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문학/홍루몽

홍루몽작가의 수수께끼: '조설근은 조인의 손자'라는 설의 문제점

by 중은우시 2018. 11. 22.

글: 송초(松樵)


<홍루몽>의 원작자가 누구일까? 현재 갈수록 많은 연구자들은 호적(胡適)이 고증한 "홍루몽의 작자는 조설근이다"라는데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호적의 <홍루몽고증>에서는 홍루몽의 작자가 조인(曹寅)의 손자인 조설근(曹雪芹)이라고 본다. 현재의 홍학가들은 보편적으로 조설근이 조옹(曹顒)의 유복자로 약 1715년경에 태어났다고 본다. 그런 조씨족보에는 조옹의 아들을 조천우(曹天佑)라고 적었고, 조설근이라고 적지 않았다. 그는 관직이 주동(州同)에 이르러, '모연봉유(茅椽蓬牖), 와조승상(瓦竈繩床)", "거가식죽주상사(擧家食粥酒常賒)"할 정도로 가난하지 않았다.


비록 이 '조설근'은 일부 청나라사람들의 자료에 기록이 남아 있지만, <홍루몽>의 창작사상, 시대배경 및 작자가 가져야할 생활경력, 생활습관, 지식구조, 문학재능등과는 심각하게 들어맞지 않는다. 이 '조설근'은 분명히 의문을 품거나 부정되어야 한다.


필자는 지금까지 주장해왔다. <홍루몽>을 연구하려면 반드시 문본(文本)을 바탕으로 해야 하고, 지평(脂評)을 보조로 써야 한다고. 다만 지평에 코가 꿰어서 끌려가서는 안된다. 여하한 고증, 색은도 모두 문본을 벗어날 수는 없다. 그리고 반드시 적당한 선을 지켜야 한다. 호적의 <홍루몽고증>은 말이 좋아서 고증이지, 실제로는 견강부회이다. '조설근은 조인의 손자'라는 주장은 문본과 저촉되고, 넘기 어려운 장애물이 많다. 본문에서는 그 중 중요한 것들을 언급해 보기로 한다.


넘기 힘든 첫번째 장애물: 조씨일가는 '시례잠영지족(詩禮簪纓之族)"이 아니다.


가씨가족은 '시례잠영지족'으로 독자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다. 이 단어의 기원은 소설의 첫머리이다. 선승이 돌을 미옥으로 바꾼 후 돌에게 한 말이다:


"그 승려는 미옥(美玉)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웃으며 말했다: '...너를 창명융성(昌明隆盛)한 나라, 시례잠영의 집안, 화류번화(花柳繁華)한 땅, 부귀온유(富貴溫柔)한 곳으로 데려가서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


무엇이 '잠영'인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고대에 관료들이 모자에 다는 장식이다. 나중에는 고관대작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예를 들어, 이백의 <소년행>의 삼에 이런 싯구가 있다: "차막인친연제성(遮莫姻親連帝城), 불여당신자잠영(不如當身自簪纓)" 이곳의 잠영은 바로 고관이라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현장(縣長), 주포두(州捕頭)도 모두 모자에 '잠영'을 단다. 그렇지만, 고관대작만이 '잠영'이라고 불린다. 이뿐 아니라, '잠영'에는 문무의 구분이 있다. '시례잠영'은 의문의 여지없이 주로 시와 예를 담당하는 관직을 맡은 서향문제(書香門第)이다. 절대로 치고박고 싸우는 무장집안이 아니다.


우리는 조씨집안을 보기로 하자. 고증해낸 조석원(曹錫遠)은 명나라때 심양중위지휘사(瀋陽中衛指揮使)였고, 조진언(曹振彦)은 후금 홍의포대의 교관 및 기고우록장경(旗鼓牛祿章京)이며, 조새(曹璽)는 산서의 반란을 진압했다. 이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조씨집안은 군공으로 성공하였고, 모두 중하급의 계급이다. 이것은 성공했다고는 할 수 있지만 고귀하다고 할 수는 없다.


