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고산(高山)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은 심심하면 항상 고대의 명인들의 후손에 대하여 얘기하다가, 일단 관우의 이름이 나오면 사람들은 모두 할 말이 없어진다. 관우의 후손은 그다지 큰 공헌이 없으므로 언급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어떤 사람은 관우에게는 후손이 없다고 얘기한다. 도대체 관우는후손을 두었을까?
관우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동한 삼국시대의 대장이다. 또한 유비와 도원결의한 형제이기도 하다. 관방사서의 기재이건 아니면 역사연의소설의 묘사이건, 관우는 모두 충성과 의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는 온조참화웅과 천리주단기로 삼척동자도 아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영웅도 죽는 법이다. 건안24년(219년), 관우는 형주를 지키다가, 조조와 손권이 연합하여 관우를 기습하고, 또한 손권이 강릉성을 함락시키자 관우는 맥성으로 도주했고, 그때 동오 마충의 매복에 걸려 피살당한다. 최후로 손권은 관우의 수급을 조조에게 보낸다. 관우는 죽었지만, 정신은 남아 있다. 후세의 역대왕조는 그를 '관공'이라 존칭했고, 청나라때는 그를 '무성'으로 받든다. 전국각지에는 그의 조상을 만들어 관제묘를 만들어 제사지냈다. 관우는 후세에 명성을 크게 떨쳤는데, 그의 자손후대에 관한 이야기는 왜 전해지지 않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답하기 위하여는 먼저 약간의 자료를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무성부분지관씨종보(武聖府分支關氏宗譜)>이다. 이는 산동 연주(兗州)당안관에 소장되어 있는 관씨족보이다. 민국30년(1941년)이전에 편찬되었다. 그 외에 절강 항주와 광동일대의 민간사회에도 적지 않은 관씨족보가 있다. 그리고 이곳들에는 대량의 관제묘가 있고, 향불이 꺼지지 않는다. 그외에 현지의 관씨성의 사람들은 스스로 '한수정후(漢壽亭侯, 관우)'의 후손이라고 한다. 즉 관우의 후손은 대체로 산동 절강과 광동등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이런 것으로 그들이 관우의 후손이라고 확정할 수 있을까이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것만으로는 그들의 신분을 확정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외에 사람들이 잘 모르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건안23년(219년), 조인(曹仁)이 번성을 지키면서 관우와 싸울 때, 조인은 관우를 당해내지 못해서 조조는 방덕을 번성으로 파견하여 조인을 지원하게 했다. 후속전투에서 방덕은 관우에게 생포되고, 결국 관우는 그를 투항하도록 설득하는데 실패하자 죽여버린다. <삼국지>에 기재된 것처럼 "그리하여 관우에게 살해당했다" 당시에 관우가 방덕을 죽인 것은 잘못이 없다. 다만 우리가 이 일을 다시 검토하는 것은 관우의 자손들에게 화근을 남겼기 때문이다. 다음 해, 관우는 방덕의 전철을 밟는다. 동오에 생포되어 피살당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아들 관평(關平)도 함께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방덕에게도 아들이 하나 있었고, 이름이 방회(龐會)였는데, 그는 나중에 부친의 복수를 한다. 관우집안의 모든 후손을 죽여버린 것이다.
동진의 왕은(王隱)은 <촉기>에 이렇게 적었다: "방덕의 아들 회(會)는 종회, 등애를 따라 촉을 토벌한다. 촉을 격파하고, 관씨집안을 모조리 멸했다(盡滅關氏家)" 이에 대하여 역사학자들은 논쟁이 있다. 다만 <촉기>는 연의소설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신뢰성이 있다. 만일 한발 양보하여 방회가 관씨를 모조리 죽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관우의 후인이 살아남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촉이 멸망한 후, 관씨일족은 여러번 겁난을 당했기 때문이다. <삼국연의>에 묘사한 것과 마찬가지로, "태자 유관(劉瓘), 한수정후 관이(關彛)는 모두 위나라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병사와 백성이 크게 혼란에 빠져, 서로 짓밟아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다."
역사학자들은 연구를 거쳐 관우의 친족을 도표를 정리했다. 연의소설에서는 관우에게 3남1녀가 있다고 쓰여 있다. 장남 관평(關平), 차남 관흥(關興), 장녀 관은병(關銀屛), 그리고 삼남 관색(關索). 다만 정사에는 관우에게 단지 1남1녀가 있다고 적혀 있다. 즉 관흥과 관은병이다. 관흥에게는 모두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남 관통(關統), 차남 관이. 관통은 죽기 전에 자식을 두지 못했다. 관이가 위나라병사에게 살해당할 때도 자식이 없었다. 이렇게 보면, 관우의 직계혈족은 3대손까지 모조리 끊겼다. 만일 관우에게 후손이 있다면 그것은 방계혈족일 것이다. 즉 관우의 장녀인 관은병이 낳은 자식일 것이다. 그래서 엄격한 의미에서 관우의 후손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결론적으로, 관우의 후손을 토론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정사와 야사, 그리고 연의소설과 민간설화는 구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확한 답안을 도출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비록 여전히 많은 관씨성의 사람들은 자신이 관우의 후손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신뢰성이 높지 않고 계속 연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필자가 보기에 관우는 역사상 명인이므로 그래서 이렇게 후손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을 것이다. 그래도 이건 좋은 일이다. 관우의 정신이 천지간에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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