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지진재주(至眞齋主)
모든 책에는 작자가 있다. 그러나 어떤 작자는 실명을 드러내기 실어서 가명을 쓴다. 그리하여 어떤 책은 작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금병매>의 작자는 '난릉소소생(蘭陵笑笑生)'이다. 이 이름은 보기에도 가명인 것을 알 수 있다. 작자가 도대체 누구일까에 대하여는 지금까지도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홍루몽>에서는 "조설근(曹雪芹)"이라는 사람이 증산자(增刪者)로 되어 있다. 이 '조설근'은 우리가 평상시에 짓는 이름과 방식이 같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조설근'을 실명이라고 본다. 신홍학(新紅學)의 기초를 닦은 인물인 호적은 바로 그렇게 생각했다.
호적의 홍학에서의 기본관점은 이러하다: <홍루몽>의 시대배경은 청나라중기이고, 작자는 조인(曹寅)의 손자인 조설근이다. 나중에 호적의 견해는 공식 홍학관점으로 된다. <홍루몽>의 연구방법에 관하여 호적은 <홍루몽고증(紅樓夢考證)>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저 믿을만한 판본과 믿을만한 자료에 근거하여, 이 책의 저자가 도대체 누구인지, 저자의 사적과 집안내력, 저서의 시기는 언제인지, 이 책은 몇 가지 서로 다른 판본이 있고, 이들 판본의 내력은 어떠한지를 고증하여 정하는 것이다. 이들 문제가 바로 <홍루몽> 고증의 정당한 범위이다." 즉 호적이 보기에 <홍루몽>이라는 책에 무엇이 쓰여져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작자의 사적, 작자의 집안내력, 저서시기, 저작판본등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렇게 본말이 전도된 연구방법은 직접적으로 호적의 홍학연구를 잘못된 진흙탕으로 빠지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호적은 어떻게 <홍루몽>의 작자를 확정했을까?
<홍루몽>의 설자문(楔子文)에는 이런 말이 있다: "공공도인(空空道人)은 공(空)으로 인하여 색(色)을 보고, 색에서 정(情)이 생기고, 정을 전하여 색에 들어가고, 색으로부터 공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이름을 정승(情僧)이라고 고치고, <석두기(石頭記)>를 <정승록(情僧錄)>으로 고친다. 오옥봉(吳玉峰)에 이르러 제목을 <홍루몽>이라 한다. 동로(東魯)의 공매계(孔梅溪)는 제목을 <풍월보감(風月寶鑑)>이라고 한다. 나중에 조설근이 도홍헌(悼紅軒)에서 십년간 피열(披閱)하고 5번 증산(增刪)하며, 목록을 만들고 장회(章回)를 나눈다. 그리고 제목을 <금릉십이채(金陵十二釵)>라고 한다. 지연재(脂硯齋)의 갑술초열재평(甲戌抄閱再評)에서도 여전히 <석두기>라는 이름을 썼다." 호적은 이 설명성의 문자를 임의로 취사선택하는 태도를 취한다. 이 책을 쓴 "석두(石頭)", 책을 전한 공공도인, 책제목을 쓴 동로 공매계등은 모두 "조설근이 '가탁(假托)한 연기(緣起)'로 본다. 그 뜻은 바로 <석두기>라는 이 책은 오직 조설근 1명이 썼다는 것이다. 그는 무슨 '증산자'가 아니라 유일한 작자라고 본다. 호적은 후사십회(後四十回)의 끝에 <석두기>의 내력에 관한 일단의 문장을 조설근이 작자라는 증거로 삼는다. 120회 통행본을 출판한 정위원(程偉元, 약1746-1818), 연구자 유서(裕瑞, 1771-1838)는 모두 감히 <홍루몽>의 작자가 누구인지 확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호적은 이렇게 말한다: "당시의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은 조설근이 썼다고 생각했다."
