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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홍루몽

<홍루몽>작자: 효렴공(孝廉公)과 조설근(曹雪芹)

by 중은우시 2020. 1. 16.

글: 토묵열(土默熱)


호문빈(胡文彬) 선생의 <부상담홍류유고(扶桑談紅榴遺稿) - 황준헌(黃遵憲)과 일본우인의 홍루몽필담>이라는 글에서, 청나라 광서4년 무인년(1878년) 중국근대의 저명한 학자이자, 대시인이며 당시 일본대사관 참찬으로 있던 황준헌이 대사관직원인 매사(梅史), 칠원(漆園), 추선(樞仙)등을 데리고, 일본우인과 홍루몽 및 그 작자에 관하여 필담을 나누었다. 일본의 <대하내문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다:


문: <홍루몽>이라는 책의 작자는 누구인가? 그가 쓴 것은 어느 시대를 가리키는가?


매사가 답하다: 전반은 효렴공이 썼고, 후반은 조설근이 완성했다. 보옥은 명주(明珠)를 가리키고, 강희말기의 재상이다. 나중에 권력을 농단하고 간악한 일을 저질러 실패하고 죄를 받았다.


매사가 말한 <홍루몽>의 '전반'은 전80회를 가리키고, '후반'은 후40회를 가리킨다. 황준헌, 매사등은 비록 증거를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이를 보면 청나라 광서 초기 문학계에서 일반적으로 <홍루몽>의 원작자는 바로 '효렴공'이라는 사람으로 생각했고, 조설근은 단지 속서작자(續書作者)이며 전체 책을 완성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매사가 말한 '보옥은 명주를 가리킨다'는 것은 당연히 색은파(索隱派)의 '명주가사설(明珠家事說)로 간접적으로 <홍루몽>은 강희초기의 작품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매사가 말한 <홍루몽>전반의 작자를 강희연간의 모 '효렴공'이라는 것은 광서시기의 문인들이 아무런 근거없이 추측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고장난명(孤掌難鳴)의 주장도 아니다. 건륭연간 진용(陳鏞)의 <저산헌총담(樗散軒叢談)>(가경9년 청하재 간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홍루몽>은 실로 재자(才子)가 쓴 책이다. 처음에는 작자가 누구인지 몰랐다. 혹은 강희연간 경사(京師) 모부(某府)의 서빈상주(西賓常州) 모효렴이 쓴 것이라고 했다. 여러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는데 모두 초록(抄錄)이고, 간본(刊本)이 아니다. 그때 본 사람은 아주 적었다. 건륭54년 봄, 소대사구가(蘇大司寇家)에서 책이 쥐에 쓸려서, 유리창의 서방에 보내어 장정을 새로 하게 했는데, 서방의 사람이 이를 초록하여, 인쇄후 간행하여 이익을 취했다. 오늘날 천하에서는 모두 <홍루몽>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홍루몽120회의 원서(原書)는 단지 80회였고, 나는 그것을 보았다. 후40회는 간행때 호사가가 보완해서 쓴 것이다. 원래의 글에 많이 못미친다. 볼만한 것이 없다. 최근 듣기로 더더욱 <속홍루몽>이 있다고 한다. 비록 내가 보지는 않았지만,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사가 말한 "효렴공"이 바로 진용이 말한 "강희연간 경사 모부 서빈상주 모효렴"일까? 비록 양자를 연결시킬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홍루몽>의 원시작자가 강희제때의 '모효렴'이라는 주장은 확실히 아무런 근거없는 것이 아니다. 진용은 <홍루몽> 후40회의 속작자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다. 다만 이 책은 건륭연간 '간행때 호사가가 보완해서 쓴 것'이라고 했다. 이 '호사사'와 매사가 말한 조설근을 연결시켜 보면 아무런 근거없는 추측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정고본(程高本) <홍루몽>의 출판자는 정위원(程偉元)이다. 건륭말기 <홍루몽>에 쓴 <서(序)>에서 이렇게 말했다: "<홍루몽>소설의 본명은 <석두기>이다. 작자는 전해지는 바가 서로 다르다(相傳不一). 그러나 누구에게서 나왔는지는 알지 못한다. 오직 책안에서 조설근 선생이 여러번 삭제하고 고쳤다(刪改數過)" 이를 보면, 정위원은 조설근을 작자로 보지 않았다. 그저 '산개수과'한 사람으로 보았다. 작자는 '상전불일'하다. 그래서 정위원은 의문을 품은 태도로 대했다. 다만 원작자가 따로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했다.


