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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관우)

역사상 관우(關羽)가 사용한 병기는 무엇이었을까?

by 중은우시 2024. 3. 8.

글: 영주해객(瀛州海客)

호북 형주 관우사의 관공상

소설 <삼국연의(三國演義)>는 제77회에 관우가 옥천산에 나타나는 모습을 묘사할 때, 이렇게 적고 있다: "공중에 한 사람이 보였다. 적토마(赤兔馬)를 타고, 청룡도(靑龍刀)를 들고, 왼쪽에는 백면장군이 있고, 오른쪽에는 흑면규염의 사람이 따르고 있었다. 함께 구름 끝에서 내려와 옥천산 정상에 내려왔다." 많은 말이 필요없다. 아마도 '적토마' '청룡도'라고 들으면 바로 나타난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세상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적토마와 청룡도는 모두 관우의 상징이다. 그리고 적토마와 비교하자면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는 관우에 전속적인 신병으로 더욱 대표성이 있다. 관우와 함께 "온주참화웅(溫酒斬華雄)", "삼영전여포(三英戰呂布)", "필마참안량(匹馬斬顔良)", "과오관참육장(過五關斬六將)"등 하나하나의 명장면에는 청룡언월도가 관우와 함께 하고 있었다. 민간에서는 청룡언월도를 "관도(關刀)", "관왕도(關王刀)"라고 부른다.

비록 관우와 청룡언월도는 일찌감치 하나로 묶여버려 뗄레야 뗄 수 없게 되어 버렸지만, 진지하게따져보면 양자간에는 시간차가 천여년이나 존재한다. 사람은 한나라말기의 사람인데, 청룡언월도는 송나라때의 무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사상의 관우는 도대체 무슨 병기를 사용했을까?

관우는 한나라말기에 등장한 촉주 유비 휘하의 대장이다. 관우가 살아있을 때, 그는 이미 전설이 되어 있어, 그의 이름을 들으면 적장들은 간담이 서늘했다. 조위의 군신들도 일치하여 이렇게 인정했다: "촉은 소국이다. 명장은 오직 관우 뿐이다." 다만 관유의 일련의 영웅적인 사적 중에는 그의 병기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다.

역사상의 관우는 도대체 무슨 병기를 사용했을까? 지금까지 여러가지 설이 있다. 가장 많이 언급되는 무기는 도(刀)이다. 이는 관우가 안량을 참살할 때의 묘사에서 비롯된다. <삼국지> 권36 <관우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관우가 안량의 휘개(麾蓋)를 멀리서 보그는 말을 달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안량을 찔렀고(策馬刺良), 그의 수급을 베어서 돌아왔다(斬其首還). 원소의 여러 장수들 중에서 그를 막을 수 있는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백마의 포위는 풀어진다." 여기에서 "찌르다(刺)"라는 동작으로 인하여 어떤 학자는 관우가 사용한 것이 장모(長矛, 세모난 긴 창)라고 본다. 그리고 이 병기는 한나라때 자주 사용되던 것이다.

이는 가장 합리적인 추측이다. 한무제때 흉노와 싸우기 시작한 때로부터 중원정권은 기병에 더욱 많이 투자한다. 한나라말기와 삼국시기 한왕조의 강역내에서 말을 생산하는 지역이 크게 늘어난다. <후한서> 권60 <채옹전>에 따르면, "유(幽), 기(冀)의 옛 땅은 갑옷과 말이 나오는 곳이다." 하북지역을 제외하고도, 요동, 관중, 연대(燕代), 옹량(雍凉)등에서 모두 좋은 말이 나왔다. 이와 동시에, 장병들이 말타는 기술도 이전에 비해 확실히 높아졌다. 이런 객관적인 조건으로 인하여, 기병이 점차 전투에서 주류가 되어갔다. 조조가 중원을 빠르게 평정할 수 있었던 것도 기병의 도움이 불가결했다.

이어서 나타난 것은 전술, 병기, 장비 내지 갑옷의 변화였다. 관우가 안량에게 공격한 것을 보면, 그가 먼저 많은 군인들 사이에서 안량의 위치를 확정한 후, 말을 빠르게 달려 순식간에 안량의 면전에 이르러 근접전을 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작전방식하에서 모(矛), 극(戟)같은 장병기가 확실히 우세하다. 당시의 명장인 공손찬(公孫瓚)은 자신보다 수배인 적군을 만났을 때, 역시 이런 방식으로 승리를 거둔다. <삼국지> 권8 <공손찬전>의 기록에 따르면, "공손찬은 일찌기 수십기를 이끌고 새외로 나갔다. 거기서 선비 수백기를 만난다....공손찬은 모를 들고 양쪽으로 휘두르면서, 오랑캐를 찔러갔고, 수십명을 살상하며, 기병의 절반을 죽였다 .그리하여 벗어날 수 잇었다. 선비는 다시 침범해 들어오지 못했다." 이렇게 소수로 다수를 이기는 전투에서 공손찬이 사용한 병기가 바로 장모였다.

