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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미방(糜芳)은 왜 싸우지도 않고 오(吴)에 투항했을까?

by 중은우시 2024. 5. 10.

글: 지도제(地图帝)

219년, 관우(关羽)가 양양(襄阳), 번성(樊城) 및 한수(汉水) 일선에서 조인(曹仁), 서황(徐晃)과 대치하고 있을 때, 동오는 돌연 형주의 공안(公安), 강릉(江陵)을 기습한다.

동오쪽에서 여몽(吕蒙)은 이만여 인마를 거느리고 육구(陆口)에 주둔하여 관우의 절반 형주를 노리고 있었다. 몇해동안 손권(孙权)과 여몽은 계속하여 관우에게 암중으로 수를 쓰고 있었다.

손권은 유비(刘备)와 관우를 이간질하기 위해 사람을 강릉으로 보내어, 관우에게 정략결혼을 제안한다. 즉 손권의 아들이 관우의 딸을 취하겠다고 한 것이다.

유비는 일찌기 손권의 여동생 손씨를 취한 바 있고, 나중에 손부인은 동오로 도망쳐 돌아간다. 그리하여 유비와 손권간의 정략결혼은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만일 관우의 딸이 동오로 시집가서 아들을 낳게 되면, 관우는 큰형님인 유비를 도울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외손자를 도울 것인가?

표면적으로는 손권이 스스로의 신분을 낮춘 것이지만, 실제로는 악독한 심계를 품은 사악한 제안이었다. 그래서 관우는 즉시 그것을 알아차리고 손오의 사신에게 욕을 하며 쫓아버렸던 것이다.

이때, 손권은 동한에서의 관직이 토로장군(讨虏将军, 군직3품), 회계태수(会稽太守, 관직3품)이었다. 그러나 적벽대전이후 유비는 손권을 거기장군(车骑将军, 군직2품), 서주목(徐州牧, 관직2품)으로 임명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아직 조조가 통제하는 동한조정으로부터 허락이 떨어지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동오의 관직은 모두 손권이 임명한 것이지, 동한의 관직이 아니었다. 손권 자신의 관직이 아주 낮았기 때문에(조조와 유비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호군(护军)으로 여러 장군을 지휘했다. 처음에 주유(周瑜)를 중호군(中护军)에 임명했었다. 주유가 죽은 후 여몽이 좌호군(左护军), 장흠(蒋钦)이 우호군(右护军)으로 임명한다. 마찬가지로 이 군직은 자신의 장군들과 같거나 높은 군직이었다. 좌우호군을 견제하기 위하여 손권은 다시 자신의 당제(堂弟)인 손교(孙皎)를 도호(都护)로 임명하여, 호군들보다 높은 직위로 삼았다.

동오가 형주를 기습하기 전에, 군직서열이 높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손교: 도호, 정로장군(征虏将军, 군직3품). 정보(程普)의후임으로강하군(江夏郡)을 지키며, 하구(夏口)에 병력을 주둔시킨다. 손권의 당제로서, 손교는 강하군의 사선, 운두, 남신, 경릉의 4개현을 식읍으로 받았다. 한수하류는 손교의 방어지구이고, 또한 그의 식읍이 소재하는 곳이었다.

여몽: 좌호군, 호위장군(虎威将军, 군직3품). 여몽은 장사군(长沙郡)의 육구에 주둔하고 있었다. 파구(巴丘)에서 시상(柴桑)까지의 장강지역에서 수군을 훈련시켰다. 몇년전 여몽은 형주를 기습한 바 있다. 결국 담판을 통하여 손권이 형주의 절반을 받아낸다. 촉한과 관우의 측면에서 보자면, 여몽은 동오에서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장군이었다.

장흠: 우호군. 탕구장군(荡寇将军, 군직3품). 유수독(濡须督). 장흠은 장강하류를 지켰다. 유수구를 중심으로, 하후돈(夏侯惇), 장료(张辽), 장패(臧霸)등 조위의 명장들과 맞서 있었다.

하제(贺齐): 안동장군(安东将军, 군직2품). 산음후(山阴侯). 강상을 지키면서, 부주(扶州)에서 안휘까지를 맡았다. 하제는 비록 군직이 높기는 하지만, 도호나 호군을 맡지는 않았고, 병권도 작았다. 이것은 동오의 특징중 하나이다.

동오가 형주를 기습할 때의 주요장수는 앞의 3명이다. 즉 도호 손교, 좌호군 여몽, 우호군 장흠이다.