정워원시대와 가까운 유서(裕瑞)는 그의 <조창수필(棗窓隨筆)>이라는 책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듣기로 예전에 <풍월보감>이라는 책이 있는데, 다른 이름은 <석두기>이다. 누가 쓴 것인지는 모른다. 조설근이 이를 얻어서, 가까운 시기의 인정과 언어로 윤색했고, 이를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썼다. 이 책을 전하게 된 자가 자신의 집안 사적과 비슷하게 된다. 차제발휘(借題發揮)하여 이 책은 다섯번이나 고쳐썼고, 갈수록 기이해졌다...."


같은 류의 주장은 청나라때 여러 문인의 필기에 나온다. 예를 들어 광서23년 구위애(邱煒薆)의 <숙원췌담(菽園贅談)> 권4에도 모 <석두기> 80회초본을 언급한다:


"이 책은 옛날에 초본(抄本)이었고 단지 80회였다. 예운구(倪雲癯)가 각본을 본 적이 있는데, 역시 80회였다. 뒤의 40회는 나중에 붙여서 책으로 만든 것이다. 누구인지는 증거가 부족하다. 혹은 이전 80회는 국초때의 사람의 것이고, 후40회는 설근이 증가시켜 넣은 것이다."


구홍학 색은파의 대표인물중 하나인 왕몽완(王夢阮)은 <홍루몽>의 성서연대(成書年代)와 작자에 대하여 정교하게 분석한 바 있다:


"대체로 이 책은 건륭가정때 고쳐썼다. 기록된 내용은 많은 것이 순치강희때의 일이다. 특히 2,3여자는 친히 듣고 친히 보았다. 양대의 성쇠(盛衰)는 노래하고 눈물흘릴만하다. 강산과 헌신짝, 그 일은 고금에 없던 기이한 이야기이다. 규각 풍진도 그 사람은 역시 얻기 힘든 우물(尤物)이다. 이것이 그대로 파묻히는 것은 도저히 참지 못하겠고,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쓰는 것은 감히 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소설의 형식을 빌어서 한정(閑情)을 섞어서, 보대(寶黛, 보채 대옥)를 빌어 그 사람을 그리고, 영녕(榮寧 영부 녕부)로 그 일을 쓴 것이다."


왕몽완은 이렇게 생각한다: <홍루몽>은 비록 건륭,가정시기에 '개작'한 작품이지만 책안에 쓴 '남다른 여자'는 댱대의 성쇠이고 노래하고 눈물을 흘릴 '순치, 강희때의 일'이다. "책은 도홍헌(悼紅軒)에서 완성되었고 ,조설근선생이 5번 넣고 뺐다. 이 책에서 분명하게 말한 것이다." 다만, '책의 완성'은 바로 '넣고 빼는 것', '개작'을 말한다. 원시창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뜻은 이 책은 조설근을 통해 수정되었고, 당초에 창작한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왕몽완은 이에 대하여 추가적으로 분석하여 이렇게 말한다:


책의 제1회 전반부에 말한 것은 바로 초창자의 자서이다. 일은 친히 듣고 친히 본 것이다. 책의 완성시기를 추측해보면, 강희중엽일 것이다. (건륭조에 이르러) <홍루> 책은 내정에서 검토한 후 금본으로 한다. 조설근선생은 부득이하게 게속 수정했고, 계속 감추려고 했지만, 그 진면목은 잃지 않았다.


왕몽완은 비록 조설근이 <홍루몽>의 원작자는 아니라고 생각했고, 당초의 '초창자'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조설근은 <홍루>의 공신이고, 그림을 그린다면 능연제일(凌煙第一)일 것이다. 그러나 역시 당초의 원본이 비범한 구조를 지녔고, 나중의 사람도 분명 노력을 다 했을 것이다. 역사를 고증하는 사람은 불가불 20여명외의 별감(別龕)을 만들어 양군(兩君)을 제사지내야 할 것이다." 비록 그러하지만 왕몽왕는 초찿자가 처했던 순치, 강희 양대의 문화배경을 가지고 <홍루몽>을 해석했다. 조설근이 처했던 건륭조의 시대배경으로 해석하지 않은 것이다:


"<홍루>를 읽으려면 오매촌집(吳梅村集)을 참고해서 봐야 한다. 거기에는 옛날에 들은 바를 많이 기록하고 있다. <홍루>를 보려면 또한 마땅히 왕어양집(王漁洋集)도 참고해서 봐야 한다. 거기에 증빙이 되는 것이 역시 적지 않다. <판교잡기(板橋雜記)>를 보지 않으면, <홍루>를 읽을 수 없다. 여러 사람의 내력을 알 수가 없다. 어디를 얘기하는지 꿈속과 같다. 청나라초기의 고사에 익숙하지 않으면, 홍루를 읽을 수 없다. 당시의 대사를 알지 못하면 어찌 친근하게 볼 수 있겠는가?"


