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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홍루몽

모벽강(冒辟疆): <홍루몽>의 진정한 작자

by 중은우시 2023. 4. 22.

글: 주한경(周漢卿)

 

먼저, 가장 먼저 모벽강이 <홍루몽>의 작자라고 주장한 사람은 계림재자(桂林才子) 증절명(曾節明) 선생이다. 증절명 선생의 문학적 소양은 아주 뛰어났다, 그는 <홍루몽>의 내용을 통하여 모벽강이 진정한 작자라고 판단했다. 필자는 비록 십여년전에 <홍루몽>의 작자가 모벽강이라고 추측했지만, 필자는 교과서에 도전할 용기가 없었다. 오늘 증절명 선생이 필자와 거의 비슷한 견해를 가진 것을 보고나서, 이 글을 쓸 용기가 생겼다.

 

필자는 증절명 선생을 높이 평가한다. 그는 사람됨이 정직하고, 인생의 추구가 있으며, 오성(悟性)이 아주 뛰어나다.

 

필자가 모벽강이 <홍루몽>의 작자라고 판단한 것은 논리로 추론하여 얻어낸 것이지, 문학을 통한 것이 아니었다. 필자의 문학적 소양은 증절명 선생의 십분의 일에도 못미친다.

 

필자가 <홍루몽>을 읽었을 때, 여러번 "달자(韃子, 오랑캐)"라고 쓰여진 글자를 읽고는 아주 기이하게 여겼다(포의인 조옹(曹禺)가족이 만청을 달자라고 쓸 수 있을까?). 다시 <청사고>와 몇권의 청나라사서에 아예 "조설근(曹雪芹)"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발견한다. 교과서에서 말하는 조옹 가족에 '설근'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이때 필자는 판단했다. "조설근"은 필명이라고. <홍루몽>은 옹정,건륭때 쓴 것이 아니라고. 오히려 순치, 강희때 쓴 것이라고. 순치, 강희시기라면 바로 남명(南明)시기이다.

 

남명시기의 작자가 "조설근"이라는 필명을 썼다면, 분명 작자는 자신의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근(芹)"은 10도이하에서는 죽는다. "설근(雪芹)"이라는 것은 작자가 망국지인(亡國之人)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중국의 성씨는 수백개인데, 작자는 굳이 "조(曹)"를 성으로 썼다. "조"라는 성을 들으면 바로 생각나는 것은 "삼조(三曹)" 즉, 조조, 조식, 조비의 대문호이다.

 

"조설근"이라는 이 필명은 바로 작자가 망국의 사대부대문호라는 것을 말해준다.

 

명나라말기, 지리학자 서하객(徐霞客)도 있고, 해적상인 정지룡(鄭芝龍)도 있고, 국성야(國姓爺) 정성공(鄭成功)도 있으며, 사상가 고염무(顧炎武), 이지(李贄), 왕부지(王夫之)도 있고, 영원총병(寧遠總兵) 오삼계(吳三桂)도 있다. 그러나 대문호를 얘기하자면 필자가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모벽강과 김성탄(金聖嘆)이다.

 

모벽강과 김성탄중 누가 <홍루몽>의 작자일까? 필자는 모벽강이라고 추측한다. 왜냐하면, 모벽강과 동소완(董小宛)의 이야기는 명나라말기에 아주 유명하다. 모벽강은 바로 남명의 유영(柳永, 송나라의 유명한 사인)이다. 오직 모벽강, 유영같은 치정대문호(痴情大文豪)만이 <홍루몽>같은 책을 써낼 수 있다. 김성탄같은 정인군자 강철직남(鋼鐵直男)은 <홍루몽> <금병매>같은 작품을 써낼 수가 없다.

 

소완입궁, 순치출가, 효장출가, 역사자료를 조금만 읽어본 사람이라면 모두 진위를 알고 있다. <홍루몽>을 이해라려면 '조설근'이 진정 표현하고자 했던 것을 알아야 한다.

 

임대옥과 동소완

모벽강과 가보옥

순치와 가보옥

효장과 가모

만청과 가부

 

대명의 대문호 모벽강은 망국의 치욕에 직면하고, '처'를 빼앗긴 원한으로, 더 이상 살고싶지 않을만큼 고통스러웠다. 만청의 문자옥통치하에서 '조설근'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쓴다. 애인 동소완이 황궁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고, 순치제가 출가하는 것을 보고, 조설근은 돌맹이라고 스스로를 비유하면서, 남명의 비가를 배경으로, 집안의 원한과 나라의 원한을 개인일생의 사랑과 원한으로 <석두기>에 써넣은 것이다. 후세에는 <홍루몽>이라고 부르게 되고.

 

모벽강과 동소완의 이야기, 오삼계와 진원원의 이야기, 심복과 운낭의 이야기, 유영의 이야기, 사마상여의 이야기는 여권주의자들에게 읽어보기를 권한다. 중화는 자고이래 정이 많은 남자들이 많았다. 강산보다 미인을 더욱 사랑한.

 

중국의 호적들과 노신들은 착실하게 학문을 하기를 권한다. 더 이상 우회추월하려고 하지 말고. <석두기><홍루몽>의 이렇게 명백한 복선을 호적은 보지 못했고, 호적은 <홍루몽>의 작자인 "조설근"이 포의 조옹의 가족이라고 하였다.

 

호적의 자는 적지(適之)이다. 사람은 그 이름과 같이 명확히 "적당하게" 했다. 호적,노신이 왜 '신문화운동'을 했는가? 독자들은 그들의 성적표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노신은 일본의 센다이의과대학에서 공부했는데, 모든 과목중에서 오직 문학만이 우수했다.나머지 모든 과목은 불합격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노신의 수준은 중국과 일본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었다. 노신은 유명해지고 싶었고, 그저 우회추월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문학비판이다.

 

전목(錢穆), 황흥(黃興), 장태염(章太炎), 진인각(陳寅恪)은 사대부집안 출신이고, 전문지식이 우수했다. 그들은 착실하게 역사를 연구하고, 정치체제를 연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적은 그렇지 않았다. 호적은 <사기>조차도 읽어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관직도 얻고 돈도 벌고 싶었다. 그럴려면 '신문화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