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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관우)

관우(關羽)는 왜 여몽(呂蒙)에게 참패했는가?

by 중은우시 2023. 5. 19.

글: 개말노생(芥末老生)

 

건안24년(219년), 십월, 관우가 주력부대를 이끌고 양양(襄陽, 지금의 호북성 양양시 양양구)전선에서 조조의 군대와 혈전을 벌이고 있을 때, 손권이 돌연 부대를 둘로 나누어 습격하도록 한다. 하나는 여몽, 육손이 이끄는 정예병으로 배를 타고 공안(公安, 지금의 호북성 공안현), 강릉(江陵, 지금의 호북성 형주시)을 공격하고, 다른 하나는 장흠(蔣欽)이 이끄는 수군(水軍)으로 한수(漢水)를 따라 북상하여 직접 양양(襄陽)을 친다. 관우를 겨냥한 천라지망을 조조와 손권이 손을 잡고 펼친 것이다.

 여몽은 대군의 선봉부대로, 병사를 이끌고 위장된 상선(商船)에 숨어서, 관우가 장강을 따라 배치한 여러 초소의 경계망을 뚫고 공안에 도달한다. 공안의 수비장수 사인(士仁)은 권항서(勸降書, 투항을 권유하는 서신)를 받고 저항을 포기하고 투항한다. 그후 여몽은 사인을 데리고 신속히 강릉으로 진격한다. 남군태수(南郡太守) 미방(糜芳)은 강동군대가 도착하는 것을 보자마자 성문을 열고 투항한다. 여몽은 힘한번 쓰지 않고 두 개의 요새를 점령해버린 것이다.

 

<삼국지. 여몽전>: "여몽이 심양(尋陽)에 도착하여, 그 정예병을 모두 매복시킨다"

 

<삼국지. 장흠전>: "손권이 관우를 토벌하면서, 장흠은 수군을 지휘하여 면(沔)으로 들어가다."

 

여기서 한가지 바로잡을 것은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백의도강(白衣渡江)"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몽이 "사백의요로(使白衣搖櫓), 작상고인복(作商賈人服)"(백의로 하여금 노를 젓게 하고, 상인의 옷을 입도록 했다)에서 '백의'는 하얀색 옷을 입은 병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평민, 백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백의도강'이라는 것은 백성들 혹은 백성으로 변장한 병사들이 상선으로 위장하여 강을 건넜다는 말이다. 그런데, 후세에 와전되어, 강동병사들이 흰색 옷을 입입은 후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고 알려지게 된 것이다.

 

관우는 양양전선에서 철수하여 지원하러 가는 도중에, 강릉은 이미 수복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병력을 이끌고 맥성(麦城, 지금의 호북성 당양시 동남)으로 간다.

 

<삼국지.여몽전> "마침 손권이 추격하여 오자, 관우는 자신이 고립무원이라는 것을 깨닫고, 맥성으로 도주한다. 서쪽으로 장향(漳鄕)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모두 관우에게 투항하라고 권한다. 손권은 주연(朱然), 반장(潘璋)으로 하여금 퇴로를 막도록 한다. 관우부자가 모두 생포되고, 형주는 평정된다."

 

 미방, 사인이라는 두 명의 반도가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 관우가 패망한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주요한 원인이다. 그러나, 관우가 이끄는 부대는 전투력이 아주 강했고, 병력도 적지 않았다. 왜 강동부대와 전투 한번 벌이기도 전에, 1달도 안되는 시간안에 앞뒤로 모두 적을 맞이하여 물러날 곳조차 없는 지경에 처할 정도로 신속히 붕괴되었을까?

 

기실, 역사상 이처럼 대군이 원정나가 있을 때, 후방에서 반도가 인랑입실(引狼入室)한 사례는 아주 많다. 예를 들어, 25년전, 장막(張邈)과 진궁(陳宮)이 조조를 배신하고 여포에 투항한 경우도 있다.