왕몽완이 언급한 <홍루몽>의 참고서적은 '오매촌집'이건 '왕어양집'이건 아니면 여회(余懷)의 <판교잡기>이건 모두 청나라초기 순치,강희연간의 작품이다. 이것도 또 다른 측면에서 <홍루몽>은 '국초'에 창작된 소설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조설근이 수정하고 보완한 것은 건륭중엽이다. 어떻게 보더라도 이때를 '국초'라고 부를 수는 없다.


매사, 진용, 정위원, 유서, 왕몽완등의 주장은 홍루몽 전반부(즉 <석두기>)는 원시작자가 있고, 강희연간에 창작되었으며 조설근은 그저 후반부속사자(續寫者)라는 증거들이다. 그리고, <홍루몽>의 첫부분 제1회에 '출즉기명(出卽旣明)'이라는 4글자는 이 책의 출처에 대한 기재와 완전히 부합한다.


"공공도인(空空道人)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석두기를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본다....처음부터 끝까지 초록하여 돌아와 세상에 전했다; 공(空)에서 색(色)을 보고, 색에서 정(情)이 생기며, 정을 전하여 색에 들어가고, 색에서 공을 깨달으니, 이름을 고쳐 정승(情僧)이라고 하고, <석두기>를 <정승록>으로 고친다. 동로(東魯) 공매계(孔梅溪)는 제목을 <풍월보감>이라 한다. 나중에 조설근이 도홍헌에서 10년간 피열하며(披閱十載), 다섯번 넣고 빼고(增刪五次), 목록을 편찬하고, 장회(章回)를 나누고 제목을 <금릉십이채(金陵十二釵)>라 한다. 그리고 이런 절구를 쓴다: 만지황당언(滿紙荒唐言), 일파신산루(一把辛酸淚), 도운작자치(都云作者痴), 수해기중미(誰解其中味)


조설근이 <홍루몽> 후40회 속서작자의 가장 직접적인 증거는 역시 책 120회의 결미부분에 나오는 명확한 기재이다:


"이 날 공공도인은 다시 청갱봉(靑埂峰) 앞으로 지나갔다. 그 보천(補天)에 사용되지 않은 석게문(石偈文)을 보았다....나중에 다소 여러 인연을 거둔 결과의 말이 쓰여 있었다.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탄식했다: 나는 이전에 석형의 이 기이한 글을 보고 원래의 내용을 세상에 알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일찌기 초록하였다. 그러나 원래의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언재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복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내가 다시 한번 초록하여 세상에 일없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전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가우촌은 공공도인에게 도홍헌의 조설근을 추천한다. 공공도인은 과연 도홍헌을 찾아간다. 그 조설근 선생이 바로 거기에서 역대이래의 고사(古史)를 뒤적이는 것을 보았다. 공공도인으로부터 그를 통해 전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조설근은 웃으며 말한다: "너 공공은 원래 뱃속이 원래 공공이구나. 가어촌(假語村)의 말인데, 노어해시(魯魚亥豕) 및 배류모순(背謬矛盾)되는 것은 없다. 기꺼이 두 세 동지와 술마시고 배부를 때, 비오는 저녁 창 아래에서 적막함을 해소할 수 있겠다. 그리고 대인께서 굳이 세상에 전할 필요가 없다. 당신처럼 근본을 끝까지 찾아간다면 그것이 오히려 각주구검(刻舟求劍), 교주소슬(膠柱鼓瑟)이다." 공공도인이 그 말을 듣고는 앙천대소한 후 초본을 던지고, 표연히 떠났다."