호위장군 여몽은 비록 겨우 41살에 불과했지만, 평생 전쟁터에서 보냈고, 전상을 많이 입었다. 관우의 이목을 마비시키기 위해 그는 사직하고 건업(建业)으로 돌아간다. 손권은 36살의 육손(陆逊)을 우부독(右部督), 편장군(偏将军)으로 삼아 육구로 보내 여몽의 군대를 인수하게 한다.

관우의 수엄칠군(水淹七军)이후, 조조는 스스로의 몸을 낮추어 합비(合肥)전투에서 손권에게 화해를 청한다. 손권은 즉시 조조와 비밀맹약을 맺는다. 조조는 성의를 표시하기 위해 합비, 거소(居巢)등지의 위군을 철수시키고, 동오의 압력을 해소시켜준다.

손권이 형주를 기습할 때, 주요 장수는 도호 정로장군 손교, 좌호군 호위장군 여몽, 우호군 탕구장군 장흠, 편장군 육손이다. 이해에 손권은 37살이고 그는 병력을 양로로 나누어 형주를 기습하고자 계획한다. 북로는 노장 장흠이 양주수군을 이끌고 한수를 따라 서진하여 관우의 수군이 돌아가는 것을 막게 하고, 37살이 되지 않은 손교는 장흠을 지원하는 외에 육로에서 관우의 군대를 막는 것이었다. 남로는 41세의 여몽이 이끌고, 36세의 육손이 선봉장이 되어, 공안, 강릉으로 진격하는 것이다. 연령으로 보자면 손권과 주요장수들은 한창 연부역강한 나이이고, 그들에게 기습받는 관우는 이미 59세였다.

십월, 우호군 장흠이 양주수군을 이끌고, 수로와 육로로 나란히 한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강하의 하구, 경릉을 지나 북상하며 관우수군의 귀로를 차단한다.

장흠의 군대는 원래 동쪽 장강하류에서 하후돈, 장료의 조위군대를 막고 있었다. 공격하는 것까지는 힘들더라도 방어에는 전혀 빈틈이 없었고, 견고했다.

이와 동시에, 좌호군 여몽은 몰래 육구에 도착하여 편장군 육손, 장군 이이(李异), 장군 사정(谢旌)등을 지휘하여, 3만대군, 80여척의 전함을 이끌고 수로로 나아가 장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여몽군은 모두 백의(白衣)를 입고 노를 젓는 선부(船夫)로 위장했다. 소위 백의도강(白衣渡江)이다. 여몽은 작은 배를 타고 봉화대에 가까이 다가가서 상인으로 위장해서 스스로 검사까지 받는다. 그리고 선물도 건네준다. 그 결과 형주의 수십개 봉화대는 그 어느 하나도 불을 올리지 않았고, 봉화대를 지키던 수비병사들은 모조리 포로로 잡혀버린다.

관우의 남군본부는 어떻게 배치되어 있었을까?

남군태수(南郡太守) 미방(糜芳)은 강릉(江陵)을 지키고 있었고 장군 사인(士仁)은 공안에 병력을 주둔시켜 강릉성의 앞에 있는 하나의 장벽을 이루고 있었다.

유비가 사천으로 들어가기 전에, 계속 공안성에 병력을 주둔시켰고, 이곳에서 명을 내렸다. 공안은 촉한의 형주에서의 중요도시이다. 단지 촉한은 형주에 오직 관우라는 중요장수가 있을 뿐이었다. 마초(马超), 장비(张飞), 황충(黄忠)도 없고, 위연(魏延), 조운(赵云)같은 잡호장군도 없었다. 심지어 황권(黄权)같은 편장군, 이엄(李严)같은 비장군(裨将军)조차 없었다. 사인은 관우의 부장으로 이 중요도시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며느리라도 쌀이 없으면 밥을 지을 수 없는 법이다.

사인은 공안을 지킬 뿐아니라, 관우의 군대에 양초(粮草)를 수송해야 했다. 그는 미방과 같이 적시에 임무를 완성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관우는 전쟁이 끝나면 책임을 묻겠다는 말까지 한 상태였다. 공안에서 동쪽으로 백리의 거리에 장강의 남북으로 2,30리마다 봉화대를 만들어 놓았는데, 역시 공안에서 관할했다. 동오의 대군이 밀려오는대 봉화대에는 불이 올라오지 않았다. 이 책임은 이전의 양초공급문제보다 더욱 심각한 것이었다.

