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관우)

형주(荊州)전투에서 관우(關羽)에게 치명적 일격을 가한 것은 누구일까?

by 중은우시 2024. 8. 2.

글: 서북낭(西北狼)

219년에 발생한 양번(襄樊)전투는 삼국역사상 가장 읽기 힘든 대목이다. 관우는 이 해에 사망했고, 전체 삼국의 형세는 달라진다. 동시에 한실부흥의 한가닥 희망도 사라져 버렸다.

이 사건에 관하여,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관우의 '부주의' 혹은 쥐새끼같은 무리의 후안무치때문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관우가 이 전체 사건에서 무슨 '부주의'한 부분은 없다. 여몽(呂蒙)의 '백의도강(白衣渡江)'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역사의 방향은 여러 방면의 힘겨루기를 통해서 결정되는 것이지, 단순하게 어떤 사건의 성패를 어떤 사람의 책임으로 돌리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생각의 나태이다.

  1. 형주의 힘겨루기

형주사건의 기인(起因)을 따져보자면, 208년의 적벽대전부터 얘기해야 한다.

한나라때 형주는 모두 7개의 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역은 대체로 오늘날의 호남, 호북 이외에 하남의 남양시(南陽市)까지 포함한다. 이는 다시 북삼군(北三郡, 호북): 남양(南陽), 남군(南郡)과 강하(江夏), 그리고 남사군(南四郡, 호남): 영릉(零陵), 계양(桂陽), 장사(長沙)와 무릉(武陵)으로 나눌 수 있다.

그중 남양군의 실력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군만으로 하나의 성에 맞설 수 있을 정도이다. 어쨌든 그곳은 광무제(光武帝)의 용흥지지(龍興之地)이니까.

난세가 시작되자, 형주의 최대 군인 남양군은 형편없는 주군을 맞이하게 된다: 원술(袁術). 원술이 계속하여 피해를 입히는 바람에, 남양이 이백년간 쌓아온 경제력은 2년도 지나지 않아 모조리 사라지게 된다.

게다가 형주의 최고장관인 유표(劉表)는 남양의 경제를 회복하는데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단순히 남양을 북방의 위협에서 방어하는 전략적 보루하는 정도로 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먼저 장수(張繡)에게 맡겼다가, 장수가 조조에 투항하자, 다시 전문문지기로 20년간 일해온 유비(劉備)에게 맡겨버린다.

남양이 쇠락한 후, 형주의 실력은 남군(南郡)에 기대어야 했다. 남군의 한수에 있는 양번은 천하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군사요충지이다. 북방의 위협을 막을 수도 있고, 남군의 대부분은 강한평원에 있어, 물산이 풍부했다.

산간지역이 많은 강하가 할 수 있는 역할은 그저 형주의 동쪽대문역할이다. 장강하류의 양주(揚州)방면에서의 위협을 막아내는 것을 책임졌다. 유표 시대에, 이 동대문을 지키는 책임은 손씨집안과 부친을 죽인 불공대천원수의 관계에 있는 황조(黃祖)가 맡았다. 손씨집안이 2대에 걸쳐 수차례 강하를 공격했으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적벽대전이 발발하기 몇달전에 겨우 황조를 죽일 수 있었다.

형남4군은 경제적 가치로 보나 군사적 가치로 보나 모두 보조적인 존재들이었다.

적벽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조조는 강하를 제외한 형주6군을 차지하고 있었다.

적벽대전이 끝난 후, 조조는 과감하게 장강이남의 형남4군을 포기한다. 어쨌든 장강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형남4군은 맹지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비집단은 그 빈틈을 노려 치고 들어간다. 조조가 뱉어낸 뼈를 그대로 삼켜버린 것이다. 그리고 적벽대전의 주재자인 동오는 가장 비옥한 남군을 차지하고, 조인(曹仁)과 1년여간 죽기살기로 싸운다. 그 과정에서 하마터면 주유의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남군이 동오의 손에 들어간 것은 유비집단에 극히 불리했다. 왜냐하면 형주에서 사천으로 들어가는 주요 통로는 의도(宜道), 이릉(夷陵)인데 모두 남군의 관할지역내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비가 형남에서 사천으로 들어가려면 설봉산(雪峰山), 오몽산(烏蒙山)등 물류의 사지를 넘어야 했다. 생각해보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유는 생전에 한편으로 유비를 죽이고 싶었고, 다른 한편으로 파촉을 정벌하여 천하를 양분하고자 했다. 그래서 유비에게 조그만치의 활로도 열어주지 않으려 했다.