유비가 유명해지기 전에 동문사형인 공손찬의 보살핌을 받았다. 유주에서 비교적 오랫동안 활동한다. 관우, 장비도 이때 유비를 따른다. 그러므로, 관우, 장비는 공손찬의 작전방식에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당양 장판파전투에서, 장비는 이십기를 이끌고 후방을 막을 때 눈을 부릅뜨고 모를 휘둘렀다(瞋目橫矛). 관우가 안량을 제거할 때도 아마 모를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관우가 사용한 병기가 도(刀) 혹은 검(劍)일 것이라고 본다. 다만 문제의 관건은 손잡이가 긴 도나 검은 기병위주의 전술에서 우선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고고학적으로 뒷받침도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관우가 먼저 모를 사용하여 관우를 찔러 말에서 떨어뜨린 후, 다시 몸에 차고 있던 도 혹은 검으로 그의 머리를 베었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고대인들이 검을 허리에 차고 다니는 전통은 아주 오래되었다. 저명한 홍문연에서도 "항장무검, 의재패공(項莊舞劍, 意在沛公)"이 있다. 한나라말기에 이르러, 조조의 권력이 조야를 뒤흔들 때, 천자가 그에게 "검리상전(劍履上殿)"의 특권을 내린다. 이는 조조가 조정에 나아갈 때, 더 이상 신발을 벗을 필요가 없고, 차고 있는 검을 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패검(佩劍)외에 당시에는 패도(佩刀)도 있었고, 다른 병기도 있었다. 동탁이 낙양에 들어온 후, 조정을 농단하며, 황제를 폐위시키고 새로 세우려 했다. 원소가 이에 반대하여 "횡도장이거(橫刀長輯而去)"했다. 그리고 강동버전의 홍문연에서 능통(凌統)은 일찌기 여몽(呂蒙)집에서의 연회때 칼춤을 추어 흥을 돋구면서, 부친의 복수를 꾀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미리 대비한 감녕(甘寧)이 따라 일어나서 쌍극(雙戟)이 서로 마주하게 된다.

도, 검, 모는 모두 관우가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는 병기들이다. 그래서, 송나라에 이르러 관우의 병기에 관한 추측에 의견일치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도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검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모 내지 다른 병기라고 했다. 남조 양의 도홍경(陶弘景)은 <고금도검록>에서 유비가 검을 주조하여 그중 하나를 관우에게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관우가 보도를 주조했다는 전설도 있다. 당나라때 시인 낭사원(郞士元)의 <관우사송고원외환형주>에서는 "주마백전장(走馬百戰場), 일검만인적(一劍萬人敵)"이라고 했으며, 송나라때 문인 이치(李廌)는 <무후묘>에서 "장절기개세(仗節氣蓋世), 횡삭용관군(橫槊勇冠軍)"이라고 적었다.

기실, 위에서 언급한 논의는 모두 문인들의 상상일 뿐이다. 약간은 문학적인 색채가 묻어 있다. 소설 <삼국연의>에 나오는 청룡언월도를 보면, 마찬가지로 상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다른 점이라면, 다른 병기와 비교하여, 여러차례의 가공과 윤색을 거쳐 청룡언월도가 사람들에게 더욱 깊이 각인되어 있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이미 관우의 필수적인 장비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몇년전에 상영된 영화 <관운장>을 영문으로 번역한 제목은 "The Lost Blademan"이었다. "즉 길을 잃은 도객(刀客)이라는 것이다. 왜 세상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관우는 도(刀)를 쥐어야 했을까?