사인의 자는 군의(君义)이고, 유주(幽州) 광양(广阳) 사람이다. 유비를 여러 해동안 따라다니면서 여러 전투를 겪었다. 숙장(宿将)이라 할 수 있다. 쉽게 투항할 사람은 아니었다. 여몽은 우번(虞翻)을 유세객으로 보낸다. 사인은 성문을 꽉 걸어잠그고 만나주지조차 않았다. 성대방이 이간계를 쓸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우번은 노장이고, 원래 이 전투에 참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의술을 잘 알아서 건업에서부터 여몽을 따라오면서 그를 치료하는 임무를 맡았었다.

만일 관우가 조위에서 항복한 병사 수천을 공안에 안치해두지 않았더라면, 사인은 몇달 정도 성을 지키는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군대와 조위에서 투항해온 군사들의 수량이 비슷했다. 조위의 항졸들은 원래 물에 갇혀서 관우에게 투항한 것이었다. 대부분 앙앙불락하면서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는 사인을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그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때 우번이 편지를 한통 써서 성문앞으로 보낸다. 서신에서는 먼저 큰 이치부터 얘기한다: "총명한 자는 화를 미리 대비하고, 지혜로운 자는 장래의 우환을 대비한다. 득실을 알면 제대로 사람역할을 할 수 있고, 존망을 알면 길흉을 가릴 수 있다."

바로 주제를 바꾸어 이렇게 말한다: "강동의 대군이 습격했는데, 형주의 척후는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고, 봉화도 올라가지 않았다. 이건 천명이 아니라면 분명 내부에서 호응하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사인이 방어에 엄중한 직무태만이 있었다는 것을 얘기한다. 동오의 대군이 성아래에 이르렀는데, 아무도 봉화를 올려 미리 경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오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형주의 내부에 호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사인을 놀라자빠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마지막 문구는 핵심을 향한다: "장탕구(탕구장군 장흠)이 수로를 막았고, 여호위(호위장군 여몽)은 육로를 막았다. 성이 함락된 후에 장군이 항복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의를 잃은 것이다. 장군을 위하여 말씀드리오니 깊이 생각해주기 바란다." 그 뜻은 탕구장군 장흠이 한수에서 관우의 수군을 막고 있고, 호위장군 여몽은 공안을 포위공격하고 있으니, 사인이 만일 성이 함락된 후에 투항한다면 아무런 가치도 없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사인은 성문을 열고 눈물을 흘리며 투항한다. 촉한을 위하여 수천의 군대를 남긴 것이다. 사인은 비록 미방처럼 황후의 가족이라는 배경은 없었지만, 절대로 관우가 무서워서 투항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관우는 자기 수하의 장군을 참살한 기록도 없다.

사인은 유비, 관우를 따라 여러 곳을 전전하며 싸웠고, 경험도 상당히 풍부했다. 시국에 대한 판단이 기하여 그는 동오의 수군이 관우의 수군에 못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흠이 관우의 수군이 오는 길을 막아내는 것은 그럴 확률이 컸다. 공안성 밖에는 수만의 동우군이 있다. 그리고 성안에는 수천의 조위 투항군이 있다. 그의 수천수비군으로는 며칠이야 버틸 수 있겠지만, 투항군이 내부에서 움직이고 동오의 병사들이 성밖에서 공격해오면 결말은 결국 같을 것이다.

4년전에도 여몽이 형주를 기습한 바 있다. 당시 유비는 5만의 군대를 이끌고 사천에서 나왔고, 관우는 3만의 군대를 이끌고 남하했다. 그렇게 손권과 평화협상을 통해 상수지맹(湘水之盟)을 맺는다. 손유연맹의 큰 배경하에서 그리고 4년전의 역사관성에 따라 사인은 손유가 이번에도 평화회담을 통해 종결할 확률이 크다고 보았다. 공안성이 조위의 손에만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래도 여지는 있다고 본 것이다.

동오에서도 사인이 진심으로 투항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번은 여몽에게 이렇게 헌책한다: "이건 기만술일 것입니다. 좌호군은 사인을 강릉으로 보내어 투항하도록 권유하게 하고, 병력을 남겨서 공안을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여몽은 사인을 데리고 강릉성으로 간다. 미방은 사인이 투항한 것을 보자, 역시 성문을 열고 술과 소를 이끌고 나와 투항한다.