주유가 죽은 후, 유비는 손권으로부터 남군을 빌려 자리를 잡을 생각을 품는다. 당시 동오는 형주, 양주(지금의 合肥)의 두 전선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국면이 아주 심각했다. 손권의 주요공격방향은 합비였다. 마침 유비가 와서 자신이 형주방면의 조조군대의 압력을 막아주겠다고 나서자, 노숙과 협의를 해서 이 거래를 성사시킨다. 이것이 바로 "차형주(借荊州)"의 유래이다. 이때부터 형주칠군중에서 유비가 5개를 얻고, 조조와 손권이 각각 1개씩을 차지하게 된다.

이 사건은 경영의 각도에서 보자면, 손씨집단이 유씨의 소규모공장에 자본투자를 한 것이다. 그리고 손씨의 지분비율은 적지 않았다. 어쨌든 형남4군을 다 합쳐보아야 남군 하나의 중요성에 못미쳤기 때문이다.

당연히, 유비측에서도 공짜로 받은 것은 아니다. 보증금조로 유비는 차형주를 한 그 해에 동오의 군대가 형남4군을 지나 교주(광동,광서)를 정벌하도록 허용했다.

자고이래로 북방에서 월(粤, 광동)으로 들어오는 길은 오직 3개의 고정도로밖에 없었다. 첫번째는 강서(江西)의 감강(贛江)의 상류에서 대유령(大庾嶺) 혹은 기전령(騎田嶺)을 넘어 광동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이 두 도로의 교차점이 지금의 소관(韶關)이다. 그러나 산과 고개를 넘어야 해서, 물류비용이 아주 많이 들어, 일반적으로 그곳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세번째 도로는 상강(湘江)에서 진시황이 건설한 영거(靈渠)를 통해 주강(珠江)의 지류인 이강(漓江)으로 들어가고 강을 따라 광주까지 내려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리적 위치로 보면 교주(交州)는 본질적으로 형남4군에 부수되는 이익인 셈이다. 원래 유비가 점령해야 하는 곳이다. 그런데, 그 이익을 손권에게 넘겨준 것이다.

2. 손권의 난제

그러나, 이 부수적이익은 화근을 내포하고 있었다. 지도로 보면, 교주는 동오와 접경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맹지인 셈이다. 손권이 교주를 제대로 차지하려면 반드시 형남4군의 상강대동맥을 차지해야 했다.

손권측이 보기에, 남군은 유비에게 빌려준 원금이고, 형남사군은 이자이다. 유비 네가 사천이라는 큰 땅을 차지했다면, 마땅히 나에게 원금과 이자를 갚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회한 유비는 빌린 것은 인정하지만, 나는 아직 자산이 많지 않으니, 내가 양주(凉州, 지금의 감숙성)까지 차지한 다음에 돌려주겠다고 버틴다. 사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손권은 유비가 이미 익주를 차지한 것을 보고, 제갈근(諸葛瑾)을 보내 형주의 여러 군을 돌려달라고 한다. 유비는 허락하지 않으면서 말했다: '우리가 양주를 도모하고 있다. 양주를 평정하면 형주를 모두 오에 돌려주겠다.'"

손권은 할 수 없이 차선책을 택하게 된다. 원금은 나중에 돌려주어도 좋으니, 먼저 이자를 달라는 것이다. 상서(湘西)의 무릉군은 필요없으니, 상강유역인 나머지 형남사군의 삼군을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관우는 전혀 이를 응락하지 않았다. 사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마침내 남3군에 장리(長吏)를 보냈다. 관우는 이들을 모조리 쫓아냈다."

이 사건에서 촉한의 일처리는 확실히 심했다. 손권은 대노했고, 직접 친정을 한다. 노숙(魯肅)이 익당(益當)에서 관우의 주력을 막고, 여몽(呂蒙)이 남3군을 기습한다. 결국 쌍방은 상강을 경계로 하기로 하고, 손권은 영릉군을 유비에게 돌려준다. 계양, 장사 두 군만 차지한다. 이때부터 형주7군중 조조가 1개, 손권과 유비가 각각 3개를 차지하게 된다.

상강으로 촉한과 동오의 국경선이 정해진 후, 형주에서는 다시 조조와 유비의 싸움이 전개된다. 동오는 그저 관전하는 상황이다. 그후, 손권은 계속하여 주공격방향을 합비로 잡고, 더 이상 형주에서는 아무런 활동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219년에 발행한 양번전투는 이런 국면을 깨트려 버린다. 동오측에서는 조위와 관우라는 두 호랑이가 서로 싸우는 것을 즐겁게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한 호랑이가 다른 호랑이를 죽여버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형주가 소재한 장강중류는 강동이 소재한 장강하류에 대하여 천연적으로 지리적위치상 거고임하(居高臨下)의 우세를 점하고 있다. 형주에서 삼족정립하고 있을 때는 이런 우세가 영원이 이론적인 것에 그칠 것이다. 관우의 담량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조위가 상존하는 한 감히 동오를 칠 생각은 품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엄칠군(水淹七軍) 이후, 조위의 형주지역 총사령관 조인(曹仁)은 위기일발의 상황에 빠진다. 언제든지 끝장날 위기였다. "관우가 배를 타고 성으로 다가갔다. 몇 겹으로 포위하여, 내외를 단절시켰으며, 양식은 다 떨어지고, 구원병은 오지 않았다."