관우가 도를 사용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삼국지>권54 <노숙전>에 이런 기록이 있다: "노숙이 관우를 불러 서로 만났다. 각각 병마를 백보 떨어진 곳에 머물게 하고, 장군을 청해서 단도(單刀)만 갖추고 만나러 갔다." 소설에 나오는 "단도부회(單刀赴會)"는 역사상으로도 확실히 기록이 있다. 관우는 노숙과 논쟁을 벌이면서 도를 들고 일어나면서 상대방을 위협한 바 있다. 또한 <삼국지> 권36 <마초전>에 주석으로 인용된 <산양공재기>에는 "다음 날 코임에 마초를 불렀다. 관우, 장비가 도를 들고 서 있었다. 마초가 좌석을 둘러보다가 관우와 장비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똑바로 서 있는 것을 보고는 크게 놀라서 더 이상 유비를 자로 부르지 못했다." 원래 마초가 유비에 투항한 후 유비를 그의 자(字)로 불러서 관우, 장비가 불쾌해 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비의 뒤에 도를 들고 서 있었다. 이는 마초에게 경고를 한 것이고, 겁을 먹은 마초는 더 이상 범상(犯上)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관우가 사용한 도는 절대로 언월도가 아니다. 한나라때 가장 많이 쓰인 도는 환수도(環首刀)이다. 이건 단병기이다. 휘두르고 자라는데 쓴다. 악주박물관에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긴 환수도가 전시되어 있는데, 길이는 기껏 146센티미터에 불과하다. 그외에 당시에 백벽도(百辟刀)라는 것이 있었는데, 백번 제련하여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만드는 비용이 너무 비싸서 조조, 조비같은 사람들만이 만들 수 있었다. 그러므로, 환수도는 당시에 가장 널리 보급되고 가장 많이 쓰이던 도이다. 양쪽에 모두 날이 있는 것보다는 한쪽에만 날이 있는 도는 주조과정이 더욱 짧고, 간단하여 대량으로 만들기 유리했었다.

이전에, 검이 한때 도보다 환영을 받았다. 진한시기, 검은 귀족들에게 사랑을 받는다. 서주사자산 초왕묘에서 출토된 옥으로 만든 검이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한나라때 황제의 즉위식에서도 참사검(斬蛇劍)이 등장한다. 한나라말기에 이르러 사회가 어지러워지고, 무력이 각로군벌이 각축하는 주요 요소가 되면서 대량으로 주조하기 좋고 가격이 적게 드는 도가 점차 무인의 상징으로 된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 고대 제왕의 병기주조에 관한 신화도 약간은 변화하게 된다. 삼국시대이전에, 개국황제들은 모두 보검을 주조했다. 그러나 위진시대이후에 강성했던 국가나 정권은 대부분 보도를 주조한 이야기를 후세에 전하게 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검이 더욱 문인들에게 사랑받았고, 도는 무인들에게 더욱 실용적이었다. 문무를 겸비한 관우는 혁혁한 전공으로 인하여 후인들에게 기억되었다. 지금도 그는 "무성인(武聖人)'으로 모셔진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마땅히 보도를 사용해서, 자신의 주공인 유비를 도와 천하를 주유해야 했다. 당연히 도의 종류도 아주 많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청룡언월도가 되었을까?

청룡언월도의 "청룡"과 "언월도"는 구분해서 보아야 한다. 당,송때 이미 손잡이가 긴 대도가 나타난다. 예를 들어 저명한 맥도(陌刀)이다. 그리고 언월도는 송나라때 통상적으로 사용된 8종류의 군도(軍刀)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는 적을 죽이기 위하여 만든 것이 아니다. 명나라때의 모원의(茅元儀)가 쓴 <무비지(武備誌)>에서 언급된 언뤌도의 작용은 "칼을 들어 위풍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고, 실제 전투에 쓰는 것은 아니다." 이는 언월도가 단지 송나라, 명나라 군대내에서 쓰이는 의장용무기라는 것이다. 실용성은 없다는 것이다. 명나라이후의 무과 과거시험을 보면, 응시하는 참가자는 수십근 내지 백근의 팔힘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이 언월도를 잘 휘두를 수 있다. 이를 보면 언월도는 보통사람들이 휘두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더더구나 전투에서 사용되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관우는 예외이다. 송나라때는 관우를 신격화하던 시기이다. 불교, 도교 및 관방의 추진하에 관우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더욱 신격화되고, 민간에서는 한때 "관우가 치우와 싸우다"라는 전설까지 나왔다. 이런 관우는 당연히 보통사람들이 휘두를 수 없는 언월도를 휘두르면서 영웅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되는 것이다.

"관우숭배"가 심해지면서, 그는 이미 사람의 범주를 벗어났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이미 "신"이 되었다. 나아가 전설상의 '청룡신앙'과 결부된다. 관우는 아름다운 수염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상상하는 "용수(龍鬚)"와 맞추어지게 된다. 용은 고대 사람들에게 시조신이다. 관우는 현세에 사람들을 보호하는 신이다. 양자는 서로 통하는 점이 있다. 그외에 "청(靑)"은 관우의 대표적인 복장인 "청건(靑巾)"과도 어울린다. 이러한 여러가지 요소들로 인하여, "청룡언월도"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관우가 당연히 갖추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특성들을 가진 관우의 병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