남군태수 미방이 투항한 것은 이번 전쟁승부의 전환점이었다. 그는 왜 투항했을까? 이건 미축(糜竺), 미방형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미축의 자는 자중(子仲)이고, 서주(徐州) 동해군(东海郡) 구현(朐县) 사람이다. 미씨집안은 대대로 상업에 종사했고, 서주의 거부이며, 현지의 호족이었다. 자산이 수억이며, 일하는 사람만 1만여명에 달했다. 선조는 대대로 개간을 해왔고, 동복, 식객이 근 만명에 달했으며 자산이 억을 넘었다. 미축은 통이 컸고, 후덕하며 문아했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

서주목 도겸(陶谦)은 미축을 서주별가종사(徐州别驾从事)로 임명한다. 도겸과 미축은 유표와 괴월(蒯越), 혹은 유장(刘璋)과 장송(张松)같은 관계이다. 즉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와 현지 호족이 공동으로 통치하는 모델이다.

194년, 조조가 서주를 공격한다. 공손찬(公孙瓒)은 평원상(平原相) 유비를 보내 지원한다. 다음 해, 도겸의 병이 위중해지자, 유명으로 유비에게 후임을 맡게 한다. 그리고 유비에게 이 유명을 전달할 사람은 바로 미축이었다.

196년, 원술(袁术)이 서주를 공격한다. 여포(吕布)는 그 기회를 틈타 유비의 본거지를 빼앗는다. 유비는 패배하고, 잔여부대는 동으로 광릉(广陵)을 공격하지만 원술에게 패배한다. 해서로 물러났지만 군량미가 바닥났고, 장병들은 심지어 자기들끼리 서로 죽여서 인육을 먹을 정도였다.

위기의 순간에 미축은 유비와 정략결혼을 맺는다. 여동생을 유비에게 시집보내고, 노복2천과 금은재화를 무수히 보내어, 유비가 재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조조도 미씨형제의 가치를 잘 알았다. 그래서 미축을 영군태수(嬴郡太守)로 삼고, 미방을 팽성상(彭城相)으로 삼아 미씨를 자신이 거두고자 한다. 동시에 유비의 세력을 분화시키려 한다. 그러나, 미축, 미방형제는 거기에 흔들리지 않고, 관직을 버리고 도망쳐 유비와 함께 중원을 전전한다. 형제둘은 지방관료로서 편안한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이다. 이는 유비에 대한 충성심이 크다는 것으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유비는 서주에서 패주하고, 여남(汝南)에서 유격전을 벌이고, 신야(新野)에 주둔했다가, 당양(当阳)으로 도망친다. 그 길이 매우 험난했지만, 그래도 미씨형제는 유비를 따른다.

214년, 유비가 익주목(益州牧)이 된 후 미축을 안한장군(安汉将军, 군직2급)으로 삼았다. 서열은 유비의 바로 다음이고, 관우와 장비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동시에 미방은 남군태수(관직3품)이 된다. 형주에서의 지위는 탕구장군(군직3품), 양양태수(관직3품)인 관우의 바로 다음이었다.

즉, 유비가 유장으로부터 익주를 빼앗아 차지한 후, 미씨형제와의 관계에 미묘한 변화가 발생한 것이다. 미부인은 일찌감치 유비가 유표를 위해 신야를 지키고 있을 때 사망했고, 자식을 전혀 남기지 못했다. 당시 사십여세의 유비는 자식이 없었다. 형주 본토의 호족들은 모두 이 일을 우려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유비의 편에 붙지 않으려 했다. 그에게 후계자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미씨형제는 유비를 위해 후계자를 물색하기 시작한다. 결국 나후(罗侯) 구(寇)씨의 아들 구봉(寇封)으로 확정하고 유봉(刘封)으로 개명해 유비의 세자로 세운다. 이때부터 미씨형제는 유봉과 혈연관계가 없는 외삼촌과 조카의 관계를 맺게 되고 운명공동체가 된다. 나중에 비록 유선(刘禅)이 태어났지만, 유비가 익주를 획득하기 전에는 안정된 강산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유봉은 무예도 뛰어나서, 군대를 이끌고 여러 전투에 참가하며,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생긴다. 그리하여 그의 세자로서의 지위는 전혀 동요되지 않았었다. 유비가 익주를 취득한 후, 즉 유선이 6살이 되었을 때, 유비는 친아들인 유선을 유봉을 대체하여 세자로 삼기로 결정한다.