 

흥평원년(194년), 장막은 원래 조조가 처자식을 맡겨도 될 정도로 친형제라고 생각했던 인물이고, 진궁은 일찌기 조조에게 연주를 차지하여 자사가 되도록 하는데 공을 세우고 크게 신임을 받던 인물이다. 그런데, 조조가 도겸(陶謙)을 원정하러 나간 사이에 이들이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켜 조조를 크게 배신하고, 여주를 연주로 모셔온다. 방대한 연주 관할하의 거의 모든 군현은 여포에게 투항한다.

 

<삼국지.무제기>: "장막과 진궁이 반란을 일으켜 여포를 맞이할 때, 군현이 모두 호응했다. 순욱(荀彧), 정욱(程昱)은 견성(鄄城)을 지키며, 범현, 동아현의 두 현을 고수했고, 태조(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이렇게 위급한 국면과 관우가 처한 상황이 놀랍도록 유사하다. 그러나 왜 조조는 결국 다시 판을 뒤집고 승리를 거두었는데, 관우는 패배하여 죽게 되었을까?

 

그리고, 4년전인 건안20년(215년), 손권은 역시 여몽에게 대군을 이끌고 관우를 기습하도록 보낸 적이 있다. 다만 그때 손권은 그저 장사군, 계양군과 영릉군을 점령했을 뿐, 관우가 소식을 들은 후 신속히 대군을 집결하여 반격할 준비를 했다. 그리하여 결국, 쌍방은 협상을 통하여 분쟁을 끝내고, 대전투로 확대되지는 않았다.

 

<삼국지.여몽전>: "손권이 여몽에게 명하여 서로 장사, 영, 계의 3군을 취하게 한다. 여몽이 2군에 서신을 보내니 모두 눈치를 보아 투항한다.....유비는 직접 촉에서 공안으로 왔고, 관우를 보내 3군을 쟁취하게 했다.....유비가 결맹을 청했고, 손권은 학보(郝普)등을 돌려보내고, 상수(湘水)로 나누어, 영릉을 반환한다."

 

그렇다면, 왜 이번에는 관우가 전혀 반격하지 못하고, 손권도 관우를 참초제근(斬草除根)하고자 한 것일까?

 

그 흥평원년(194년) 장막, 진궁이 일으킨 반란은 거의 하룻밤만에 연주의 8개군, 수십개 현중에서 오직 견성(지금의 산동성 견성현, 조조의 가족이 모두 이 곳에 있었다), 범현(지금의 하남성 범현), 동아현(지금의 산동성 양곡현)이라는 3개만이 순욱, 정욱, 하후돈(夏侯惇)의 노력으로 굳게 지킬 수 있었다. 조조의 지역은 신속히 아주 적은 지역내로 축소되고, 형세는 위기일발로 아주 위급했다.

 

다만, 여포는 이렇게 좋은 상황하에서 회복할 수 없는 전략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그는 조조대군이 외부에 나가 있고, 성을 지키는 병사는 극히 적으며, 인심이 흉흉한 기회를 이용하여 전력을 다하여 조조의 남은 마지막 3개의 근거지를 무너뜨려, 조조가 돌아올 곳이 없도록 만들었어야 하는데, 오히려 견성에서 한번 시험적인 진격만 해보고는 동군의 치소(治所)인 복양(濮陽, 지금의 하남성 복양현 서쪽)으로 물러난다; 그리고, 그는 기회를 잡아 전략요충지인 동평(東平, 지금의 산동성 평현)을 점거하고, 유리한 지형인 항보(亢父, 지금의 산동성 제녕시)와 태산도(泰山道)라는 두 갈래의 조조가 서주에서 연주로 철수할 때 반드시 지나가야하는 길에 매복을 설치하여 기습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조조가 손쉽게 자신의 지역으로 철수하여, 남아있던 부대와 평안무사하게 회합하도록 방임한다. 그리하여 조조는 다시 부대를 정비하여 중정기고(重整旗鼓)할 수 있게 된다.