고대문인의 관념에서 시사가부(詩詞歌賦)야말로 고대상(高大上)의 문학이라 여겼다. 소설은 패관야사(稗官野史)로 사람들이 식후에 시간보내기용으로 읽는 것이라 여겼다. 그리하여, 소설을 쓰는 경우에 자신의 이름을 쓰는 경우는 아주 적다. <홍루몽>도 마찬가지였다. 책의 "석두"는 작자가 스스로를 비유한 '가탁'일 것이다. '공공도인', '동로 공매계', 그리고 갑술본에 나오는 '오옥봉'은 모두 가명일 것이다. 이 책을 비열한 '지연재' '기홀수(畸笏叟), '송재(松齋)', '기원(綺園)'등도 모두 가명이다. <홍루몽>의 설자문은 명확하게 '가어존(假語存)', '진사은(眞事隱)'의 저술방법을 채용했다고 말한다. 분명하게 개인의 사적인 일이나 조정에 관련되는 내용을 직접 쓸 수는 없는 것이다. 일단 밝혀지면 벌을 받는다. 자신만 처벌받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까지 연루되게 된다. 그러므로, '조설근'도 분명히 가명이다. 만일 실명이라면 모든 것을 드러냈는데 뭘 더 감추고 쓸 필요가 있겠는가? 호적은 그런데도 '조설근'을 실명으로 보았다. 이렇게 하여 그에 관하여 추적하는 '고증'을 한 것이다.
호적이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원매(袁枚, 1716-1797)의 <수원시화(隨園詩話)>이다. <수원시화> 권2에는 이런 말이 있다: "강희때 조연정(曹練亭, 練은 楝으로 써야할 것이다)은 강녕직조(江寧織造)이다....그의 아들 설근(雪芹)이 <홍루몽>이라는 책을 써서, 풍월번화의 번성함을 기록했다. 그 중에 소위 대관원(大觀園)이라는 것은 바로 나의 수원(隨園)이다." 원매의 이 말은 건륭45년(1780년)에 쓰여졌다. 당시 <홍루몽>은 아직 공개적으로 간행되지 않았었다. 원매는 <홍루몽>을 읽어본 적이 없다. 그의 이 말은 부찰명의(富察明義)의 <제홍루몽>시의 "소인(小引)"을 인용한 것이다. 원매는 당연하게 조설근을 조인(曹寅, 호가 楝亭임)의 아들이라고 보았다. <수원시화> 권16 제17조에는 또 다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설근이라는 사람은 조연정 직조의 자식이다. 이미 백년전의 일이다(相隔已百年)." 이 글은 개략 건륭52년(1787년) 혹은 건륭53년(1788년)에 쓰여졌다. 원매의 말에 따라 백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강희26년(1687년)이다. 그때는 조인이 아직 강녕직조를 맡지도 않았을 때이다. 그의 아들 조옹(曹顒), 조부(曹頫)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더더구나 조설근은 말할 것도 없다. '상격이백년'이라는 말로 보면 원매는 조설근을 알지 못할 뿐아니라, 조설근이 그와 동시대의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적의 고증에 따르면 조설근은 약1715년-1720년 사이에 태어났고, 원매의 출생연도는 1716년이어서 서로 가깝다. 조씨집안이 패망한 후 강녕에서 북경으로 옮긴다. 조인의 강녕의 집은 수혁덕(隨赫德)이 인수하고, 나중에 수혁덕은 가산물수를 당한다. 그리하여 집은 다시 원매에게 팔렸고, 이름을 수원이라고 하게 된다. 만일 <홍루몽>의 작자가 조인의 손자인 조설근이라면, 원매는 그의 옛집을 산 것이므로, 조설근의 행방을 조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조설근과 자신은 백년의 시간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보면 우리는 부득이 조인에게는 아예 조설근이라는 손자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조씨집안의 족보에도 조인의 손자는 조천우(曹天佑)이고 조설근이 아니다. 여러 증거를 보면, <홍로몽> 판본은 조인의 손자가 쓴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호적은 그런 것은 따지지도 않고, 계속하여 '조설근'의 행적을 추적한다.
호적은 원매의 <수원시화>의 조설근에 대한 문구에 근거하여 아래와 같은 몇 가지 결론을 얻어낸다: (1) 우리는 이로 인하여 건륭시기의 문인이 <홍루몽>은 조설근이 썼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것을 알았다. (2) 이 글에서 조설근은 조연정의 아들이라고 했다. (<수원시화> 권16에는 '설근이라는 사람은 조연정직조의 자식이다."라고 적었는데, 이는 기실 잘못된 것이다.) (3) 이 글에서는 대관원이 수원이라고 했다. 호적은 다시 오수(吳修)의 <소대명인척독소전>, <양주화방록> 한염의 <연정기>에 근거하여 조인의 평생과 내력을 연구한다. 호적은 다시 청나라말기의 장서가 양종희(楊鍾羲, 1865-1940)의 <설교사화>엣는 원매가 조설근을 조인의 아들이가고 본 견해를 시정하여, 조설근은 조인의 손자라고 본다. 그리고 <설교사화>에서는 조설근의 친구 돈민(敦敏), 돈성(敦誠)은 <팔기인시초>에서 두 형제가 조설근에 관하여 쓴 시를 확인하고, 조설근의 이름이 점(霑)이고, 호가 설근이라고 확인한다.