조석원은 제1대로 포로로 잡혀 노비로 정백기예 예속된다. 조씨집안은 이때부터 만주정백기의 포의(包衣, 가노)가 된다. 천하가 태평해지면서, 조새의 아들 조인이 부친의 직위인 강녕직조(江寧織造)를 물려받아 비로소 시례를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설초(曹雪樵)'가 나왔다. 다맘, '시례잠영지족'과는 아직 거리가 멀다. 만일 작자가 정말 조인의 손자인 조설근이라면 절대로 자신의 집안이 얼굴에 이런 식으로 금칠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위대한 작가는 그렇게 얼굴이 두꺼운가? 일단 신분이 드러나면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그는 자신의 이름을 책에다 당당하게 써놓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건륭조의 조설근은 조인의 손자일 수가 없다고. 이 '조설근'은 조씨족보에 없고, 조씨의 집안이 가산몰수당할 때의 명단에도 없다. 만일 그를 굳이 조씨집안과 연결시키려 한다고 하더라도, 조씨집안은 '시례잠영지족'이 아니다.


넘기 힘든 두번째 장애물: 강건옹 삼조는 절대로 '말세(末世)'가 아니다.


<홍루몽>에는 여러번 '말세'가 언급된다.


제1회에 이런 말이 있다: "가우촌은 원래 호주 사람인데, 시서사환지족이기도 하다. 그는 말세에 태어나서, 부모조상의 기반이 이미 없어지고, 사람도 쇠퇴하여 겨우 그 혼자만 남아서 고향에 있어야 이익되는 것이 없다."


제5회에 가탐춘의 판사(判詞)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재자정명지자고(才自精明志自高), 생어말세운편소(生於末世運偏消)"


'말세'의 사전적인 의미, 기본해석은 다음과 같다: "한 왕조의 말기"


이 말이 최초로 나오는 것은 개략 3곳이다:

1. <역경.계사하>: "역지흥야(易之興也), 기당은지말세(其當殷之末世), 주지성덕야(周之盛德邪)"

2. <순자.의병>: "진사세유승(秦四世有勝), 시시연상공천하지합이알기야(諰諰然常恐天下之一合而軋己也), 차소위말세지병(此所謂末世之兵), 미유본통야(未有本統也)"

3. <사기.태사공자서>: "말세쟁리(末世爭利), 유피분의(維彼奔義), 양국아사(讓國餓死), 천하칭지(天下稱之)"


후인들이 쓰던 것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1. 송. <신당서.형문위전>: "성인작악(聖人作樂), 평인심(平人心), 변풍속(變風俗), 말세악괴(末世樂壞), 즉위인소이(則爲人所移)"

2. 청. 후방역 <예성시제이>: "석지득통어전대자(昔之得統於前代者), 역기호(易其號), 불역기례(不易其禮), 즉혁기말세지례(卽革其末世之禮), 이불혁기유구지례(不革其由舊之禮)"


<홍루몽>의 '말세"는 토묵열(土默熱) 교수가 이에 대하여 전문적으로 분석한 바 있다. 그는 반박할 수 없는 사실로 증명했다. 이 '말세'는 한 가족의 말세를 가리킬 리가 없고, 오직 명나라의 '말세'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그것은 분명히 명말청조시기를 말한다. 윗글에서 인용한 후방역의 문자도 바로 그런 예이다.


의문의 여지없이, 작자는 가우촌이 '말세에 태어났다'고 적었다. 이것ㅇ느 그가 출생한 조대를 가리킨다. 많은 가족들이 이미 몰락하고, '말세'의 기본적인 정의에 따라 한 왕조의 말기라고 보아야 한다. 청나라말기를 가리킬 리는 없으니 명나라말기를 가리킬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명나라가 망한 일자를 우선 말하지 말기로 하자. 청나라의 건국으로 부터 계산하면, 1636년 홍타이시가 국호를 청으로 바꾼 때이건 아니면 1644년 청나라가 북경으로 들어와 중원을 차지한 때이건, 1715년에 태어난 '조설근'은 이 말세와 50년이상 간격을 두고 있다. 건륭성세에 생활한 '조설근'이 어찌 이들 이야기를 친히 겪고, 친히 목격하고 들었을까? 설사 회고한다고 하더라도 그 시기까지 회고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때 그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호적의 견해에 속박되어, '말세'를 주류홍학가들은 봉건사회의 말세라고 해석한다. 이렇게 하면 위대한 천재 '조설근'은 또 하나의 '공적'을 세운 것이 된다. 그것은 바로 봉건사회가 멸망할 것이라고 에언했다는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시대배경을 벗어난 현대의 관점으로 문제를 보는 것이다. 호적의 홍학은 조인의 손자가 저자라는 것을 지켜내기 위하여, 19세기에 나타난 마르크스사상까지도 억지로 갇다 붙인다.