 

<삼국지.무제기>: "여포가 도착하여 견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서쪽으로 복양에 주둔한다; 태조가 말하기를 '여포가 일단 주 하나를 얻고, 동평을 점거하며, 항보, 태산의 길을 막아서 험준함을 이용하여 나를 막지 않고, 오히려 복양에 주둔하다니, 나는 그가 무능하다는 것을 알겠도다."

 

건안20년(215년), 여몽은 명을 받아 3군을 탈취한다. 그는 상강을 따라 직접 남하하여, 신속히 수비가 비어있는 장사군과 계양군을 점령한다. 다시 거짓소식을 알려 영릉군을 굳게 지키던 학보의 투항을 받아낸다. 그후 노숙과 회합하여 동정호, 자수, 익양(益陽, 지금의 호북성 익양현)에서 유비, 관우가 상강을 넘어 3군을 탈취하려는 기도를 막아낸다.

 

다만, 이번 군사행동에 있어서, 손권은 3군이 지역을 쟁탈하려는 것이었지, 유비와 전면적으로 전투를 벌이려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관우의 대군이 밀려오고 유비가 최종적으로 타협함으로써, 양군은 그저 대치만 했지, 진정으로 교전을 벌이지는 않았다.

지금, 여포가 당초 허술한 일처리로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던 것과는 달리, 또한 당초 단지 장사, 계양, 영릉군만을 차지하려던 것과는 달리, 손권이 형주삼군을 탈취하려는 계획은 이미 오랫동안 준비해온 것이었다. 그리고 준비도 아주 충분했다; 신속하게 기습을 하여 목적을 이룬 후, 각종 배치와 대응도 아주 적절했다. 심리전과 공성전도 급소를 찔렀다. 손권의 목적은 바로 그들이 호랑이로 여기고, 그들이 침식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게 만드는 관우를 철저히 제거하고, 형주를 모조리 차지하는 것이었다.

 

여몽은 공안과 강릉이라는 관우의 형주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개의 근거지를 점령한 후, 신속히 관우와 전체 병사들의 가족을 장악한다. 

 

다만 이전에 대군이 입성한 후에는 살인방화약탈을 벌였던 것과 달리, 여몽은 적군의 가족들을 위문하고 도와주었으며, 부대에도 엄격히 규율을 지키도록 하며, 백성들로부터 바늘 하나 실 하나 빼앗지 못하게 한다. 이를 위하여 심지어 백성들에게서 삿갓 하나를 가져간 자신의 동향인을 참살함으로써 다른 병사들에게 경고하기까지 했다.

 

그는 수하들로 하여금 곳곳을 다니면서 민심을 다독이도록 하고, 노인이나 고아등을 위하여는 물을 길어주고, 환자에게는 의약품을 전해주었으며,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옷과 음식을 보내주었다.

 

<삼국지.여몽전>: "여몽이 들어가 성을 점거한 후, 관우와 장병의 가족들을 모두 얻고는 모두 다독였다. 군대에 백성을 괴롭히거나 물건을 가져오지 말 것을 엄명했다. 여몽의 휘하 병사중에, 같은 여남 사람이 있었는데, 민가에서 삿갓 하나를 가져와서 관청의 갑옷을 덮었다. 관청의 갑옷은 공물이지만, 여몽은 이것이 군령을 어긴 것이라고 보고, 같은 고향사람이라고 하여 처벌하지 않을 수도 없어서, 마침내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베었다.

 

그리하여 군인들이 모두 전율하고, 아무도 백성의 물건을 건드리지 않았다. 여몽은 아침 저녁으로 나이든 사람들을 찾아뵙고, 부족한 것을 물었다. 병이 든 사람에게는 의약품을 주고, 춥고 배고픈 사람에게는 옷과 양식을 주었다. 관우의 관청에 보관되어 있던 재물은 모두 봉해두고 손권이 오기를 기다렸다."

