕭關)으로 침입했는데, 이광(李廣)이 양가자(良家子)의 신분으로 군대에 들어갔다고 한다. 고대에는 천민(賤民)과 자유민(自由民)을 나누었고, 양가자는 자유민의 일종이다. 그 범위는 계속 바뀌었다. 필자는 이렇게 본다. 한나라때 양가자는 군공지주(軍功地主)이상의 계층이며, 진나라때 20등 군공으로 비유하자면, 양가자는 최소한 최저등급인 공사(公士)이상의 등급을 받은 가정이다. 일정한 토지를 가져야만 경제적인 기초가 있고, 무술을 닦고 단련할 수 있으며, 군사장비를 갖출 수 있고, 군대명령을 따를 수 있으며, 전투력이 제고될 수 있다. 이광은 바로 진나라때 군공장수의 후손이다.

육군양가자라는 명칭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한서.흉노전>이다. 이에 따르면 한무제가 일찌기 육군양가자들과 함께 말을 타고 활을 쏘았다고 한다. 한무제가 일반농민자제들과 함께 말을 타고 활을 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황제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여러 단계의 심사를 거쳤을 것이고, 일반농민자제라면 황제와 직접 만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진한의 양가자는 경제력이 있는 지주집안의 자제로 보는 것이다.

2. 육군양가자의 전통

육군은 지리적으로 섬서, 감숙, 영하 3개성의 북부를 포함한다. 진한시기 이곳은 흉노와 전투를 벌이던 최전선이다. 진나라가 멸망한 후, 흉노는 다시 하투를 점령하고, 계속하여 남하하여 한나라를 괴롭혔다. 저명한 사건은 바로 백등산(白登山)에서 한고조 유방을 포위한 사건과 선우가 서신을 보내 여후를 희롱한 사건이다. 기원전166년, 흉노는 소관을 함락시키고, 회중궁을 불태우고, 감천궁밖에서 무력을 과시한다. 치욕을 씻기 위해서, 한무제때 가장 절박한 바램은 용맹한 병사와 장수를 얻어 변방을 지키는 것이었다. <한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한무제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원수를 갚고 해악을 제거하며, 적을 죽이는 것은 짐이 장군에게 바라는 것이다. 만일 관모를 벗고 맨발로 이마를 땅에 대며 죄를 청하는 것이 어찌 짐이 바라는 바이겠는가." 한무제는 장수가 절박하게 필요하다는 점을 이렇게 얘기했다.

기원전104년, 한무제는 건장궁(建章宮)을 새로 짓는다. 궁전을 지키기 위해, 건장기영(建章騎營)을 조직한다. 건장기영은 바로 나중에 그 이름도 유명한 우림기(羽林騎)이다. 이 기병의 병력은 한무제가 직접 육군에서 뽑았다. 육군양가자는 이리하여 역사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궁전을 수비하는데 왜 기병이 필요한지 물을 수 있다. 사학계에서는 이렇게 본다. 비록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의 활약으로 흉노의 기세는 많이 꺾였지만, 위청, 곽거병등이 사망하면서, 한나라는 기병장수가 부족하게 되었다. 한무제는 이로 인하여 건장기병영을 만들고, 이곳을 기병장수를 양성하는 요람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왜 육군인가? 왜냐하면 육군자제는 흉노와의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기 때문이다. 육군출신의 장수는 수도없이 많다. 저명한 인물로는 이광, 이채(李蔡), 이식(李息), 공손하(公孫賀), 공손오(公孫敖)등이 있다. 그들은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게다가 이때 한나라의 통치중심은 관중(關中)이었다. 육군은 관중의 주위를 감싸고 있다. 황제는 이들을 기용하는 것이 가장 안심된 것이다. 그래서 육군을 병력모집지역으로 삼은 것은 한무제가 흉노와 30여년간 싸워온 경험의 소산이다. 남송의 장여우(章如愚)는 이렇게 말했다: 한무제가 육군을 양가자를 구하는 곳으로 삼고, 우림, 기문(期門)을 장수를 기르는 곳으로 삼았다. 육군은 장수가 나온 곳이고, 한무제는 이들을 궁중에서 배양하며 호위로 삼았다. 일단 사건이 벌어지면 이들 중에서 뽑아서 기용했다.

