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방관경(逄冠卿)
홍학에는 유파가 아주 많아서, 도대체 몇개의 유파가 있는지에 대하여 확실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홍학유파의 구분에 관하여 과거 각 홍학사연구자들은 서로 다른 견해를 취했다. 호적(胡適)이 보기에 홍학은 오직 2개파였다. 구홍학의 색은파(索隱派)와 신홍학의 고증파(考證派)이다. 당금 주류홍학계는 일반적으로 3대유파로 구분한다. 고증, 색은 두 파 이외에 평점파(平點派)를 추가한다. 주여창(周汝昌)은 홍학을 4대 문류(門類)로 나누었다. 역시 4대유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조학(曹學), 지학(脂學), 판본학(版本學), 탐일학(探佚學)이 그것이다.
당금 홍학계는 백화제방 백가쟁명이다. 여러가지 새로운 학설이 속속 나오고 있다. 비록 광괴육리(光怪陸離), 어룡혼잡(魚龍混雜)의 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살펴볼만하고 논리적인 새로운 관점도 적지 않다. 홍학유파의 구분에 관하여 일찌감치 오늘날의 모든 홍학학설을 포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당금 홍학계의 각종 학설의 형식과 내용을 구분해보면 12개 정도의 유파로 정리하는 것이 비교적 타당해 보인다. 그럼, 아래에서 홍학12파를 하나하나 소개해보기로 한다.
- 평점파(評點派)
이는 홍학계에서 배분이 가장 높고, 가장 오래된 학파이다. <홍루몽>의 창작과정에서, 지연재(脂硯齎) 어르신이 여러번 평했다. 홍학의 개산비조(開山鼻祖)라 할 수 있다. 청나라때의 학자 왕희렴(王希廉), 장신지(張新之), 요섭(姚燮)이 평점한 홍루몽도 홍학사상 중요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 근대 국학대사 왕국유(王國維)의 <홍루몽평론(紅樓夢評論)>은 바로 당대홍학의 개산지작(開山之作)이다. 과거 어떤 사람은 왕희렴을 홍학 색은파에 소속시켰는데, 그것은 정확하지 않다. 왕희렴등은 단지 평점을 했을 뿐이고, 수수께끼를 푸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색은파와는 관계가 크지 않다.
2. 색은파(索隱派)
이는 구홍학의 골간유파이다. 청나라 건륭연간의 항주에서 발원했고, 절서(浙西, 절강서부)에서 성행했다. 아주 오래된 유파이다. 대표인물은 청나라때의 주춘(周春), 왕몽완(王夢阮), 심병암(沈甁庵)등이다. 근대학자인 채원배(蔡元培)는 이 학설의 집대성자이다. 색은파의 주요 논점은 "명주가사설(明珠家事說)", "장후가사설(張侯家事說)", "청세조옥동소완고사설(淸世祖玉董小宛故事說)", "강희조정치상태설(康熙朝政治狀態說)"등이 있다. 모두 정사 혹은 패사(稗史, 야사)의 일부 자료 내지 야사전설을 근거로 하여 <홍루몽>에 부회(附會)하는 학설이다.
어떤 사람은 1920년대 호적의 고증파가 득세한 후, 홍학의 색은파는 끝났다고 여긴다. 그 견해는 어느 정도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색은파는 홍콩 대만등지에서 오랫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으며, 최근 들어 대륙에서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점점 더 강성해지는 추세이다. 특히 처음 홍학에 발을 디딘 사람들이 따르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인물이자 학술저작으로는 수방삼(隋邦森)의 <석두기밀마(石頭記密碼)>가 있다. 그 색은의 광도(廣度)는 옛날 색은파들보다도 훨씬 더 나아간다. 부회하는 심도(深度)도 옛날 색은파들보다 더더욱 '수수께끼풀이식'이다.