책의 시작부분에 공동도인이 대황산 청갱봉에서 돌에 쓴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초록하여 돌아온 후 세상에 전했다' 말미에서 다시 공공도인이 돌에서 당초에 보지 못했던 '다소 인연을 거둔 결과의 말'을 본다. 이는 확실히 전후모순된다. 당초에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다 베꼈다면 다시 '다소 인연을 거둔 말'이 빠질 리가 없다. 이를 보면 후40회는 속서인이 보완해서 쓴 것이다. 원작자가 초창한 글이 아니다. 공공도인이 조설근에게 던지고' 간 초본은 그저 그가 '다시 초록한' '인연을 거둔 결과의 말'이다. 당초의 '처음부터 끝까지' 초록하여 돌아온 글이 아니다. 이를 보면 후40회를 쓴 사람은 도홍헌의 조설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홍루몽>책에 나오는 이 책의 출처에 관한 기록은 마땅히 <홍루몽> 작자의 가장 원시적이고 가장 효과적인 증거이다; 호적(胡適) 선생은 당초 단순히 한 구절 "고농교회(故弄狡獪)'했다는 것을 이유로, <홍루몽> 책의 원작자와 속서자에 관한 기재를 뒤집어 버렸고, '대담한 가설'로 피열증산한 조설근을 작자로 보았다. 그리고 그에 대하여 '조심스럽지 않은' '고증'을 하여 증거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책에서 말하는 원작자인 '석형'에 대하여는 증거가 없다고 보았다. 이는 학술적인 도덕에 맞지 않는 일이다.


<홍루몽> 책에 기록된 원작자 '석형'에서 정위원, 유서, 왕몽원이 기록한 강희연간의 '초창자' 그리고 진용, 황준헌이 기록한 강희연간의 '효렴공'까지. <홍루몽> 초창자 '석형'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주장도 끊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석두기>(홍루몽 젼80회)를 창작할 때, 초창자는 고의로 자신의 진실한 신분과 창작연대를 숨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석형'이 도대체 누구인지를 고증해내지 못했다.


필자는 35년간 세심하게 고증해 보았다. <홍루몽>과 청나라초기 정본문화(情本文化)와 강남세족문화(世族文化)의 관계에 착안하여, <홍루몽>과 <장생전>, <사선연>, <직금기>, <상사연>의 비교문학연구에서 출발하여, 홍씨가난(洪氏家難), 초원시사(蕉園詩社), 서계원림(西溪園林), 죽창접가(竹窓接駕), 장생전안등 작품창작소재에 대한 고증을 진행한 후, <홍루몽>은 명말문화기맥의 산물이며, 강남세족의 시례잠영(詩禮簪纓) 생활 '말세'의 제련(提煉)이다. 즉, <장생전>이라는 옛 부대에 새 술을 담은 것이다. 즉 소설화된 수마강(水磨腔)이고 이야기화된 매촌채(梅村體)이다. 이렇게 하여 자체적인 체계를 가지고 자원기설(自圓其說)의 홍학신체계를 이루었다.


토목열홍학은 홍루몽작자와 속서자의 원모습을 복원하는 것이다. <홍루몽>의 초창자는 강희때의 대문호, 시인, 극작가인 홍승(洪昇)이다. 소재는 홍승 본인, 가족 및 초원십이채의 진실한 생활에서 따왔다. 홍승의 신세내력은 책에서 토로된 작자와 평점자인 '석두' '근계' '지연'과 큰 관계가 있다. 그 신분은 바로 '홍상사(洪上舍)' 즉 국자감생이다. 경사에 있었던 기간동안 오랫동안 '서빈(西賓)'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가 바로 진용, 황준헌이 말한 '모부의 서빈', '효렴공'과 들어맞는다. 단지 그의 원적은 상주(常州)가 아니라, '삼생석반' 화류번화한 항주(杭州)일 뿐이다.


홍승이 당초에 쓴 <석두기>는 마땅히 80회 완성본이다. 김성탄(金聖嘆)이 <수호전>의 허리를 자른 수법을 본받아, 보옥의 태허환경꿈은 전체 책의 비극적인 결말을 암시한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공공도인이 비로소 '처음부터 끝까지 초록해서 돌아오고' '그러나 원래의 모습을 복원할 수 없었던' 원인이다. 강희43년 홍승은 친구인 조인(曹仁)의 초청을 받아, 강녕직조부로 가서 '삼일간 장생전을 마음껏 공연하고' 귀가하던 도중에 '눈물이 마르며 죽는다.(술을 마신 후 물에 빠지는데, 굴원이 멱라강에 몸을 던진 것이나 청련 이백이 채석기에서 달을 잡으려 한 것과 같다). 그가 몸에 지니고 있던 '행권(行卷)'은 조인의 집에 남겨두었다. 이 강희연간에 생활했던 강녕직조 조인이야말로 <석두기>책에 기록된 비열증산자인 조설근이다. 조인의 장서(藏書) <서사기원(書史紀原)>에서 '설근교자(雪芹校字)'라고 쓴 것이 그 증거이다.