3. 육군양가자의 운명

대만대학의 녹요동(逯耀東) 교수는 이렇게 본다. 육군양가자는 흉노와의 전투에서 골간이었고, 위청, 곽거병의 공적은 실제로 육군자제들이 흘린 피로 얻어낸 것이다. 우림군은 일반병사가 아니다. 그것은 원나라때의 케식(怯薛)과 같다. 출신은 일반백성보다 높고, 그들이 속한 우림군의 지위도 일반군대보다 높다. 명나라때의 서부원(徐孚遠)은 이렇게 평가했다: "양가자가 군대에 들어가면, 무릇 스스로 재(才)와 력(力)으로 대장군을 따라 공명을 얻는다. 일반적인 병사가 아니다." 여기의 '재(才)에 대하여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는 통가자로 재(財)라는 것이다. 양가자는 자신의 집안의 재산으로 무기와 장비를 준비하여, 무기장비가 뛰어났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일반적인 '재능'으로 해석하여 자신의 재능으로 대장군을 따라 적군과 싸웠다는 것이다. 어느 해석에 의하더라도, 우림군은 일반병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우림군의 인원수는 많고, 모두 장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능력이 평범한 사람은 일반적인 기병이 된다. 한무제는 기병군의 장군은 육군에 한정하여 선발했다. 이는 양한 육군군공집단이 탄생하도록 만든다. <한서>에 따르면, 진한이래, 산동에서는 재상이 나오고 산서에서는 장수가 나왔다(山東出相, 山西出將). 여기의 산은 효산(崤山)을 가리킨다. 산서는 바로 육군을 가리킨다. 육군의 자제들은 가족적인 색채가 짙었다. 예를 들어, 이광의 집안은 진나라때도 장수였고, 한나라때오 여전히 장수였다. 이광의 동생 이채, 이광의 아들 이감(李敢), 이광의 손자 이릉(李陵)은 일맥상전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외에 조충국(趙充國), 조앙(趙昻) 부자, 공손하, 공손오 형제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이런 상황은 한편으로 그들의 군대내에서의 지위를 말해주고,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정치적 안목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이 바로 육군군공집단의 쇠락을 불러오게 된다.

정치적안목이 부족한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이광 가족이다. 이광의 가족은 평생 흉노와의 전투에서 최일선에 섰다. 그러나 최후는 아주 비참하다. 이광은 자살했고, 이감은 피살되었으며, 이릉은 고립무원에서 할 수 없이 흉노에 투항하고 결국 일가족이 몰살당한다.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이광가족은 그저 무인이었고, 정치적인 안목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진퇴의 도리를 몰랐다. 비록 그러하지만, 육군양가자는 양한때 여전히 정예병이었고, 양한사백년의 강대함을 이끌었다.

4. 마지막 대표자인 동탁

동한의 중앙정부가 쇠약해지면서 육군양가자도 몰락의 길을 걷는다. 육군양가자의 마지막 대표는 동탁이다. 동탁은 농서군 임조(臨洮)사람이다. 한환제때 우림기에 들어갔고, 그후 굴기한다. 189년에 이르러, 동탁은 하진(河進), 정원(丁原)의 부대를 병합하고, 이때부터 세력을 떨치고, 조정을 주재한다. 동탁의 심복역량은 바로 삼천양주군(三千凉州軍)이고, 휘하장수는 다수가 육군출신이다. 동한시기 양주는 육군의 대칭(代稱)이다. 북지군을 대표하는 이각(李傕), 호봉(胡封), 무위군(武威郡)의 가후(賈詡), 장제(張濟), 금성군의 번조(樊稠), 장액(張掖)의 곽사(郭汜)가 그들이다. 동탁의 사위 우보(牛輔)도 양주사람이다. 가후는 더더욱 이각, 곽사를 부추겨 장안으로 진공한다. 이유는 바로 가후가 "장안에서 양주사람을 모조리 죽일 논의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당하기 전에 먼저 손을 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론

육군양가자는 양한때 아주 중요한 군공집단이다. 진나라때 시작하여 한무제때 굴기하며, 한나라의 몰락과 더불어 동탁은 육군의 마지막 대표가 된다. 동탁이 피살되고, 이각, 곽사가 실패하면서, 양주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육군자제는 마침내 무대에서 사라진다. 그후 중국은 군벌혼전시대에 접어들고, 각지의 군벌은 현지인을 가지고 군대를 조직한다. 육군자제는 더 이상 예전의 명성을 되찾지 못하고, 그저 역사의 명칭으로 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