3. 반만파(反滿派)
반만파의 주요학술관점은 이러하다: <홍루몽>의 주요목적은 "반청조명(反淸弔明)" 혹은 "반청복명(反淸復明)"이며, 풍월번화한 겉모습 아래에 피눈물이 스며있는 "민족주의작품"이라는 것이다. 이 파의 대표적인 인물은 수붕비(壽鵬飛), 반중규(潘重規), 등광언(鄧狂言)등이고, 채원배도 골간인물이다. 주요 학술저작은 <홍로몽석진(紅樓夢釋眞)>, <홍루몽본사변증(紅樓夢本事辨證)>등이 있다. 당금 홍학계에 이 학설을 취하는 사람이 아주 많고, 주광동(朱光東)과 그의 <홍루몽한민족정신연구(紅樓夢漢民族精神硏究)>는 그중 대표작이다.
과거 홍학계는 이 파를 색은파로 분류했다. 그러나 그건 편파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만파와 색은파의 관계는 확실히 구분된다: <홍루몽>이 반만사상을 가졌다고 연구판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색은의 방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색은파학설은 반드시 반만의 결론을 가져오지 않는다. 청나라때 3대 "가사설'은 모두 반만의 연구판단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당시 수방삼등은 만주족문화 혹은 기인문화(旗人文化)를 찬양하는 사람이다. 오직 채원배의 학설만이 양자를 모두 겸비하고 있고, 양파에 모두 걸쳐 있다. 당대학자 주광동도 채원배의 뒤를 밟는 사람이다. 그이 연구에는 일정한 내공이 있으며, 볼만한 내용들이 있다.
4. 고증파(考證派)
고증파는 고거(考據)의 방법으로 <홍루몽>의 '작자와 판본'을 연구하는 학파이다. 색은파의 부회방법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어떤 사람은 고증홍학의 창시자를 호적이라고 하는데, 기실 맞지 않는다. 처음 고증의 방법으로 <홍루몽>의 작자가 조설근(曹雪芹)이라고 단정한 사람은 유평백(兪平伯)의 조부이자, 청나라때 박학대사(朴學大師)인 유월(兪樾)이다. 고증파의 대표인물로는 호적, 유평백, 주여창등이 있다.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홍루몽고증> <홍루몽변(紅樓夢辯)>, <홍루몽신증(紅樓夢新證)>등이 있다. 모두 당대홍학의 기초를 닦은 저작들이다.
건국후 홍학고증파는 점차 힘을 잃어갔다. 원인은 한편으로 '조가호증(曹賈互證)'의 비과학적 방법에 있고, 다른 한편으로 정치사회적인 원인도 있다. 호적은 '주관유심주의'로 비판받았고, 유평백은 정상궤도를 벗어나 "홍학은 <홍루몽>에 반한다"고 주장했고, 주여창은 또 다른 길을 찾아 '탐일홍학'이라는 길로 들어섰다. 최근 들어 적지 않은 '초근홍학가'들이 <홍루몽>을 위해 "20여명의 작자"를 찾아냈고, 이들이 가는 길은 호적의 "가설은 대담하게, 증명은 조심해서"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모두 가설이 너무 대담하고, 고증은 조심하지 않는 혐의가 있다.
5. 정치파(政治派)
정치파는 건국후 "관방홍학"의 총칭이다. 중국홍학회는 계속 이 파를 주도하고 있다. 정치파의 치학종지는 말 그대로 당대정치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계급투쟁홍학을 연구하는 것이다. 54년 비유(批兪, 유평백비판)에서 문혁평홍(評紅)까지 정치파는 역대정치운동에 힘을 더하면서 목숨을 연명해왔다. 그 대표인물은 "홍광사(洪廣思)"와 "양개소인물(兩個小人物)"이 있다.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홍루몽은 계급투쟁의 책이다> <계급투쟁의 형상역사 - 홍루몽을 평한다>, <홍루몽간론(紅樓夢簡論) 및 기타에 관하여>등이 있다.
문혁이 끝난 후, 발란반정(拔亂反正)된 이후, 계급투쟁홍학관점은 철저히 청산되지 못했고, 정치파의 대표인물은 여전히 활약하고 홍학무대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지금, 비록 그들은 더 이상 감히 홍학연구가 계급투쟁, 노선투쟁을 위해 봉사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들의 주요 관점 예를 들어, "홍루몽은 봉건사회몰락시기의 역사이다" "전체 봉건사회의 거울이다"등은 홍학영역에서 여전히 많은 연구자들이 스스로 따르거나 반복하여 기술하고 있다. 홍학의 문혁유풍(遺風)은 많은 홍미(紅迷)들 사이에 여전히 시장이 있다.