219년 유비가 한중왕(汉中王)을 칭할 때, 유선을 태자로 삼는다. 그리고 유봉은 부군장군(副军将军, 군직2품)에 명한다. 유비는 많은 사람들을 발탁했지만, 미축, 미방형제는 승진하지 못한다. 이때 군대내의 5대장군은 각각 전장군 관우, 좌장군 마초, 우장군 장비, 후장군 황충, 안한장군 미축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미축의 서열이 아주 높았지만, 앞의 네 명은 모두 새로 발탁된 사람들이다. 병권을 얘기하자면, 앞의 네 사람은 모두 많은 병력을 거느리고 있지만, 미축은 부하가 거의 없었다. 형주의 미방은 같이 형주에 있는 관우가 전장군, 가절월(假节钺)을 받았지만, 자신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관우는 양양,번성전투에서 전투를 하고 있었고, 미방은 후방에서 무기를 제조하고, 군량미를 쌓아두고 운송했다. 이 두 가지 일은 미방이 해내고 싶었지만 힘이 부족했다. 그리고 강릉성의 병기고에 불이 난다. 적지 않은 병기가 불타버렸다. 관우는 일찌기 전쟁이 끝나면 책임을 묻겠다고 말한 바 있다.

미방은 유비의 처남이고, 촉한의 초기주주이다. 관우와는 근 30년을 같이 일했으니, 관우를 잘 알았다. 정말 그를 엄히 처벌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러니 미방이 관우를 두려워해서 동오에 투항한 것은 아니다.

관우의 수엄칠군후, 3만명의 포로를 잡는다. 그중 2만여명은 강릉으로 보내고, 수천명은 공안으로 보낸다. 미방과 사인은 원래 관우에게 양초를 공급하는 것도 힘들었는데, 일거에 3만명을 더 먹여살려야 했다. 그리고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도 막아야 했다. 그러다보니 압박이 배로 커지게 된다. 미방의 강릉은 원래 수비군이 만여명이었다. 그런데 조위의 투항군이 2만며영이다. 그리고 투항한 장수중 가장 지위가 높은 우금(于禁)도 강릉에 와 있었다. 그러니 미방으로서는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었다.

미방의 시국에 대한 판단은 사인과 비슷했다. 모두 관우가 온전하게 병력을 물리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고, 자신이 이렇게 많은 투항병졸을 관리해야 하다보니 오래 강릉성을 지켜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미방은 어쨌든 유비의 처남이다. 그의 형인 미축과 여러 친척들은 모두 성도(成都)에 있다. 이 점만으로도 그는 투항할 수가 없다.

4년전에 노숙(鲁肃)이 아직 살아있을 때 여몽이 형주를 기습하여, 장사, 계양, 영릉의 3군을 획득했다. 나중에 유비가 5만을 이끌고 사천에서 나오고, 관우가 3만을 이끌고 남하자자 손권은 협상을 통해 상수지맹을 체결한다. 유비와 손권은 상수(湘水)를 경계로 한다는 것이다. 이는 손권이 이미 기습을 통해 얻어냈던 3군중 3,4할을 토해내고, 상강의 동쪽만 차지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미방은 유비가 이번에도 사천에서 군대를 이끌고 나와 손권을 압박하여 평화협정을 맺을 것이라 여겼다. 지난번에는 조조가 장로(张鲁)를 공격해서, 유비가 급히 익주로 돌아가서 대비해야 했고, 그래서 황급히 평화협정을 체결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유비가 하후연(夏侯渊)을 참하고 한중(汉中)을 취했으며, 관우는 양번전투에서 우금을 포로로 잡고, 방덕(庞德)을 참했다. 촉한의 형세가 아주 좋았다. 유비는 손권과 협상을 벌일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지난번처럼 황급히 맹약을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동한의 13주에 사례를 더해서 보면, 조조가 9개를 차지하고 있고, 유비와 손권은 단지 익주, 형주, 양주의 3주만을 차지했다.(교주(交州)는 명목상으로 순권이 지배했지만, 병력이나 물자는 모두 북상하기 곤란했다.) 그러니, 유비와 손권은 역시 협력이 필요했고, 함께 조조에 맞서야 했으며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3국정립의 국면이 불안해지고, 조위가 결국 촉한과 동오를 멸망시킬 터였다.

미방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관우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손권이 형주를 기습한 시기는 4년전만 못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생각지 못했던 것은 손권과 여몽이 이번에는 반드시 형주를 모두 차지하겠다고 결심을 굳혔다는 것이고, 손유동맹이 철저히 파괴되는 것까지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후에 조조와 어떻게 싸울지는 나중에 다시 생각하겠다는 것이다. 미방등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으로서는 손권이 이렇게 안목이 단기적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고, 더더구나 여몽이 이처럼 전략적으로 문란한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