홍승이 사망한 후, 조인은 '설근'이라는 이름을 쓴다. 홍승을 추도하는 마음에서 지은 강간시관(江干詩館) 즉 '도홍헌'에서 홍승의 <석두기>원고에 대하여 '비열증산'을 진행한다. 그는 원서의 <자서>와 <설자(楔子)>를 책의 첫부분 제1회에 집어 넣는다. 그리고 전체 책의 결말부분의 태허환경 꿈을 제5회로 앞당긴다. 그리하여 원본의 완전한 <석두기>는 꼬리잘린 잠자리가 된다. 이를 기초로 후40회를 추가로 쓴다. 그리하여 120회 <홍루몽>을 쓴다. 이렇게 하여 <홍루몽>이 정식으로 책으로 완성된다. 건륭연간에 정위원, 고악이 정리하여 간행하고 천하에 널리 퍼지게 된다.


조인(조설근)이 비열증산하는 과정에서, 고의로 전인의 작품을 표절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제120회의 결미부분에 명확히 자신이 도홍헌에서 쓴 것은 단지 '인연을 거둔 결과의 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책의 '제1회'에 '나중에 조설근이 도홍헌에서 십년간 비열하고 5번 증산하였다'는 말을 추가했다. 첫머리와 끝부분에서 자신은 단지 '비열증산'자라고 말한 것이다. 홍학계에서는 과거에 후40회이 속서인을 고악이라고 단정했었지만, 고악설이 파탄난 후 나중에는 '일명(佚名)' 혹은 '무명씨'로 추단된다. 기실 고악이건 무명씨이건 속서때 이렇게 조설근에게 얘기했을 리는 없다. 단지 조설근 자신만이 이렇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


호적 선생이 고증한 그 건륭년간의 조설근은 그저 <홍루몽>이 책으로 완성된 1갑자이후에 나온 이름을 사칭한 자일 뿐이다. 건륭연간 문단에서는 <홍루몽>을 보속(補續), 개편(改編)하는 것이 유행했다. 보속개편자들은 많은 경우 조설근이라는 이름을 쓴다. 심지어 조설근의 어머니인 '조대부인'이라고 쓰기도 한다. 이런 사칭자 조설근은 강희연간에 일찌감치 책으로 만들어진 120회본 <홍루몽>중 제22-35회의 줄거리를 개편하여 내용이 짧고, 줄거리가 간단하며, 내용이 단일하고, 앞뒤가 ㅘㄴ벽하며, 색정적인 내용의 소설로 만들고 여전히 <홍루몽>이라는 명칭을 쓴다. 이 개편된 <홍루몽>은 홍승원작, 조설근 개속의 <홍루몽>과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수준은 낮다. "그 책은 전해지지 않고 세상에 아는 사람이 없다" 최종적으로 실전된다. 


개편당시, 이 사칭한 조설근은 이 <홍루몽>을 명의(明義), 영충(永忠), 묵향(墨香)등 종실의 무리들에게 보여준다. 명의의 3수 영충의 20수 "제홍시"가 그 증빙이다. 호적 선생 및 당대 홍학자는 지록위마하여, 개편본 <홍루몽>을 원저 <홍루몽>으로 오인한 것이다. 건륭연간의 사칭자인 조설근을 <홍루몽>책에서 언급한 조설근으로 오인한 것이다. 그래서 백년홍학은 <홍루몽>을 건륭문화, 북경문화, 기인(旗人)문화로 해석하는 잘못과 비극을 범하게 된다.


토목열의 홍학연구성과는 결국 백년홍학이 오인하고 오해한 <홍루몽>을 말세문화, 강남문화, (한족)세족문화의 본래 면목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토목열이 연구한 <홍루몽>소설의 창작과정은 전인이 기재한 초창자 효렴공이고, 속서자는 조설근이라는 것과 완전히 부합한다. 토목열은 건륭 조설건의 <홍루몽>저작권을 부정한다.(이 홍루몽은 그 홍루몽이 아니다). 그리고 강희 조설근이 <홍루몽>의 초창자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강희 조설근이 홍승의 <석두기>에 후40회를 이어서 쓴 속서권을 가진다는 것은 인정한다. 속서문자의 시비공과는 또 다른 문제이다. 토목열도 왕몽완의 평가에 동의한다: "설근은 <홍루>공신이고 그림으로 그리자면 능연제일이다"(능연각은 당태종 이세민이 공신들의 초상을 그려 모셔놓았던 곳이다. 홍루능연각에서 조설근은 두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첫째 자리는 그래도 원시작자인 '효렴공'이 차지해야 한다), "역사를 고증하는 사람은 불가불 20여명외의 별감(別龕)을 만들어 양군(兩君)을 제사지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양군은 바로 효렴공 홍승과 조인 조설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