6. 탐일파(探佚派)
탐일파의 원래 뜻은 홍루몽의 산일(散佚)된 후반부분의 진실한 내용과 "옛날 고본"과 금본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탐색하는 것이다. 고증파에서 "작자와 판본"을 연구하는 것과 겹치는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탐일파의 개창자이자 대표인물은 주여창이다. 당대 홍학가 양귀지(梁歸智)는 현재 탐일파의 중견인물이다. 탐일파의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홍루십이층(紅樓十二層)>, <누가 지연재가 상운(湘雲)이라는 것을 알까> <홍루진영(紅樓眞影)> <석두기탐일> <잃어버린 세계 - 홍루몽일화(佚話)>등이 있다.
탐일파는 고증파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다. 주여창선생이 초기에 명성을 얻은 저작인 <홍루몽신증>은 고증파에 속하지 탐일파에 속하지 않는다. 말년에 출판한 많은 논문집과 소책자는 모두 탐일파의 범주에 속한다. 탐일파의 연구는 더 이상 고증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색은파와 유사한 '수수께끼풀이'식의 방법을 사용한다. <누가 지연이 상운임을 알까>는 그 전형적인 대표작이다. 일찌기 TV드라마 <조설근>에서도 채용되었고, 전국에 큰 영향을 끼친다. 탐일파의 학설은 과학성이 부족하지만 취미성은 아주 강하다. 그래서 홍학계 내에서 일정한 시장이 있다.
7. 신비파(神秘派)
소위 신비파는 탐일파가 키우고 변질되어 갈라져 나온 홍학유파이다. 대표인물은 곽국령(霍國玲) 삼형제자매와 유명작가 유심무(劉心武)이다. 대표적인 저작은 <홍루해몽(紅樓解夢)> <해석진가경(解析秦可卿)> <유심무게비홍루몽(劉心武揭秘紅樓夢)>등이 있다. 신비파의 최대특징은 허황한 수법으로 <홍루몽>을 해석한다는 것이다. 작품 뒤의 신비사건과 신비인물을 탐색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진가경은 폐태자의 딸이다." "조설근과 축향옥(竺香玉)이 공모하여 옹정제를 독살했다"는 등이다. 신비파작품은 소설로 읽으면 된다. 학술성과로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8. 지위파(脂僞派)
지위파는 말그대로 <홍루몽> 지본(脂本)을 위서(僞書, 가짜책)로 보고, 지연재도 위인(僞人, 가짜인물)로 보고, 조학(曹學)도 위학(僞學, 가짜학문)으로 보는 홍학유파이다. 이 파의 대표인물은 구양건(歐陽健), 극비(克非), 곡목(曲沐)의 세 교수이다. 홍학의 신예 진림(陳林)도 이 파에 넣을 수 있다. 대표적인 학설은 "정전지후설(程前智後說)", "도수작위설(陶洙作僞說)"이다. 정고본(程高本)<홍루몽>이 모든 판본의 근원으로 보고, <홍루몽>120회는 완전본으로 보는 것이다. 지위파는 비록 중파경립(重破輕立, 기존학설을 부정하는 것을 중시하고, 새로운 학설을 세우는 것은 경시함)의 약점이 있지만, 거짓된 내용들을 파헤치고 홍학계를 정화시킨 공로는 거대하다. 그래서 독립된 유파로 본다.