일단 조인이 패배하고 나면, 손권과 유비는 형주에서 다시 싸워야하는 상황이 곧 닥치게 될 터였다.

그리하여, 동오의 입장에서 형주를 기습하는 것은 시급한 일이 되어버린다.

3. 막후의 검은 손

그러나, 관우는 절대로 전설 속에서 처럼 그렇게 '부주의'한 사람이 아니다. 조위측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평가도 이러하다: "촉은 소국이다. 명장은 오직 관우뿐이다." 이런 사람이 어찌 그렇게 멍청하게 일처리를 했겠는가?

동오측에서 기습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여몽의 백의도강이 무슨 의표를 찌른 수법이기 때문도 아니고, 관우가 여몽이 거짓으로 병든 것처럼 한 것이나 육손(陸遜)이 보낸 서신에 속아서도 아니다.

실은 촉한쪽의 여러 방면에서의 폐단이 일거에 전체적으로 폭발하였기 때문이지, 관우 본인과는 그다지 큰 관계가 없다.

이 사정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번성전투 1년전에 발생한 사건 하나를 얘기해야 한다. 완성후음(宛城侯音)의 반란

<삼국연의>의 영향으로, 통상 우리는 형주문제의 촛점을 손권과 유비 둘 사이에 놓고 보고 있지만, 사실상 형주의 진정한 싸움은 조조와 유비의 사이에 이루어졌다.

210년의 '차형주'때부터 시작하여, 번성전투가 발발하기까지 10년간, 관우는 계속하여 조위의 형주지역군사책임자인 악진(樂進), 조인과 전투를 멈춘 적이 없었다.

매년 전쟁을 벌이다보니, 조위가 점거하고 있는 남양군은 수탈이 가장 심했다. 218년, 현지의 호족인 후음은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킨다. 결국 조인에게 평정당한다. "남양의 관리와 백성들은 요역에 힘들어했고, 겨울 시월, 완성의 장수 후음이 반란을 일으킨다. 정월 조인이 완성을 도살하고, 후음을 참하고, 다시 번성으로 돌아가서 주둔한다."

뉴튼의 말에 따르면 힘의 작용은 상호적이다. 조위의 형주지역이 매년 전쟁으로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면, 관우가 다스리는 형주지역도 별반 다를 것이 없을 터였다.

이렇게 여러 해동안 관우의 병마를 먹여살린 돈과 양식은 어디에서 왔을까? 분명 현지의 명문거족들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삼국시대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형주의 명문거족들은 아주 보수적이다. 그들은 진취적인 지향이 없었다. 유표가 단기필마로 형주에 들어간 고담영웅(高膽英雄)에서 나중에는 그저 한 마리 수호지견(守戶之犬)으로 전락한 것도 결국 그 뿌리를 찾아보면 이들이 견제하였기 때문이다.

관우, 너는 매일 조위와 싸우고 있고, 그 비용은 모두 우리가 부담하고 있다.

그렇다면, 형주의 사족(士族)들은 왜 그 막대한 비용을 기꺼이 여러 해동안 부담해 왔을까? 유비가 사천을 차지하면서, 형주사람들의 몸값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유비집단의 대부분 핵심간부는 모두 형주사족이 제공한 인재들이다. 유비집단이 강해지면 그들에게도 좋은 점이 있다.

형주의 이들 사족들과 유비의 관계를 거슬러 올라가면 유비가 신야(新野)에서 지낼 때부터이다.

형주의 사족들중 가장 먼저 유비에게 와서 가담한 사람은 바로 서서(徐庶)이다. 그는 한미한 집안출신이고, 도망다니는 유협이었으니, 죽어도 별달리 아쉬울 것이 없었다. 그저 투석문로(投石問路)하는 의미였다.

이어서 형주의 사족들이 유비에게 던져준 것은 그들이 와룡(臥龍)이라고 포장한 제갈량(諸葛亮)이다. 그도 실의한 집안출신이고, 서서보다 조금 더 재산이 있던 정도였다. 제갈량까지 보낸 것은 형주의 사족으로서는 추가투자인 셈이다.