돈민,돈성 형제의 시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친구인 조설근이 곤궁하게 살았다. 돈성의 시 <기회조설근점(寄懷曹雪芹霑)>에서 돈성은 조설근에게 이렇게 권한다: "권군막탄식객협(勸君莫彈食客鋏), 권군막구부아문(勸君莫扣富兒門), 잔배냉자유덕색(殘杯冷炙有德色), 불여착서황엽촌(不如着書黃葉村)" 이는 <홍루몽>의 작자가 시작부분에서 스스로를 "일기무성(一技無成) 반생요도지쥐(半生潦倒之罪)"와 확실히 유사하다. 조설근은 시재(詩才)가 있었고, 돈성의 <사송당집,아료암필진>에서는 조설근이 세상에 남긴 식수 둘을 기록하고 있다: "백전시령응희심(白傳詩靈應喜甚), 정교만소귀배장(定敎蠻素鬼排場)" 이 두 싯구이 풍격을 보면 돈성이 조설근의 시풍은 이하(李賀)와 비슷하다는 말이 믿을만하다. 돈성의 <기회조설근점>의 싯구인 "애군시필유기기(愛君詩筆有奇氣), 직추창곡파리번(直追昌谷破籬樊)" 돈성의 <만조설근>에도 이런 싯구가 있다: "우귀유문비이하(牛鬼遺文悲李賀), 녹거하삽장유령(鹿車荷鍤葬劉伶)" 이하의 시풍은 '공령(空靈), 궤이(詭異)한 것에 뛰어났다. 내용은 주로 재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뜻을 펼치지 못하는 불운에 대한 비분을 표현한다. 환상 속의 귀신세계를 묘사했다. 호적은 비록 '돈성형제가 그를 이하에 비유했는데 개략 많이 닮은 것같다."고 했지만, 다만 호적은 <홍루몽>의 많은 시사의 시풍이 '매촌체(梅村體), 향렴체(香奩體)라는 것은 보지 않는 듯하다. 이하의 시풍과는 차이가 너무나 크다.
돈민, 돈성형제의 친구 조설근은 1764년 갑신년에 사망했고, 나이 겨우 40살때였다. 돈성의 <만조설근>에는 이런 싯구가 있다: "사십소연태수생(四十蕭然太瘦生), 효풍작일불명정(曉風昨日拂銘旌)" 다시 <만조설근.갑신>에는 이런 싯구가 있다: "사십년화부묘명(四十年華付杳冥), 애정일편아수명(哀旌一片阿誰銘)" 그런데 호적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렇게 추측해볼 수 있다. 설근의 나이는 그들보다 10여살 많다고, 그렇게 보면 개략 강희말엽(약1715-1720년)에 태어났다. 그가 죽었을 때 약 50세가량일 것이다." 돈성은 조설근이 40세까지 살았다고 말했는데, 호적은 조설근이 약 50살까지 살았다고 한다. 설마 호적이 가장 간단한 산수조차 할 줄 모른단 말인가> 아니면 조설근의 친구 돈성이 말한 '사십세'가 허수란 말인가? 조설근이 1764년 갑신년에 사망했다고 하면, 앞으로 40년을 당기면 그는 1725년에 태어났어야 한다. 그렇다면, 1712년보다 약간 뒤에 태어났을 수는 없다. 호적이 조설근의 나이를 여러 살 늘여잡은 것은 <홍루몽>의 작자가 스스로 '반생료도(半生潦倒)"했을 때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고 했기 때문이다. 만일 조설근이 겨우 40살까지 살았다면, 설마 20여세때부터 <홍루몽>을 창작하기 시작했단 말인가? 현대인은 몰라도, 고인들도 2,30살은 아직 청춘기로 생기발랄할 때이다. 미래에 대해 희망이 충만한 나이닌데, '반생료도'라는 말을 쓸 리는 없는 것이다. 설사 조설근이 정말 50살까지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이 친구 돈성이 사회풍속에 위반하여 나이를 줄였단 말인가? 중국인은 죽은 사람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기 위하여, 역대이래로 '적윤향수(積閏享壽)"하는 경향이 있다. 즉 허세(虛歲)로 사망한 사람의 나이를 계산하는 것이다. 그리고 윤년을 누계로 합하여 죽은 사람의 나이에 보탠다. 나중에 세상에 나온 갑술본의 '갑술년'은 주류홍학가들이 건륭19년으로 본다. 즉 1754년이다. 갑술본은 기본적으로 완성본인데, '십년간 비열하고, 5번 증산했다"는 것을 거꾸로 추산해보면, 조설근은 최소한 10년전인 1744년에는 창작을 시작해야 한다. 만일 조설근이 1725년에 태어났다고 하면, 이때 그의 나이는 겨우 19살이다. 그런데 무슨 '반생료도'를 말할 나이인가. 