9. 풍아파(風雅派)
풍아파의 대표적인 인물과 가장 창조적인 연구자는 저명한 작가인 호문빈(胡文彬)이다.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홍변좌어(紅邊脞語)>, <홍변만필(紅邊漫筆)>, <몽향정치독홍루(夢香情痴讀紅樓)>, 주향차농설홍루(酒香茶濃說紅樓)가 있다. 주로 <홍루몽>의 금기서화(琴棋書畵), 화조충어(花鳥蟲魚)등 풍아한 것들을 고증연구하는 것에 치중한다. 호문빈은 또한 <열장본석두기관규(列藏本石頭記管窺)>, <홍로몽재국외(紅樓夢在國外)>, <홍루몽자제서(紅樓夢子弟書)>등 저작도 있어, 전문적으로 <홍루몽>의 문화전파를 연구한다. 풍아파는 치학이 엄근하고 글이 아름답지만, 어떤 때는 너무 지엽적인데 치우치는 폐단도 있다.
10. 제영파(題詠派)
제영파는 구홍학의 주요유파이다. 주요 대표인물은 청나라때의 숭륜(崇倫), 환명(喚明)등이 있다. 대표적인 작품은 <홍루몽제사(紅樓夢題詞)>, <금릉십이채영(金陵十二釵詠)>등이 있다. 그리고 많은 여성시인들도 거기에 참여했다. 제영파의 시, 사, 부, 찬은 <홍루몽>을 읽고 느낀 인상을 쓰는 식의 비평이다. 모두 번화지경과 향염지정에 대한 그리워하는 마음을 드러내고, 부귀영화가 쉽게 지나가고 인생은 꿈과 같다는 무력한 비정을 읊기도 한다. 제영파의 작품을 연구하는 것은 <홍루몽>이라는 책이 당시에 전파된 것이나 영향이 있었다는 것을 연구하는데 크게 가치가 있다.
11. 경제파(經濟派)
소위 홍학경제파는 <홍루몽>의 "사도경제(仕道經濟)"와는 관계가 없다. <홍루몽>책에 나오는 원림건축, 금기서화, 음식남녀를 빌어 현지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하나의 유파이다. 옛날 홍등구가 대관원 및 임매매(林妹妹)의 이름을 빌려쓰는 것은 유래가 깊다. 현재도 "홍루연(紅樓宴)", "조설근가주(曹雪芹家酒)", "조설근고거(曹雪芹故居)"등으로 경제를 진작시키는 것이다. 이는 북경, 남경 및 관련각지에 퍼져 있다. 엄격히 말하자면 경제파는 학술유파라 할 수 없다. 다만 <홍루몽>을 보급하는데에는 공헌이 있으니, 완전히 말살할 수는 없다.
12. 시미파(猜迷派)
주로 홍루몽 책에 나오는 "미어(謎語)" "은어(隱語)" 내지 제목이나 정문을 가지고 수수께끼를 풀이하는 방식으로 그 배후에 솜은 비밀을 탐색하는 홍학유파이다. 시미파와 색은파는 약간 다르다. 색은파는 사료를 가지고 수수께끼를 풀이하는데 반하여, 시미파는 '해음(諧音, 같은 발음의 다른 글자)' 도독(倒讀, 거꾸로 읽는 것)등의 기이한 방식으로 수수께끼풀이를 하는 것이다. 시미파는 많은 경우 인터넷에서 글을 쓰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안효령(安曉玲), 고동진인(古洞眞人)등이 있다. 조인부자(曹仁父子)의 '가사진출가(假死眞出家)라든지, 조손3대가 분업하여 <홍루몽>을 함께 창작했다든지하는 것들이 있다. 그 방법은 비록 학술적이라 할 수 없지만, 읽기에 편하고 재미가 있어, 따르는 사람이 많아 하나의 유파를 이루었다.
여기까지 얘기하다보니,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이 12개 유파중에는 학술적인 유파도 있고, 어떤 유파는 학술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간다고. 그렇다. 확실히 그렇다. 설사 학술에 속한 유파라고 하러다도, 어떤 경우는 아직도 생기가 발랄하지만, 어떤 경우는 이미 일박서산(日薄西山)이고, 어떤 경우는 이미 문을 닫았다. 그러나, 홍학은 <홍루몽>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광의의 정의에 따른다면, 어떻든 모두 <홍루몽>과 관련이 있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12개유파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유파를 어떻게 볼 것인지, 어느 유파를 따를 것인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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