적벽대전후 유비는 처음으로 기세를 올린다. 형주의 사족들은 다시 추가로 투자를 한다. 이번에 가담한 것은 정통의 형주사족이었다. 바로 봉추(鳳雛) 방통(龐統).

그는 형주사족의 진정한 이익대변인이다. 방통의 가입은 형주사족이 유비집단에 전면적으로 투자했다는 것을 표시한다.

패배해서 쫓겨가고 위기일발이던 상황에 가담한 제갈량은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유비집단내에서 실력을 발휘하면서 군사중랑장(軍師中郞將)에 오르지만, 방통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지만, 가자마자 바로 같은 예우를 받는다. 그 배후의 힘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사람이 바라는대로 이루어주지 않는다. 방통은 유장(劉璋)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불행히도 전사해버린다. 방통의 사망이 유비집단에 준 영향은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219년, 유비가 한중(漢中)에서 조조를 격패시킨다. 유씨집단이 정식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그러나, 유씨집단의 고위층내에 형주명문거족의 대표는 없었던 것이다.

관우, 장비, 조운은 원래부터 따르던 원종파(元從派)이고, 법정, 이엄은 사천동주파(四川東州派)이고, 제갈량, 황충, 위연은 비록 형주출신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한미한 집안출신이다. 비위(費褘), 장완(蔣琬)같은 형주명문거족출신들은 지배층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것은 모두 제갈량이 죽은 후에나 이루어진다.

대표가 없으면 세금도 없다. 유비는 형주의 명문거족들을 너무 홀대했다.

이때부터, 형주의 사족들은 이미 유비집단과 사이가 갈라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유비가 나중에 보복하는 것도 겁내지 않았다. 너의 아래에 있는 중견간부들은 모두 우리 사람들인데, 네가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보자.

전투를 개시하기 전에 관우는 동오의 기습을 막기 위하여, 변방에 여러 척후와 봉화대를 설치한다. 백의도강은 이동할 수 없는 봉화대는 속여넘길 수 있지만,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척후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럼 동오는 어떻게 소리소문없이 형주로 쳐들어갈 수 있었을까? 형주의 중요도시 공안(公安)을 칠 때, 동오는 우번(虞翻)이라는 사람을 보내 공안의 수비장수 사인(士仁)을 설득한다. "장군 사인은 공안을 지키고 있었다. 여몽은 우번에게 명하여 그를 설득시킨다. 우번은 성문에 도착하여 성문을 지키는 자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 장군과 얘기할 것이 있다'. 그러나 사인은 만나주지 않는다. 그러자 글을 써서 보낸다: '총명한 사람은 화를 미연에 방지하고(明者防禍於未萌), 지혜있는 자는 장래의 우환을 도모한다(智者圖患於未來)'고 했습니다. 득실을 알면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고, 존망을 알면 길흉을 판별할 수 있습니다. 대군이 다가오는데, 척후는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고, 봉화는 적시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천명이 아니라면 분명히 내부에 호응하는 자가 있는 것입니다. 장군이 앞날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일이 닥쳤을 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것입니다. 혼자서 성을 지키고 투항하지 않았다가, 전투에서 죽으면 집안이 멸문되고 제사가 끊길 것이고, 천하의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는 사인에게 더 이상 버티지 말라. 너희의 순찰계통은 이미 마비되었다. 아직도 모르겠는가. 형주의 명문거족들은 이미 우리 편에 섰다. 사족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 것이다. 하루빨리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 것이다.

미방(糜芳)과는 달리 이 사인은 피동적으로 투항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버티고자 했었다: "사인은 서신을 받고 눈물을 흘리면서 투항했다. 우번이 여몽에게 말하기를 '이는 휼병(譎兵)입니다. 마땅히 사인을 데리고 가고, 병력을 남겨서 성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인을 데리고 남군으로 간다. 남군태수 미방은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여몽이 사인을 보여주자 투항한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형주의 국면을 결정한 것은 관우도 아니고, 미방도 아니고, 더더구나 사인도 아니다. 오히려 형주사족들이다. 그들이 인랑입실(引狼入室)하기로 결정했다면, 미방이 배반하지 않았더라고, 관우가 그저 자리를 지키기만 했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결론

삼국의 각 정권 가운데, 촉한은 한문(寒門, 한미한 집안출신)에 가장 우호적인 정권이었다.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유비의 일생동안 명문거족에서는 그에게 투자하지 않았다. 어렵사리 형주사족의 투자를 받았는데, 결국은 이익배분문제로 갈라서게 된다. 이것이 아마도 촉한정권의 멋진 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런 낭만마저도 없었다면, 사족들과 전면적으로 타협한 조위, 동오와 무슨 차이가 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