넘기 힘든 세번째 장애물: 대청왕조는 <홍루몽>에 묘사된 태감이 존재하지 않았다.


작자가 <홍루몽>에 출연시킨 태감은 아주 교묘하다. 사람들이 한번 보면 바로 엄당의 영수 위충현을 가리키는 것으로 느껴지는 대권(戴權)을 제외하고 나머지 두 태감도 신경을 많이 썼다. 한 명은 하(夏)이고 다른 한 명은 주(周)이다. 기실 이것은 암시이다. 이곳에서 표현한 것은 한족황실의 태감이지, 만주족황실의 태감은 아닌 것이다.


여화청(余華淸)의 <중국환관제도사>를 보면, 명말 숭정연간에 태감은 최대 9만명에 이른다. 청나라 순치연간에는 '엄당집단이 조정에 화란을 가져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9천명으로 삭감한다. 그리고 강희, 옹정, 건륭연간에도 계속하여 줄여서 건륭시기에는 3천명에도 이르지 못하게 된다.


청나라때는 제도적으로 상당히 엄격했다. 특히 실제권한, 신분지위와 정치내왕에 대하여 가혹하게 통제한다. 특히 정치내왕의 방면에서는 청사연구소 위림기(韋林圻)가 쓴 <추의청조환관제도>에서 이렇게 말한다: "청나라 통치자들은 환관의 사당화, 내외결탁을 방지하는 문제를 아주 중시한다. 환곤의 정치력양을 제한하고, 환관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하여, 청나라 통치자들은 주로 환관의 정치내왕의 채널과 경로를 차단한다. 순치제는 이렇게 규정한다: 무릇 내원(內員)은 차견(差遣)을 받들지 않으면, 황성을 마음대로 나갈 수 없다. 직무 이외에는 어떤 일에도 간섭해서는 안된다. 외인을 불러들여서는 안되고, 외관과 교분을 맺거나 결탁해서도 안된다. 동생 조카 친척과 암중 연락하거나 결탁해서도 안된다. 동생 조카등의 명의를 빌려 전답과 부동산을 사서 관부와 짜고 백성을 해쳐서도 안된다. 외부의 관리도 역시 내관과 상호 연락하거나 결탁해서는 안된다. 이 금령은 후대이 역대군주가 재삼 얘기했다. 강희의 훈유에서는 환관이 결당을 맺는 것을 금지했고, 옹정의 훈유에서는 환관이 마음대로 황자들과 연락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건륭은 환관과 외정관리, 왕공대신과 말하거나 연락하는 것을 금지했다. 더더구나 환관이 황태후의 처소에서 말을 전하고 정무를 보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데, <홍루몽>의 태감들 활동은 청나라태감제도의 제약과 부합하지 않는다. 금방 태감이 등미(燈謎)를 보내오고, 금방 태감이 상사(賞賜)를 보내온다. 만일 가원춘이 명령을 집행하는 것이라면 임무를 받아서 궁을 나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각지를 돌아다니고 심지어 공갈협박하여 재물을 긁어모으는 것은 완전히 청나라 궁정제도에 어긋난다.