설사 호적이 말한 것처럼 조설근이 1715년에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조설근이 창작할 때의 나이가 19세인데, 스스로 '반생료도'라고 할만한 나이는 아니다. 그리고 돈민,돈성의 친구인 조설근은 1764년 갑신년에 사망한다. 이는 갑술본에 나오는 지연재의 비어(批語)인 "임오년 제석(除夕) 책을 완성하지도 못하고, 설근은 눈물을 흘리며 죽었다."는 것과 맞지 않는다. 그러나, 호적은 <홍루몽> 의 작자정보는 무시하고, 돈민, 돈성형제의 친구인 조설근이 바로 <홍루몽>의 작자라고 인정한 후, 누가 의문을 표시해도 그는 견해를 바꾸지 않았다. 말년에도 그는 철저히 색은파(索隱派)을 쳐부수지 못했음을 자책했을 정도이다.
돈성의 <기회조설근점>이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소릉석증조장군(少陵昔贈曹將軍), 증왈위무지자손(曾曰魏武之子孫), 군우무내장군후(君又無乃將軍後), 우금환도연호둔(于今環堵蓮蒿屯)" 돈성은 그의 친구 조설근이 조조의 후손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의 친구 조설근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시다. 송나라이래로 조조는 '간웅'으로 폄하되었고, 원말명초 나관중이 쓴 <삼국연의>에서 조조폄하가 최고조에 달하는 지경에 이른다. <홍루몽>도 극력 조조를 폄하한다. 작자는 가우촌의 입을 빌려 조조는 응겁이생(應劫而生)의 대간대악(大奸大惡)의 인물이라고 한다. 가우촌이 등장할 때 비서인(批書人)은 그를 가리켜 '망조유용(莽操遺容)' 즉 왕망, 조조와 닮았다고 했다. 조조를 조상으로 생각해야 하는 조인은 <후비파(後琵琶)>라는 전기극(傳奇劇)에서 조조를 '제후에 명령하여 백만의 병력을 몰은다. 간적(奸賊)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수 있고, 충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였다."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극중의 조조는 지모도 있고, 박력도 있고, 현명한 인재를 갈구하며, 재능있는 사람을 목숨처럼 아끼는 영웅의 이미지이다. 만일 <홍루몽>의 증산자라고 되어 있는 조설근이 실명이라면, 그는 조인의 손자이다. 그이 할아버지가 세워놓은 이미지를 버리고 조조를 욕했다. 이것이 가능할까? 호적과 당금의 호적홍학을 따르는 홍학가들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일만한 해석을 내놓을 수 있을까? 그뿐 아니다. 이 '조설근'은 자신이 쓴 책에서 '인(寅)'자를 가지고 우스개소리도 한다. 설반(薛蟠)이 얻은 춘궁화(春宮畵)의 작자인 '당인(唐寅)'을 '당은(糖銀)', '과은(果銀)'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이저(尤二姐)의 사후 장례를 '인시(寅時)에 염을 하면 대길하다'고 한다.
호적은 일찌기 "가설은 대담하게(大膽的假設), 고증은 신중하게(小心的求證)"의 학술원칙을 제창했다. 그러나 호적 및 그를 따르는 홍학가들은 그저, '대담한 가설'만 내놓았고, '세심한 고증'은 하지 않았다. 청나라때 사람들의 자료에서 '조설근'은 그저 <홍루몽>의 증산자 '조설근'과 동명이인일 뿐이다. 호적은 '세심하게 고증'하지 않고 그들을 동일인으로 취급했다. 이것은 학술이 아니다. <홍루몽>의 증산자 조설근은 도대체 누구일까? 이는 새로 고증하고 연구해야할 문제이다. 다만 절대로 '조가구(曹家溝)'에서 머물며 찾아다니거나, '조가포(趙家鋪)', '전가점(錢家店)'등도 찾아가야 한다. 이는 노신(魯迅)을 고증할 때 '노가장(魯家莊)'을 가야하는 것이 아니라, '주가촌(周家村)'을 가야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노신이 본명은 주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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