 

손권은 자신들이 선비들을 예로 대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형주의 인재를 갈구한다는 태도를 나타낸다. 그리고 직접 이전에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돌아가서, 투항을 거부했던 형주 치중종사(治中從事) 반예(潘睿)를 직접 가서 투항을 받아낸다.

 

<삼국지 반전>: "손권이 형주를 함락시키자, 관리들이 모두 복속했다. 그러나 반예만이 유독 병을 핑계로 나타나지 않았다. 손권은 사람을 보내어 침대를 가마로 삼아 데려온다....가까이 다가가 수건으로 그의 눈물을 닦아준다."

 

이런 방법으로 질서를 확립시키고, 민심을 안정시켰다.

 

관우는 회군하는 길에 여러번 사람을 강릉으로 보내어 여몽과 접촉한다. 관우는 동오가 이번에 공격한 최종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강릉에 남아 있는 가족들의 상황은 어떠한지가 궁금했다. 여몽이 이전에 강릉성에서 보여준 여러가지 우호적인 제스추어의 효과가 이때 위력을 발휘한다. 관우가 보낸 사자들은 여몽의 열정적인 환대를 받았을 뿐아니라, 고의로 성내의 곳곳을 둘러보게 해주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는 사람들이 가족들의 안부를 묻는 편지들도 함께 보냈다.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할 때, 강릉성내의 상황 그리고 여러 장병들의 가족이 다치지 않았을 뿐아니라, 우대받고 있다는 것도 말해준다. 관우 부대의 투지는 이때부터 완전히 꺽여버린다.

 

<삼국지.여몽전>: 관우가 돌아오면서, 도중에, 여러번 사람을 보내어 여몽을 만나게 한다. 여몽은 그 사신을 후대하고, 성안을 구경하게 했으며, 집집마다 안부를 전하거나 혹은 편지를 주었다. 관우의 사람이 돌아온 후 사적으로 보고 들은 것을 얘기하며, 가족들이 무양하고, 평소처럼 지내고 있다고 말해준다. 그리하여 관우의 부하들은 싸울 마음이 사라졌다.

 

 이와 동시에 육손(陸遜)은 군대를 이끌고 신속히 장강상류로 전진한다. 의도태수(宜都太守) 번우(樊友)는 그 소식을 듣고 성을 버리고 도망친다. 소속된 대소관리는 모조리 투항한다. 십일월이 되어, 육손은 전후로 지강(枝江, 지금의 호북성 지강현), 이도(夷道, 지금의 호북성 지성시), 자귀(秭歸, 지금의 호북성 자귀현)을 점령하고, 중병으로 이릉(夷陵, 지금의 호북성 의창시)을 지키게 한다. 그후 다시 부대를 지휘하여 북상하며, 첨안(詹晏), 진봉(陳鳳)등의 부대를 격패시킨 후, 다시 계속하여 임저(臨沮), 방릉군(房陵郡)과 남향군(南鄕郡)을 점령한다.

 

<삼국지.육손전> 육손은 빠른 길로 전진한다. 의도태수, 무변장군의 직을 받고 화정후에 봉해진다. 유비의 의도태수 번우는 군을 버리고 도망친다. 성의 관리와 오랑캐 군장들이 모두 투항한다....그때가 건안 24년 십일월이다. 육손은 장군 이이, 사정등으로 하여금 3천명을 이글고 촉의 장수 첨안, 진봉을 공격하게 한다. 이이는 수군을 이끌고, 사정은 보병을 이끌며, 험준한 요지를 막아서 첨안등을 격파하고, 진봉을 생포한다. 다시 방릉태수 등보(鄧輔), 남향태수 곽목(郭睦)을 공격하여 대파한다. 자귀의 문포(文布), 등개(鄧凱)등이 오랑캐병사 수천명과 합쳐서 저항한다. 육손은 다시 사정으로 하여금 문포, 등개를 토벌하게 하였고, 등개는 도주하여 촉으로 갔으며, 촉에서 장수로 임명한다. 육손은 유인하여 문포가 투항한다. 전후로 참하고 노획하고 투항을 받은 것이 수만에 달한다.

