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지역사(知歷史)
사서에 이름을 남긴 여성은 아주 적다. 관우의 딸도 예외는 아니다.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건안24년(219년), 관우는 형주를 잃고, 아들 관평(關平)과 함게 오나라장수에 붙잡혀 살해된다. 그를 따라 도망쳤던 나머지 가족(그의 딸을 포함해서)의 행방에 대하여는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진수의 <삼국지. 관우전> 기록에 따르면, 관우에게는 아들 관흥(關興)이 있고, 그가 관우의 작위를 승계했다. 추측하건데 그는 나이가 어려서 성도(成都)에 남아 있었던 것같다. 그래서 부친과 함께 겁난을 당하지 앟은 것이다. 당연히 이렇게 추측할 수도 잇다. 아이는 전란중에 적의 눈에 잘 띄지 않아서, 쉽게 도망칠 수 있었다고. 그러나 어떻게 추측하든간에 관흥은 사서에 기록된 유일하게 살아남은 관우의 아들이다.
민간의 전설에 따르면 관우의 딸 관은병(關銀屛)이 성도로 도망쳐 살아남았다고 한다.
전해재는 바에 따르면, 관은경은 셋째 딸이어서 "관삼소저(關三小姐)"라 불리웠다. 나중에 제갈량이 남정할 때 내강도독(㾢降都督) 이회(李恢)의 아들 이울(李鬱)에게 시집을 갔다고 한다. 촉한대군이 남정에서 개선한 후, 이회는 전공으로 한흥정후(漢興亭侯)에 봉해지고, 안한장군(安漢將軍)의 직위를 추가로 받는다. 관은병과 이울은 건녕군 유원현(兪元縣, 이회의 고향)에 머물렀고, 현지 백성들을 다독이고 한족과 소수민족의 교류, 융합을 촉진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고, 사후에 부부는 합장된다.
'유원'은 지금이 윈난성 위시시(玉溪市)이다. '관삼소저묘'는 위시시 청장현(澄江縣)에 있다.
당연히 이는 그저 민간전설일 뿐이다. 진수, 배송지는 모두 이울과 관은병에 관해 기록해 놓지 않았다.
<삼국지.이회전>에서 이회의 아들은 이유(李遺)라고 했다. 필자의 추측에 따르면, "유(遺)"자의 독음은 "wei (4성)"이다. 그래서 민간전설에서의 "이울"의 "울(鬱)"자는 아마도 잘못 쓰여진 것일 것이다. 현지인들은 그저 'Li Wei'라고만 알고 있는 것이고, 사서에는 '遺'로 쓴 줄 모르고 잘못 '鬱'로 적었다는 것이다.
후인들 중에서 이를 고증해본 사람은 없다.
명,청시기이후에 이 '이울'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기 시작한다.
관삼소저묘의 비석에 남아 있는 묘비는 청나라 선통3년에 세웠다. <도광징강부지(道光澄光府誌)>에서도 이를 "한이울부인관씨묘(漢李鬱夫人關氏墓)"라고 하고 있다.
정중각(正中刻): 한충신흥정후자이공휘울(漢忠臣興亭侯子李公諱鬱), 한수정후녀관씨삼저지묘(漢壽亭侯關氏三姐之墓)
양측비련(兩側碑聯): 묘근성인궁(墓近聖人宮), 부녀상규지수보(父女相睽只數步)
신유형양계(神遊荊襄界), 백혼장한어천추(魄魂長恨於千秋)
1989년, 위시시정부는 이 묘를 수리보호했다. 2001년, 위시시정부는 제1차 시급문화재보호단위로 지정한다.
고고학적 각도에서 보자면, 묘주인을 확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다만 '관은병과 이울'은 이미 현지에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수백년간 전해내려온 이야기이다. 현지인들의 '관삼조서'에 대한 존경의 마음은 지속되어 왔다. 여러 해동안 현지인들은 희극, 소설등 예술작품도 창작하여 이 전설 속의 '관삼소저'를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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