예를 들어, 제72회 "왕희봉시강수설병(王熙鳳恃强羞說病), 내왕부의세패성친(來旺婦倚勢覇成親)"에는 이런 장면이 있다:


한 마디가 끝나기 전에, 사람이 돌아왔다: "하태부(夏太府)가 소내감을 보내서 말을 전했습니다." 가련이 듣고는 눈을 찡그리며 말한다: "또 무슨 말이냐. 1년에 그들은 가져갈만큼 가져갔는데." 봉저(鳳姐)가 말한다: "너는 숨어 있어라. 내가 기다려서 그를 만나보겠다. 만일 작은 일이면 그만이지만, 만일 큰 일이면 내가 알아서 그에게 대답하겠다." 가련은 안쪽 방으로 숨어들어갔다. 여기에서 봉저는 사람에게 명하여 소태감을 들여보내게 한다. 그에게 의자를 내어주고 차를 마시게 한다. 그리고 무슨 일인지 묻는다. 그 소태감은 이렇게 말한다: "하어르신이 오늘 우연히 집을 하나 보았는데, 지금 이백냥 은자가 부즉합니다. 저를 외할머니댁(가탐춘을 기준으로 한 듯)에 보내어 현금 일이백을 잠시 빌려주면, 하루이틀만에 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봉저는 듣고나서 웃으며 말한다: "무슨 돌려줍니다. 있는 것이 은자인다. 그저 먼저 드릴테니, 나중에 우리가 돈이 부족할 때 다시 빌려주시면 됩니다." 소태감이 말한다: "하어르신이 또 말씀하셨습니다. 지난번의 두번 천이백냥 은자도 돌려드리지 못했는데, 금년 연말이 되면 같이 돌려드리겠다고 하셨습니다." 봉저는 웃으며 말한다: "너희 하어르신은 너무 세심하시다. 그것까지 마음쓰실 필요가 없다. 한 마디로 너무 많이 생각하하시는 것이다. 만일 이렇게 우리에게 다 따져서 돌려준다면 얼마를 돌려주어야할지도 모를 일이다. 없으면 몰라도 있으니 가져가시면 된다."


같은 회에 나오는 주태감의 측면묘사를 보기로 하자:


가련이 말하기를, "어제 주태감이 왔다. 입을 열자마자 일천냥을 얘기한다. 내가 약간 대답을 늦게 했더니 그는 어쩔 줄 몰라했다. 앞으로 밉보이게 될 곳이 적지 않다. 이번에 다시 이삼백만의 재물을 보내면 좋겠다." 한편으로 말하면서, 한편으로 평아가 봉저가 세수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을 기다려 옷을 갈아입고 가모에게로 가서 저녁시중을 들었다.


이런 태감은 명왕조 유민의 사고 속에 들어있는 태감의 이미지이다. 그것이  <홍루몽>에 나타난 것이다. 유민들은 청초에 생활했고, 그들은 일부러 청나라의 태감 이미지로 그리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그리고 싶더라도 현실생활의 기초가 부족하다.


청왕조때, 이렇게 활발하게 다닌 태감은 없었다.


제18회의 "황은중원비성부모(皇恩重元妃省父母), 천륜락보옥정재조(天倫樂寶玉呈才藻)"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일시에 사람들에게 명하여 납촉(蠟燭)을 한무더기씩 들고 들어와서 각 처에 불을 밝힌다. 불을 다 붙였을 때, 돌연 밖에서 말이 달리는 소리가 들린다. 일시에 십여명의 태감이 모두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서 박수를 쳤다. 이들 태감들의 뜻은 모두 알고 있다시피, "내가 왔다. 내가 왔다."는 것이다. 각각 방향을 잡고 섰다. 가사는 일족의 아들과 조카를 데리고 서가문 밖에서 맞이하고, 가모는 일족의 여자들을 데리고 대문밖에서 영접했다. 반나절동안 조용했다. 돌연 한 무리의 홍의태감(紅衣太監)이 말을 타고 천천히 걸어왔다. 서가문에 이르러 말에서 내리고, 말을 밖으로 내보내고,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섰다.


여기의 '홍의태감'은 건륭시기에 살았던 조설근이라면 보지 못했을 뿐아니라, 심지어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건륭시기에 생활한 조설근이 태감을 쓰면서 '홍의태감'이라고 쓸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청나라때 태감들이 붉은 옷을 입도록 전혀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 검은색 혹은 남색으로 입었다. '홍의태감'은 역시 유민사고이다. 이는 명나라때의 태감 이미지이다. 대권, 주태감, 하태감도 마찬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