금방 투항한 반예는 귀의자의 열정을 나타낸다. 그는 스스로 앞장서서 손권에게 자신의 원래 동료이자 무릉군종사인 번주(樊伷)의 강동군대에 대한 역습을 진압하겠다고 한다.

 

<삼국지.번전>: 무릉군종사 번주가 여러 오랑캐들을 유도하여, 무릉을 유비에 속하게 하고자 했다...준(濬)을 보내 5천의 병사를 이끌고가게 했다. 과연 번주를 참살하고, 평정했다. 

 

이렇게 하여, 형주경내에 더 이상 관우가 국면을 만회하기 위하여 발을 붙일 근거지가 없게 되었다. 강동부대는 이미 철저하게 익주와 형주간의 수륙교통요지를 차단하여, 관우는 익주로 돌아갈 수도 없었으며, 유비도 병력을 형주로 보내 지원해줄 수도 없었다.

이때까지도 관우는 후방의 험악해진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는 황급히 부대를 이끌고 강릉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조조의 군대는 철수하기 시작한 관우부대에 대한 추격을 포기했다. 조엄(趙儼)은 조인(曹仁)에게 말한다: "만일 우리가 지금 관우의 뒤를 끝까지 추격한다면, 아마 손권이 우리에 대하여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는 아마도 자신이 나서서 관우의 부대를 제거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책략은 좌산관호투(坐山觀虎鬪, 가만히 앉아서 호랑이 두마리가 싸우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다."

 

<삼국지. 조엄전> "조인이 여러 장수를 모아 회의를 했다. 모두 말하기를, "지금 관우는 위기에 처하고 두려워하고 있으니 추격하면 반드시 붙잡을 수 있을 것이니다." 그러나 조엄이 말한다: "지금 관우는 이미 고립무원이다. 그를 남겨두면 손권에게 심복지환이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끝까지 추격하면 손권은 관우군대에 대한 걱정을 바꿀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 군대에 골치거리가 될 것이다. 위왕(조조)도 분명 이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을 것이다." 조인은 조엄의 말을 듣고 추격을 멈춘다. 조조는 관우가 패주했다는 말을 듣고 장병들이 추격할까봐 걱정되어 급히 전령을 조인에게 보낸다. 그의 뜻은 조엄이 한 말과 같았다."

 

십이월, 강동의 대군이 속속 도착하면서, 이미 막다른 골목에 몰린 관우는 맥성으로 물러나 지킨지 수일만에 다시 성을 버리고 포위망을 돌파한다. 곁에는 겨우 십여명이 따를 뿐이었다. 얼마 후 장향(지금의 호북성 당양시 동북의 장수북쪽)에서 매복에 당해 포로로 잡힌다. 그후 자신의 아들 전우들과 함께 처형당한다.

 

<삼국지.오주전> 관우가 당양으로 돌아오고 서쪽으로 맥성을 지킨다. 손권이 사신을 보내어 유인한다. 관우는 거짓으로 투항하며, 번기(幡旗)를 사람인 것처럼 성 위에 세워두고 도망친다. 병사들이 모두 흩어지고, 관우의 곁에는 십여기가 남는다. 손권은 먼저 주연, 반장으로 하여금 그의 퇴로를 막게 한다. 십이월 반장의 사마 마충(馬忠)이 관우와 그 아들 관평, 도독 조루(趙累)등을 장향에서 잡는다. 이렇게 하여 형주를 평정한다.

 

관우의 양양북벌은 일전으로 천하에 명성을 떨쳤다. 이 얼마나 휘황한 업적인가. 그러나 일대영웅이 이렇게 최후를 맞이하고, 그 시대의 시야에서 홀연히 사라진다. 이 또한 얼마나 슬픈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